논쟁서평: 『역사적 파시즘-제국의 판타지와 젠더정치』(권명아 지음| 책세상 刊 | 2005| 511쪽)
단절론적 시각 문제..."무엇이 최소한의 생존이었는가"

2005년 10월 02일   홍양희 한양대 이메일 보내기

이 책은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을 파시즘의 유산이 살아 숨쉬는 사회로 보면서 그러한 폭력의 시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저자의 자기 성찰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그 기원을 일제말기 전시동원체제의 경험에서 찾으면서, 그것의 역사적 특성을 파시즘과 젠더정치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수탈과 저항, 혹은 억압과 동의의 구조로 일제 말의 파시즘 체제를 분석하는 역사 연구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분법적 연구는 파시즘 체제의 폭력성을 단순화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실제 모습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파시즘의 속성, 즉 파시즘이 젠더, 지역, 인종 등을 기제로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전환시키는 체제라는 바로 그 점에서 비롯된다. 총후부인, 청년, 남방담론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따라서 전시동원체제 하의 파시즘 체제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여성과 남성, 식민지라는 집단들 내부에 존재하는 정체성 투쟁의 양상들을 분석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 파시즘 체제를 유지시키고 대중을 그것에 합류하게 하는 근본 요인이 그들 사이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이기려는 욕망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시선을 끄는 대목은 총후부인이나 스파이 담론을 통해 여성의, 모던보이나 애국청년 담론을 통해 남성의, 좋은 일본인 되기를 각각 분석한 2부와 3부의 젠더 관련 부분이다. 젠더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정체성 집단간의 갈등과 투쟁의 모습을 포착한 점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젠더사 연구에서 한 걸음 나아간, 이 책이 지닌 차별성 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황민화 정책과 그에 대한 저항이나 협력이라는 접근 방식과 달리, 식민지인들의 내부 투쟁을 통한 자발적 일본인 되기란 시각은 역사 연구자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역사 연구자, 특히 한국사 연구자로서 이 책이 준 유용한 자극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전시 동원 체제기와 그 이전 시대를 너무 단절시켜 보지 않느냐는 것이다. 특히 총후부인 담론이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여성 정체성을 혐오하는 담론이었다는 점과 전시동원체제 하에서 가정은 새로운 정치적 단위가 되었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물론 총후부인은 전시체제기에 나오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가정 주부와 여성해방적인 신여성 사이의 정체성 투쟁이 과연 이 시기에 한정된 담론이었다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은 식민지 초기부터 1920년대의 교과서와 잡지에도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가정을 둘러싼 젠더정치는 일제 말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젠더로 이분화된 국가 분업주의는 근대국가의 중요한 시스템이었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가정은 국가로부터 개개인을 국민으로 자기 복제해 내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가정은 사적인 공간으로 은폐되어 있지만, 사실상 공적인 세계에 처음부터 열려있었다. 최근의 젠더사 연구가 사적 생활조차 정치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총후부인이 그 이전의 여성 담론과 구별되는 것은 남자들의 빈공간을 메우기 위해 사회적인 진출을 일정하게 용인하였다는데 있다. 요컨대 저자는 여성들 사이의 정체성 투쟁과 가정의 정치적 성격이 제국주의의 폭력성에서도 기인한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다. 


둘째, “파시즘 체제의 욕망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제한된 상황에서 그 폐쇄된 상황에서 적어도 자신을 파시즘적 폭력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도덕은 없는가”라는 논리 모순적 화두에 담긴 문제점이다. 이 질문은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에 의하면 파시즘 체제는 국민의 일상 전체를 잠재된 적에 대한 공포를 통해 규율함으로써 일상적으로 끝없이 좋은 일본인 되기의 실천을 수행하게 하는 주체화의 역학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인은 그 체제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고, 부지불식간에 일본 파시즘에 공범이 되고 만다.


이 논리의 연장선에 서면 친일 협력의 책임 부분에서 전시동원체제 이전과 이후의 친일 행위를 분리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나아가 이후의 친일은 책임을 묻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 자체가 정당화된다. 저자의 고민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하여 조심스럽게나마 “파시즘의 유산과 최소한이나마 거리를 두게 해주는 최소한의 도덕은 어쩌면 자기 안의 무한 증식하는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 그것인지도 모른다”는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 경우 이번에는 무엇이 최소한의 생존이었는지 그 기준을 세워야 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일상적이고도 구조적인 폭력 체제 안에서 생존을 위한 힘겨운 선택을 강요받았다는 결론에 공감하면서도 저자의 화두에 공허함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째서 일까.

홍양희/한양대·한국근대사

필자는 한양대에서 ‘조선총독부의 가족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기 호적제도와 가족제도의 변용’, ‘식민지시기 남성교육과 젠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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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05-10-0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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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10-09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오랜만이죠, 따우님.
ㅎㅎㅎ 그런데 일단 퍼가시려면 추천도 하나 해주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