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민음사에서 나올 자크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에코그라피] 재판 역자 서문을 올립니다.

 

지난 2002년에 초판이 나왔었으니, 무려 12년만에 재판이 나오는 셈입니다.

 

그동안 이 책을 읽고 싶어 했던 분들께 그동안 재판을 못내서 죄송했는데,

 

이제 그 빚을 갚은 듯해서 후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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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와 그의 제자인 베르나르 스티글레르(1952~)의 대담을 묶은 [에코그라피] 번역 초판이 출간된 것은 지난 2002년이었다. 그 이래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이 책의 필자 중 한 사람인 자크 데리다가 2004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인문학 담론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인 데리다가 사망함으로써, 보통 ‘프랑스 철학’ 또는 ‘포스트 담론’으로 불리는 20세기 후반 철학 및 인문학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루이 알튀세르, 자크 라캉, 미셀 푸코, 질 들뢰즈,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자크 데리다 같은 위대한 이름과 결부되어 있는 이 철학 운동에 대해서는 앞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연구와 토론, 비평들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다만 이 운동에서 데리다의 작업, 특히 그의 [그라마톨로지]에서 수행된 혁신적인 작업이 불러일으킨 효과를 국내에서는 제대로 인식하거나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그라마톨로지]를 통해 펼쳐진 데리다의 철학이 얼마나 광범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지 소개해볼 계획이다.


 

  또 다른 변화는 이 책의 또 다른 필자인 베르나르 스티글레르가 세계적인 기술철학자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이 책이 국내에 출판될 당시만 해도 그는 아직 신진 학자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세계 학계에서 현대의 대표적인 기술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스티글레르는 [기술과 시간](2001년까지 3권이 출간되었고, 앞으로 몇 권의 연작이 더 출간될 계획이다), [상징적 빈곤에 대하여](2002; 2013년 2판) 등과 같은 저작을 통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이론과 후설, 하이데거의 현상학, 질베르 시몽동의 기술철학,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등을 결합하여 독창적인 기술적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앞으로 그의 저작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국내에 읽을 만한 데리다 번역이 여러 권 출간된 것도 기억해 둘만한 일이다. 이 책이 나온 당시만 해도 국내에 번역된 데리다 책들 중에는 원서 없이 읽을 수 있는 번역본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입장들]이라는 제목의 대담집이나 [다른 곶] 정도가 어느 정도 읽을 만한 번역본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국내에는 이 책의 공역자 중 한 사람인 진태원의 번역으로 [법의 힘]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데리다 후기 사상의 대표작들이 소개되었고, [목소리와 현상], [정신에 대해서] 같은 주요 저작들 역시 충분히 독서 가능한 좋은 번역으로 출판되었다. 따라서 이제 국내의 독자들도 얼마간의 집중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면 데리다 사상에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은 여전히 나름대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초판 역자 서문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후기 데리다 사상에 대한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우정의 정치] 같은 저작을 중심으로 데리다는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독서와 법과 정의, 폭력의 관계에 관한 독창적인 성찰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정치철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해주었다. 또한 [불량배들] 같은 저작에서는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모색한 바 있다. [에코그라피]는 독자들이 데리다의 정치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정보통신기술과 매체 및 이미지의 문제에 관해 데리다와 스티글레르의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인 논의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 역시 이 책이 지닌 중요한 장점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 새 자신이 우리 삶의 핵심적인 지점에 다가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역자들은 이 책을 번역할 당시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직장에서 전문적인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진행했던 독서와 세미나 등이 두 사람의 현재 학문 연구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만큼 이 책이 다시 출간되어 새로운 독자를 만나게 된 것이 역자들로서는 큰 기쁨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데리다의 사상에 대하여, 현대의 정보통신이론과 매체 이론에 대하여 유익한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초판과 마찬가지로 재판에서도 책을 내기 위해 많이 애써준 민음사 편집부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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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30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4-04-30 02: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초판하고 번역은 거의 똑같습니다. 인명을 바로잡고 몇 가지 아주 사소한 점들만 수정했으니,

아마 책을 또 구입하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