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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신은 죽었다.' 라고 100여년 전 사람 니체는 말했다.
그는 '신의 사망선고'에 자필로 서명함으로써 역사에 과분한 칭송과 또 그에 상응하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그는 '신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외로와도 슬퍼도 울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긍정성을 믿었다.하지만 그것만으로 니체는 불안했나 보다.그래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고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심정으로 새로운 '초샤이언인'을 상정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니체는 틀렸다.신은 죽지 않았다.잠시 이웃 동네 김영감네 마실 다녀왔을 뿐이다.'신이 여전히 건재하다'고 말하는 유명한 종교학자가 있다.<세속도시>의 하비 콕스이다.그가 말하는 세속화되고 더 업그레이드 된 신은 누구인가? 새롭게 경배받고 있는 신.부지불식간 세계 최대의 종교의 우상이 된 신.....하비콕스는 말한다.
"시장, 곧 신으로서의 시장이 우리시대와 우리 사회에서 확보한 듯한 강력한 힘에 도전할 종교운동이나 그 밖의 운동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저는 시장이 단지 은유로서 신이라고 제시한게 아닙니다.시장이 이 세상 많은 곳에서 믿음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현상학적으로 그동안 종교가 가장 흔하게 하던 걸 지금 시장이 하고 있습니다.시장은 이야기,은유,상징,의식,신화,가치,그리고 종교가 제공해온 의미를 제공합니다.종교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그러니 사실은 종교들 사이의 다툼인 겁니다.이건 신들의 전투입니다."
어떤가? 당신은 '시장교의 광신도'는 아닌가?
하비 콕스의 비유를 역으로 예를 들면 <나쁜 사마리아인>의 저자 장하준 교수는 '시장교의 배덕자'이자 '적 시장교 전도사'이다.그는 세계를 뒤덮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근본주의적 종파'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또한 전도사로서의 역할에 맞게끔 그는 학술적인 글로, 때로는 대중적인 논설을 통해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복음에 현혹되지 말 것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경제학자라는 딱딱한 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는 책들은 하나 같이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그는 지난 3년동안 <사다리걷어차기>,<쾌도난마 한국경제>,<국가의 역할>등 6권의 책을 통해 일관된 주장을 펼쳐왔다. 이 책 <나쁜 사마리아인> 역시 동일한 선상에 있는 '반신자유주의 삐라책'이다.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장하준 교수는 시장에 대한 제도주의적 접근방식과 개발도상국의 유치산업옹호론을 대중적인 필치로 선보인다.이전에 나왔던 <국가의 역할>에서 했던 것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대신 <나쁜 사마리아인>은 동일한 내용을 부드러운 필치로 옮기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물론 좀 더 학술적인 책인 <국가의 역할>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각개전투식 비판은 뒤로 조금 물러 난다.그렇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사상과 그들의 논리가 가지고 있는 일방성,편재성등에 대한 공격날이 무뎌진 것은 아니다.
시장은 사실 전능한 신이 아니다.역사적으로도 시장이 전능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자본주의 태동기에 몇 몇 상인집단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진 이상적인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그렇지만 이런 신화에 가까운 이데올로기가 최근 세상을 구성하는 역사적 진리인 양 거만한 그림자를 세계에 드리우고 있다.장하준 교수의 지속적인 주장 먼저 '시장이 전능하다'라는 믿음에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그것은 거짓말이다.먼저 그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성장이 어떤 패턴으로 이루어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장만능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선진국가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 위치에 왔는지를 그들이 현재 입 싹 닥고 있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한마디로 하면 그들은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역사적 시기에 맞추어 국가별 산업 전략을 택해왔다.세계 자본주의의 형님들이라고 자처하는 영국이나 미국 역시 역사적으로 보면 무역보호주의와 자국 산업보호를 위한 보조금,외국인 투자에 대한 제제등 국가가 시장에 개입했던 사례들이 수두룩 하다.그런데 이제 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소리를 한다.그들은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뻔뻔한 것이다.프리드리히 리스트를 인용해서 장하준 교수가 말하는 '사다리 걷어차기'가 바로 그것이다.
국가 개입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알레르기 반응은 유명하다.그들은 국가가 개입하면 잘 되던 밥도 죽이 된다고 주장한다.그러니 국가는 그냥 정치나 하고 경제에는 개입하지 말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이건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그것도 아니면 건져 주었더니 날강도로 변하는 것이거나.지오반니 아리기의 자본주의 축적과정을 인용해 보자. 15-16세기 헤게모니국가는 네덜란드였다.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을까? 아리기는 '비용의 내부화'라는 말로 설명한다.즉 원거리 해외무역을 부의 축적기반으로 삼았던 자본가들은 국가가 강한 해군력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기를 요구했다.결국 '보호비용의 내부화'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그렇게 멀리까지갈 필요도 없다.한국이 경제적 성장을 거둔 것은 '국가의 개입'없이는 불가능했다.한국은 중앙정부가 자본을 통제하고 유치산업 성장을 지원했다.물론 박정희의 개발 독재형 방식이 옳았던 것은 아니다.그는 경제 개발을 목표로 또다른 미래의 사회비용을 당겨썻으며 정치,사회적 부채를 많이 남겨놓았다.그러나 어쨋거나 국가의 개입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지금같은 정도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정치와 경제를 구분해 버리는 즉 '경제의 탈정치화'를 주도한다고 말한다.그는 이것은 거짓말일 뿐이며 모든 시장은 정치적 산물이라고 말한다.(지극히 당연한 말인데도 이 말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바보주의자들이 많다.현재 대선정국을 봐도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 무엇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장하준의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그는 '세계를 평평하게'라는 구호대신에 '경기장을 기울이자'라고 말한다.브라질 축구팀과 한국 초등학교팀이 같은 경기장에서 똑같은 조건으로 경기를 하면 결과는 뻔하다.'자신 없을때는 자신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군인정신을 가지고 '하면 한다'로 부딪혀봐야 죽어나는 것은 서민들일 뿐이다.장교수는 개별국가별로 선택적으로 유치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진정한 산업발전은 제조업에서 승부가 난다는 입장이다.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단 국가는 자국 생산자들을 보호하고 외국인 투자에 대해 제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또한 기술발전을 위해 기득권자들의 이익만 보호하고 있는 지적 재산권 문제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따라 그에 대한 세계적 저항운동도 거세다.흔히들 반세계화운동이라고 일컽는 것이 그것이다.이 그룹 안에는 여러 다른 계파들이 존재한다.이 계파 안에는 서로 상충되는 부분들도 존재한다.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몰고오는 거대한 구름 앞에서 이들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장하준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노엄촘스키나 조셉 스티글리츠등 거장이 칭찬할 만큼 명료하고 적절하다.그렇지만 그의 주장 중 어떤 부분은 상당히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그의 '제도중심'접근법이다.그의 책 어느 구석을 살펴도 사람은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여기서 사람이라는 것은 '노동'이다.그의 분석에는 '노동'과 관련해서 어떠한 테제와 안티테제도 등장하지 않는다.결국 제도를 만들고 제도가 운행되어가는 시스템을 분석하고 있을 뿐 그 시스템의 뿌리이면서 또한 희생양이고 또 움직일 수도 있는 주체들과의 관계성을 무시되고 있다.그가 한국경제를 분석하면서 나왔던-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재벌 경영권 유지와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것 역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그는 1920년대 스웨덴식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경제발전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하는 듯하다.그렇지만 이 부분에서 그는 한국형 재벌의 형성과 강고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너무 쉽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신자유주의는 재벌들에게 합리적 경영을 요구하기도 한다.그러나 결국 신자유주의의 이해관계는 재벌이라는 국내 지배블록을 통해 실현된다.재벌은 그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가장 중심된 기득권이며 신자유주의의적 재편의 수혜자다.한국에서 재벌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아닌가? 재벌은 사회의 담론을 신자유화하는데 가장 큰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일반론의 오류를 범할 수 도 있지만- 박정희시대의 개발독재에 대한 나이브한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차 대전 이후 선진국들이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활동한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역사적으로 나이브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남미와 아프리카,중동 등에 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이며 또한 경제적 개입을 '좋았던 시절'정도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아쉬움이다.(물론 미국의 외교사에 있어서 70년대는 윌슨의 이상주의를 실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그러나 그것도 결국 악어가 잠시 졸릴때 뿐이었다.)그는 전후 선진국들의 선의에 대해 '냉전 역할론' 보다는 '장기적 자국이익론'에 힘을 싣는다.그래서 그가 현재 나쁜 사마리아인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기적 동기라도 발휘해서 지금 잠깐 양보하고 '키워서 잡아먹어라' 라는 식의 주문밖에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의 첨병 IMF로부터도 '브레이크 좀 밟고 가라' 고 조언을 받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의 터보엔진을 부착하고 있다.앞으로 한국의 미래를 옅볼 수 있는 현재 대선 상황을 보면 암담하다.마치 보드카에 취한 기관사들이 귀를 막고 운전하는 폭주 기관차 3등칸에 올라탄 심정이다.기관실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불콰해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뛰어 내릴 것인가 아니면 요행을 바랄 것인가?
건축가이자 미술 공예운동의 주창자였던 윌리엄 R 레서비의 글로 마친다.
"역사를 쓰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고, 철학을 쓰는 것은 부자들이다.
.....죽은 자와 가난한 자는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