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 지친 저녁,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커피를 들이키는 순간이나 머리가 멍한 아침에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을 먹으며 힘을 얻는 순간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순간들이 떠올랐다. 한 모금의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으로 쓰디쓴 일상을 위로했던 것처럼, 이 책이 선물해주는 것들도 그런 달콤한 순간들이 지닌 마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일상적인 삶에서 잠시 벗어나,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내 삶이 조금 더 달콤해지는 상상을 했다. 그 달콤함을 조금 더 오래 유지하고 싶어서, 단편 하나하나를 아껴가며 읽었다.
열세 편의 이야기들 속에 저마다 다른 삶과 일상이 직조되어 있지만, 이 연작소설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여성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거나, 때로 잠깐 스쳐지나가는 조연으로 등장하지만 그럴 때조차 그녀가 남기는 발자국은 크게 느껴진다. 커다란 체구를 가지고 있지만, “음식이 주는 위안을 내던질 생각은 없는” 사람이고, 누구에게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심지어 가족에게도) 변덕스러운 기분을 휘둘러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망치기도 하는 사람이다. 변덕스러운 기분을 휘두르며 미안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이 사람이 전혀 이해되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그녀의 삶에 강한 연민을 느낀 것은 우리 삶 자체가 변덕스러운 신의 장난 같다고 느낀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인터뷰에서, “일상적인 매일의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존중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이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는데, 올리브 키터리지는 그런 작가의 말을 가장 잘 전달하는 인물처럼 여겨진다. 누군가에게는 변덕스럽고, 괴팍하고, 거만하게 보일지라도, 그녀 자신은 결코 쉽지 않은, “일상적인 매일의 삶”을 견뎌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연민을 느꼈던 인물 가운데 하나로,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인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숨어 있는 고통과 슬픔을 저마다 다른 빛깔로 촘촘하게 엮어냈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까지 훤히 알 것 같은 작은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삶의 풍경들은 다들 고만고만한 슬픔과 기쁨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다들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헤쳐 나가고 있지 않은가. 이웃집 사람들을 슬며시 엿보는 것처럼, 이들의 삶을 조심스럽게 훔쳐보았다.
남편의 병이 나으면 함께 여행가자고 여행 책자를 모으며 행복한 공상을 하지만, 결국 남편을 보내야 하는 여자도 있고, 혼자된 여자를 보며 아내 몰래 애틋한 마음을 품는 남자도 있다. 누군가의 슬픔을 보며 위안을 받으려 하지만 그것마저 쉽사리 되지 않는 여자도 있고, 이제 더는 애틋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아내에게 상심을 느끼는 남자도 있다. 모두가 그럭저럭 살아내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스며있는 슬픔은 지독해서 놀랄 때도 많았다.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낸다는 그 말. 올리브는 확신하지 못한다. 거기에도 여전히 파도는 있지, 올리브는 생각한다.” 314쪽
소설을 읽기 전, 나는 이 소설이 달콤할 거라 생각했다. 이 책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를 보며 이 소설을 읽으면 삶이 조금 더 따뜻해질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단편을 읽을 때마다 나는 당혹스러웠고, 심지어 괴로운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도 연속해서 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삶에서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관계에서 비롯되는 슬픔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연하게 인질극을 경험한 키터리지 부부는 불운한 그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 당시 서로 주고받았던 말 때문에 상처받는다. 변덕스러운 어머니 때문에 힘들었던 아들은 결혼해서 어머니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면서 상처를 극복하려 한다.
그럼에도 결국 모든 단편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모든 삶을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힘은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 주름이 져 보기 흉한 얼굴도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라는 걸, 늙어서도 우리의 심장은 여전히 사랑 때문에 더욱 가파르게 뛸 수밖에 없다는 걸, 그 사실을 나는 마치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처럼 약간 들떴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 기댄다. 남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은근슬쩍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끼워 넣은 것만 같다. 결국 모든 삶의 결과는 사랑과 결부되어 있다고, 나는 쉽게 단정 짓는다.
그리고 또 하나. 지친 일상에 찌들려 잊기 쉬운 사실을 작가는 넌지시 찔러준다. “정말 어려운 게 삶”이고, 언제나 “너무 늦었을 때에야 뭔가를 깨닫는 것이 인생”이며 “인생은 뼈와 마찬가지로 서로 얽혀 직조되며 어긋난 뼈는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가끔씩 누군가는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끝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삶은 선물이라고” 우리는 이 선물 같은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단편 하나하나를 읽었던 순간은 약간 괴롭기도 했지만, 책 전체를 다 읽고 나서 드는 느낌은 괴로움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에서도 말했듯이, 달콤한 기분이었다. 어떤 괴로운 삶에도 삶을 만끽할 수 있는 순간은 존재한다. 그런 순간들 덕분에 마치 건망증 환자처럼, 삶이 괴롭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는 삶을 선물처럼 받아들인다. 누군가를 수십 년 동안 알면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걸, 자신과는 생각이 달라도 외로움으로부터 구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게 행복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순간순간을 정교하게 빚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단편 하나하나에 세밀하게 스며들어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슬픔에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작가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쪽지 하나 없이 가까운 사람들과 이별할 생각을 품다가도, “내가 당신 곁에 있어요.”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그럭저럭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펼쳐 보인다. 일상을 달콤하게 요리하다가도 날카롭게 선을 그어버리는 작가의 능력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근사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달콤한 초콜릿을 맛보거나,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순간처럼 일상에 작은 기쁨을 주는 순간이 하나 더 생긴 것만 같았으니까.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포스트잇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렇게나 적은 거였다.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이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인지 물어보기, 선물 같은 삶을 마음껏 즐기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당신 곁에 늘 함께할 거라고 말해주기, 내 변덕스러운 기분으로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같은. 약간의 흥분과 약간의 들뜸이 섞여 있는 것만 글씨를 바라보며, 가끔씩 이 작은 책이 주었던 선물을 기억해낼 것이다. 그러면서 달콤씁쓸한 초콜릿을 삼키듯,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으로 이 책에 빠져들었던 시간도 함께 떠올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