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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법, 종이 책 읽기를 권함


고서점에 갔다가 책이 너무 탐이 난 나머지 통장에 있던 돈을 다 찾아들고 나간 사람, 돈이 없던 유학시절 옥스퍼드 영어사전 한 질이 너무 갖고 싶어 책 한 트럭을 내다판 사람, 인사동 고서점에서 혼자 책과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 한때는 책을 읽기 위해 기차를 탔던 사람, 책 읽는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을 아직 찾아내지 못한 사람. 그는 바로 책 속에서 행복을 구현하는 우리시대 간서치, 김무곤 교수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마치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한 대목이다. 가만있자 한 사람 더 있다. "모든 곳에서 안식을 구했지만 찾지 못했다. 다만 작은 책 한 권 들고 구석자리 앉아 있을 때는 예외였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중세의 신비주의자인 토마스아 켐피스의 말이다. 책에서 안식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제목이 참 맘에 든다. '종이책 읽기를 권함' 저자는 지독한 독서광이다. 특히 종이책에... 그건 필자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독서에 관련된 자신의 체험담을 거침없이 들려 준다. 그는 강연에서 책 이야기를 하면 청중들이 못알아 먹다가, 텔리비전에서 나온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주는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 한다. '책따위'로 치부하는 풍토도 서운해 한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세계의 리더(Reader)들은 리더(Leader)들이라는 것을... 빌게이츠, 오프라 윈프리, 마우쩌뚱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리더들이 리더들이다. 그러니 '책따위'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오만이 아니건다. 


개인적인 체험이다. 속도법을 배워 진짜 빨리 되었지만 진작 공허함과 아쉬움은 배로 커져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천천히 읽는 버블 배우러 다녔다. 책도 지식을 쌓이 귀한 수단을 넘어 자시 수양을 위한 것으로 되돌아아 가야할 것을 말한다. 


"저 위 하늘나라에 있다는 천국은 엄청나게 큰 도서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스통 바슐라르, <몽학의 시학>에서


정말 아름다운 문구다. 나도 그런 천국을 꿈꾸어야 겠다. 


혼자 책 읽는 시간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할 때 <혼자 책 읽는 시간>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좋은 시간다. 책은 도끼이기도 하지만, 양약이기도 하다. 나를 안아주고, 부듬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친구이다. 

"나는 독서를 하나의 규율로 정해두려고 한다. ... 그렇게 몰두하지 않으면 삶의 다른 부분들이 슬금슬금 침범해 들어와 시간을 훔쳐 가버릴 수 있다."(43쪽) 쓰라린 고독과 아픔을 독서를 통해 치유하고 이겨 내었다. 


"말은 살아있고, 문학은 도피가 된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이다." -시릴 코널리 <조용하지 않은 무덤>에서.. 


언니의 죽음 앞에서.. 상실의 아픔을 부둥켜 안고 이는 여인에게 찾은 그렇게 찾아왔고, 그녀의 도피처가 되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책 읽는 시간>을 만들어 숨어 들어갔다. 


이 내용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것으로, 소리를 내어 공부하는 것은 새로운 내용을 효율적인 방법으로 배우고 익히게 해 준다네. <중략> 몸을 움직이면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흡수하게 되지. 이것이 토라 공부와 다른 분야 공부의 다른 점일세. 일반 학교의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거나 도서실에서 책에 파묻혀 조용히 공부를 하지. 토라를 공부하는 곳은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온몸과 온힘을 다해 공부하느라고 항상 시끄럽고 격렬한 분위기라네. <중략>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읽기를 통해 내용을 기억하기 때문에 시각에 만족하곤 한다네. 소리를 내어 공부하는 것은 또 다른 감각, 청각이지. 이것은 텔레비전을 볼 때 소리를 들으면서 보는 것과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쉽다네. 소리를 내어 공부하는 것은 영혼에 기록을 남기는 것과 같은 일이지




책으로 크는 아이들, 제목이 참 맘에 든다. 부모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책이 아이들을 키운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여행을 떠난다. 책의 이야기가 서린 곳으로 말이다. 예절도 배우고, 저자도 만나고, 주인공도 만난다. 책이 아이들을 키운다. 정말이다.  온 가족이 독서에 흠뻑 빠져 산다. 우리집은 텍도 없는 소리다. 그래도 잠 자기전 들려주는 동화책은 그야말로 꿀맛이란다. 그나마 다행이다. 




상큼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책에는 말이다.  나의 독서 이야기도 잔뜩 써 놓아야 겠다. 결론은 종이책이다. 디지털이 아닌 손으로 느끼고, 코로 맡고, 귀로 듣는 종이책이다. 그래서 종이책이 참 좋다. 이사갈 때의 괴로움만 뺀다면 종이책은 나의 영원한 쾌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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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본능은 인간의 생존본능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명제가 있다면 르네 데카르트의 바로 이 말일 것이다. 이 명제를 통해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다 의심한다해도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사고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했다. 그러나 소비를 지향하는 현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존재를 나타내는 명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소비한다. 그로 존재한다.’이다. 소비는 허비가 아니다.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말한다. 소비는 곧 문명인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문명인이 된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소비하는 인간들은 이제 사바나 초원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까? 저자인 개드 사드는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게 ‘No!’라고 외친다. 현대인의 소비본능을 밀도 있게 파헤친 저자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여전히 초원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초원적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진화심리학자인 저자는 인간의 소비 형태가 원시적 진화초기의 삶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으며, 여전히 그러한 본성에 얽매여 있다고 말한다. 다만 현대 문명에 맞는 옷만 갈아 입었을 뿐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남자이다. 남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바로 차다. 그것도 ‘스포츠카’를 원한다. 환경적 이유 때문에 지르지 못할 뿐이지 남자의 본능 속에는 언제나 폭발질주를 일삼는 포르쉐가 꿈틀거리고 있다. 왜 남자들은 스포츠카를 원할까? 저자는 남자들의 생존전략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즉 과시를 통해 여성들의 호감을 사서 자신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는 생존본능인 것이다. 공작의 댄스는 자신의 화려함과 건강함을 암컷에게 보여줌으로 자신을 선택하도로 유도한다. 자기 과시인 것이다. 남자들의 스포츠카에 대한 집착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저자는 재미난 실험을 했다. 두 명의 남자로 하여금 최고의 스포츠카인 포르쉐와 낡은 도요타 세단을 몰게 했다. 주행 중에 그들에게서 남자를 상징하는 테스토스테론이 얼만 분비되는가를 측정했다. 대개 한적한 고속도로에서는 두 자동차의 운행이 호르몬에 영향을 주지 않고, 도심에서만 포르쉐를 운전할 경우 크게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니었다. 도심에서든 시골에서든 포르쉐를 운전할 경우 호르몬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당연히 낡은 도요타 세단은 호르몬이 적게 분비되었고, 특히 도심에서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더욱 줄어들었다. 미국의 정치 풍자가 이자 저술가인 오루크는 ‘특히 여성의 성적 흥분을 고조시키는 많은 기계장치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인 벤츠 380L 컨버터블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남자는 멋진 차를 구입함으로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위와 능력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여성은 그러한 남성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고 선택한다. 90년대 있어서 ‘오렌지족’의 이야기는 부유한 청년들의 퇴폐적 삶만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문제로 들어가 보자. 여성들이 가장 많이 구매하는 물품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하이힐’이다. 하이힐의 얼마나 건강상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지는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하이힐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을까? 바로 이곳에 하이힐의 치명적 유혹이 숨겨져있다. 미국의 섹스심볼의 상징인 마를린 먼로는 ‘누가 하이힐을 발명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남성들은 그 사람에게 많은 빚을 졌어요.’라고 하이힐의 치명적 유혹을 간파했다. 처음 하이힐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하이힐을 보며 “하이힐을 신으려면 윗다리로 계속 균형을 잡아야 해서 등 근육이 긴장되기 때문에 활력이 넘치고 짝짓기를 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이지.”라고 말했다. 하이힐은 여성들로 하여금 성적인 매력이 넘치도록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여성스럽다는 말 속에는 다음 세대를 이어갈 생존본능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이를 임신하고 기르는데 있어서 여성성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슴이 작은 여성보다 큰 여성이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도 생존본능 때문이다. 심지어 저자는 생리주기에 랩 댄스들이 팁을 받는 액수가 많다는 것도 들고 있다. 댄스 자신도 모르지만 남성들은 생리주기의 여성들에게 가장 강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문명인이라도 사바나의 초원에서의 삶이 아직 청산되지 않았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이다. 저자는 여기서 더 한발자국 나아간다. 키가 큰 남자일수록, 예쁜 여자일수록 돈도 잘 벌고, 성공할 확률도 높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키가 큰 남자가 능력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예쁜 여자일수록 남자들은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은 ‘미인효과’라고 부른다. 저자는 1991년에 사회비평가인 나오미 울프가 출판한 <미의 신화>에서의 주장을 망상이라고 까지 말한다. 울프는 이 책에서 여성들이 예뻐지려는 욕망은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성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불안감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 또한 울프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저자는 미인효과를 사회화 이전의 어린 영아들도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가장 오래 바라본다는 실제적 연구를 통해 반박한다.(276쪽) ‘미’는 사회 속에서 조작된 편견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에 속한다.

 

결국 인간의 소비 본능은 진화심리학을 알지 못하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문명을 지배하고 삶의 좌지우지하는 것은 수만년 전에 인간이 진화하면서 만들어진 생존 본능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소비는 결국 자신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물려 주기 위한 이기적 DNA의 발현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인간의 소비를 파헤친 본 저서는 어떻게 소비를 이해하고 풀어 나가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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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연의 독설, 독설, 독설


독설이 유행이다. 독설의 뜻은 독한 설득이지만 야단치다는 뜻도 있고, 가르침이란 뜻도 있다. 하여튼 독설이 유행이다. 조금 잘나간다 싶은 분들의 책에는 '독설'이란 제목이 심심찮게 붙어있다. 한때 네이밍에 대해 연구를 하다 제목에도 유행에 민감한다는 것을 알고는 참 묘한 세상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1972년생이다. 놀랐다. 나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젊은. 이제는 조금 늙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태아난 사람들을 대개 '베이비붐' 세대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건너온 말이라 그런지 썩 공감은 가지 않는다. 유수연! 그는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별 볼일 없는 여자였다. 공부도 그리 잘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열심히 사는 그런 여자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때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누구나 가는 길이다. 그러데 바로 이때 그의 인생이 갑자기 뒤바뀌고 말았다. 잘 노는 사람이 공부도 잘하는 말이 있듯이 잘 놀았던 그녀는 학교에 돌아와 자신의 끼를 살려 강의를 시작하면서 '잘 가르치는 강사'로 거듭났다. 그녀는 스타강사이다. 지금은 어엿한 '유수연 언어연구소' 소장이자 강사이자, 연예인?이자. 하여튼 뭐든 다 한다. 글쓰기는 어떻고, 못하는 것이 거의 없는 엄친아이다.















"노력하는 자는 반드시 성공한다. 다만 그때가 조금 늦고 빠르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의 강도를 유지하면 언제가 되었든 그 누구든 자신의 무대를 밟아 볼 수 있다."

 

나를 고무시키는 말이다. 전적으로 동감이고 공감한다. 하여튼 멋지다. 오늘 하고 싶은 유수연이 아니라 '독설'이다. 독하게 야단치지만 격려하는 말이다. 독설하면 또 한 분 떠오른 사람이 있다. 바로 김미경씨다. 유수연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지만 이 분도 여자다. <언니의 독설>은 유명하다. 모두 새겨들을만한 교훈으로 가득차 있다. 지난번 김미경씨가 TV에 나와 젊은이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한 것을 보고 '멋지다'라는 생각을 했다. 독하게 먹고 젊었을 때 충분히 '고생하라'는 쉽지 않는 독설을 퍼부었을 때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게 진정한 카타르시스다. 














작년이었던가. 젊은이에게 꾸중을 했다가 죽을 뻔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신문에 났다. 개인주의에 빠져 어른 공경할 줄도 모르고 자신을 올바로 지도하는 어른을 '팬' 그야말로 패륜아들이 넘치는 사회가 되었다. 예전에는 어른이 차에 오르면 젊은이들은 누구나 말도 없이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다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자. '경로석'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 경로석조차 젊은이들이 눈을 딱 감고 비켜주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되가는지 모르겠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예절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 논어를 읽히고, 중학교 때 명심보감을 읽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학과 대학, 중용과 채근담을 읽혀야 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마키아벨리 군주론 같은 책은 저급한 책이다. 같은 한문 고전이지만 삼십육계나 손자병법 같은 책을 조심해야한다. 오히려 맹자를 읽혀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스펙을 쌓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현대의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한국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독설이 필요하다. 지금은 이 세상에서 도와 예를 가르치는 독설가가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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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원색적이어야 한다. 


알라딘의 정체성을 논하기는 정말 힘들다. 드러 내놓고 말하기도 그렇고 우물쭈물 넘어가기도 그렇고... 댓글 달리는 것이 좋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지난 번 읽은 콰이어트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천성적으로 '내향형'이고, 소심하다. 이중적 잣대와 기대심리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 가끔씩 찾아오는 이상한 손님들이 댓글을 남겨 놓고 떠난다. 자유다. 나도 모든 이들에게 댓글을 달 수 있도록 열어 놓았으니 나에게도 책임은 있다. 아내가 댓글을 읽어 보고는 '당장 지우세요' 라고 한다. 그러나 그대로 두기고 했다. 뭐 나도 그리 칭찬 들을 만한 일은 안했으니 욕 들어도 싸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그런데... 그런 글을 아무렇게나 지껄여 놓고 달아 나는 인간들은 링크고 걸지 않는다. 자신을 밝힐 용기도 없는가 보다. 그것도 자유다. 단지 그들이 벌이는 행각이 유치할 뿐이다. 그런 글에는 답글도 쓰지 않는다. 


글은 또다른 나다. 나의 본신으로서의 글은 피할 수도 꾸밀 수도 없다. 그저 솔직하게 적을 뿐이다. 어쩌면 이곳은 나의 글쓰기 연습장이기도하고 나의 욕망을 표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공식적인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사적인 글도 아니다. 이런 애매함은 글을 써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나의 사적인 공간이요 의견을 개진하는 곳이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상관 없다. 나는 나의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다만 너무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의견은 개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의 평범한 생각, 상식적인 소견을 적을 뿐이다. 오타도 많고, 오류도 적지 않다. 일부러 '퇴고'하지도 않는다. 매우 어슬픈 단어과 문장이 연결되어 있더라고 내버려 둔다. 읽는 이들이 약간의 실망을 가질지언정... 


글은 원색적이어야 한다. 좀 던 원색적이어야 한다. 싫고 좋음이 분명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확실해야 한다. 그래야 싫은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구분이 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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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복고풍 시대다.

 

구약성경의 전도서에 해아래 새 것이 없다는 기록이 있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다. 전에 있던 것이 다시있고, 다음에도 있을 것이다. H.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로 풀어 나갔지만 결국 유행이란 종속된 주제는 여전히 역사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의 또 다른 해석인 셈이다. 이러한 복고풍의 유행은 옛 것을 그리워하고 새로움에 대한 반동에서 나온 발로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이 모두 싫은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내지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에 옛 것을 놓치고 싶지 않는 것이다. 몇 달 전에 보수동 책방 골목에 가서 주인과 잠깐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주인의 말은 이제 헌책방은 접어야 할 것 같다는 하수연을 늘여 놓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찾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관광지기 때문에 그나만 구경하러 와서 몇 권 사가기는 하지만 예전처럼(7-80년대) 헌책방을 찾아 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 자신도 헌 책방은 잘 가지 않는다. 가끔씩 기분전환을 위해 나오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새책을 서점에서 구입한다. 그것도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에서 말이다. 그러나 주인장의 말에는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이제 헌 책방은 더이상 되지 않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주인장과 나에게 새로운 생각의 전화를 준 기사가 나왔다. 중고서점이 "잘" 된다는 기사였다. 9월 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로 '중고서점과 헌책방은 다르다'이다. 물론 이 기사는 기존이 헌 책방과 새책을 다 읽고난 '중고'서적을 구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다른 기사에서는 헌 책의 인기 이유가 경기 불황이라고 말한다. 이것또한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 기존의 헌 책방이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 오는 이유는 다른데 있어 보인다. 이것은 신간 서적에서도 그 '낌새'를 챌 수 있다. 근래에 들어와 발행되는 신간의 대부분은 '이미 출간된 신간'들이다. 인문학 열풍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난히도 고전에 대한 인기가 날이 날 갈 수록 높이지고 있다. 검색창에 논어라고 치면 수많은 종류의 [논어]가 검색된다.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번역자의 논이들이 있다. 또한 논어를 중심으로 한 풀어쓴 논어와 논어를 교육과 경제, 리더십 등에서 응용한 논어들이 즐비하다. 대체 어느 것을 읽어야 진짜 논어를 읽는 것인지도 헤깔릴 정도다. 


아래는 논어를 검색했을 때 검색된 책들이다. 잘 팔리는 순서대로 그대로 올려 본 것이다. 순수한 논어는 홍익출판사의 [논어]와 글항아리에서 출간한 [논어]이다. 요즘 한창 인기있는 풀어쓴 논어인 [집 나간 개]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언제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전통 유학에 대한 심히 큰 반항심?을 보였던 우리나라가 갑자기 2-3년 전부터 옛 것이 좋다는 슬로건을 내걸더니 독서에 있어서도 고전으로 급 선회하고 있다.

























중고서점과 헌 책방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역시 동일한 것이 아닐까? 경제적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옛 향수를 찾고 싶어하는 추억의 발로는 아닐까?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그렇게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는 침물하다. 부동산은 몰락의 조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이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정부에서는 경매연기를 3달까지도 연장해 주는 법안을 추진중이라고 한다. 경기침체를 예상한 때문이다. 제조업 분야에서도 긴장을 하고 있다. 엊그제 신문에는 아직 한 번도 없었던 르노 삼성에서 자유퇴직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말이 자유퇴직이지 '구조조정이 아니냐?'라는 우려 목소리도 끊이지 않고 있다. 


어쨋든 이러한 이유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게하고 위기를 극복하고자 지혜를 얻기 위해 서점으로 몰려들게 한다. 그것도 헌책방과 중고서점으로 말이다. 알라딘에서 중고 서점을 열자 많은 우려와는 다르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서울과 부산이라는 대도시를 넘어 중소도시에도 중고서점이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또한 헌 책방을 찾는 이들이 젊은 층으로 많이 옮겨 갔다고 말한다. 이렇게 책의 복고풍 시대는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인문학을 광고도하고, 인문학으로 공부도하고, 인문학으로 돈도 벌고, 인문학으로 랩도하고... 인문학으로 뭐든지 다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 이제 인문학은 순수한 학문을 넘어 좀더 넓은 영역으로 자신의 지경을 넓혀 가고 있다. 이러니 인문학 복고시대라고 말해도 껄끄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언제 이 복고풍이 끝날지 모른다. 수천년의 지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어려운 시기에 많은 법이다. 그러나 역설이다. 계속 잘하기 위해 평상시에 인문학을 찾아야 할 터인데 어려울 때만 찾으니 말이다. 이것은 기쁜 가운데서도 서글픈 우리의 자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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