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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제목으로만 알고 있던 '쿠오 바디스'를 업무상 참고도서로 읽었다. 제목에 인용된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는 사도 베드로가 주님께 위임받은 양떼를 버리고 피신하려다가 듣고 순교를 결심하도록 이끈 신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에피소드가 소설의 절정부에 배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네로 황제가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광기, 그 밑에서도 확산되던 그리스도교라는 대안공동체, 필연으로 따라오는 박해와 예기치 않았던 민중의 회심으로 이어지는 대서사에서, 저 절절한 질문은 그리스도교에 마음을 기울이는 모든 등장인물의 마음속에 심긴 것이기도 했다.

폴란드가 주변국들의 분할조약으로 지도에서 사라졌던 시절, 폴란드의 작가는 그가 아는 한 (유럽과 아메리카의) 세계인 모두가 공감하는 박해와 승리의 기록을 선택함으로써 동포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를 우회적이고 안전한 방식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하여 이 대작 역사소설은 폴란드 민중에게는 희망이 되고 번역본을 접한 외국 독자들에게는 감동이 되었다.

특기할 점은 타락한 로마 제국의 비교적 순수한 젊은 귀족 청년 비니키우스를 그리스도교 대안 공동체로 이끄는 연인 리기아의 설정이다. 작가는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리기아가 속한 가상의 '리기족'은 작가의 모국인 폴란드의 슬라브족을 모델로 설정했다고 썼다. 리기아와 동족이며 그녀의 충실한 호위무사인 우르수스가 그리스도인을 욕보이기 위한 로마 원형경기장의 결투에서 '게르마니아' 혈통의 들소를 자력으로 제압하고 리기아를 구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에 대한 여론을 결정적으로 돌려놓는 장면은 소설 창작 당시의 폴란드 정세를 겹쳐서 읽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면서도 누구 하나 원톱 주인공이라고 꼽을 수 없을 만큼 각자의 고유한 서사와 심리가 살아 있는 소설에서, 그래도 거시적으로 눈에 띄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 구시대로 묘사되는 로마 제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호의호식하거나 기생하던 기성세대 인물들이 새로운 시대에 감화되어 회심하거나, 구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는 양심고백과 함께 퇴장하는 것이다. 구세대 인물들의 희생과 퇴장은 차세대의 희망의 상징인 비니키우스와 리기아 커플의 행복한 에필로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설정이다.

둘째로 작가가 공들여 묘사한 흐름은, 그리스도인들의 양순한 비폭력이 피에 주린 로마인들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박해가 복음의 씨앗을 멀리 날려줬다'는 19세기 조선 선교사들의 증언은 약 2천 년 전의 로마에서 일찍이 입증된 명제였다. 맹수의 이빨과 십자가 화형에 저항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가는 비폭력은 약자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만, 두려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인적 용기는 네로 황제 치하에서 말도 안 되는 숱한 죽음을 목격하며 공포에 떨어온 군중에게 충격적이고 경외로운 것이었다. 비록 작가 자신은 조국의 해방을 불과 6년 앞두고 세상을 떠났지만,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 역사의 서사를 통해 어느 정도로는 불가피하게 비폭력을 택할 수밖에 없는 동포들을 위로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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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구매하진 않았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신착도서인데 출간 1년 만에 3쇄를 찍었다 하니 내가 모르는 새에 상당한 호응을 얻은 모양이다. 사춘기 때 처음으로 가수 팬덤에 발을 담근 대상이었고, 그의 죽음에 비통했던 팬의 일원이었고, 두세 번은 그의 강연회에 참가하여 가까이에서 존재를 느낀 사람이었던지라 그의 사후에 나온 평전과 분석서들을 관심있게 찾아 읽는 편이었다.

 

저자가 그의 단순한 팬이 아니라 생전의 가까운 교우였던 관성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큰 자산이다. 필자 자신이 대중음악평론을 업으로 하고 있고 신해철과의 교분이 깊었던지라 그가 말한 대로 3주 만에 본문을 다 써내려갔을 법하다. 신인 시절부터 멈추지 않았던 대중음악계 적폐와의 싸움, 잠재력은 크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아 밟힐 뻔했던 신인에게는 큰 행운이 되어 준 가왕 조용필과 제작자 유재학의 영향을 짚어준 부분은 이후 신해철의 성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스쿨밴드 멤버에서 솔로로, 프로젝트 밴드에서 풀밴드로 변신하고, 그 와중에도 간간이 솔로라기보다 1인 밴드 개념으로 음반을 내면서 더 치밀하고 완전한 구조의 음악을 축조하기를 갈망했던 음악인의 행보를 꼼꼼하게 짚은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100자평 중에는 '다른 강연이나 책에서도 많이 다룬 내용'이라 신선하지 않다는 말도 있었지만, 신해철을 잘 몰랐던 독자가 읽으면 새롭게 다가오는 알찬 정보일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런데 책의 섹션 구성과 만듦새를 보면 그래서 이렇게 작업했구나, 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아니라 왜 이렇게 작업했을까, 라는 의아함만 커진다. 우선 레이아웃이 그렇다. 하드커버로 감싸이고 세로로 길게 빠진 날렵한 책장 속에 과도한 시각적 실험을 해놓았다. 명조 계열의 굴림에 날카롭게 각을 넣은 본문 서체, 어절 단위로 행이 갈라지게 설계한 좌측정렬 문단 구조는-특히 그의 기나긴 인터뷰 문답에 적용한 글자 크기와 들여쓰기의 변주들은, 신해철의 예민함과 철두철미한 작업정신을 은유한다고 좋게 해석하기에는 가독성이 떨어진다. 신해철의 음악세계와 메시지에 대한 저자 자신의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저자의 '신해철 주크박스 뮤지컬' 대본은, 글쎄, 내용 구성은 저자의 소관이지만 그닥 훌륭하거나 의미있는 콘텍스트를 '분만'하지 못한다. 텍스트에 담긴 내용만이 아니라 책의 하드웨어 또한 독자에게는 책의 메시지를 말 대신 오감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될 것이지만, 그가 좋아했던 보라색으로 새겨진 하드커버 위의 플레이리스트(이것 역시 읽으라고 새긴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컴컴하다)와 보라색 가름끈을 제외하면 그 오감 메시지가 무엇인지 좀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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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생이 온다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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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마다 서점의 경제경영 섹션에는 시장과 소비자의 과거 트렌드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책들이 넘친다. 이를테면 김난도 교수를 위시한 서울대 트렌드분석센터가 매년 펴내는 <트렌드 코리아>도 있고, '대예측'이라는 거창한 문구를 제목에 넣은 모 경제신문사의 기획출판물도 있다. 그 가운데서 발견한 이 책은 90년대생의 정서와 여가생활 방식을 진단하는 부분을 봐서는 <88만원 세대>의 계보를 잇는 사회문화비평서 같기도 했는데, 읽어보니 대기업의 현직 브랜드매니저가 90년대생 세대에 초점을 좁히고 맞춰서, 시장의 생산자 겸 소비자 집단으로서의 성격을 분석한 책이었다.


90년대생을 분석하는 책은 교수나 학자도 쓸 수 있고 전문 논객도 쓸 수 있다. 그런 필자들이 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있다. 주석이나 참고서적 목록에 꽤나 어렵고 때로는 외국어로만 표기된(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책과 논문들이 가득해서 독자를 주눅들게 하기 십상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직장인이 쓴 이 책의 미덕은 분명하다. 발품 팔아 수집한 내용이고, 쉽고, 간결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운 논문이나 학술서적이 아닌 익히 알려진 비평서들과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신문/방송 기사들을 가지고도 유익하고 알찬 책을 쓸 수 있음을 입증했다. 덕분에 저자가 글의 근거로 제시한 각주의 자료들은, 독자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직접 찾아보고 동의하거나, 저자와 다른 입장에서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풍성하고 접근성 좋은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하나 더. 책 전체뿐 아니라 목차가 유용하다. 편집자의 친절한 배려 덕분인지 모르나, 장(부)마다 핵심을 요약하는 소제목들이 차고 넘치게 달려 있어, 목차만 복사해 두어도 책 내용을 어렵지 않게 기억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실용서로서의 미덕이다.


저자가 이 책을 처음 기획한 때는 2012년이고 뼈대(아마도 개요)를 세운 때는 2014년, 출판한 때는 2018년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장장 6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 산물이고, 저자가 직장생활을 하고 대학원 공부를 한 시간만큼 축적된 공력이 반영된 산물인 것이다. 책 속에는 많은 90년대생 신입사원들이 입사하자마자 이직을 꿈꾼다는 언급도 있다. 또 어느 90년대생 신입사원은 목표가 뭐냐고 묻는 상사에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상사 본인의 맥락에서는 당연히 회사 안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물어본 것인데, 신입사원은 회사와 관련되지 않은 본인 인생의 목표를 답했다는 것이다. 이직의 꿈, 베스트셀러의 꿈은 본인의 유능함을 인정받아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싶은 욕구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꾼다는 90년대생이 그 꿈을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이룰 거라고 희망하거나 예상하는지 나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책은 회사원으로 살아도 베스트셀러 작가는 될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작가가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있게 쓸 내용이 있어야 하고, 그 내용은 사회 어디에서든 구체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지속하고 발전시킨 시간을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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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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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오빠'라는 호칭의 오묘한 어감 때문에 제목이 오래 기억났던 책을 같은 작가의 신작 <목양면 방화사건 전말기>를 읽은 뒤에 찾아 읽었다. 이 책보다도 훨씬 전, 10여 년 전에 발표된 <최순덕 성령충만기>까지 아울러 감안하면 작가가 개신교회와 그 구성원들에 대한 가벼운 조롱과 연민과 혐오를 뒤섞어 품고 있는 속칭 가나안 신자인가 싶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가 무슨 짓을 했나 싶어 책을 열어보았는데, 뜻밖에도 뇌리에 강하게 박히는 작품들은 따로 있었다. 


한 권으로 엮인 작품들의 공통 주제도 작품 자체뿐 아니라 평론가의 친절한 해설과 작가의 글 덕분에 더 잘 알겠고,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한정희와 나'도 주인공의 사실상 장인 장모의 무조건 친절과 주인공의 조건부 친절이 교차하면서 깊은 인상을 주긴 했다. 


그런데 무심코 베푼 친절이 오해되거나 어그러지면 급기야 어떤 사달을 내는지 알려주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상당히 긴 분량과 중량으로 읽히는 연작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와 '오래전 김숙희는'이다. 김숙희가 연애라고 믿었던 관계의 성격, 연애의 시작이라고 믿었던 구 내연남의 행동의 동기, 어쩌다 보니 갖게 된 직업에 대한 혐오의 말마디도 상대의 본심과 기억에는 다르게 저장되어 있다. 상대의 무심한 친절에 어쩌면 혼자서 자극받은 김숙희는 제멋대로 가는 마음에 휘둘려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난 그냥 친절했을 뿐인데 저 사람은 혼자 왜 저럴까, 라는 의아함과 답답함은 박창수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김숙희 시리즈에서 (이승환의 노래 제목을 빌리면) 소통의 오류를 친절하고 소상하게 알려준 직후, 작가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의 파격적인 작법으로써 독자를 황당하게 만든다. 교회 여후배가 울부짖는 모양을 보니 오빠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후배는 자신의 생생한 기억을 말하지 않고 오빠는 그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몸에 밴 친절이 그만큼 무심했고, 딱히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할 만큼 대수롭지도 않았다는 증거다. 


김숙희 시리즈의 친절한 서술에 길들여져 교회 오빠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잔뜩 기대하던 독자에게, 기억이 안 난다며 시치미를 뚝 떼는 '교회 오빠'의 무성의한 서술은 작가가 책 밖에서 일부러 저질러버린 소통의 오류인 듯싶었다. 소설 안에서나 밖에서나, 너와 내가 화법과 태도와 생각을 딱 맞추기가 이렇게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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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욥기 43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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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을 읽어본 이들에게 가장 불가해한 책인 욥의 21세기판 패러디. 이해할 수 없이 연쇄적으로 다가오는 불행을 신의 섭리라며 애써 순응하려는 가여운 신자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하나님도 모른다. 종교 누아르의 외피 속에 어떤 주제가 숨었는지는 독자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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