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치 않은 계란 프라이

 

작은미미

 

 

 

며칠 전 스뎅 프라이팬을 샀다.

 

그 며칠 전엔 압력밥솥을 충동구매했던 터였다. 원래 서투른 무당이 장구만 나무란다고, 요리든 뭐든 해 먹기 귀찮을 때 갑자기 주방 기기 사 모으는 것에 불타오를 때가 있다. 밥솥을 바꾼 것도 밥맛이 좋아지면 좀 살맛날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확실히 밥맛은 좋아졌다. 묵은쌀로 밥을 해도 윤기가 쫄쫄 흘렀다. 밥통에 81시간째 두어도 (몇 시간까지 표시되나 한번 놔둬봤음. 절대 게을러서 밥을 안 먹은 것이 아니라고는 말 못 함) 거짓말 조금 보태 갓 한 밥만큼 풍미가 느껴졌다. 하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순 없지 않은가.

 

나는 요즘 자꾸 검댕이 묻어나는 프라이팬을 원망스레 노려본다. 알록달록한 아래쪽 무늬에 현혹되어 산 코팅 프라이팬. 하지만 지금은 무늬 따위 그을음에 가려져 오히려 지저분해보이기만 하다. 그래. 이제 프라이팬을 바꿀 때다. 그것도 스뎅으로.

 

스뎅 프라이팬. 전문용어로 스테인리스 프라이팬.

길들이기 힘들다, 무거워서 손목 나간다, 어차피 사봤자 얼마 못 쓴다, 등등 악플의 대명사, 스뎅 프라이팬. 하지만 이제 나이도 있고 건강도 생각해야 하니 기름 덜 먹는 스뎅이지!’, ‘, 번쩍번쩍 제대로 느낌 나는데!’, ‘역시 이쁜 건 스뎅 프라이팬이지!’ 하는 생각으로 눈 오는 어느 겨울날 저녁, 덜컥 질러버렸다.

 

엄마에게도 스뎅 프라이팬이 하나 있는데, 사실 엄마가 그걸 꺼내는 건 누룽지를 만들 때뿐이었다. 팬 위에 지은 지 좀 오래된 밥을 얄팍하게 펼치고 보일 듯 말 듯한 약불로, 그야말로 지진다. 노릇노릇하게 지져진 누룽지는 간식으로도 먹고 뜨거운 물에 넣어 말아먹기도 하고. 입과 손이 심심할 때 딱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

 

암튼, 프라이팬은 정확히 이틀 뒤에 집에 도착했다. 떨리는 손길로 박스를 벗겨본다. 뿌연 비닐 안에서 빛나는 속살을 뽐내는 프라이팬. 절세미인 옆에 선 우락부락한 보디가드처럼 설명서에는 협박과도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초록 수세미로는 절대 닦지 말라, 요리가 끝난 뒤 바로 물세척하라, 이래라 저래라, 이러지 말라 저러지 말라. 뭐가 이리 복잡해. 그래봤자 니가 프라이팬이지. 널 내 손안에 길들이고야 말겠다.

 

설명서에는 온갖 멋진 요리들의 조리법이 나열되어 있었다. 닭찜부터 케이크까지 가능하다고? 오호, 실제 요리하는 것보다 요리책을 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레시피를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프라이팬을 길들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해볼까. 당장 냉장고를 열어보자!

생닭 따위가 있을 리는 없고. 셰프마냥 구울 수 있는 스테이크가 있을 리도 없고, 케이크는 너무 귀찮고, 뭔가를 데우기엔 첫 요리치고 아쉽고. 그래 너, 너로 가자. 제일 만만해 보이는 계란, 나와.

 

약불로 일단 팬부터 10분 정도 데웠다. 물방울을 튕겨보아 또로록 구르면 적정 온도랬지. 처음이니 매뉴얼대로 해주자.

기름을 두르고 떨리는 마음으로 계란을 깬다. , 하고 팬 위로 계란이 안착한다. 이제 계란은 나의 손을 떠났다. 계란 프라이 정도야 뭐, 하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풍광이 있다.

 

해 저물어가던 봄날, 나는 부암동 오르막길을 자전거로 열심히 오르고 있다. 꽤 가파른 언덕길이었기에 생각보다 땀이 많이 났다. 화장이 지워질까 내심 걱정되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호감이 있는 썸남의 집에 가는 길이다.

 

.

누군가의 집.

그것도 남자의 집.

그것도 살짝 좋아진 남자의 집.

 

일 때문에 두서너 번 만났던 그는 뜬금없이 저녁밥을 해줄 테니 집으로 오라 했다. 30줄이 훌쩍 넘은 총각의 집밥 초대라. 경우에 따라 1부터 100까지 상상 가능한 설정이다. 속옷을 아래위로 맞춰 입고 가야 하나. 촌스럽게 왜이래. 기대한 거 같잖아. 나 설마…… 기대하는 건가?

 

뭉글뭉글한 심장은 그의 집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었다. 동네 슈퍼에서 마실 것을 사고 전화를 했더니 아뿔싸 그의 집은 슈퍼 사장님네 안쪽 집이었다. 머쓱하게 다시 한번 슈퍼 사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던 그는 나에게 반찬들이 다소곳하게 담긴 접시를 건네주며 계단 쪽을 가리킨다.

 

그 계단 올라가면 옥상이 나와요, 먼저 올라가 계세요.”

, .”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이건 뭐 절경이 따로 없다. 동네가 한눈에 보인다. 심장이 또 한번 뭉글뭉글해진다. 잠시 뒤 그가 올라온다. 그의 손에는 부루스타가 들려 있다.

 

우와~ 삼겹살?”

 

야외 옥상에서 둘만의 바비큐 파티인가요? , 서로 쌈 싸주면 부끄럽게 받아먹고, 그러다가 눈 맞으면 러브 쌈 싸먹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나 또 기대하는 건가?

 

그러나 아니었다. 정성스레 옥상까지 부루스타와 프라이팬까지 대령한 뒤 그가 해준 요리는 삼겹살도, 목살도, 갈비살도, 항정살도 아닌, 그것은 바로 계란 프라이였다.

 

이렇게도 만만치 않은 계란 프라이라니!

내 생애 이토록 호사스러운 계란 프라이라니!

 

만약에 그가 가금류나 어패류를 가져와 구웠다면 그건 뭔가 모범답안 같아서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굳이 생각하려는 분위기).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젓가락을 들고 프라이팬에 달라붙어 살점에만 집중했겠지. 뭐 그것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하지만 계란 프라이라니!

내가 이토록 계란 프라이를 특별하게 기억하게 될 줄이야!

 

계란 두 알을 나란히 깨서 지글거리는 걸 한참 바라본 기억이 난다.

왠지 우리 둘도 저 계란처럼 뜨겁게 익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순간.

 

스팸 투하.

 

 . 고기다.

완벽한 밤이구나.

 

그 남자와는 잘 안 되었다. 그뒤에 그와 가금류도 어패류도 먹었지만, 이상하게 진전이 되질 않았다. 길들여지지 않는 스뎅 프라이팬 같은 남자랄까.

 

, 이렇게 두루뭉실 다시 나의 스뎅 프라이팬으로 돌아오자.

익었으려나. 조심스레 계란을 뒤집어본다.

 

……. 은반 위의 요정처럼 매끄럽게 떨어지는 비주얼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건 달라붙어도 너무 달라붙었다. 이미 망했다 생각하며 다시 한번 뒤집어본다. 이제 계란의 반 가량만 생존가능하다. 스뎅 프라이팬, 너 무서운 놈이구나.

 

내 인생 두번째로 만만치 않은 계란 프라이를 만난 날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jongkyu 2017-06-27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설프게 혼자서 살아가는 삶이 오롯해서 좋아요. 쓰뎅 푸라이팬에 칠두른 오일, 눌러붙은 달걀이 검노룻게 타고 내음나는. 살짝 슬픈...

로네 2017-07-0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호화 프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