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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당신이 가장 은밀한 소원은 무엇이었는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주기도 하고, 과자도 준다는 말에 혹해, 친구를 따라 (아니 정확히는 친구의 언니가 좋아하는 오빠를 따라) 교회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적이 있었다. 한두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 정말 신이라는 존재가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내 소원을 들어주는 줄로만 알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겐 그것은 좀이 쑤시는 일이었고, 친구 역시도 옆에서 꼼지락거리기에 둘이 장난을 치다가 결국 우리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서 주위 신자들의 눈총을 받았었다. 도대체 내 소원은 언제 비는가, 과자는 언제 주는가 친구와 둘이서 연신 쫑알쫑알거리며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랐다. 깜빡 졸다보니 어느 순간 예배는 벌써 끝나고 나서 기도를 하는데, 사람들이 울더란 말이다. 왜 저렇게 서럽게 우는가, 울어야만 신이 소원을 이루어주는가, 나도 울었었다.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울었는지, 혹은 다 큰 어른들을 울리는 그곳이 무서워서 울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그 한번의 기억은 아직도 나를 두려움으로 밀어넣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결코 교회를 비판하고자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때 내 나이 열살도 채 되지 못했을 때로 기억한다. 그 나이에 어떤 것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서 그곳에 발걸음을 했었는가, 아직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딱히 소원하던 것이 있었던가, 그조차도 모르겠다. 그저 정말 들어주는가, 그것을 확인하고자 갔던 걸까.
나는 아직도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을 법한 투명한 마음가짐으로(실은 그것이 어떤 건지 몰라 마음을 비운 것이 그것이라 믿지만) 정돈한 뒤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백점짜리 시험지를 안겨주세요,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해주세요, 예쁜 사랑을 하게 해주세요, 또, 행복하게 해주세요. -.. 내 기도를, 혹은 소원을 들어주는 주체는 찬연하게 쏟아지는 햇빛이 되기도 하고, 창문 너머의 둥근 달이 되기도 하고, 밖에서 또르르, 또르르 우는 풀벌레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오래 전 돌아가신 할머니. 신자들에겐 신만이 그들의 종교라고 말한다면, 나에게는 내가 믿고 싶은 모든 것들이 종교가 되는 셈이다.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주체는 누구, 혹은 무엇인가.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 그런데 혹시, 동글동글한 것이 아닌 빼쪽하게 모나서 할퀴고 뜯겨나갈 듯한 소원을 빈 적이 있는가. 사실 난, 있다. 내일 아침이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리게 해달라는 누군가,라는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의 부재를 빌어본 적이. 그러면서 그 다음 날엔 행복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불행을 빌었으나 반대로 행복을 빌었고, 또 다시 불행을 비는, 그런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 내 뼈 마디가 아파오는 소원을 상기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 여기에 소라게를 불로 지져 그의 희생으로 소원을 이루려는 아이들이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가만히 두고 보고 있기에는 아이들의 소원이 위험하다.
소라검님, 소원을 들어주세요.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 - 상처투성이다. 누구 하나 온전치 못하다. 나는 그 세 아이 중 누구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가. 아빠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한 채 엄마의 외도로 또다시 엄마의 상실과 맞닥뜨리게 된 신이치? 아버지의 폭력에 익숙해진 희생양으로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는 하루야? 엄마의 상실이 신이치의 할아버지인 쇼조때문인 것을 알고 그를 증오하는 나루미? 하지만 결코 자신의 상처가 그 누구보다 앞서거나 뒤쳐질 수는 없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나온 말 중 “남들한테는 먼지만한 가시같아도, 그게 내 상처일 때는 우주보다 더 아픈거래요.”라던 말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상처받고 그로 인해 성숙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초등생 5년,이라는 나이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 아니던가. 아직 한참을 보듬어 주어야 하는데, 그 손길이 끊겨버렸다. 그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이다. 하여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닿을라 치면, 소스라치게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500엔의 돈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커져 같은 반 아이의 사고를 바라고, 급기야 엄마의 애인이 죽어버렸으면 하는 그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소원도 우리는 눈시울을 붉히면서까지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지도. 하지만, 우리가 결코 더이상 수수방관해서는 안되는 까닭은 그 소원들이 하나 둘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소원이 온전치 못하기를 바랐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마음을 짓누를 만큼의 돌덩이가 앉아 아이들이 아주 많이 아프기를 바랐고, 그리하여 이루어지기 전에 깨어지고 부서지길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더이상은 그런 소원들이 자신의 마음에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뜨려주고 싶었다.
사실 나, 당황스러웠다. 책을 넘기는 속도가 꽃을 전전하며 돌아다니며 팔랑팔랑거리는 나비와도 같았기에, 내가 이 책에서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재미를 느끼기엔 아이들이 소라게에 쏟는 시간이 턱없이 길었다,는 점이 내게는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오직 아이들은, 소라게를 붙들고 있을 때에만 입을 열었다. 집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단연 1인칭이었던 신이치뿐이었다. 그럼에도 답답했다.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신이치에게는, 하루야나 나루미에겐 없었을지도 모를 집에서 누구에게나 툭 터놓고 말할 상대가 분명히 있었는데도 (“신이치, 뱃속에다가 너무 묘한 걸 기르지 말거라. (…)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야기하는 거다. 나든 네 엄마든 괜찮으니까.” 라고 말하던 쇼조가 있었으니까.) 저자는 그의 앙 다문 작은 입술을 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 학교에서조차 남의 이목이 두려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소라게 앞에서만 껍질 속에 들어가 있던 자신들을 바깥으로 슬그머니 꺼내 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이야기가 사실은 무척이나 답답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대체 어디에서 내 마음을 놓아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던 것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끝내, 책에 마음을 둘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그럼에도, 아이들의 껍질이 조금 물렀으면 좋겠다. 스스로 껍질을 벗고 나올 수 있을 만큼. 고로 나는, 아이들의 행복을 소망한다. 그들의 소라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