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유정 작가의 신간 소식, 꽤 오랜만임에도 불구하고 멈칫하게 된다. 재작년(09)에 읽은 「내 심장을 쏴라」의 수명과 승민이 상처에 엉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처럼 내게 들러붙어 있는 까닭이었다. 나는 한국 소설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그것이 현재 읽고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이름들을 기억해내지 못하여, 서평을 찾아 보거나 책을 펼쳐 가장 맨 앞의 장에 오밀조밀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보고 나서야 간신히 그들을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하루이틀이 아니다. 헌데, 구태여 그때 썼던 서평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책을 첫 페이지를 펼쳐보지 않아도, 수명과 승민의 모습이 선연한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물론, 난 성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듯, 저질 기억력은 늘 한탄스럽기만 하다.) 또한, 그 책을 읽으며 느꼈던 기분을 아직까지도 담아두고 잊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작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도 단 한 권의 책을 두어번 읽는 것으로. 하지만, 그 책 - 초반에는 지독하리 만큼 읽히지 않아 읽을 때마다 도중에 책을 몇 번이고 덮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그것을 반복했다. 놓을 듯 말 듯 하면서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던 건, 서평책이라는 명목이 아닌 오로지 세상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는 나를 투영시킨 수명과 승민 때문이었으리라. 정유정,- 이름 석자를 기억할 수 있는 것 또한 오로지 그들의 몫이었고 앞으로도 그들 몫이 될 줄로만 알았다. 헌데, 다른 인물들을 품에 안고 오물조물 만져댄다니. 까닭을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드는 게다. 그렇게 따지고 들자면, 정유정 작가는 평생토록 내게 「내 심장을 쏴라」라는 소설로만 읽혀져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러므로, 정유정 작가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이 욕심이 났고, 또 어쩌면 그래야만 했다. 작가 박범신의 “그녀는 괴물같은 ‘소설 아마존’이다.”라는 수식어도 영 불편스럽게만 느껴져 책을 받자마자 띠지 먼저 떼어서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버리고, 한참을 쳐다봤다. 읽고 싶다,가 아니라 그저 욕심이었던 게지. 이 책을 꼭, 가져야 겠다,는 추레한 욕망같은 것. 허나, 직접 내 돈 주고 구매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었기에 언제까지고 책장 속에서 뒤집어둘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 핑계가 아니었더라도 난 이것을 사월이 가기 전, 읽었겠지. 팔과 발이 없어 언뜻 배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누군가 남편에게 자신의 삶을 걸고 지켜야 할 ‘어떤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기자신을 포함한 모든 걸 버릴 수 있느냐고 물어도 마찬가지 답을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을 버리는 것이 지키는 길이라면, ‘어떤 사람’을 버릴 수 있겠는가, 라고 물어도 이 역시 ‘예스’라는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서원을 그녀에게 데려가라고 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서원을 버리는 것 말고는 지킬 길이 없다는 의미.

 

세상은 ‘지난밤 일’을 ‘세령호의 재앙’이라 기록했다. 아버지에게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를그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때 나는 열두 살 이었다. 날 먹은 술이 문제였고, 눈을 시리게 만들 정도로 뿌연 안개가 문제였고, 그 속에서 급작스레 튀어나온 여자아이가 문제였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의 입에서 신음소리처럼 나왔던, “아빠.”라는 소리를 막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한 순간에 살인자가 되었다. 서원의 눈에 반달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애정과 믿음이 담긴 눈웃음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초라한 삶을 견디게 하는 달빛이었다. 그랬기에 서원이 아빠를 살인자로 기억하는 건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최서원이란 이름 뒤에 붙을 ‘살인범의 아들’이란 딱지가 죽음보다 무서웠다. 여자아이의 “아빠.”라는 소리만큼,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그보다 더 막고 싶어 했을 ‘살인범의 아들’ - 하지만 서원은 아빠에 의해 자신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던 여자아이도, 그 아이의 아빠도, 자신의 엄마도, 나아가 동네주민까지도 죽어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이 되어 버렸다. 나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황하고,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곁을 내줘서는 안 된다. 거지처럼 문간에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서라도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나의 힘이다. 아니, 자살하지 않는 비결이다. 그래서였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빠를 죽도록 미워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아빠에 대한 분노와 증오와 미움의 덩어리가 서원을 세상으로부터 거부를 당할지언정 추방당하지는 않게 칠년이란 세월을 살게 한 게다. 그런데, 서원에겐 무엇이 우선이었을까. 사실과 진실의 간극 속에 새근새근 잠든 ‘그러나’였을까, 소록소록 잠든 ‘그러니까’였을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의 입술 사이에서 “아빠.”라는 소리로 어둠이 세상을 삼켰을 때 최현수가 한 일은 분명 더 이상 변명의 여지도 없기에 ‘가해자’라고 일컬어져도 어떤 명분거리도 없음은 분명하다. 헌데, 그의 아비 오영제는 어찌하여 명백한 ‘피해자’ 범주에 들어가는가. 누가, 어떤 이유로 ‘피의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어 망아지새끼처럼 날뛰는 그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게만 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피해자’는 누구이고, ‘가해자’는 누구인가. 전에 읽었던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때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여선생을 보며,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내주어도 좋은가,에 대한 생각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여선생은 한 순간의 장난으로 딸아이를 잃은 직접적인 피해자였기에 그것에 대한 생각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었더랬다. 하지만, 오영제, 그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교정’할 수 있는 소유물이 자신이 정해준 위치인 제자리에 있기를 바랬던 게다. 사고 당일, 오줌 지리도록 무서운(글을 읽고 있던 나조차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교정’을 받은 세령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태어난 생일에, 곤히 자고 있는 침대에서, 그리고 여느 곳보다 안락할 집에서 아이를 내 몬 것은 누구란 말인가. 이래도, 그를 끝까지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책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무엇보다 내가 유심하게 지켜본 것은 사형제도. (저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사형제도가 존재한다. 글쎄. 좋은 방법일까. 현재 읽은 책 중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 이것들의 공통된 것은 사형제도라는 틀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글쎄. 나는 사형제도에 ‘결사반대’, ‘절대찬성‘ 중 그 무엇도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찬성’에 동의한다. 그런데, 위에 나열한 책들은 항상 내 머릿 속의 그 생각들을 뿌리채 뽑아놓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도 아닌, 그 무엇도, 어떤 것도 대용할 수 없는 사람의 생명이 좌지우지되는 법률이기에 안락사도 그와 마찬가지인 이유로 현대사회에서 논란이 끊이질 않는 이유일 게다. 死刑 -. 어디까지 옹호해야하고 배타해야하는 것인가. 당신이 상대의 생명을 당신의 손바닥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의 목숨은 누군가의 손바닥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러던 중 간밤에 김길태가 무기징역으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형제도는, 필요하다.

 

 

  

그래서였어. 그래서…… 넌 아니기를 바란 거야.

 

책을 다 덮고 난 뒤에 오는 안도감이 벌게진 얼굴을 식힌다.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결코 하고 있던 팩이 속눈썹에 아롱진 까닭은 아니었다. 영영 사람들의 입방아에 ‘살인범’으로 남을 현수가 가여워서도 아니요, ‘살인범의 아들’로 살게 될 서원이 가여워서도 아니요, 오영제의 결말(ex. 권선징악)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적 조창인의 「가시고기」를 몇 번이고 되돌려 읽으면서 분명, 소극적일지라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이보다 더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었고, 김민기의 「눈물의 아이」를 읽으며 그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었다. 「7년의 밤」 이 역시 그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오영제에게 ‘교정’이 그의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면, 최현수에게는 지키기 위한 것이 사랑이었던 게다. 물론, 극과 극의 인물을 제시했기에 조금 더 역동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말이다. 앞서 박범신 작가가 아마존 같다고 했었나. 아니, 세령호였다. 세령호에 마음먹고 물을 채운다면 얼마의 깊이까지 찰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난 딱 그 정도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별 다섯 개인 이유는, 그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정유정인 까닭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