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과 쓸개>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오는 어느 날, 공부 할당량을 누구에게 쫓기듯이 가까스로 채워넣고 더 이상은 무리,라며 무료하게 퇴근 시간만을 바라보다가, 다소 시니컬해보이는 표지를  신경질적으로 툭, 떼어내고 이 책의 첫 문장을 시작했다. 어쩌면,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모든 장기들을 두 손에 꼬옥 거머쥐고 몇 번이고 확인하며 읽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김 숨은 나의 그것들을 억압해왔다. 특히, 무엇보다 우리네의 삶을 철저하게 판박이처럼 닮은 그 이야기들에 그곳들은 아파했고, 쓰라려 하며 아우성을 치는 꼴이 되었다. 헌데, 그것을 감히 발악,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그래도 될까. 그 단어가 이 책에 어울리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내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머릿 속에 유영하는 단어는 단연코 그 뿐이다. 그러니,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그래서 내가, 주말 자정이 훨씬 더 넘도록 김 숨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고, 또 그래야만 했다. 그들의 소리없는 발악의 끝이 내 손 안에 고스란히 쥐어지길 바랬다. 그런데-. 나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끝끝내 자유로이 내뱉을 수 없었던, 길었던 숨을 내쉰다. 마치 해방감,이라고 표현해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의 숨-. 그것 말이다.

 

 

 

첫번째 단편, 간과 쓸개에서 67세 간암 환자인 ‘나’는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거울 속의 늙은 남자와 조우한다. 죽은 남자라도 바라보듯 아무런 감흥도 없이 ‘나’를 빤히 응시하던 이는 두렵게도, 자신이었다. ‘죽음’이 머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유년 시절에 큰누님과 함께 갔던 ‘저수지’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시시때때로 ‘나’를 억압한다. 어느 날, 저수지의 축소판, 수도기 계량기통에서 죽은 귀뚜라미 떼들을 보는데, 유독 한마리만 살아남아 버둥대고 있더란 것.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 하다.’고 그는 생각하지만, 알고보면 그 역시도 그와 다를 바 없다. 친구가 억지로 떠안긴 골목을 받아 뒷마당에 내팽개치듯 버려두었는데, 일주일 뒤 표고버섯이 자그마치 여섯 개나 열려있는 것을 보고 ‘나’는 새삼스럽다.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골목이 말이다. 거기서 그는 골목에 자신의 삶을 얹어놓는다. 그는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담낭관을 담석이 틀어막아 쓸개즙이 고여 있다가 다른 장기들로 스며드는 병을 가진 누님과 대면한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듣는다. 저수지에 ‘나’와 함께 간 사람은 마흔 살도 안 되어 죽은 셋째누님 을숙. ‘나’는 결국 ‘죽음’에 져버린 누님을 생각하고, 이젠 그것이 ‘나’의 간을 뜯어먹고 있다, 생각한 것일까. 노인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노인이 우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울음소리 또한 들은 적 없다. 그런데 그것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 단편 말고도 모든 단편이 그러하다. 책을 덮은 지금에도 난, 노인의 흔들리는 어깨가 보이는 듯 하고, 처연한 울음이 들리는 듯 하다.

 

 

 

그들은 그렇게 죽었다, 혹은 살았다, 아니 - 둘의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죽어 가고 있다앞서 말한 간과 쓸개>의 ‘나’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숨통을 틀어막는 가래때문에 거동도 불편하여 <북쪽 방(房)>에서 유배되듯 살아가는 노인이 있고, 뒤를 이어, 흑문조>에는 간암으로 두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노인이 있으며, 내 비밀스런 이웃들> 중에는 네번째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내가 있다. 그들 모두는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늙고 추레하다. 그렇기에 있는대로 위악을 부려도 용서받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헌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혹은, 못했다. 그 대신, 진물이 터져나온 그곳에 바람을 쏘이고자 작가는 그들에게 외출을 선사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모일, 저녁>소주를 사러간 아버지도,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만나기로 한 동생들도, <북쪽 방(房)>우족을 사러간 아내도, 흑문조>집에 구멍을 뚫어놓은 배관공도, 룸미러>상황을 보고 온다며 차에서 내린 남편도, 육(肉)의 시간>불온한 욕망의 대상이었던 여자의 육체를 안았던 남편도, 내 비밀스런 이웃들>그들과 함께 떠난 남편도, 럭키슈퍼>물건을 사러왔던 사람들도, (혹은, 유통기한이 다 된 아버지.) 외출을 감행했다. 그런데, 왜 당신네들인가. 외출의 대상은, 당신들이 아니지 않은가. 정작 외출을 허락받아야 할 그들은 허락받지 못했다. 혹은, 스스로가 나가지 않았을 수도. 구태여 그것을 묻는다면, 그들에게는 질서가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하지만, 귀뚜라미처럼, 표고버섯처럼, 붉은얼굴원숭이처럼, 새처럼, 흑문조처럼, 자라처럼, 생태를 에워싼 구더기처럼 오늘도, 살아가고 있을 터다. 그러니까, 이들 모두는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골목이다.

 

 

 

김 숨의 아롱진 눈물방울의 까닭은 ‘죽음’이었으나, 그 끝에는 그럼에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떨어지려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서도록 지켜내려는 게다. 그것이 얼룩조차 아름다운 까닭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만만찮다’고 표현했고, 이 책이 어떻느냐 묻는 질문에도 그리 답할 수밖에 없다. 쉽게 읽히는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장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꼈고, 숨 쉬기를 느리게 할 때의 그 갑갑함을 오롯하게 안아야했다. 탁한 공기의 마찰들에 숨이 막혔다. 그런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아니, 책을 읽었다고 해야하나, 책이 읽혔다고 해야하나. 그것조차도 모르겠다,는 것이 나에게서 자조적인 웃음을 띠게 한다. 그럼에도 내가 확신할 수 있는 하나는, 작가가 그려낸 그들은 모두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산다는 것, 아간다는 것,에 집요하리만큼 파고 들어갔다. 그래서, 그것은 내게 회의적으로 다가왔고, 그에 대한 회의는 마침내 ‘우리는, 살아야 한다’,로 굳혀졌다. 따라서 우리는 질서정연하게 살아가려는 그들을 따라 낮은 곳에서 숨을 끌어모으는 숨쉬기를 배워야 한다. 어느샌가 그들은 우리가 되고, 우리는 그들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