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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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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의 이야기’ , ‘소설 속의 소설’이라 불리는 액자소설을 나는, 오래전 중·고등교를 다닐 때에 구운몽이라던가, 무녀도, 배따라기 등을 통해 이미 접한 바 있고, 가장 최근에는 치트라 바네르지 디바카루니의 「마지막 고백」에서 만나본 적 있다. 가장 최근에 만나보았던 그 책은 하나의 이야기에 국한되어 있는 것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은 분명 매혹적으로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아홉 명의 생을 어루어 만지려니 조금은 벅차게 전개되는 이야기였기에 여운을 느끼기 보다는 그저 활자를 따라가기에 바빴었음이 매우 아쉽게 느껴졌었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베일에 쌓인 이야기를 풀어헤쳐 보는 것과 같은 비밀스러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는데, 이번에 내가 접한 작품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 역시, 앞서 말한 액자식 구성으로 한 사람의 회고록을 읽어나가게 된다. 시대는 1967년과 2007년. 40년의 간극에 나는 그 속에서 제대로 유영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1967년 봄에 그와 처음으로 악수를 했다. 당시 나는 컬럼비아 대학 2년생이었고 책만 좋아할 뿐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훌륭한 시인으로 이름을 날려 보겠다는 믿음 (혹은 망상) 하나만은 굳건했다. 애덤 워커, ‘’는 기억이 증발되어 누군지 모를 누군가에 의해 어느 파티에서 어울리지 않는 커플처럼 보이는 루돌프 보른과 마고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어떻게 그 파티장을 빠져나왔는지, 그들에게 작별인사는 했는지조차 모르는 그 이야기가 시발점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bar에서 우연치않게 만난 나에게 보른은 문학잡지 창간에 참여를 제안하고, 나는 잠시 주춤,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수락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발동이 걸리게 된다. 보른의 집에 초대를 받은 나는 마고에게 매혹되었느냐, 어느 정도로 매혹되었느냐, 안아보고 싶을 만큼? 동침하고 싶을 만큼? 이라고 묻는 보른에게 이상한 점을 느끼지만, 이내 술에 많이 취했을거라는 판단 아래 가벼이 무시한다. 하지만 나는 보른의 수법에라도 말린 듯 른이 집을 비운 닷새동안 마고와 쾌락을 즐기고, 마고는 결국 보른에 의해 프랑스로 쫓겨나지만, 보른은 그런 나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귀찮은 존재를 정리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잡지 제작에 앞서 저녁을 먹기 전, 가볍게 산책을 하던 도중 어린 강도를 보른은 칼로 찔러 죽이는(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었고, 그 사건으로 결국 수표를 찢어 보른에게 우편으로 보내는 것으로 문학잡지 창간은 물거품이 된다.  여기까지가 제 1장 ‘’이다.

 

 

 

나는 나의 접근 방법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질식시켰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는 게 불가능해졌다.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 자신과 나의 주제 (바로 나 자신)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했다. p96 보른을 떠나보낸 봄의 자리에 나뭇잎이 푸르딩딩한 여름이 차지했다. 현재 ‘’는 <하품의 성>에서 지루한 작업들을 하고 있고, 웨스트 107번가에선 누이 그윈과 함께 살고 있으며 부모님의 차가운 관계에 대해서, 남동생 앤디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해 전 봄 방학 때 함께 쓴 희곡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그러나 금지된 동거는 근친상간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1장에서 이야기의 축이 보른이었다면, 2장에서는 그윈이 된다. 3장, 가을.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간 ‘’는 노천카페에서 우연하게 보른과 재회하면서 봄에 있었던 살인을 보른과 결혼할 여인인 엘렌 쥐앵과 세실 쥐앵을 이용하여 퍼뜨리려 한다. 하지만…, , 여름, 가을,까지 왔으면 겨울도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겨울은, 애석하게도 ‘, , ’ 가 아닌 타자에 의해 완성된다.

 

 

 

이야기는 위와 같이 봄, 여름, 가을로 갈수록 나, 너, 그 (1인칭,2인칭,3인칭)으로 변화된다. 애초에 그 시점 변화를 알고 있던 난 그것이 복잡하고 산만할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것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출근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따분한 생각이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시점 변화는 출근해야지, 생각했던 그 날이 바로 일요일인 것 만큼의 흥미로움을 주는 것이다. ‘내’가 ‘그’가 될수록 이야기는 조금 더 객관적이고 세밀해지는데, 그것은 내가 움직이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닌, 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2장에 나왔던 근친상간도 그렇게까지 세밀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나,너,그의 현실이든, 허구이든-. 그런데 서평을 쓰다보니, 이건 액자식 구성이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전적으로 액자식 구성의 핵이 되는 짐이 빠진 것이 원인인데, 사실 나는 이 서평에 그의 존재가 부재하길 원했다. 물론 그 인물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니, 짐,은 이 책을 세상에 태동케 만든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이라는 이 작품은 순전히 애덤 워커의 중심인 까닭이리라.

 

 

 

오랜만에 참 재미있는 책을 만났음이 실로 반갑다. 실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책은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을 보아서 나 역시도 지레 겁먹고 책을 펴기조차 두려워했음이 책을 붙잡고 있었던 일주일이라는 긴긴 시간이라는 증거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읽고 있는 이 내용이 맞는 것인가, 자문하고 또 자문해야만 했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그런 재미없는 글읽기를 했던 게다. 그래서 책의 2장인 여름을 막 끝냈을 때, 과감히 덮고 새로이 1장의 봄으로 돌아가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 역시 이 책을 오롯하게 이해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결말에서 숨이 턱, 막혀버린 까닭이다. 아직도 나는 그 결말에 서서 그들이 망치로 돌들을 내리찍는 걸 보고 있다. 언젠가는 무릎을 탁 치며, 아! 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멈추어 서서 이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안다. (역자의 해설은 언제나 이런 아이러니한 부작용을 낳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궁금증은 참을 수 없기에 들여다 보는데, 또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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