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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그 여운의 맛이 깊어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만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내가 이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치부해버려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남는 책이 있다. 그것은 책을 다 읽고 현기증이 일도록 아득해져버리는 까닭이다. 그런 책은 다시 읽어야 한다. 내 마음 속에서 밀어낸 책이 아니고서야 그 책은 다시 한번 읽을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전에 김은국의 「순교자」가 있었고, 김별아의 「미실」이 있었다. 그것들은 내게는 언젠가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 책도 혹시나,하는 마음에 이 책을 덮고 다른 감성 에세이를 접한 뒤에야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첫 장을 펼쳤다. 두번 째로 마지막 장을 넘기며 또 한번 하지만,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는 내가 야속하기만 하다. 처음이 어렵고 두번은 쉽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 있고, 제외되는 것이 있다. 나에게 있어 이 책은 후자였다. 옮긴이의 말을 제외하면 꼴랑 265페이지라는 결코 두껍지 않은, 소설로서의 알맞은 두께를 자랑하는 이 책은 무척 질척거리는 존재,였다. 마치 마그다가 아비에게 질척거리는 존재였던 것처럼 -
처음부터 끝까지, (1 - 266이라는 번호가 주는 의문점은 끝내 풀리지 않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향하는 곳은 마그다, 그녀 뿐이었다. 그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각이 매듭지어진 견해를 발설할 수 없었고, 그 근처에 근접할 수조차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심지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마저도. 만약 그녀와 헨드릭 - 혹은 클라인 안나 - 혹은 아버지, 혹은 독자인 ‘나’ -. 개중 누구든간에 그녀와 조우하였더라면 아니, 그녀의 ‘나라’에 다른 이의 ‘나라’가 개입된다면 그것은 분명 ‘충돌’이라 규명지어질 것이었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녀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밖에는 이 책에 대해 가타부타할 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재하는 이야기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것은 그녀의 아비였던 요하네스 나리가 도끼에 찍혀 살해당했는지, 총으로 살해당했는지와 연관되는 문제다. 하지만, 난 할 이야기가 남았다. 아직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녀에 관한 이야기. 가엾은 그녀의 -.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일러주려고 하는 것을 느낀다. 아마 정말 자신의 독백, 그것뿐이었다면 내가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리라는 우매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책을 되풀이하여 두번을 읽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상한 기분이 감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린다. 그것의 까닭은 알아낼 수 없었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고독’ 혹은 ‘외로움’이라 이름 붙여져 있는 그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나는 혼자 살지도 않고 무리 속에 살지도 않고, 아이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산다. 이상하고 베일에 가려진 듯한 말이 아니라 신호, 얼굴과 손의 일치, 어깨와 발의 자세, 음색과 어조의 미묘한 차이, 문법이 기록된 바 없는 틈과 부재와 같은 신호를 통해 나에게 의사가 전달된다. p18 이라는 문장에서 ‘외로움’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 그녀의 살갗에 들러붙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은근스레 일러준다.
그러다가 나는 어둠 속에서 뒤척인다. 미칠 것 같다. 너무 비참하고 너무 외로우면 사람은 동물이 된다. 나는 모든 인간적인 관점을 잃어가고 있다. p103 이곳에서 그녀의 외로움이 가중되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하지만, 누구와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한 그녀는 그것을 클라인 안나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헨드릭에게 돈을 주겠다는 명목 하에 자전거로 이틀이나 가야하는 우체국에 보내고,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 나의 혓바닥은 불길이야, 너도 알 거야. 하지만 그것이 모두 쓸데없이 안으로 향하고 있어. 너한테 내 말이 화난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건 내 안에 있는 불길이 타닥거리는 소리일 뿐이야. 너한테 정말로 화가 난 적은 없었어.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거든. 늘 말이 나한테 왔고 나는 그것을 전했을 뿐이지. 안나, 나는 진심으로 서로 주고받는 말을 알았던 적이 없어. 내가 너한테 한 말들을 너는 되돌려줄 수 없잖아. 그건 가치 없는 말이야. 알아듣겠어? 가치가 없다고. (…)” 클라인 안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듯 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토록 가엾지만은 않았으리라.
책을 한 번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 - 그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고 해야했다.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게 다른 점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내면의 아픔이 가중되었을 뿐.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생각한다. 한 사람이 쓸쓸함을 느끼는 정도가 환산된다면, 그녀의 쓸쓸함은 어디까지 치솟을 것인가. 나는 감히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려고 했다. 나도 똑같다고. 나도 제대로 된 대화법을 몰라 사람들과 투닥투닥하며 지내고, 몰랐던 사람들보다도 못하게 지내는 이들이 많다고. 제대로 된 대화법을 알기 위해 책까지 나오는 시대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아주려했다. 하지만, ‘대화한 적이 없다’와 ‘대화법을 모른다’의 간극에는 무수한 점들이 빼곡히 박혀있었다. 그런데 가혹하게도 그녀는 그 간극의 틈을 알아챌 수도 없게, 둘 모두 해당사항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거다. 후우 - 나는 여전히 그녀의 삶이 처연하다. 하지만 공감할 수가 없다. J.M.쿳시 - 그가 뱉어내는 단어의 조합으로 인한 문장의 완성은 아름답고, 청아하며, 유려하다고까지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 문장들이 내게 와서 와닿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에 별 한개 - 한개반 이상은 줄 수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 위해 생각해야만 했던 것들이 많았고, 그 생각하는 시간에 비로소 책을 읽으면서는 홀라당 넘어갔던 것들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는 점, 그것이 이 책에 별 세개라는 나조차도 까무라칠 만한 평을 주게 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