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의 소개를 채 접하기도 전에,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주저없이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에는 책의 제목이 대부분을 차지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나는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귀중하게 생각하고 혹여나 그것이 바스라질까, 두 손으로 보듬는 것이-, 그것이 책에 대한 애정이라고, 그렇게 미미하게나마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구지 어떤 책인지 소개를 보지 않고도, 제목만 보고서도, 끌림이 강했던 까닭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자칫 어린아이같은 발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그러한다는데 - 누가 시시비비를 논하겠는가. 아, 그런데 - 이 책, 생각보다 만만치않다. 언어라는 과목을 특출나게 잘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해력이 딸린 것은 아니라고 자신만만하며 살아왔는데,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나는 나의 이해력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나는 책 시작을 제대로 앞세우지 못하는 작가의 역량덕에 -그것이 의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 호소한 것엔 실패다- 무려 50페이지나 날려버린 셈이다. 그것을 나는 이해하겠다며 읽고 또 읽고, 적어도 세 번은 읽은 것도 같은데, 그것도 잠시뿐, 읽다 보면 알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읽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척이나 황량한 기분마저 든다.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책을 다 읽고 그 부분에 대해서 읽고 또 읽어 이해를 할 때까지 -자칫 무식하다 생각할 정도로- 읽어왔었는데, 이것은 왠지 구태여 그렇게 할 까닭이 없다는 판단 아래 그냥 지나쳤다. 지금도 여전히 이 책의 50페이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그 50페이지에 대해 장황하다,라는 단어밖에는 딱히 느꼈다고 말할 것이 없는 것이 책의 내용으로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돌리고 있는 부분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아야했고, 손가락 사이에 낀 책장들이 자신들을 넘겨주지 않는다며 펄럭거리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 책장을 낀 손가락을 빼버렸다. 아마 어떠한 압력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이미 내 손을 떠났을 것이라는 것. 어쩌겠는가. 입 안에서 오물거리던 사탕이 내가 싫어하는 체리맛 사탕이었음을 깨닫고 퉤,하며 뱉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 반디라는 별명으로 ‘책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도형, 그는 어느 연유에서인지 그것을 그만두고 헌책방을 운영한다. -헌책방의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도리어 정겹고, 아련하다.- 그러던 그에게 언뜻 제과점 이름이라고 착각할 만한 미도당이라는 곳의 윤선생이 찾아와 ‘베니의 모험’이라는 책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고, 그는 어떠한 연유 덕에 그 모험을 감행하게 된다. - 내가 다른 이들을 위해 일러줄 수 있는 줄거리는 여기까지다. 이것이 혹자에겐 배려라고 할 만한 행동일 수도 있으나,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이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판타지하다는 소설이, 상상력이 기발하다는 소설이, 내게는 그리 와닿지 않은 것이 그 까닭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줄거리를 써놓는 까닭은 훗날 내가 이 책에 대해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할까봐.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보고 이 책이 어떤 내용이었더라 -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본래, 소설이란 것은 작가와 독자의 교감 형성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 책의 내용을 깊숙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좋은 결과를 낳진 못했을 게다. 까닭은 반디가 9권의 책을 찾아가면서 독자인 나는 도대체 무얼 했는가, 이 말이다. 나는 그저 반디의 행동반경을 보며 그가 그 다음번에 할 행동을 모색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적어도 추리소설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작가 혼자 풀어내는 것이 아닌, 적어도 독자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남겨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슬몃 생각해본다. 어떤 아무런 단서없이 어쩔 수 없이 반디의 뒤만 졸졸 따라가는 ‘나같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재미없고, 지루하며, 건조하다. 내가 왜 그의 뒤만을 졸졸 쫓아야만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아니 - 반디는 따라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내가 따라가는 것, 딱 그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소설이라는 분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인 ‘재미’라는 부분마저 결여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책을 찾는 것뿐이라는걸. 이 책이 결코 추리에만 집중시키지 않았다는 -혹은, 못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으나, 이 책을 읽고 뇌엽에 박히는 것이 얼마 없다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다. 게다가 그가 다른 책에서 -혹은, 실재하지 않는 책- 발췌해놓은 몇 가지의 문장만 보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나를 보니, 나는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는 것인가 - 하는 의구심마저 들더라, 이것이다. 좋게 말해서 책 사냥꾼이 책을 찾아 헤매는 것에 그래, 기발한 발상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미안하게도 그게 나같은 독자에게는 통하지 않음이 이토록 애통할 수가 없다. 어떤 책에 대해서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독자요, 실망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오롯한 독자 몫이니, 더이상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으나 그런 기대마저 없었다면 - 그래, 차라리 그랬다면, 이 책을 읽는데에 있어서 이런 배신감같은 이상한 감정 또한 일지 않았을 게다.

  

 

 

책은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리고 사람이 지나간 곳에 있다. 그래서 가끔 난, 한 권의 책을 찾는 것은 곧 그 책이 지나온 궤적을 더듬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한 사람의 삶의 길을 되짚어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물론 또한 책은 우연과 망각, 부주의로 인해 원래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세상으로 흩어지며 퍼져가기도 한다. p126 그러나 공교롭게도 난 이 문장을 보고 그래도, 내가 이 책에 애정을 표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점에 대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적어도 ‘책’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는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 그 뿐이다. 그리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것은 ‘책’이었다는 점이 나를 안도케한다. 어쩌면 그것조차 부재했더라면 나는 이 책에 대한 손톱의 때 만큼의 애정조차도 표하지 않았을 뿐더러, 책장에 비어있는 곳이 있음에도 그곳에도 두기 싫어 책장이 아닌 바닥에 깔아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에게도 삶이 있다. 작가가 아버지라면 장정가는 어머니다. 인쇄소는 자궁이다. 누군가 표지를 여는 순간 책은 책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어떤 책은 끝까지 다 읽히지 못하고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채 서가에 잠들어 있다. 어떤 책은 책장마다 무수한 삶의 흔적을 지닌다. 어떤 책은 복되게도 여러 주인을 섬긴다. 물과 불과 칼과 햇빛과 습기와 벌레와 짐승이 책을 병들게 하거나 해친다. 책의 가장 큰 적은 사람이다. 무지한 한 사람은 한 책의 책에 상처를 내고 무지한 100명의 사람은 다락방에 책을 넣고 잊어버리고 무지한 1만 명의 사람은 도서관을 불태운다. 책은 죽을 때 소리를 낸다. p212 잠시 외출을 할 때, 구지 그것을 읽지 않더라 하더라도 옆에서 나와 동행해야 마음이 편한 것. 그러다가 책을 떨어뜨릴 때도 있었고, 나와 맞지 않는 책이라고 하여 집어던질 때도 간혹 있었다. 그것은 책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분노를 그곳에 표출한 것이다. 그럴 때 책은 어떤 소리를 냈을까. 내가 상상하는 으악 - 같은 소리를 냈을까. 지금 나의 책장에서 읽히지 못해 뒤집힌 책들은 어떤 소리를 내고 있을지 - 먼지로 인해 숨이 턱턱 막혀 제대로 된 소리도 못내고 시름시름 앓고 있지는 않을지, - 또한, 나에게 책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한번 더 잘근잘근 씹게 한다. 전에는 책이 삶의 지침이었다면, 지금은 동기부여,라는 것. 그렇게 이 책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책’에 대한 깊은 저자의 사색과, 그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책들에 대한 나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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