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로 먼저 알게 되는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선 "영화보다는 책이 우선!"이라는 나만의 고집에 따라 읽히게 되는 책. <<박사가 사랑한 수식>>도 그렇다.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조금의 긴장감없이 조용히 읽힌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심심하지 않다. 오히려 그 조용함이, 아주 오랫만에 여유를 주는 것 같다. 

<메멘토>라는 영화를 통해 "단기기억상실증"이라는 병명을 알았다. 아무리 오래 기억하고 싶어도 뇌손상으로 인한 체계에 따라 어느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든 기억을 상실하는 병이다. "박사"의 기억은 딱 80분이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 80분과 1975년 이전의 기억 뿐. 그래서 그의 일상은 모든 것이 시련이고 모험이며 도전이다. 

"박사의 집에서 파출부로 일하기 시작하고서 얼마 후, 박사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혼란스러웠을 때, 말 대신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박사의 버릇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타인과 교류하기 위해 그가 고안해 낸 방법이었다. "...14p

자신이 가장 자신있으면서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절한 숫자. 박사는 그 숫자로 자신과는 단절된 바깥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소통하려는 시도였었다. 그의 소통 방식을 받아들여준 사람이 거의 없으니. 그런데 그의 세계에 "나"와 아들 루트가 조금씩 다가간다. 박사가 사랑하는 "수식"으로. 박사가 낸 숙제를 하느라 몇날 며칠을 끙끙대고선 마침내 답을 풀어내고 깨달음의 축복을 느끼기도 하고, 아들과 박사와의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서로를 신뢰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어간다.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해줄 줄 아는 박사와 모자 가정 사이에서 탄생한 관계이다. 

"오일러의 공식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줄기 유성의 빛이었다. 어둠의 동굴에 새겨진 시 한 줄이었다. "...180p
"그는 루트를 소수만큼이나 아꼈다. 소수가 모든 자연수를 있게 하는 근원이듯, 아이는 어른에게 필요불가결한 원자라고 생각했다."...184p

누군가가 불완전하다고 그 사람과의 관계마저 불완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만큼의 신뢰를 가지고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냐가 중요하다. 그것을 박사가 알려준다. 관계맺기에 서툰 그이지만 그 나름의 철학대로 언제나 같은 행동으로 믿음과 사랑을 주었다.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와 루트도 온전한 0의 관계로 규합되는 것이다. 

듣고,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것 같던 수학 용어들이 이처럼 시적으로 들리고 보일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박사가 부여한 "의미"에 있을 것이다. 또한 "나"와 루트가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스하게 스미는 감동을 주는 책이다. 이 감동이 영화에서도 이어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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