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 일정은 일본규슈지방의 임난때 끌려가 정착한 조선인 피랍민들의 자취를 찾는 여정이다.그중에도 도자기를 구은 도공들의 발자취를 찾는다.

 우리 조상이 개척한 도자기가 화려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심지어 천황이나 영주가에 헌상한 도자기들은 금을 입힌 그것까지 있다. 밋밋한 조선백자나 전통한국도자기에 비할 바없이 사치스럽다.어떻게 고령토도 나지않는 일본이 세계최강의 도자기생산국이 되었을까?

심지어 아직까지 많은 외화벌이수단이라고 하는데 우리로서는 억울하기 짝이없다.

그들의 도자기가 너무 화려해 우리나라백자가 싱겁기까지하다. 명청대의 도자기보다 더 현혹적이고 값도 비싼 것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초래한 건 조선이라는 나라 당사자였다.분명 우리 조상들이 본토일본인보다  재주가 더 뛰어나고 학식도 있었으리라.삼국시대부터 문물을 전수해준만큼 일본은 조선의 문화를 동경했다.도자기 ,서예,의술,천문,주자학등등...

 하지만 도공들은 조선에서 사회최하층 천민이었다. 그들을 끌고온 일본인들은 도공들을 사무라이신분에 편입시키고 대우를 해줘 도자기만 개발하게끔 배려했다.비록 그들이 우리문화재를 약탈하고 도공들을 끌고갔지만 기능공들을 대우할 줄 알았던 것이다.하지만 조선은 그들을 천대하며 대우하지않았다. 도자기외에도 세금과 여러 천역에 동원되어야하는 만큼 끌려온 이들을 데려오려 했을 때 오히려 도공들이 귀국을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조선정부의 치욕스런 실수다.유교가 노동을 천시하여 조선은 상공업발달을 할 수 없었고 근대화에 뒤진 결과 식민지가 되었다. 양반은 생업에 종사하지않는다는 불문율은 사서 어디에도 없는데 무슨 근거로 도공이나 상공인들을 천시했나 모르겠다.

 눈물을 뿌리며 피랍된 그들의 터전은 척박했다. 하지만 잇속에 밝은 일본 영주들은 그들을 이용할 줄 알았다.도래인내지 피랍인들이란 딱지를 떼고 일본사회에 파고들어 성공한 것도 보면 조선인들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끌려간 조선인들이 사회적 천대를 받았다는 흔적은 에도시대들어 거의 찾을 수없다.그만큼 일본인들이 동화시키려 노력했고 기능공을 대우했다는  뜻이다.물론 도공들이나 주자학자들이 귀족들의 취향에 맞춰 생산을 해내기도 하고 그들이 통치에 필요한 학설을 역설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실용지식을 존중했다는 뜻이다.

 청출어람 청어람,..조선인후예들은 일본에서 자신들의 예술을 더 꽃피웠다. 문화란 교류하며 발전한다고하는데 일본인은 섬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외래문화및 선진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에대한 민족적감정이 안좋아도 얄미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문제는 조선자신에 있었다.노동을 경멸하고 사농공상중 사에만 매달려 관리를 최고로 여긴 결과가 어떻던가는 두말않겠다.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시험에 매달려 인생을 허비하고 있으니...고질적인 유교의 뿌리가 문제가 심각하다. 일본이나 구미서구에서 젊은이가 그렇게 세월을 낭비하며 보내면 당장 손가락질 대상이다.일본도 사무라이들이라도 평화시에는 농사짓는 걸 당연시 여겼다.그들이 도자기외에도 화과자나 기타 손재주에 명인들이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책을 읽으며 일본에 뿌리깊이 남은 조선인들의 자취를 음미하다 우리나라는 그런 건설적인 풍토가 언제 받아들여질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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