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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보다 작은, 이슬 맺힌 비가 소소솔 떨어졌다. 날이 좋으면 부러 멀리 나갈까 했더니 그냥 가만히 서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습도 높은 날의 낭만적인 빗소리와 차창 밖의 마음 녹이는 편안함은 내가 느끼기 어려운 기분인지라, 눅진한 날씨가 누르는 무거움 때문에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씹었을 때 눅눅해서 치아로도 잘리지 않는 오징어칩. 그 질긴 듯 녹은 과자의 질감이 장마철 내 모습이다.

 

습기 먹은 내 몸은 453번 버스를 타고 현대해상에서 내렸다. 터덜터덜 걸어서 울산 문화예술회관 1전시실로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이, 습도를 차고 건조하게 바꿨다.

눈 앞에 펼쳐진 서예 작품들은 광장을 둘러싼 벽에 촘촘히 걸린 것처럼 광활하게 펼쳐졌다. 먼저 눈길을 끈 작품은 한시였다.

한시의 글자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형이상학적 그림을 자랑했다. 본디 나는 시와 그림의 어려움은 똑같다 여겼는데 정자체가 아닌 것을 읽을 수 없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은 더 커졌다.

 

모두 하나같이 누구 선생의 시, 누구 선생의 시들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뒤로 갈수록 큰 상을 받은 작품들이 이어졌다. 눈길을 끈 건 한글로 써진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다.

앞의 작품들은, 보면서 어떤 서체(書體)로 썼는지, 이 시의 내용이 담긴 감정과 시대적 배경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걸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글이 별 헤는 밤으로 윤동주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영화와 그를 사실적으로 다룬 평전을 생각했다.

별 헤는 밤 외에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생각한 건, 작품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눈빛으로 붓을 잡았을까 하는, 작업 중의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고, 내가 작품을 이해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이기도 했다.

 

함축적 감정의 절정체인 시와 그림은 함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어렵다. 그것은 작품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들의 집중력에서 나온 반짝임으로 저 작품들을 완성했을 것이다.

왜 그 시를 선택했고, 시를 작품으로 그리는 동안 저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건 매한가지라는 내 신념(?)과 달리 보면 볼수록, 감정이 아니더라도, 작품을 보면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계속 추가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시를 적은 이도 있었고, 별주부전을 쓴 이도 있었다. 자로 잰 듯한 한글의 아름다움을 가장 한국적으로 표현한 시들. 시를 이해하고 그림을 보며 눈을 감는 이들이야말로 섬세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나는 전시장 안을 그저 빠르게 걸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다 속으로 웃어버린 지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빼곡히 적은 작품 앞에서였다. 한국의 고3을 겪어본 이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웃음이다 (강요가 아니다). 그러니 모두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제야 시를 읽긴 합니다 라고 말하는 요즘의 나는 아직도 필사하지 않은 시가 어렵기만 하다. 그것이 하나의 작품이 됐을 때나, 아니면 한 폭의 작품으로 등장할 땐, 더 어려워진다.

 

이쯤 됐다 싶어 한 바퀴를 쓱 둘러본 후 전시장을 나왔다. 장마철의 높은 습도는 여전히 축축했다. 내 몸까지 축축해질 필요는 없는데…. 그와중에 시와 그림은 여전히 어렵다는 것을 느끼며 건물을 나갔다.

회관 앞에는 연잎이 떠있는 큰 화분이 여러 개로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그림일 수도 있겠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사의 작품일 것이고, 물감이나 먹을 들면 한 폭의 그림이 될 것이고, 때로는 그것을 보며 활자를 그려내면 시가, 수필이, 혹은 소설로 바뀔 것이다.

 

작품과 제목을 동시에 읽어내지 못하는 나의 어설픈 한계는 무슨 무슨 작품이 있었는지 사실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단순하게 정자(正字)로 써서 읽을 수 있는 서체, 흘려 써서 읽을 수 없는 서체, 그림, 이 세 가지로만 구분했던 이 날 전시는, 내가 감정을 이해함에 꽤 서툴다는 것과 작품을 그려낸 이들의 눈빛을 생경하게 떠올리며 낯선 감각을 느낀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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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이른 아침 10시. 세수하고 양치질만 하면 나갈 준비 끝. 울산을 벗어나지 않아도 먼 곳, 북구로 갔다. 오히려 동구와 가까운 염포동은 현대 공장이 즐비했다. 집 앞에서 106번 버스를 타고 중구를 지나쳐 동구를 건너면 정류장인 염포동에 도착한다.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 그걸 말하기 전에 남구에서 시작한 여정은 중구와 동구를 지나가는데 구(區)마다 다른 특색이 있음을 말하고 싶다.


시청과 공업탑으로 이어진 106번 버스 노선이 내가 본 남구의 마지막 길목이다. 공업탑은 고등학교와 교통이 몰려있는 데다 이 부근은 내가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해서 어떻다 할 느낌이 없다. 울산의 모든 버스가 모였다 흩어지고, 고등학교가 몰려 있어 특정 시간이면 교복 입은 아이들로 꽉 찬다. 시청 옆엔 친구 집이 있었기에 학교만 안 가면 그곳엘 갔었고. 뭐 그런 곳이다.

시청을 지나 태화 로터리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중구로 진입한다. 106번 버스 노선의 중구는 읍내보다 훨씬 발전한 大(?)읍내 느낌이다. 동시에 역사의 산물을 간직하고 있다. (남구에 비하면 그렇다는 이야기) 그곳엔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머무른 동헌 내아가 자리한다. 혹시 밀양 부사를 역임했던 드라마 속 이준기를 기억하는가? 그 부사(府使)가 이 도호부사이다.

잠 오는 눈을 겨우 부여 뜬 채 동구로 진입하면 낯선 공간이 시작된다. 동구는 같은 울산이라도 이질적이다. 역시 동구하면 현대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그도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하루는 택시 타야 할 일이 있었다. 기사 아저씨께서 동구 지역의 택시 기사들은 다른 구(區) 지리를 잘 모르고, 다른 구(區) 택시 기사들 역시 동구 지리는 잘 모른다 하셨다. 거 참 묘하다.

동구에서 내 여정은 염포동에 내려서 끝난다. 내가 도착한 곳은 염포예술창작소인데(주소는 북구다?), 작은 공간의 상설 전시라도 있을까 싶어서 간 것 이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창작소. 예술인 창작을 위한 공간. 결국, 건물 사진 하나만 찍고 돌아섰다.

그런 직후부터 고민이 생겼다. 이 망망대해 같은 낯선 곳에서 그대로 길을 잃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익숙한 곳으로 돌아갈 것인가. 라고 생각하던 참에 버스 정류장이 보였고, 이어서 411번 버스가 도착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몸을 실었다.

어쩔까? 익숙함을 품은 그곳, 울산박물관으로 갈까. 아니면 예정 없던 길 잃음을 선택할까. 411번 버스는 제 노선을 벗어나지 않고 쉼 없이 달렸다. 성남동으로 가는 버스 노선. 문득 성남동 앞에 있는 태화루를 떠올렸다. 언젠간 가야지, 가야지,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던 곳이었다.

오전 11시 30분쯤인가, 도착했을 때 먼저 보였던 것은 쉼터였다. 옹성(甕城)처럼 태화루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이 현대적 분위기의 쉼터는 태화루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뭔가 하면서 쉼터를 지나면 태화루가 보였고, 장엄한 태화루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 팻말이 입구에 있었다. 게다가 현수막을 재활용한 신발 주머니가 그 옆에 달려있다.

고려 시대에도 이미 유명했던 태화루는 고려 대표 건축 양식인 주심포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게다가 조선 시대 시조에도 풍경을 극찬하는 내용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살피며 들어가면 광활한 누각 내부와 태화강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할머니들이 유독 이곳에 앉아서 쉬고 계셨다. 나는 그중 아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태화강 풍경을 바라봤다. 공업 도시로 악취가 풍긴다는 태화강은 옛말이었으며 하얗게 빛나는 햇살이 강가에 내려앉았다.

시원한 강바람이 습기를 머금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곳이다. 내가 오늘 찾은 여행 장소가.

노트북을 켜고 타닥타닥 글을 써 내려갔다.

오늘의 여정은 여기가 끝이구나. 아무렴 어떤가, 잃어버림과 새로운 만남이 같다는 것은 이를 두로 할 말일 테지.

누각 사이로 통과하는 시원한 바람이 마음을 아릿하게 녹였다.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여행에서 8할을 차지한 건 여정이었다. 여정이 즐거웠다고 할 수 있었던 건 종착지에서의 내가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행복의 여지가 온종일 남아 나는, 다음의 반나절 여행지를 기대하며 은근하게 고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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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에서 태양도 보지 못하고 죽은 생명체를 인어로 묘사했던, 귀신이 된 그들이 끝까지 스스로 인어라고 착각하며 바닷속으로 퇴장한 이들의 이야기 소설 제목에는 반월당이 들어갔다.

대구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그와 음운이 같은 반월당에 도착했다(소설 속 배경은 대구가 아니다!). 재회가 목적인 방문이었지만 나 스스로 선택한 결정에 의미 없는 발걸음이 즐거울 수 있는 걸 깨달은 추억이기도 하다.

재회라니, 추억이라니. 마침 저 멀리서 나를 반기는 선생님이 보였다. 가까이 보일수록 선생님의 희끗한 머리칼을 먼저 보고 말아, 아버지가 생각나버렸다.

선생님께선 유명한 돈가스 가게와 스테이크 가게가 있다며 뭘 먹고 싶냐 물으시기에 나는 바로 앞의 ‘함박 별장’을 가리켰다.

단정하고 이국적인 인테리어의 이 가게는 유명했다. 앉을 곳이 없어서 그냥 나가거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손님들이 나가버리면 우리가 마지막 테이블에 앉았다는 사실이 괜히 뿌듯했다. 밥을 먹으면서 서로의 근황을 말했다. 전문 기관에서 공부한다는 언니, 공부하던 곳에서 일한다는 다른 언니 이야기, 결혼한 오빠라던가.

느리게 먹는 내가 식사를 끝내자 선생님께서 ‘만약 여기서 후식을 준다면 사무실에 있는 차가 더 좋을지도 모르니 거기로 어서 가자’ 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다도를 익히 알고 있었고, 안부 속 언니 오빠들과 방학 때 갔었던 그곳으로 향했다.

여전히 고서(古書)와 기와, 도자기가 보였다. (고고학 박물관보다) 골동품 가게를 연상하는 분위기였다.

중국을 오며 가며 사오신 잎차와 다기(茶器) 제품들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차를 마시며 대화가 시작되자 수다로 이어졌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도 안 쓰셔서, 그래서 꾸준히 생각 없이 떠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데 그때는 진심으로 즐거웠다.

차를 다 마시고 짧은 전화를 하신 선생님께서 갈 곳이 있다며 따라오라 하셨다. 근처였지만 따라간 곳은 목공예 공방. 가장 먼저 보였던 귀면도를 조각한 나무판, 일명 ‘사연 있는 귀면도’와 벽 수납공간에 넣은 나무판들이 빽빽하게 놓여졌다.

이 일을 하신 지 20년이 됐다는 사장님께선 손재주가 실로 세밀하셔서, 공방 안 작품의 외양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거쳐 갈고 닦은 것 같았다. 특히 더없이 반듯한 서예 작품을 보며 넋을 놓았다.

선생님과 사장님은 아주 가까운 동네 친구처럼 건강, 한의원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대화하셨다. 무슨 대화가 그리도 즐거우신지, 내가 나이 들면 친구들과 저 이야기를 하겠다 싶었다.

수다를 넋 놓고 듣는데 선생님께서 나가자 하신다. 따라 나온 내게 추후 일정이 있느냐 물으셔서 대구 관광을 말했다. 그곳까지 데려다 주신다기에 말한 곳은 대구제일교회. 알고보니 선생님 댁 바로 뒤 근대 골목을 이어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근대 골목으로 들어가면 먼저 보이는 서상돈 고택은 천장이 낮았고 방은 좁았다. 고택 바로 맞은 편 이상화 고택도 낮은 천장과 좁은 방이 모인 기와집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도심 가운데 이런 역사 거리가 있는 것은 생경하고 부러웠다.

마지막 들어간 제일 교회는 실내 1층이 전시실이었다. 풍금과 오르골이 나란히 전시돼 있었고,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먹으로 복사(?)하는 체험장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선생님은 이곳 전시실을 유심히 보셨다. 나는 그저 따라다니듯 구경했다. 등사기였나, 옛날에 독립선언문이나 태극기를 먹물로 쓱쓱 해서 만드는 기구라고 해야 하나. 그것이 기억에 남았다.

나는 내부보다 건축 외부를 더 보고 싶었다. 근대의 건물. 요즘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커졌다. 잊지 않기 위해서, 글에 더 자연스레 녹여내기 위해서 기억하고 싶었다.

선생님과 헤어지고 서상돈 고택부터 다시 밟았다. 제일 교회의 외벽을 보기 위해 맞은 편까지 갔지만, 옆부분을 볼 수

없는 그 좁은 공간을 보자 돌아서고 말았다. 진짜 여행을 하고 싶었다. 혼자서 타지를 돌아보는 여행은 내겐 없었다.

그래서 그냥 구경한 것도 있었고, 그냥 먹은 것도 있었다. 그냥이기에, 그날의 그냥은 의미가 없었으므로 근본 없는 발걸음이다. 앞으로 그런 근본 없는 자유를 표방한 여행을 하고 싶다. 그래서인가,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집과 먼 곳을 떠날 계획을, 금요일마다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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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반월당역에 내리자 날카로운 더위가 아닌 눅눅해진 텁텁한 공기를 느꼈다.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과 함박스테이크를 먹고 사무실로 갔다. 다도와 옛것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의 취향이 그대로 베여 골동품 가게를 연상하게 했다.

청화백자, 기와 심지어 가야 문화권 토기까지 방대한 옛것들이 있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고서(古書)로, 사다 보니 혹은 모으다 보니 이렇게 됐네, 하셨다. 청화백자는 주로 다기(茶器)에서 많이 보였는데 아담한 찻잔으로 선생님께서 추천하는 차를 마셨다. 그사이 담소를 나누며 고려도경, 옛 춘향전(이름이 자세히 기억 안 난다) 등 각종 책이 가지런하게 쌓인 걸 구경했다.


담소를 나누던 중 통화 하시던 선생님께서 갈 곳이 있다 하셨다. 적당히 다 마시고 따라간 곳이 목공예 공방이었다. 20년 이상 일하신 사장님의 공간이다. 가게가 20년일지언정 목공품에 스민 사장님의 실력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듯 보였다. 처음 와본 이곳은 장인의 손길이 느껴져 각종 목판과 서예 붓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직접 쓰신 서예 글씨는 컴퓨터로 뽑은 듯한 정갈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과 사장님은 서로의 서예가 낫네 어쩌네 실력을 떠밀며 각자 수줍어하셨다.

선생님께선 이런 곳이 잘 없다며 구경시켜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나 역시 새삼스럽고 신기하여 눈 둘 곳 없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구경했다.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모습에 사장님은 크게 웃으셨다.

그곳을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단지 제일교회를 가고 싶다는 제자의 말에 그 앞까지 데려다주신 것이 대구 여행의 시작이었다. 본격적인 여행은 근대를 머문 서상돈 고택부터 제일교회까지 이어지는 거리였다. 서상돈 고택, 이상화 고택, 그곳을 지나쳐 도착한 제일교회.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을 줄이야!


산책길처럼 골목을 들어가 먼저 서상돈 고택으로 향했다. 서상돈은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 운동은 일제의 계략으로 늘어나는 대한제국의 국채를 없애기 위해 국권을 지키려 했던 우리네의 피와 땀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민족 저항 시를 쓴 이상화 시인이 말년에 살았던 고택이 바로 옆에 있어 파도에 쓸리듯 들어갔다.

서상돈 고택도 그러했지만 이상화 고택도 마찬가지로 원래 우리네 전통 집은 천장이 굉장히 낮았다. 사극에서 보던 그런 높은 천장이 아니었다.


게다가 방 안은 좁았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서 뒤주라던가, 3단 책장(?) 같은 것도 고스란히 있었다. 아쉬웠다면 미술고고학 책에서 봤던 것들이 눈앞에 있었음에도 용어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상화 고택의 방 안에는 입식 책상이 눈에 띄었다. 두 고택 모두, 모든 것이 작았으므로 난쟁이들이 살았나 싶었다. 1900년대 관군(官軍)의 평균 키가 150cm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건가, 온갖 생각이 들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을 꼽으라면 제일교회였다. 근대식 건물 건축 분위기를 보고 싶었다. 적색 벽돌로 차곡차곡 지어진 건물 안에 들어가자 상설 전시관이 보였다.


교회의 역사를 다루긴 했지만, 당시 기독교와 관련된 그네들의 움직임과 일제 정책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사진을 통해 문명을 타파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운동, 외국 선교사가 나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지어진 공간들, 교육을 위한 소학교까지, 근현대사 교과서를 펼친 듯했다.

그 외에 옛 선풍기, 등사기, 캔들전화기와 오르간과 풍금이 나란히 전시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함께 보고 교회를 나온 선생님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오늘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선생님과 헤어지고 혼자 남은 나는 문득 낯선 곳에서 길 잃은 기분이 들어 생각 없이 멍청해졌다. 그 근본 없는 자유를 믿고 약령시 한의학 박물관과 매콤 돈가스 가게인 포크포크의 문을 열었다. 한의학 박물관에서 광물도 약재로 쓰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포크포크에서는 내 생에 첫 매운 돈가스 도전기로, 즐겁게 먹을 수 있었다.

이 상황을 충동적이라거나 오후 4시의 이른 저녁밥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그냥 꽤 괜찮은 하루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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