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남구에서 동구까지 버스를 타는 시간은 매우 오래 걸린다. 106번을 타고 동구로 곧장 출발했다. 고흐 레플리카 전을 하는 현대예술관은 현대중공업, 울산대학교병원 정류장 앞에 선다. 예술관 맞은편에 공장이 버젓이 서 있는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염포 예술창작소를 갔을 때도 갔던 길들을 이리저리 지나쳐 도착했다. 현대백화점이 보이고 맞은 편에 있는 예술관으로 들어갔다.


전시장 안으로 첫발을 들어선 순간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무지(無知)가 떠올라 아쉬워졌다. 진짜처럼 다가오는 미술의 세계에 충격을 받은 탓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의 시선이 실제처럼 느껴져 숨이 턱 막혔다. 그럴수록, 오르세 미술관을 가기 전에 그림에 관심을 좀 가져놓고 갈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고흐 전은 그의 그림체 변화를 알기 쉽도록 4파트로 구성했다. 초기 네덜란드 농민 화가 시절, 파리에서의 수련 기간, 아를에서 그림 그린 기간, 생 레미 병원 요양 시절로 나누어져 있다.

그래서 그림의 변화가 눈에 더 확 들어왔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문체의 변화가 있듯이 그림을 그리는 그 사람의 그림체 변화가 생경하게 닿았다.

그림은 그냥 보면 되는구나. 이렇게 처음 느낀 오늘은 내가 그만큼 섬세한 감정을 가지게 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흐 전은 그 생애의 변천이었다. 그림을 그린 시기 중 아를에서 그렸던 그림들이 가장 아름다웠다. 반면, 정신병원에서 그림이 너무 화나 보여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숨 막히던지.

모든 굴곡진 세상이 고흐의 눈인 것처럼 심장을 쿡쿡 찔렀다. 그리고 숨이 막혔다. 그래, 모든 세상이 직선으로 이어진 건 아니지. 하지만 정신병원 이후의 그림은 굴곡진 선과 흐릿한 세계로 가득했다.


고흐의 자화상은 언제나 봐도 무서웠으며, 정말 그림에 불타올랐구나. 이 전시를 보기 전에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보면 편지에 녹아든 그의 감정과 생각이 오롯이 생각나서 그림에 더욱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전시된 그림 중, 아를에서 그린 밤의 카페와 밤의 테라스가 마음에 든다. 고흐는 아를을 정말 사랑했구나 하는 그림들이었다. 그래서 아를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곳에서 아를 주민처럼 일상을 보고 오고 싶다. 그런 여행을 생각했다.


고흐 그림을 영상으로 담은 스크린 앞에서 글을 쓴다. 내 옆에는 아이와 엄마가 앉아서 가만가만 영상을 보고 있다. 엄마 주위를 벗어나지 않는 아이는 혼자서 조용히 노는 모습이 귀여워 이를 몰래 적는다.

아이가 귀엽고 엄마의 시선이 따뜻하다. 전시장에서 그런 소중한 한 모습에 감사한다.

쉴 겸, 생각을 정리할 겸. 고흐 그림 영상 앞에서 생각을 노트북에 정리하고 몸에 힘이 조금씩 돌아올 때쯤, 나는 일어섰다.


돌아보고 감상하는 1시간은 내겐 새로운 황홀감을 경험케 했다. 그 경험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고흐 그림에 스티커로 색을 채웠다. 최대한 원본과 같은 색을 넣어주고 싶어서 책상에다 붙였다.

고흐 그림을 VR로 돌아보는 체험도 있었지만 역시 젤 좋았던 건 유화 그림을 만져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고흐의 그림 3개를 놓고 만져보도록 전시된 그림을 만지자 올록볼록한 촉감이 닿아 기분이 좋았다. 이것이 유화구나, 색을 덧칠하면 실수 할까봐 전전긍긍했던 고흐의 감정이 이렇게나 닿았다.


그저 신기해서, 색깔마다 얼마나 더 두껍게 그리고 얇게 칠했을까 생각하면서 만졌다. 유화 위에는 딱딱하게 굳은 알로에 젤 같은 투명한 뭔가가 있었다. 마치 유화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 같았다.

뭐든지 촉감으로 확인하고 싶은 내게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모두 둘러봤다는 아쉬움이 커서 한 바퀴를 더 돌았을 땐, 또 다르게 그림이 보였다. 익숙함과 익숙하지 않음은 차이가 이렇게 크다.


그렇게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고흐 그림이 그려진 기념품을 구경했다. 오르세 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 기념품에 환장했던 친구의 감정을 조금이 이해해버렸다. 나도 자취를 하게 된다면 이런 것들로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사게 된다면 보관조차 제대로 하지 않을 장면이 뻔히 보여 만지기만 하다가 제자리에 두었다.


동그란 테이블 위의 기념품들은 고스란히 누운 그들을 빤히 보다가 배가 고파서 나와버렸다. 뭐든지 처음 겪을 때와 익숙해지고 겪을 때는 같은 사과를 보더라도 새로운 세상인 날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으로 혼자서 기차 여행을 한 날이다! 그래서 더 깊은 감정으로 남아 있다. 울산과 맞닿은 경주는 승용차로도 1시간은 가기에, 느긋하게 머리까지 감고 집을 나왔다. 705번 버스를 타고 역에 도착한 오전 11시 24분은 사실 기차 여행을 하기엔 늦은 시간이긴 하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기차는 12시 45분. 기다리는 시간이야 평소 나는 느긋한 편이라 점심도 천천히 먹으면 되고, 혼자 놀만 한 물건들도 두둑해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도 시간 단축은 필요하다. 그래서 역 안엔 던킨도너츠, 토스트 가게, 편의점이 있었지만, 이미 점찍어둔 4번 토스트를 먹었다.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경주에 도착하면 박물관까지 무사안전을 걱정한 생각들이 나의 심심함을 틈틈이 채워주었다.


또, 요즘 내가 푹 빠진 크레마 카르타는 어디서든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토스트를 다 먹은 후엔 휴게실에서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건 너무 유용한 것이라 어디서든 심심하지 않기에,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다)

기차에서도 그걸 읽을 요량으로 가져온 건 분명했다. 그러나 막상 기차를 타니 피곤이 몰려왔다. 창밖 풍경도 구경하고, 사진도 소소하게 찍을 생각인데 역시 바퀴 달린 걸 타면 자야 하는 내 성미에 눈이 감겼다.


확실하게 선잠을 잤다. 잘 때 빛에 약한 난 편하게 잠들지 못했다. 덕분에 경주역이란 방송을 확실히 들을 수 있었고,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경주역으로 들어갔다.

역을 나서자 광장처럼 탁 트인 공간 앞으로 삼거리가 보였다. 곧바로 내려가면 시장으로 이어진다. 시장에서 뭔가를 사 먹을까 했지만 늦게 도착했다는 생각과 함께, 일전에 박물관 가려고 탄 택시 기사가 덤터기를 씌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못 긴장했다.

시장 구경은 잠시, 600번 버스를 타야 한다는 강박감에 경주역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자주 오는 버스인지 몇 분 기다리지 않고도 버스는 도착했다. 이 버스를 타면서 그때 탔던 택시가 덤터기 씌운 사실을 아주 확신한 것이, 버스는 출발한 지6분 만에 경주박물관 정류장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멍해졌다. 이렇게 가까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초록빛 풍경은 도시의 잿빛 건물과 달랐다. 박물관 앞이 이런 풍경이 될 수 있는 건지. 대곡박물관을 둘러싼 풍경과는 또 다른 자연이었다. 푸른 들판이, 논과 꽃들이 한없이 멀리 눈앞에 펼쳐졌다.

더위를 뚫고 박물관 정문을 들어가자 불국사가 생각나는 건물이 떡하니 앞에 서 있었다. 신라역사관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1000년의 신라가 가졌던 흥망성쇠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그 바로 옆엔 특별전시관이 있는데, 그날 벼루를 주제로 한 전시를 하고 있었다.


먼저 들어간 곳은 신라 역사관. 처음부터 수많은 유물을 접했다. 심지어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보면 하나의 유물을 너무 많이 전시해서 난잡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대체로 돌로 만든 유물들을 그렇게 해놨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다. (반달돌칼이라던가, 석촉이라던가)

신라 역사관에서 볼만한 것은, 역시 신라인들의 금으로 세공한 장신구와 부장품을 무덤 속 위치 그대로 전시한 유물들이다.


금으로 치장한 장신구에 눈이 팔려 넋을 잃고 쳐다봤다. 인간문화재가 아니고서야 그런 섬세함을 수작업으로 하기엔 힘들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뚫어져라, 본 금귀걸이들도 있었다.

신라의 화려함을 받아들일수록 한 국토에서 지역마다 추구하는 것들이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고 왔다. 울산에서 봤던 유물과 경주에서 봤던 유물의 분위기가 그토록 다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그래서 한성 시기의 백제가 기대된다. 서울에 있는 한성백제 박물관이 너무 가고 싶은 까닭이다)


도록은 신라 불교미술관 1층에서 구매했다. 박물관 도록 모으는 취미가 생긴 나는 즐거워서 몇 번이고 펼쳐봤는데, 이는 월지관에서 그 위용을 톡톡히 치렀다. 월지관은 안압지에 관한 것만을 담아둔 공간이다.

월지관은 마치 소설 속에 있을 법한 아름다운 정원처럼 내 상상 속에 자리잡혔다. 나무로 만든 배, 바다처럼 꾸며 놓은 임해전, 귀족들의 사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 난 들뜬 얼굴로 돌아다녔다.

특별전을 포함해 3시간을 둘러본 경주국립박물관은 매우 컸다. 이는 한 나라의 수도였기에 가능했고, 그에 준한 유물의 방대함은 상당히 부러웠다. 심지어 박물관 아래에는 수레가 다닌 흔적이 남겨진 도로가 있다.


계획도시처럼 만들어진 신라의 수도는 체계적인 얼굴이었다.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조선의 수도보다 더 현대적인 느낌을 보여줬다. 근현대사와 더불어 신라 중대와 하대에 관심을 가진 나는 도록을 품에 안고 기쁨을 새기며 경주역으로 돌아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회사 다니면서 받은 첫 휴가를 보내고자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살짝 들면서 여태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을 알차게 쫓아다녔다.

가령, 전시를 본다던가, 가고 싶었던 박물관을 가본다든가 하는 경험들. 보고 싶었던 사람도 만나고, 친구와 함께 반나절 동안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을 졸이기도 하고, 이사하는 친구를 도와준 적 없지만, 아무튼 즐거웠던 것은 확실했다.

 

그뿐인가? 읽지 못한 소설책도 바리바리 읽고 있다. 소설책에 홀려서 이와 관련되지 않은 글을 괜히 꺼리게 될 정도였다. 동양 로맨스인 줄 알고 구매한 책은 무협지에 곁든 로맨스물이어서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읽다 보니 묘하게 집중하게 된다.

끝나가는 휴가의 아쉬움이 커지고 무릉도원의 불안 없는 삶이 끝나가지만, 시작점 역시 무서움이 컸었다.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찾아다녔던 발걸음이 그러했다.

 

벼르고 벼른 이집트 보물전이 눈앞에 너무 아른거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도 찾아갔다. 새로움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환희와 흥분이 작열하는 관람이었다. 브루클린박물관 소장품의 유물들은, 매일같이 봤었던(비록 대학 생활 4년이었지만) 가야 지역의 토기와 부장품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이렇게 만나는 이집트 문화는 신세계였다.

일요일이라 사람이 많아서 (가족 단위로, 혹은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온 경우) 시끌벅적했다. 사람이 몰린 전시물은 피했다가 조용해지면 앞으로 냉큼 달려갔다.

심장이 지성과 감정을 통제한다고 믿는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에서의 심판대에 설 경우, 심장의 증언을 두려워했다. 예나 지금이나 심장이 인간의 중심이란 것은 변함없는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또, 사후세계에서 게임을 통해 환생할 수 있다고 믿어서 체스 같은 게임판이 있었고, 동물숭배도 대단해서 악어, 뱀, 고양이, 쥐 등의 동물 미라까지. 태양, 사막, 모래 먼지가 눈앞에서 하르르 움직이는 그곳 이집트의 모습을 보여줬다. 경외, 공포, 숭배의 모든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기념품점에서 도록을 냉큼 사버리곤 아주 뿌듯하게 박물관은 나왔다. 지금 친구에게 빌려준 이 도록은 앞으로 해외 문화재 특별전일 경우 반드시 사야겠다는 다짐으로 남았다.

공예품 만들기에 관심 있는 친구와 이 책을 함께 봤는데 내가 관심 없는 분야의 혜안으로 디자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줘서 즐거웠다.

친구와 드라마를 봤다는 소소한 기억 속의 여인네가 바로 이 친구이다. 문채원이 나오는 공주의 남자를 봤다. 여자임에도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우리는 문채원의 미모를 극찬했다. 기방에서 놀다가 세령이를 만나서 여자의 쓴맛을 알게 된 김승유(우리끼리의 해석일 뿐이다)와 앞으로 얼마나 고생을 할지 알아서 씁쓸했다.

어른들끼리의 정쟁(政爭)에 왜 하필 애들이 다쳐야 하는지. 수양대군은 한없이 여우 같았고, 대쪽 같은 김종서를 연기하는 이순재는 거인이었다. 애들은 그저 안쓰러웠다. 그 와중에 문채원은 예뻤고, 홍수현은 천생 공주였다. 다 보지 못한 드라마를 위해 다음을 기약했다.

 

약속한 만남이었기에 당일 아침부터 바리바리 달려가 조조 영화를 봤었다. 요즘 핫하다는 덩케르트는 최소한의 음향으로 전쟁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를 불렀다. 잔인한 장면 없이 귓속으로, 눈으로, 심장으로 스며드는 전쟁의 참혹함은 대단히 무서웠다.

어떻게든 사람들은 전쟁과 얽혔다. 제국주의 시대는 그런 삶들이었다. 열강이라 해도 정부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가는 시민들이 그러했다. 그들의 잔인성은 사회로부터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 만든 사건들 또한 복잡해서 후유증이 현대사회인 지금 곳곳에서 터지고 있다.

게다가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들은 그 얼마나 애처로운가. 열강인 저들보다 더 비참하고 참학한 삶을 살아왔다. 본연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저 시기는 그 어느 곳도 안전한 나라가 없는 시대였다.

 

전쟁을 치르며 자식이 죽었기에, 차마 도망가지 못한 군사들을 구하러 달려가는 민간인 배의 선장님은 다부졌다. 그렇듯 모든 부모가 가지는 사랑은 대단했다. 그런 모성애를 피부로 짧게 느꼈던 월요일도 있었다.

밀양에서 공부하며 만났던 언니와 부산에서 만났는데, 이유식 하는 아기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여느 초보 엄마들처럼 언니가 밥을 편안하게 먹는 일은 없었다. 말똥거리는 눈으로 엄마에게 안긴 아기는 카페에서 잠들었다.

그래서 언니가 안심했다. 엄마가 화장실 간 고새를 알았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슬며시 뜨고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울었다. 대단한 건, 아기 울음소리 듣고 저 멀리서 달려온 언니였다. 화장실에 가기 전에 내게 “울면 안아서 얼러주면 돼”라는 말을 들어서 안았는데, 아기는 두리번거리며 언니를 찾았다.

 

안겼을 때 아기는 촉촉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아기의 피부가 내 얼굴에 계속 닿아서 화장한 내 피부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엄마 있을 땐 내게 안겨도 잘만 웃더니, 엄마 없다고 대차게 울어대는 모습이 엄마가 최고구나 싶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기점으로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나는 이날을 시작으로 휴가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매일 하던 필사도 접었고, 습관처럼 쓰던 일기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평소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누워서 영어원서 듣기라도 했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휴가였고, 뭔가 모르게 빨빨 돌아다녔던, 그런 피곤한 날들이었다. 그렇지만 잊지 않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다의 소금향이 바람 타고 진동한다. 파도가 움직이고 살아있음을 알리는 물거품은 돌고래 떼처럼 쉼 없이 오르내렸다.

찬바람을 맞으며 등대에 몸을 기대고 있으니 눕고 싶어졌다. 여행 도중의 시점부터 글은 시작한다.

해수욕장보다 조용한 어촌을 선택해서 들어갔다. 해안경찰서 앞 부두에는 어선이 줄지어 대기했다. 마침 방파제 사이로 들어오는 한 척의 어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 너머 수평선 가까운 바다를 보고 가만히 있으면 찬바람이 시원하다.

 

카페로 들어가 가만히 앉아있을까 생각하다가 등대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마침, 먼저 쉬고 있는 한 아저씨께서 내게,

“여기가 잴 시원해요, 쉬었다 가요” 라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 미소에 화답한 나는 맞은 편에 앉았다. 파도 소리를 듣고, 물거품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다가 노트북을 꺼냈다. 음악을 감상하며 풍경 보기를 좋아하지만, 지금은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기가 가장 시원한 곳이라고 말하셨던 아저씨는 등대 기단을 베개 삼아 누워있다. 이곳 주전항 방파제 등대는 탑을 본떠서 만들었기에 낮은 기단이 있어서 쉬기 좋다.

아저씨와 나는 처음 나눈 대화 이후로 말없이 바람을 맞는다. 소금 향은 여전히 바람을 타고 유유히 흩날린다.

 

오늘의 여행은 잘박거리는 파도 소리가 일품이구나, 했는데, 구름 많은 하늘이 방파제 너머 바다와 맞닿아 번지는 흐린 수평선도 좋았다. 물론 바람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공업탑에서 출발한 411번 버스는 점심시간인 12시, 주전초등학교 정류장에 섰다. 정류장에서 바로 보이는 바다는 해녀들의 일터이다. 이전에 한 번 왔을 때 해녀들은 바위를 닦고 있었건만,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조용히 내려갔다.

해안가 앞에 서자 작은 파도가 찰박거리며 왔다가 밀려갔다. 언제 밀려갔냐는 듯 다시 오면 파도 소리를 나직하게 허공으로 흩뿌렸다.

정적. 소리 앞에서 나는 파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돌멩이와 자갈 사이사이로 스미는 물이 투명했다.

해안가 바로 옆에는 해녀들의 쉼터인 주전해녀의 집이 있다. 여기서부터 이어진 주전해안길을 따라 마을 길을 꾸준히 걸으면 주전활어 직판장이 나타난다.

직판장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어선들은 가만가만 파도가 움직이는 높낮이에 따라 울렁였다. 어선들을 둘러싼 그 앞의 큰 방파제는 주전항이었다. 어쩐지 내가 생각했던 방파제 치고는 너무 크더라.

 

마을 자체가 관광지 역할을 하는 데다 해수욕장도 멀지 않아서인지 횟집과 카페가 쉬지 않고 보였다. 그중 눈여겨본 카페는 주전항 맞은 편에 자리한 빨간색으로 꾸민 가정집 외양의 건축물이었다.

마음에 드는 카페를 확인하고 주전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방파제에는 페인트로 해녀 그림이 아주 크게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해안가보다 더 세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위에 지친 나는 그 바람에 이끌려 넓고 둥글게 굽어진 방파제로 향했다.

가까운 바다 물길을 보며 낚시하는 아저씨도, 산책하며 노니는 중년 여성도 방파제의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행인은 빨간 등대 밑에서 바다 보며 누워 있던 그 아저씨였다.

 

30여 분, 내가 등대 밑에서 바다를 구경한 시간. 먼저 오신 아저씨보다 내가 먼저 일어섰다. 가려고 발을 떼자 또다시 내게 “벌써 가게요? 조금 더 쉬다 가지-” 라고 아쉬워하신다. 그래서 나는 “바람이 추워서 먼저 가려구요, 안녕히 계,,(네?)” 집도 아닌데 ‘계세요’가 어색해서 어설픈 인사를 하고 말았다.

아저씨께선 내가 돌아선 순간까지 미소를 짓다가도, 이내 처음 그대로의 자세로 바다에 시선을 거두셨다. 아주 잠깐이지만, 먼 지역(혹은 처음 듣는 언어를 쓰는 타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속 장면 같았다. 그것도 토박이로 나고 자란 곳에서의 이런 경험은 신선했다.

 

심지어 여행을 끝내고 오는 버스를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처음 보는 내게 “곧 있으면 121번이 와요~” 라고 알려주시는 중년 남성도 있었다. 버스 안내판이 있었음에도 굳이 알려주시는 친절함이 다정하게 다가왔다.

어디를 가도 낯선 인연은 새롭다. 그 낯섦이 새로운 곳에서 느껴야만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모자장수를 만나고, 고양이와 대화하는 삽화가 생각나는 여행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3일간 뭉친 긴장을 풀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이번엔 달동사거리에서 807번을 타고 오전 11시부터 여정을 시작한다. 달동사거리는 공업탑과 한 정거장 차이로 중구와 곧바로 진입하는 곳이다. 807번은 시청을 지나 태화루로 진입해 울주군으로 향했다. 울주군은 남구, 동구, 북구를 합친 것보다 크고, 울산의 역사가 곳곳에 베어져 있는 곳이다.

 

동강병원을 지나 천상을 거쳐 언양으로 들어갔다. 언제 한 번 언양읍성을 가야지 했는데, 마침 그 읍성이 버스 노선 길목에 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읍성과 반대로 버스는 코너를 반대로 돌았다.

버스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으로 점점 들어간다. 집보다는 산맥이, 음식점보다는 논밭이 점점 더 많아졌다. 이처럼 울주군은 거대한 읍내, 시골 등등 남구의 번화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처음 듣는 시골 마을 이름들은 버스 정류장이 되어 연이어 정착했다. 그 와중에 내가 버스를 갈아타야 할 구간은 언양 터미널 아니면 울산역이었다. 807번 노선을 보면 울산역과 언양 정류장 모두(언양 정류장과 터미널이 같은 거라고 지금까지 짐작만 한다)를 지나치는데, 이미 1시간 동안 버스 안에 있었던 나는 먼저 도착한 울산역에서 고민하다가 재빨리 내렸다.

 

주변이 산맥으로 둘러싼 이곳 울산역은 KTX가 선다. 버스에서 내려 멍 때리고 서 있는데 뒤이어 308번이 왔다. 그 버스를 타야 하지만 정오인 12시에다가, 저걸 타버리면 점심 먹을 곳이 없겠다 싶어서 역에서 잠시 정지했다.

3일간 하루에 한 끼씩 먹으면 1끼의 폭식일지언정 다음 날 상당히 배고프다. 고민 끝에 결국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삼각김밥을 샀다. 일순간 다른 지역으로 느닷없이 가버릴까, 순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이미 지쳐있었던 나는 말 없이 우적우적 먹었다.

다 먹은 후, 이미 놓친 308번이 더 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20분 뒤에 다시 온다는 버스를 기다렸다. 혼자서 처음 가는 시골로 들어가는 상황에 불안감도 점차 커졌다. 이건 시내버스가 아니라 시외버스나 다름없다!! (울산역이 아니라 서산휴게소 환승센터일 것이다, 분명)

 

1시가 가까워져 오는 시각에 304번 버스가 들어왔다. 무심코 버스에 적힌 노선이 눈에 들어오자 확인할 수 있어도 믿기지 않아 멍해졌다. 아, 어물쩍거린 탓에 버스를 또 놓칠 뻔했다.

원래 308번을 타면 천전삼거리에서 내려 30여 분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대곡박물관이 종점이라니! 이건 정말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은 대곡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30분 더 가면 종점인 대곡박물관에 도착한다. 고속도로 같은 국도를 한참 달리는 동안 마을보다 훨씬 많은 초록빛 논이 펼쳐져 넋을 놓았다.

종점인 대곡박물관에 도착하기 전에는 암각화 박물로 들어서는데, 가기 위해서 산을 깎아 만든 2차선 도로로 진입한다. 암각화박물관을 터닝포인트처럼 돌아서 구불구불한 2차선을 빠져나오자 산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 순간 펼쳐진다. 그렇게 오후 1시 30분에 도착한 대곡박물관은 산 속의 텅 빈 푸른 공간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먼저 보이는 야외전시장 야철지(冶鐵址)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선시대 방리마을 야철지 일부를 이전․복원한 쇠부리 가마를 보면서 대학생 때 들었던 고고학 수업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본 영상은, 초기철기시대의 철 생산 기술을 보여주고자 당시 상황을 복원하는 과정을 찍은 내용이었다.

이렇게 당시 기술을 비슷한 성질의 재료와 기술, 인원 수 등을 계산해서 실험하는 것을 실험고고학이라 한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고고학 종류가 세분화 됐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무튼, 그 외에도 하삼정 유적에서 발견된 도로를, 맞은편에는 석곽묘 내부를 유리로 동시에 감싸고, 그 가운데 다리 위로 올라가 관람하도록 만들었다. 야외 전시실을 정말 잘 만들어서 상설전시실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아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상설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상설전시실은 삼국시대 대곡천 유역‧언양 문화와 야철, 기와가마 생산을 큰 테마로 잡았다.

문제는 상설전시실과 학(鶴) 특별전까지 다 보고나니 오후 2시 쯤 됐다는 것. 누가 봐도 버스를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시골이다. 어플에는 3시 10분에 온다고 해서 시간 맞춰 나갔지만…, 오지 않았다. 마지막 버스는 5시에 온단다.

대곡박물관으로 오는 시내버스는 총 3번으로, 울산역에서 타고 들어온 버스가 두 번 째였던 것이다.

허망하기 짝이 없다가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의 서늘하고 습한 바람은 고요한 정경의 운치를 더했다. 노래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풍경화가 앞에서 현실처럼 산뜻하게 펼쳐지는 상상이 든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정말 조용하다. 초록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울을 갈 때 종종 일부러 고속버스를 선택한다. 버스를 타면서 고속도로 너머의 풍경을 구경하다보면 그 시간의 무료함이 실감나고, 그 무료함에서의 여유가 편안해서였다.

타지역 시골 여행을 상상할 때 기본 2시간 간격의 마을 버스를 기다리는 그 시간의 여유를 동경하는 마음이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덕분에 나는 그 동경을 한꺼번에 체험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폭염 경보가 뜨는 날씨에 굳이 경험할 필요는 없겠다. 그렇다고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여행에 얽메이지 않을 듯도 하다. 출발 시간과 장소만 정해지면 과정이야 어떤가,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