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 뭉친 긴장을 풀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이번엔 달동사거리에서 807번을 타고 오전 11시부터 여정을 시작한다. 달동사거리는 공업탑과 한 정거장 차이로 중구와 곧바로 진입하는 곳이다. 807번은 시청을 지나 태화루로 진입해 울주군으로 향했다. 울주군은 남구, 동구, 북구를 합친 것보다 크고, 울산의 역사가 곳곳에 베어져 있는 곳이다.

 

동강병원을 지나 천상을 거쳐 언양으로 들어갔다. 언제 한 번 언양읍성을 가야지 했는데, 마침 그 읍성이 버스 노선 길목에 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읍성과 반대로 버스는 코너를 반대로 돌았다.

버스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으로 점점 들어간다. 집보다는 산맥이, 음식점보다는 논밭이 점점 더 많아졌다. 이처럼 울주군은 거대한 읍내, 시골 등등 남구의 번화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처음 듣는 시골 마을 이름들은 버스 정류장이 되어 연이어 정착했다. 그 와중에 내가 버스를 갈아타야 할 구간은 언양 터미널 아니면 울산역이었다. 807번 노선을 보면 울산역과 언양 정류장 모두(언양 정류장과 터미널이 같은 거라고 지금까지 짐작만 한다)를 지나치는데, 이미 1시간 동안 버스 안에 있었던 나는 먼저 도착한 울산역에서 고민하다가 재빨리 내렸다.

 

주변이 산맥으로 둘러싼 이곳 울산역은 KTX가 선다. 버스에서 내려 멍 때리고 서 있는데 뒤이어 308번이 왔다. 그 버스를 타야 하지만 정오인 12시에다가, 저걸 타버리면 점심 먹을 곳이 없겠다 싶어서 역에서 잠시 정지했다.

3일간 하루에 한 끼씩 먹으면 1끼의 폭식일지언정 다음 날 상당히 배고프다. 고민 끝에 결국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삼각김밥을 샀다. 일순간 다른 지역으로 느닷없이 가버릴까, 순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이미 지쳐있었던 나는 말 없이 우적우적 먹었다.

다 먹은 후, 이미 놓친 308번이 더 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20분 뒤에 다시 온다는 버스를 기다렸다. 혼자서 처음 가는 시골로 들어가는 상황에 불안감도 점차 커졌다. 이건 시내버스가 아니라 시외버스나 다름없다!! (울산역이 아니라 서산휴게소 환승센터일 것이다, 분명)

 

1시가 가까워져 오는 시각에 304번 버스가 들어왔다. 무심코 버스에 적힌 노선이 눈에 들어오자 확인할 수 있어도 믿기지 않아 멍해졌다. 아, 어물쩍거린 탓에 버스를 또 놓칠 뻔했다.

원래 308번을 타면 천전삼거리에서 내려 30여 분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대곡박물관이 종점이라니! 이건 정말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은 대곡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30분 더 가면 종점인 대곡박물관에 도착한다. 고속도로 같은 국도를 한참 달리는 동안 마을보다 훨씬 많은 초록빛 논이 펼쳐져 넋을 놓았다.

종점인 대곡박물관에 도착하기 전에는 암각화 박물로 들어서는데, 가기 위해서 산을 깎아 만든 2차선 도로로 진입한다. 암각화박물관을 터닝포인트처럼 돌아서 구불구불한 2차선을 빠져나오자 산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 순간 펼쳐진다. 그렇게 오후 1시 30분에 도착한 대곡박물관은 산 속의 텅 빈 푸른 공간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먼저 보이는 야외전시장 야철지(冶鐵址)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선시대 방리마을 야철지 일부를 이전․복원한 쇠부리 가마를 보면서 대학생 때 들었던 고고학 수업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본 영상은, 초기철기시대의 철 생산 기술을 보여주고자 당시 상황을 복원하는 과정을 찍은 내용이었다.

이렇게 당시 기술을 비슷한 성질의 재료와 기술, 인원 수 등을 계산해서 실험하는 것을 실험고고학이라 한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고고학 종류가 세분화 됐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무튼, 그 외에도 하삼정 유적에서 발견된 도로를, 맞은편에는 석곽묘 내부를 유리로 동시에 감싸고, 그 가운데 다리 위로 올라가 관람하도록 만들었다. 야외 전시실을 정말 잘 만들어서 상설전시실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아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상설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상설전시실은 삼국시대 대곡천 유역‧언양 문화와 야철, 기와가마 생산을 큰 테마로 잡았다.

문제는 상설전시실과 학(鶴) 특별전까지 다 보고나니 오후 2시 쯤 됐다는 것. 누가 봐도 버스를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시골이다. 어플에는 3시 10분에 온다고 해서 시간 맞춰 나갔지만…, 오지 않았다. 마지막 버스는 5시에 온단다.

대곡박물관으로 오는 시내버스는 총 3번으로, 울산역에서 타고 들어온 버스가 두 번 째였던 것이다.

허망하기 짝이 없다가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의 서늘하고 습한 바람은 고요한 정경의 운치를 더했다. 노래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풍경화가 앞에서 현실처럼 산뜻하게 펼쳐지는 상상이 든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정말 조용하다. 초록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울을 갈 때 종종 일부러 고속버스를 선택한다. 버스를 타면서 고속도로 너머의 풍경을 구경하다보면 그 시간의 무료함이 실감나고, 그 무료함에서의 여유가 편안해서였다.

타지역 시골 여행을 상상할 때 기본 2시간 간격의 마을 버스를 기다리는 그 시간의 여유를 동경하는 마음이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덕분에 나는 그 동경을 한꺼번에 체험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폭염 경보가 뜨는 날씨에 굳이 경험할 필요는 없겠다. 그렇다고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여행에 얽메이지 않을 듯도 하다. 출발 시간과 장소만 정해지면 과정이야 어떤가,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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