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 멈춰버린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
프리데만 카릭 지음, 김희상 옮김 / 원더박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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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전부터 성공을 가장 잘 보증해주는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전술을 조합해가며 시도하는 자세임을 확인해준다. "더 잘 실패하자." 곧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로부터 배우는 자세가 성공의 열쇠라는 점을우리는 새겨야 한다. - P12

"답은 간단해요. ‘포모‘가 그 비결이죠." ‘포모‘는 영어의 ‘fear of missing out‘의 머리글자를 따 만든 약어(FOMO)로, ‘뭔가 놓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을 뜻한다. "사람은 의무감이나 습관, 정치적 입장 표현으로 시위 현장을 찾지만, 그냥 친구와 함께 있고 싶어 참여하는 때도 많아요." 노이바우어의 설명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정말 결정적인 시점은 사람들이 시위 현장을 찾지 않으면 뭔가 놓치는 게 아닐까 하고 느낄 때 찾아옵니다. 무슨 구체적인 사건일 수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말이죠. 역사를 쓰는 현장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 P46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개인이 집단에 가지는 소속감이라고 대다수 연구는 확인해준다. 흥미롭게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거라는 확신이다. 특히 주변의 가족, 친구, 이웃, 동료가 함께하는 것이 최선이다. 인간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 안에서 편안하면서도 고양된 기분을 맛본다. 홀로 저항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결실을 거두기 힘들 뿐 아니라, 고립되어 쉽사리 공격받을 수도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 이뤄낼 때의 기분,
자신이 속한 집단이 변화를 일으킨다는 확인,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올바른 일을 한다는 확신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인간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함께할 때 흔쾌히 행동에 나선다. - P59

‘다원적 무지‘가 우리 인식을 왜곡한다는 점을 밝혀낸 다양한 연구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 특히 규범을 지키려는 올바른 행동(이 행동의 하위범주인 운동 참여도 마찬가지)을 항상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고, 더 솔직하며, 더 잘 헌신한다고 여긴다…. ‘다원적 무지‘는 우리를 곧장 ‘애빌린 역설‘에 빠뜨린다. 집단의 구성원이 각자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과는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는 데 동의하게 되는 이 역설로 인해, 구성원들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집단의 의견과 충돌한다고 잘못 판단하면서 집단의 의견에 거스리지 않기 위해 자기 뜻을 숙이고 집단의 결정을 따른다. 실제로 투명하게 서로 의견을 나누어보면 충돌은 전혀 일어나지 않음에도, 이 역설은 저항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확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저항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는 나머지 이들은 선뜻 나서지 않고 수동적 태도를 보인다. - P70

지금까지 나는 왜 사람들이 저항에 거리를 두는지 그 몇 가지 원인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흔히 그냥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해줄 거라거나,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영웅이 나타나야 해‘ 하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려 할 때 잘못된 길로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체제에서 어느 위치에 있든 간에, 불공정과 불의가 빚어지는 책임을 최소한 간접적으로는 가지고 있다.
어떤 정권, 그 어떤 민주주의 체제도 이를 떠받드는 사회적 기둥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기둥 가운데 하나다. - P74

오늘날 운동가들이 즐겨 읽는 마크 엥글러와 폴 엥글러의 책은 20여년 전 헬비의 책에서 사회의 ‘기둥’이라는 비유를 가져왔다. 고대 로마의 신전처럼 권력자도 충성으로 자신을 받쳐주는 여러 ‘기둥‘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무력을 써서 안정시키도 한다. 이 기둥 가운데 하나 또는 두 기둥을 무너뜨린다고 해서 권력자가 바로 실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기둥이 흔들리며,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면, 잔혹하기 짝이 없는 독재자라 할지라도 빠르게 무너지는 변동이 생겨날 수 있다. 저항운동은 이른바 ‘티핑포인트‘, 작은 변화가 쌓이다가 결정적 변화를 부르는 임계점을 어떻게 불러올지 늘 유념하고 목표로 설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변혁은 카오스와 카리스마로 이뤄지지 않는다.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세가 변화의 원동력이다(물론 전략적으로 카오스와 카리스마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P82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미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세르비아의 오트포르는 저항운동의 이런 작동 원리를 똑같이 보여준다. 두 운동 모두 조바심을 내지 않고 몇 년에 걸쳐 꾸준히 작업을 벌였다.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했으며, 이들의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동안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은 계속 늘어났다. 전략적으로 사회의 기둥을 차례로 설득하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우리‘가 충분히 커질 때까지 계속해 나갔다. 그렇게 되자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현상 유지에 급급해온 많은 이들에게도 변화를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 P86

사회를 지탱해주는 기둥을 흔들려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돌덩이에 부딪혀야만 한다. 기존 제도 안에서 작은 성과를 거두는 데 만족하지 않고, 기존 제도를 싹 뒤엎는 거대한 변혁을 이루려는 사람은 처음에는 겉보기로는) 실패해야만 한다. 제한적인 힘으로 되도록 많은 기둥을 가능한 한 꾸준하게 흔들려고 하는 사람은 저항운동의 초기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드문 성공에 조바심이 나고 속이 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막스 베버는정치란 두꺼운 널빤지에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말에 빗대 말하자면 저항운동이 뚫어야 하는 두꺼운 널빤지는기둥들이다. 기둥을 흔드는 지난한 작업에서 겪는 패배, 정치적이든 사법적이든 문화적이든 실패와 좌절은 저항이 애초부터 희망이 없다는 경고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패배는 일종의 시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결과로 우리는 어떤 기둥(그리고 사안에 따라 어떤 운동가)이 어느 정도 불안정한지, 어디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지, 상황이 달라지면 누가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보일지,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변하지 않을지 등의 소중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 P91

부당한 법을 어겨도 좋은가 하는 물음은 핵심적인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만 마땅하다. "저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었을 때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법을 어기고, 그렇게 해서 이웃 시민의 양심을 일깨워 이 법의 부당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야말로 법을 가장 존중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킹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한 모든 일은 ‘합법적‘이었으며, 헝가리의 해방투사가 한 모든 행동은 ‘불법‘이었습니다." 어겨야 할 법과 지켜야 할 법은 어떻게 구분할까? 킹은 이 구분을 위해 고대 로마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글을 인용하며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리를 빌려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인간의 인격을 타락시키는 모든 법은 부당합니다. 인종차별은 인간의 영혼을 뒤틀고 인격에 해를 끼칩니다." 이로써 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해진다. 인종을 차별하고 분리하는 모든 법은 부당하다. 이런 죄악에 우리는 반드시 맞서 싸워야만 한다. 부당한 법에 맞서는 저항의 모범을 킹은 초기 기독교인에게서 찾는다. "로마제국의 부당한 법에 굴복하느니 이들은 굶주린 사자와 고문의 고통을 택했습니다." 킹의 눈에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이런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시민 불복종" 덕분에 "학문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킹이 보기에 "자유로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흥미롭게도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과 같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온건한 백인, 정의보다는 ‘질서‘를 더 중시하는 백인"이다. "이들은 정의가 살아 있는 적극적인 평화보다 긴장 관계가 없는 소극적인 평화를 더 선호하며, 줄곧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목적에 동의하지만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기후 운동가들과 그 저항의 방법을 두고 쏟아진 바로 그 비난이다. - P120

그는 시민 불복종은 그만큼 민주주의를 신뢰한다는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른 의견을 민주적으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저항이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시민 불복종을 존중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불편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참고서 그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바로 불편을 주기 때문에, 그리고 불편을 주는 방식 때문에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 불복종은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공개적이며, 비폭력적이고, 의도적으로 법을 위반하되 사법적 결과는 감당하겠다는 성숙한 자세를 보이는 행위이다. 법치국가는 스스로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국민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실험"으로 "국가를 의심"할 수 있게 허용해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성가시고 불편할지라도 그래야 잘못을 바로잡고 고쳐나갈 기회를 얻는다. - P125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든 정치적 의사 표현과 행동을 어찌 됐건 동등하게 다뤄주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보편주의를 버려야 한다. 7장에서 정리한 규칙에 비추어 민주적이고 투명하며 정당한 저항으로 볼 수 없는 운동을 시민사회는 이해해서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자신을 반대하고 심지어 폐지하려고 하는 저항도 용인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지만, 그 딜레마는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의 규칙을 지키는 상대에게만 유효하다. 규칙을 의도적으로 깨는 세력에게까지 그러한 태도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 시민 불복종과 사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시위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 정부를 메시지 수신자로 삼을 때만 정당하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나 ‘페기다‘처럼 아예 조직적으로 민주주의의 근본 규칙을 위배하거나 심지어 민주주의를 폐지하려는 세력, 예를 들어 인종차별 또는 반유대주의를 거침없이 주장하는 세력은 위르겐 하버마스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가 정당한 저항 시위라면 마땅히 지켜야만 한다고 설명한 제약을 깨버린다. - P197

자기 효능감이 있는 운동은 희망에 부푼 집단의식, ‘우리‘를 만들어낸다. 훼손당한 가치와 규범을 보며 분노하는 감정, 다시말해서 불의와 부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공통의 정서가 ‘우리‘를 결집해준다. ‘우리‘라는 집단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저항은 불의와 부정이 무엇인지를 대중에 호소하는 간명하고 호소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갈등을 우리 대 저들, 올바름 대 그릇됨, 건설적 대 파괴적이라는 구도로 담아내어 누가 적인지 분명히 보여주면, 지켜야 할 도덕이 무엇인지 명확해지고 다른 이들과의 소통도 원활해진다. 그렇게 되면 사회 전반에 걸쳐 치유력이 발휘된다. 감동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형성된 집단은 사회의 모든 기둥에서 끈질기게 동맹을 찾아야 하며, 상대를 딜레마 상황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상대의 억압과 반격이 격렬하다는 것은 운동이 어느 정도 목표에 근접했음을 알려주는 반증으로 보아야 한다.
저항은 윤리를 바로 세우자는 선언이며, 윤리는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통해 전파되는 것이기에, 저항은 상징적 갈등 상황을 계속 만들어내 우리 앞에 계속 윤리적 선택을 제시해야 한다. 저항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귀찮게 만들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거부와 회피는 까다로운 윤리적 결정 앞에 인간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물론 두 가지 나쁜 선택지를 놓고 어느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은 딜레마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좋은 해결책이 없기에 차선의 선택지를 고르는 딜레마는 피할 수 없다. 저항 본연의 과제는 문제를 문제라고 제기하는 것이며, 타협을 고민할 이유는 없지만, 저항이 혁명적 자세만 고집하지 않으려면 대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른바 ‘해결책‘의 제시가 저항의 과제는 아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저항은 비생산적인 현재에 머무르며 경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본디 저항운동은 내일을 바라보며 대안을 찾기보다는 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격해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원래 의미대로 충실하게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급진화‘가 필요하다. 즉 저항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의 뿌리를 과감히 드러내, 온 세상이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폭력은 언제나 잘못된 방법이다. 폭력은 저항의 윤리적 토대를 무너뜨리며, 상대가 직면한 딜레마에서 쉽게 빠져나갈 구실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단히 단결해야 한다. 정말로 정당한 일을 위해 저항해야만 한다. 그리고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권력이 골고루 나뉘는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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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소설집 音樂小說集
김애란 외 지음 / 프란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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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노래가 끝나자 헌수는 "왠지 ‘가지 말라‘는 청보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배웠어‘라는 가사가 더 슬프게 다가온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왠지 알 것 같다며.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쉽고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 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고. - P41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행복하고 슬프지 않다. 나는 행복하지 않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이 모두를 말해야지 인생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 게 아닐까? - P90

엄마가 남겨놓은 스웨터가 여러 사람의 흔적과 손길로 조금씩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다보면 어떤 관계든, 지금 곁에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삶의 부피감을 늘려주었다는 걸 경주가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요. 물론 스웨터를 볼 때마다 지금은 멀어진 사람들이 떠올라 아프고 쓸쓸해지겠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관계의 흔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질 테니 서로 만나지 못한 시간을 짐작하고 이해하는 품이 넓어지기도 할 것 같습니다. - P269

혼자 힘만으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없겠죠. 나를 바꾼다는 건 내 앞의 세계를 바꾼다는 뜻이니까. 자연스레 타인과의 관계 역시 바뀌게 될 테고, 그럼 그 사람의 인생도 바뀌게 되겠죠. 이게 평소 제 생각은 맞지만,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건 어릴 때 기진은 엄마에게서 새로운 인생을 찾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건 보통 때라면 말을 걸지 않을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이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인생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도와줄 귀인이 필요해요. 혹시 그런 상황이라면 먼저 말을 걸어보세요. - P224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그 상황을 감내하는 것 이외에 다른 빠져나올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실망스럽고 힘들겠지만, 미세한 변화의 조짐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 세심함과 인내심이 있다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실제 상황보다 우리를 더 어렵게 하는 건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생각입니다. 앞에서 누누이 말했지만, 현실에 대한 각자의 주석이나 자막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어려운 상황에서 안 좋은 생각을 하지 않고 좋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때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든가, 아니면 모든 생각을 다 해서 생각을 무력화시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게 제게는 소설에 썼듯이 나무 바라보기와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노트에 적는 일입니다. 명상, 걷기, 운동 등 다른 방법도 많으리라고 봅니다. 어쨌든 힘든 상황에서는 어떤 생각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생각 자체를 무력화시켜야만 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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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것을 보았어 - 박혜진의 엔딩노트
박혜진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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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대해 우리가 알고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말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통해 숨겨지는 진실의 대부분은 불편한 진실이다. 지불해야할 대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누구도 그 선택을 비난할 수 없고 누구도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불행이라면, 인간 몸의 모든 근육이 그렇듯 진실을 말하기 위해 대가를 감내하는 용기 또한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퇴화한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인간의 최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은 별로 진실하지 못한 나 자신의 최후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 P41

이 소설의 엔딩은 거짓말을 못하는 자가 죽음을 선고받는 데에 있지 읺다. 죽음을 선고받고도 사라지지 않은 그의 행복에 있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행복‘이 두 번이나 강조된다. 이때 행복이란 말의 의미는 자기 삶에서 이방인이 되지 않은 자가 삶의 중심에서 느끼는 삶과의 일체감일 것이다. ‘다정한 무관심의 세계‘는 상식이라는 이름의 표준화로 서로 다른 사람을 억지스럽게 맞추는, 폭력적인 관심의 세계와 반대된다.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진심은 적은 비용이 아니다. 그 적은 비용을 외면하는 인간에게는 결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 행복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외부와 단절되었지만 자신과는 단절되지 않았던 뫼르소는 맨주먹 안에 확신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어느 이방인의 죽음으로 기록될 것이나, 우리는 이 결말을 한 인간을 장악하려 했던 거짓의 죽음으로 기억할 것이다. - P42

내 바닥과 마주하기 위해 싯다르타』를 읽었던 걸까. 스물다섯 살에 『싯다르타』를 읽으며 엉엉 울었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취업 시장에서 ‘내가 이 일에 더 적합한 이유‘ 따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으며(내가 하게 될 일의 본질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더 잘할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 자체가 이미 거대한 모순이다) 타인을 속이고 자신마저 속일 때 싯다르타』의 문장을 읽으며 내 진짜 얼굴을 잊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던 건 내 생을 통틀어 가장 행운 가득한 경험이다. "나는 바로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려 하였던 것이며, 바로 그 자아를 나는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그것을 단지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단지 도망칠 수있었을 뿐이며, 그것에 맞서지 못하고 단지 몸을 숨길 수 있을 따름이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너만 유난 떨지 말라고, 어차피 면접관들도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헤세만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신을 관찰하라고 조언해주는 어른이었다. - P59

누구에게나 경전처럼 받드는 소설이 있다. 위기에 차할 때마다 돌아오게 되는 소설 말이다. 내게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가 그런 작품이다. 1년에 한 번쯤읃 <등대로>를 읽는다. 대체로 이렇게 한 해가 시작될 무렵, 어디에 닻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는 몸이 기우뚱거리고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부박하게 흔들릴 때, 마음이 좌표를 잃은 듯 캄캄하기만 할 때, 울프의 삶에 중요한 반환점이었던 이 작품을 읽으면 장막 하나쯤 벗길 수 있다. 쏟아지는 생각 사이를 떠다니다보면 중요한 것은 내가 문제 삼은 바깥의 상황이 아니라 문제삼고 있는 나 자신의 혼돈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등대로』에 한해서라면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뒤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냐하면, 그런 말끔한 기분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작품의 끝에서 자꾸만 마주하게 되는 죽음의 반복이 문제가 아니라 거듭되는 죽음 앞에서 실은 죽음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나 자신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죽음과 나의 간극이 거리가 조금 조정되는 정도다. - P46

패잔 일본의 공기를 반영하듯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삶 구석구석 베어든 죽음의 냄새로 시작한다. "죽는 얘기라면 질색"이라고 말하는 가즈코는 죽음 충동과 싸우는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자주 휘청거린다. 아프고 불안정한 엄마에 대해 생각하던 가즈코는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엄마를 향한 ‘사랑‘은 차마 서술할 수 없는 단어다. 서술한다는 건 안다는 것이다. 안다는 건 연루된다는것이며, 연루된다는 건 그의 상처와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즈코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내용을 서술하는 순간 그 사랑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패배한 시대의 몰락한 귀족 계급에게 책임이란 가당치 않은 소리다. ‘사양‘하는 정신들과 함께 죽음만이 아름다워 보이던 시대. 때는 바야흐로 모든 것이 가라앉고 있던 1948년이었다. - P70

인간은 의지한 채 살아간다. 의지하는 건 기대는 것이고 기댄다는건 서로가 서로의 무게를 견딘다는 것이다. 서로의 무게를 견디다보면 자세는 계속해서 바뀌고 바뀐 자세에 끊임없이 적응해나가야 한다. 적응하는 과정은 불편하지만, 그러한 불편이 삶이라는 데에 토를 달긴 힘들다. 요컨대 기대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 주저앉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세다. 가즈코는 이 또한 알았던 것 같다. 사라져가는 엄마를 향해서는 차마 서술할 수 없었던 사랑. 가즈코는 이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낡은 도덕과 ‘싸우고‘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이라고 말하는 가즈코가 말한 사랑의 모험은 서로에게 기대어 어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 P72

인민군 장교였던 남자와 그의 아내 록혜가, 탈북하는 과정에서 힘들고 지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다. 의식은 흐려지고 의지는 흩어지고 낙관은 바닥났을 때, 힘겨워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못 하나를 박아요. 마음속에 못 하나만 박아." 그럼 하나둘 떨어진 것들을, 흩어진 것들도, 나중엔 흐려진 것까지 다시 붙잡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도 나도 마음속에 못 하나를 박자. 그럼 앎의 고통 속에서도앎이라는 희망을 믿을 수 있다. 밤은 깊고 잠은 오지 않지만 내일이면 날이 밝아온다고 믿어버릴 수 있다. 안다는 건 그런 거 아닐까. 그냥 믿어버릴 수 있는 거. 어둠 속에서도 빛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no. 17 가장 나쁜 일, 김보현 - P115

마음은 언제나 기댈 것을 찾는다. - P137

흘러가게 둔 인생이 야성적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라고 장려하는 문장이 아니다. 망가지기 위해 강물을 거스르며 애쓰는 것보다 슬픔이 자신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더 많은 감정을 품는 성숙한 인간으로, 고통을 아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니 흘러가게 둔 인생이란 모든 슬픔을 다 맛보겠다는 용기와 인내로 완성된 단단하고 성숙한 인생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상처가 능력이 되려면 슬픔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수천 킬로미터를 걸으며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마음같은. 슬픔을 막으려고 애쓰는 힘보다 슬픔을 다 경험하자고 마음먹고 슬픔에 온몸을 내어주는 것이 더 강한 힘이다. 그 힘이 우리를 진짜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인생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사람이 야성적이라는 말의 뜻은 그런 것이리라. 나도 슬픔을 아는 야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 No. 24 영화 와일드 - P154

동물과 함께 살아가며 경험하게 될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그 고통을 지켜보는 것이 사랑의 행위라고 말한다.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는 시간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그 시간을 견디어내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사랑에 끝이 있는 것처럼 끝에도 사랑이 있다. 그러나 끝을 사랑하는 데에는 담대한 마음이 필요하다. 오래 갈고닦은 노력도 필요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세계적인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라는 개념을 통해 끝으로 상징되는 ‘절망‘을 사랑할 방법을 설파했다. 그는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어떤 극악한 비극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고테라피의 방식을 따르면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해냄으로써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의미를 다른 말로 바꾸면 담대한 마음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은 당신이 보는것으로부터가 아니라 당신 자신으로부터 와야 한다."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애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애도가 사랑이 지닌 최후의 능력인 것처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힘든 시간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니 힘들 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 힘듦을 선택하기도 한다.
인간의 장점을 한 가지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통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하겠다. 고통스러운 끝이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그 길로 가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하찮고도 위대한 존재인지. 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말의 불길이 좀처럼 사위지 않는다. - P160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드는 건 내 손으로 오늘 하루를 끝내는 일이다. 오늘의 엔딩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엔딩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불안과 강박을 안고 잠들지 않는다. 불빛이 없는 곳에서도 장마르크와 함께할 수 있다면 밤을 밝히는 불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은 인공의 빛이 없으면 자신도 타인도 확인할 수 없는 희미한 인간들의 가난한 채도를 반영한다. 나는 무엇으로 인해 나일 수 있을까.
"우리 종교는 생의 찬미야." 그러나 현실을 장악하는 건 권태로움이다. "권태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수동적 권태. 춤을 추고 하품하는 소녀. 적극적 권태. 연 애호가. 반항적 권태. 자동차에 불 지르고 창유리를 깨는 젊은이들." 불을 켜는 것은 시선을 떼지 않는 최초의 방법일 수 있으나 시선을 유지하는 궁극의 방법일 수는 없다. 상대방을 발견하는 건 조도를 결정하는 조명의 일이 아니라 마음의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엔딩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이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no.31, 정체성, 밀란 쿤데라) - P195

준비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사각지대에서 변화구를 던지는 것이 삶이다. 추위에 언 손과 발을 녹일 수 있는 아랫목보다 윗목이 인생의 온도에 더 가깝다. 인생의 상온은 윗목이다. 따뜻함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열기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사랑이 필요한 건 삶의 온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은 윗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no.33 엄마 걱정, 기형도) - P208

전체, 그것은 파악할수 없는 무엇이다. 전체는 추상적인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일 뿐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뿐이다. <부분적인 연결들>의 저자 메릴린 스트래선은 부분을 전체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부분의 가치와 연결의 실존을 강조한다. 어느 학자의 주장만은 아니다. 부분의 독립성, 부분의 완결성, 연결의 실재성은 오늘날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 세계를 바라보는 가장 일반적인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no.40 스토너, 존 윌리엄스 - P249

인류는 오래 사는 병에 걸렸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백세 시대라는 공포가 우리의 현재를 이토록 저당잡는다. <나이 없는 시간>에서 오제는 나이에 따라 육체가 퇴락해가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부정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에게 시간은 불려나오는 것이지 순차적으로 쌓이는 것이 아니다. 죽기 전까지 인간이 붙들고 있는 것이 최근의 기억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하고, 치매에 걸린 사람이 주로 어린 시절만을 기억하는 증상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는 나이와 시간이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을 보여준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제가 아니라 어릴 적을 기억한다. 시간은 기억을 통해 구성된다. 육체적 나이와 별개로 정신의 나이는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몇 살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나 자신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이책의 마지막 문장이자 결론이 도출된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 노년은 얼마쯤 허구적 개념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제는 노년을 거부하지 않는다. 누구도 육체의 늙음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간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정신은 육체가 변해가는 흐름에 따라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결말은 우리에게 ‘노년‘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돈이 없는 노년을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기억이 없는 노년을 생각하면 불행하다. 나이들어간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아니라 발췌할 기억이 많아진다는 것이며, 발생할 기억보다 추억할기억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러낼 기억을 잘 돌보는것. 순간의 의미를 잘 축적하는 것이 ETF ‘코인‘만큼이나 중요한노후 대비가 아닐 수 없다. - P256

두 사람은 동네 사람들과 각자의 자식들이 보내는 불신과 비난의 눈초리에도 굴하지 않고 ‘좋은 시간‘을 보낸다. 이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당장 다음 만남이 가능하기나 할지, 약속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므로 완벽한 행복을 느낀다. 루이스는 거듭해서 말한다. 자신에게 아직 무엇인가 남아 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아직 다 말라비틀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러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
외로움의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외롭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은 한 가지밖에 없다. 내가 외롭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외롭지않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온기를 유지하려면 상대방이 있어야하고, 상대방이 외롭지 않아야 나와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 P290

언제 어디에서나 등장하는 "작은 지옥"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옥이 없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건 불가항력이다) 점점 더 적은 힘으로도 지옥을 건널 수 있게 되는 것, 즉 변화하는 것이다. 변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바꿔 말해 엔딩들이 필요하다. 끝은 경험이고, 끝은 변화다.
끝에 이르면 많은 작가가 ‘현자‘가 된다. 모든 날이 다 좋았고 모든 것이 다 의미 있었다고 말하는 식이다. 돌아보는 행위가 무슨 마법의 제스처라도 되는 걸까? 한때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결말들을 언제나 조금씩 의심하는 편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도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얘기로 끝난다. 모든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경험이라 불리는 거대한 것으로 변해 결국에는 삶 자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김없이 ‘현자‘ 타임. 그런데 이번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 들었다. 돌아보는 행위가 마법의 제스처였던 것이 아니라 변화가 곧 마법이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변하면 과거는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끝은 변화의 증거다. 변형과 변화가 삶이 행진하는 방식이며, 불행을 불행으로만 보지 않게 되는 것이야말로 삶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방식이다. - P319

견딜 수 없는 일을 견딜만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건 끝에서 변화를 읽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변화엔 좋고 나쁨이 없다. 그러니 누구도 대신 의미를 만들어줄 리 없다. 의미는 오직 변화의 당사자만이 만들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의미 찾기를 연습한다. 변화에서 좋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모든 엔딩은 변화에 대한 변론이자 변화를 향한 의지다. - P320

마지막 문장은 끝까지 읽은 사람만 그 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광활한 세계다. 작품을 정직하게 완주한 사람만이 마지막 한마디의 무게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그 점이 인생을 닮았다.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마지막이라는 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끝은 ‘와버린‘ 게 아니다. 그들은 끝을 맞이한다. 이 책에서 내가 그러모은 마지막 문장들은 맞이한 끝, 환대받은 끝, 끝나지않는 끝, 부활하는 끝이다. 끝은 변화의 일부이고 변화는 끝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끝의 미학을 찾아 헤맸지만 끝이라는 미학에 도달했을 뿐이다. 출발할 땐 상상하지 못했던 이 도착지가 마음에 든다. 끝이라는 순간에 매료된 나는 때로 끝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다 가끔 두려워지면 주문처럼 되뇌는 한 문장. 이제 그것을 보았어.
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빛나는 마지막이자 마지막이라는 빛이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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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기 : 저는 바로 그러한 ‘사회적 상상‘을 비판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 정상, 독립, 자율로 대표되는 몸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거기에 한 사람의 일상, 관계, 돌봄, 상호의존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로 증발했을까요? 또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치료라는 가능성, 그 불투명한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혀야 할까요? 의료가 이제껏 이런 방식으로 발전해왔고,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재단한 측면은 없을까요?
지금도 각종 매체에서 ‘100세 시대‘ 운운하며 인간이 자연스레겪는 아픔, 의존, 나이 듦, 죽음을 리스크로 만들고 각종 의료기술과 금융상품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소리와 이미지가 넘쳐납니다. 거기에는 현재 삶의 위상을 발견하게 하는 과거도 없고, 총체적 삶이 전제된 미래도 없습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생명‘은 철저히 평가되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상적인 몸‘도 사라집니다. 이제, 다른 삶의 방식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 P75

호스피스는 ‘특이한 건축물‘이 아니라 환자의 삶을 통합적으로 디자인‘하는 일입니다. 환자의 삶에 관심을 갖고, 돌봄의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의료진이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할 수도 있지만, 환자가 목욕을 하고, 정원에서 바람을 쐬고, 가족 기념일을 챙기고, 여유롭게 음악을 감상할 수도 있죠. 그러고 보면 호스피스는 ‘미결정의 세계‘인 셈입니다. 확실과 불확실이라는 기준으로 환자의 몸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환자가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결정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고 실천하는 공간입니다. - P76

‘환자가 원해도 절대 안 됩니다‘도 아니고, ‘환자가 원하니 그냥 다 줍니다‘도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각 사례별로 세심한 판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환자 삶의 질은 숫자로 나타낸 지표가 아니라 다학제팀의 관찰, 관여, 숙의를 통해서 해석된 ‘가치‘라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여기서 가치는 생명 존중, 해악 금지, 환자의 자율성 존중 같은 ‘선언적 윤리로서의 가치 value‘로 요약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환자의 신체 상태, 성격, 경제력, 가정환경 같은 ‘세속적 평가로서의 가치worth‘로 환원되지도 않죠. 호스피스 다학제팀은 이 두 가치의 한계를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가치를 상호보완적으로 다루는 한편, ‘호스피스 돌봄‘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고 순환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에 대한 이야기도 차근차근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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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온하게 죽고 싶습니다 - 호스피스 의사와 의료인류학자의 말기 돌봄과 죽음의 현실에 관한 깊은 대화
송병기.김호성 지음 / 프시케의숲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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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기 : 그간 우리는 죽음을 ‘순간‘으로 파악해왔던 것은 아닐까요? 이를테면 ‘어떤 의료 결정이 삶을 의미 있게 혹은 무의미하게 만드는가?‘, ‘죽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가?‘, ‘임종까지 또 임종 이후에 드는 비용은 얼마인가?‘ 같은 질문을 하면서 말입니다. 죽음의 성격, 의미, 가치는 어느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규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연명의료 기술이 발달하고, 말기 돌봄의 양상이 개인의 자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현실에서 그런 물음이 중요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순간으로 이해하다 보면 ‘그 순간까지 살아온 사람의 역사‘가 간과될 수 있습니다. 출생이 삶의 과정이듯이, 죽음도 삶의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그 삶의 연속성과 통합성을 바탕으로 죽음을 파악하면 어떨까요? 저는 호스피스 다학제팀이 바로 이 지점을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자와 보호자의 서사를 주시하고 해석하는 다학제팀의 노력이 눈에 띕니다. 그때 "이 사람의 서사는 이거야"라고 확신하기보단 그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게 인상적입니다. 그 관심을 단순히 오지랖이라고 일축해선 안 됩니다. 환자에게필요한 서사라는 게 어떤 시점에는 자식의 결혼식일 수도 있고, 또어떤 시점에는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선생님말씀처럼, 환자와 보호자가 다양한 형태의 말기 돌봄을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경험에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이 달라질 수있지 않을까요?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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