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읽기
1 내가 사랑하는 시인 헤르베르트는 책 읽기의 무용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누군가 그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그 책들이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그 책들을 읽은 뒤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랬다. 늘 무언가를 읽고 있었으니 읽은 만큼 삶이 바뀌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현명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헤르베르트처럼 읽은 책들의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느 날은 책장에서 언젠가 꼭 읽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책을 문득 꺼내 펼쳐보고는 내가 좋아하는 펜으로 내가 좋아할 법한 문장에 밑줄이 쳐진 걸 보고 놀랄 때도 있다. 이 책을 언제 읽었더라?
2 "세계는 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계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은 독일 시인 슈나이더의 이 문장으로 저자 서문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 빨간 수첩과 내 머릿속은 이렇게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한 타인의 문장들로 가득하다. 가끔은 내가 이름 없는 낡은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 속 인물같이 느껴진다. 출처를 쉽게 잊는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조각들이 어디서 왔는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나 학술 작업을 할 때를 빼고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조각의 출처를 기억하는 놀라운 편집증의 소유자는 드물다. 보르헤스 소설의 주인공, 기억의 천재 푸네스 정도?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죽고만 싶었던 숱한 순간에 나를 살린 누군가의 문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도 회복의 과정도 전부 잊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삶을 연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고백했던 헤르베르트를 봐도 그렇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한 뼘이라도 더 훌륭해지는 건 아니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쉼 없이 읽었다. 그리스·로마 고전, 과학적 사회주의, 우주비행, 벌의 삶에 관한 책들, 키츠 같은 시인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플라톤, 데카르트, 스피노자, 니체 같은 철학자들의 책, 우파니샤드 같은 종교서 등등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의 고백처럼 책 속에서 연명했던 것이다.
3 프루스트는 위고를 열심히 읽었다. 그는 『되찾은 시간에서 "풀은 자라야 하고 아이들은 죽어야 한다"는 위고의 말을 인용한 뒤 덧붙인다. 예술의 잔인한 법칙은 존재들이 죽어야 하고 우리 자신도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고 죽어야하는 것이라고. 진실하지만 서늘한 말이다.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카프카, 울프, 카뮈, 베유, 톨스토이, 플라스, 니체, 아렌트・・・・・・ 여기서 다룬 저자들은 다 그렇다.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소송이거나 400년 내내 분투한 뒤에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소망,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윗돌, 보상 없이 행하는 사랑, 끝없이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겨울 숲 같은 것이다. 또는 내 속에 울음이 사는 시간, 경멸을 통해서 극복되는 운명의시간, 사회가 찍어내는 자동인형 같은 삶에 맞서는 시간이다.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고,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 P7
실비아 플라스도 똑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도로 인부들, 선원과 군인들, 술집의 단골손님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 목마른 갈망―이름 없이, 귀 기울여 들으며, 기록하며, 난장판의 일원이 되고 싶은 갈망이―이 모든 게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망가져버리고 만다. 공격당하고 포격당할 위험이 상존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온 마음을 사로잡는 이런 관심은 그들을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은밀한 관계로 유인하는 도발로 곡해되는 일이 흔하다. 아, 제기랄, 그렇다. 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야외에서 잠을 자고, 서부로 여행을 하고, 밤에 마음껏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 - P30
한나 아렌트의 구분법대로라면, 타자를 전제하는 활동인 대화는 ‘행위action‘에 속한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인 작업과 달리, 행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그런데 행위에는 불안이 따른다. 나와 다른 욕구와 관심을 가진 타인들이 내 의도대로 반응하지 않아서 행위의 결과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불안이란 대부분 이런 것이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통제 과정에 속해서 불안을 제거하려는 욕구가 생겨난다. ‘행위‘하는 대신 ‘기능‘하려는 욕구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요아힘 페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기능하기 functioning‘는 행위하기를 멈추는 것임을 강조한다.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된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부모든, CEO든, 총통이든) 한 명이면 족하고 나머지는 그 계획에 따라 기능하면서 예상한 결과를 얻으면 된다. 대화는 불필요하다. 매뉴얼을 숙지하고 실행하라. 만일 최고 결정권자가 머릿속에서 지옥을 그리면 지옥의 질서가 그대로 실현된다. 이것이 기능적 안전성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안전하게 지옥에 도착했다! 그녀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게서 안전성에의 터무니없이 멍청한 열정을 발견했다. 그리고 기능하기는 복종의 쾌감을 주는 변태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행위하기가 기능하기로 대체될 때 대화와 설득의 공간인 공적영역은 사라진다. 상명하복의 원칙을 신봉하고, 공무원과 국민은 자기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만하면 된다고 여기는 최고 결정권자가 있다고 하자. 자신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이라 확신할 테지만, 아렌트는 망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그의 마음이 설령 진심일지라도 정치는 실종되고 만다. 그가 유일한 진리의 담지자를 자처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소통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대화하고 행위할 가능성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 P43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외쳤던 연인에게 바치는 소설이라면 소설의 주인공에게 모든 행복과 사랑을 다 줄 법도 한데 작가는 그러지 않았다. 올랜도의 완벽함은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필연적 어긋남과 빈 구멍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처럼 활용된다. 심지어 그토록 아름답고 총명해서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올랜도이건만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러시아 공주 사샤에게는 버림받는다. 사샤가 더 멋진 사람을 사랑해서 올랜도를 배신한 것도 아니다. 사샤는 올랜도와의 야반도주 약속을 저버리고 러시아로 떠나는 쪽을 택했다. 버지니아는 우리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네 안에 사랑받지 못할 어떤 결핍, 열등함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저 너의 사샤는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나갔을 뿐이야. 400년이 흐르도록 올랜도는 사샤를 떠올리고, 여성의 육체에 더 끌리고 여성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늘 사랑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올랜도 역시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여러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소중하지만 자신이 짜 넣을 인생의 무늬들이 모두 관계로만 환원된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랜도는 고독을 사랑하는 실존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전기작가는 그가 굼뜬 것이 그가 종종 고독을 사랑하는 성향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랍상자 따위에 걸려 넘어지는 올랜도는 당연히 고독한 장소나 광활한 전망들을 좋아했고, 자기가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혼자라고 느끼기를 좋아했다." - P33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해."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 P61
그는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연명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떠올리면 벽 위의 그림자처럼 느껴질만큼 학교, 군대, 사무실, 집, 저녁 파티, 이 모든 곳에서 그는언제나 창백하고 흐릿한 존재였다. 이 지독하게 평범한 삶에 대해 그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어떻게 아내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힘은 긴장하고 있었노라고 어리석은 짓 하지 않고 꼬임에 속지 않고 더 강한 자와는 어울리지 않기 위해서
그는 평범함을 유지하려고 애써왔다. 평범함은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우리가 그 상태를 지키기 위해 인생의 한순간도 교활하거나 타협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순간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그는 우리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여 발언한다. 그래서 그가 왜 내가 항상 피로와 불안과 고통을 느끼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도대체 나는 언제쯤 쉴 권리를 가지게 되는 거냐고 질문할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도 그 답이 가장 궁금하기 때문이다. - P96
"고통이나 비참함 앞에서 달아나지 마라. 덧없는 이익들, 특권들, 일시적인 명예들 때문에 네 자신 안에서 네가 그리도 잘 느끼고 있는 것의 가장 작은 조각까지도 양보하지마라." 이렇게 말했던 루오는 노년에 발표한 판화집 『미제레레』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미제레레 miserere‘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라는 라틴어 성경 구절에서 온 제목이다. - P107
시인은 오래전의 시 「6월」에서 썼다. "어딘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아름다운 힘은 없을까/ 동시대를 함께 산다는 친근함 즐거움 그리고 분노가/ 예리한 힘이 되어 모습을 드러낼". - P110
시인들은 목록의 단순한 양식이 주는 기쁨을 잘 알고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즐거움」을 보라.
아침에 처음으로 창밖 내다보기 다시 찾아낸 오래된 책 감격에 겨운 얼굴들 눈, 계절의 바뀜 신문 개 변증법 샤워, 헤엄치기 옛 음악 편안한 신발 이해하기 새로운 음악 글쓰기, 어린 식물 심기 여행하기 노래하기 친절하기 - P112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은엉겅퀴, 라이너 쿤체
…… 신성해진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위해 사랑을 흘러넘치게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타자를 위해 물러서며 자신을 한껏 움츠리는 일이다. - P126
히피는 타락한 마약쟁이 집단에 불과하다고 폭로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약에 절어 몽롱한 상태로도 서로를 돌보고 채식주의와 명상을 고집하고 체포, 집단강간, 성병, 임신, 폭행, 굶주림을 피하는 법을 알리는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조앤은 거기서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 애쓰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고 확신한다. …… 이 예리한 글들을 읽다 보면, 공정, 불공정, 진보, 보수와 같이 우리 사회를 떠도는 말에 대해 우리가 너무 막연한 수준의 지지와 반대만을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단순한 결론을 향해 가는 언어 말고 제대로 듣고 충분히 관찰한 뒤에 생겨나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언어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되자는 간곡한 요청을 그녀에게서 듣게 된다. - P135
카뮈에 따르면, 비극은 피해야 할 게 아니라 자각하고 응수해야 할 운명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싸우든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어렵다. 조금 전진한 기분이었는데 도로 제자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P141
베유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랑을 지키는 겁니다.’ 인간의 사랑은 보잘것없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 싶어도 세계의 난폭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유는 부재하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에 대한 경애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뭐든지 하기"는 인간을 운명의 중력에서 뜯어내어 영원 속으로 들어 올리는 사랑이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은 승리에 대한 상상 없이, 미래의 보상을 구하지 않고 전투에서 목숨을 거는 병사와 같다. …… 인류에게 공통적 처참함을 만들어내는 몰개성적인 힘의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몰개성적인 사랑뿐이라는 뜻이다. 「신을 기다리며』에 실린 한 에세이에서 베유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줄 사람들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라고 말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즉 "당신의 고통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는 일일 뿐이다. 우리는 그 물음을 통해 나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 끔찍한 불행과 만나 천형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거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불행한 사람을 집합체의 단위로서나 ‘불행한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회 계급의 하나로 보지 않고 말이다." 자신도 언제든 불행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수난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고통을 경험한 이를 비난하거나 사물처럼 무시하게 된다. 현실에서 수난은 평범한 이들 모두에게 닥친다는 정확한 인식만이 약자에 대한 경멸을 막을 수 있다." - P148
"아! 매일 아침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이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져 우리들 자신의 손에서 탄생되어 나올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위대한 삶이 되랴!" 닦고 치우는 일을 통해서, 나아가 일상을 이루는 크고 작은 일들을 직접해봄으로써 삶을 갱신하는 것은 예술적인 작업이다. …… 바슐라르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한결 더 깊이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사물들에 스스로를 주고 스스로에게 사물들을 줌으로써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살림살이의 영역이든 또 다른 노동의 영역이든 우리가 장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느낌 속에서 일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눈길이란 무엇인가. 몽상가의 새로운 눈길은 사물에 대한 깊은 몽상을 통해서 그가 새로운 이미지를 살(체험)게 되었을 때 생겨난다. - P162
그래서 푼크툼은 꼭 별난 순간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다만 거기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난 데라고는 전혀 없는 사진들 속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특별할 것도 없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찍고 그것을 계속 바라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타임라인을 흐르는 그토록 많은 구름과 노을 사진들. 그것은 우리가 금세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있었다는 다정한 증언이자 그들이 가버린 뒤에도 계속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조금은 쓸쓸한 약속이다. 사진 속의 연인, 친구, 강아지와 고양이들. 우리는 떠난 이들을 쉽게 보내지 못하고 그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을 담아서 ‘밝은 방‘에 자꾸 쌓아두려고 한다. 네가 거기 있었지. 나는 너를 보았지. 이제 안녕, 안녕....... 언제나 사진은 작별 인사인 동시에 지금 곁에 없는 너와 만나는 재회의 인사다. - P184
‘백인식 소유자white man keeper‘는 "재산을 돌고 도는 선물의 순환 고리에서 빼내 창고나 박물관에 두는 사람이다. 선물은 정확히 이러한 백인 소유자의 본성에 반대한다. 우리가 받은 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나눠 주는 것이 선물의 원리이다. 그런데 인디언식 선물은 서로 주고받는 게 아니다. 대체로 받은 것은 제삼자에게 건네지고 그에 의해 또 다음 사람에게 건네진다. 이처럼 선물이 대가 없이 건네질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는 느낌과 생기가 생겨난다. 수건돌리기가 놀이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듯 선물 - P193
은 계속 돌아가며 사람들 사이에 결속감을 부여하고 느낌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하이드는 예술 작품도 선물처럼 움직인다고 말한다. 시를 한 줄도 읽어본 적 없는 시인, 소설을 한 편도 읽은 적 없는 소설가가 있을까? 좋은 작가들은 언제나 좋은 독자였다. 그들은 다른 예술가의 작품에서 자극받은 생기를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 다른 독자에게 선물하는 독자다. 선물을 받은 인디언이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은 선물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동하듯 예술가는 받은 선물을 증식시켜서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작품에 헌신한다. 우리가 종종 재능이라고 부르는 선물의 출처가 꼭 선배 예술가들인 것만은 아니다. 노발리스에게는 열일곱 살에 요절한 약혼녀가, 네루다에게는 민중이 영감의 원천이었다. 재능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든 좋은 시와 그림, 음악과 영화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늘 느낌이 생겨나고 정서적 유대 속에서 서로 접촉하는 공동체가 마술처럼 생겨난다. 아, 우리는 이 시, 이 소설, 이 음악을 사랑해. 우리는 함께하며 고통을 통과할 수 있어. - P194
다른 존재들을 구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늘 하던 대로, 그러나 에너지의 방향을 조금 바꿔서, 매일매일 움직이면 될 뿐. 우리의 사랑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듯 구원도 혁명도 그럴 것이다. - P20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대낮에는 별들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들을 대낮처럼 환한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별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결과로 생겨나는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제 안에서 춤추는 별을 찾게 된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라. 심지어 행복을 원하는 마음까지도. 니체는 춤추는 별을 언급한 다음, 행복을 찾아다니는 것은 비천한 인간의 일이라고 덧붙인다. 행복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새로운 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에서 우리가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당한다고 말한다. 행복이 지배의 기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은 이제 우리가 따라야 할 절대적으로 올바른 길로 간주된다. 이를 확인해주는 기본 지표들도 있는데, 결혼이나 안정된 가족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많은 부모가 이렇게 말한다. ‘얘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너의 행복뿐이다. 그러니 네가 뭘 하고 싶든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해라. 때 맞춰 결혼하고 행복한 주부, 행복한 가장이 되어라. 빨리 안정을 이루어라........‘ 그러나 세상의 아이들아,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는 삶은 불행할 거라는 협박에 굴하지 말고, 혼돈을 기꺼이 맛보며 천천히 네 자신이 되어라. 남이나 스스로에게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점점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우리를 향한 그의 다정한 전언이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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