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지음, 안진희 옮김 / 위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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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그렇듯이 심리치료에서도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심리치료사로서 저는 내담자들이 겪는 문제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둡니다. 그 대신 내담자들이 받을 수 있는 보상에 더 주의를 기울입니다. 이런 보상은 내담자들마다 약간씩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습니다. 저는 내담자들이 스스로 더 차분해지고, 더 친절해지고, 더 낙관주의자가 됐다고 느끼면서 상담실을 떠나기 바랍니다. 또한 그들이 더 계획적으로 삶의 선택들을 하고 덜 충동적으로 욕구를 만족시키기를 바랍니다. - P8

저는 행복이란 자신이 가진 것들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질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무엇이 공평한지, 무엇이 가능한지, 무엇이 개연성이 있는지에 대해 기대를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범함에서 기쁨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텔레비전을 즐겨 보지도 쇼핑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행복이 더욱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 연관돼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최선을 다해 돕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선택을 내려야 하는 엄청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특정 연령이 지나고 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만성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중증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은 오만한 태도입니다. 저는 내담자들에게 과거를 복잡한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권유합니다. 그러고선 과거를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창조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슬픔이 자신의 의무들로부터 달아날 명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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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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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한 것은 후퇴할 수도 있고, 닫힌 것이 다시 열리기도 한다는것. 한 사람의 긴 강물 같은 삶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보여주었습니다. - P38

그런데 고백하자면 저도 ‘이렇게까지‘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잘 모릅니다. 그냥 ‘해야 한다‘는 직감만 믿고 따를 뿐이죠. 우리는 알아서 행하기도 하지만 행하고 나서야 왜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되기도 하죠. 저도 나중에 알아챘어요. 손에 쥔건 비록 앙상한 글 몇편일지라도 애를 쓴 그 순간순간이 저를 조금씩 변화시켰다는 걸요. 그건 주부에서 작가로 직업이 달라진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화예요. 욕구하면 안 되는 사람에서 욕구해도 되는 사람으로, ‘욕구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허용하게 됐습니다.
‘욕구란 세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캐럴라인 냅은 <욕구들>에서 정의해요. - P52

자가 소유주이자 살림꾼 울프의 모습은 의외였다. 책에 따르면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으로 번 돈으로 몽크스하우스의 낡은 화장실을 고치고,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올랜도』 인세로는 방과 거실을 증축했다. 『등대로』의 인세로는 런던과 로드멜을 오가기 위한 자동차를 구입하고 말야. 이러한 경제적 자립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두달 후 울프는 진짜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고하네.
세상에나! 울프에게는 멋지고 당당한 삶의 드라마가 있었다. 이토록 생활력 있고 강인한 모습은 어째서 그간 드러나지 않았을까. 여기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의 옮긴이 메이가 친절하게 짚어준다. 울프는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불행한 여성 작가, 광기와 성폭력과 불감증(!) 같은 키워드로 이야기되는 삶"(199면)으로 그동안 소비되었는데, "아름다움, 기쁨, 유머, 관능, 열정, 욕망으로 찰랑대는 삶"(200면)을 살았고 물질적 풍요로부터 얻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활기 넘치는 인물이었다고.
불행한 여성 작가라는 낡은 라벨이 아니라 새로운 라벨, 글 써서 집 가꾸고 차 사는 활기찬 울프의 이야기는 신선했다. - P58

『사랑 예찬』에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여러 문장으로 변주됩니다. 하나만 골라보면요.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좀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둘이 견지하는 충실성에 대한 강조예요. "사랑은 만남으로 요약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성 속에서 실현된다." - P66

30대를 지나고 나니 인연의 지형에 서서히 변화가 생겼습니다. 양육에서 집필로, 주력하는 일이 달라져서겠지요. 40대는 책 쓰는 일과 글쓰기 수업에 온전히 바쳤습니다. 수업이나 책 만드는 일로 만나는 이들과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죠. 짧게는 두어시간부터 길게는 특히 수업에서는 몇 계절을 낯선 이들과 한시적 언어공동체로 만납니다. 직업, 나이, 성별 같은 사회적 외피를 벗고 책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뿔뿔이 흩어지죠. 동창도 아니고 고향 친구도 아닌 문우들. 만나는 순간 충분히 진실했기에 미련이 남지 않는 사이, 이 느슨한 대로 단단한 관계가 저는 좋습니다. - P70

내가 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타인을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했던 과오가 떠올랐다. 여성들끼리의 연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막상 나의 일상과 현실의 구체적인 관계에 놓인 여성을 만나는 일엔 미숙했던 것 같아. 너에 대한 나의 소홀함처럼. 책에도 나오는 대로 먼저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묻거나, 약속을 잡자고 하거나, 시시콜콜 속사정을 묻고 위로하는 일 같은 것들, 마음을 낸 다정한 행동들, 그 계산 없는 노동이 결국 환대이고 연대일 텐데 말이야. 그런 점에서 우리 관계는 나의 무심함에도 지치지 않은 네 손끝에 빚졌다.
『붕대 감기』 말미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고백처럼 네게 전할게.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 P79

뒤처진 새 / 라이너 쿤체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 P84

이 집요한 삶의 배반을 견딜 방법은 없는가. 예전에 어느 문학잡지를 보다가 중국계 미국인 작가 이윤 리 Yiyun Li의 말이 너무 와닿아서 베껴놓은 적이 있어요. 그가 그랬죠.
"삶은 그저 삶일 뿐이지요. 늘 고난이 있습니다. 좋은 순간도 나쁜 순간도 있고, 저는 좋든 나쁘든 그 모든 순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할 테니까요. 그것은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친절은 우리가 베풀거나 베풀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어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에 대한 친절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친절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선택이기 때문에 저는 친절에 대해 쓰는 것이 좋습니다." - P107

우리가 어떤 사람과 ‘일‘ 혹은 ‘일의 성과‘를 통하지 않고 관계 맺는 일이, 사회적 쓸모가 아닌 본연의 욕망을 바탕으로 사람을 알아가는 일이 불가능해진 것 같아. 일이란 게 존재 증명과 생존의 거의 유일한 방편이 되어버린 사회이기에 우린 그토록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겠지. - P115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 세사르 바예호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 연명하는 어두운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공평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노동의 결과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며,
누구의 위에 서거나 아래에 깔린 존재,
세월의 도표는 가진 자에겐 빠짐없이 보여지지만
까마득한 그 옛날부터
백성의 굶주린 방정식에 대해 왕의 눈은 반만 열려있음을 고려해볼 때

인간은 때로 생각에 잠겨 울고 싶어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 쉽사리 내팽개치고,
훌륭한 목수도 되고, 땀 흘리고,
죽이고 그러고도 노래하고, 밥 먹고,
단추 채운다는 것을 어렵잖게 이해한다고 할때

인간이 진정 하나의 동물이지만
고개를 돌릴 때
그의 슬픔이
내 뇌리에 박힌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인간이 가진 물건, 화장실
절망, 자신의 잔인한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 하루를 지우는 존재임을 생각해볼 때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그는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모든 서류를 살펴볼 때,
아주 조그맣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안경을 써가며 볼 때

손짓을 하자
그는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 P122

그날 북토크에서 저는 교사에게 말했어요. 내 자식이 특성화고를 가지 않아서 현장실습은 안 하다라더 청년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나중에 직장을 다니며 노동자로 살아간다. 평균수명이 길어져서 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나이들어 비정규직으로 재취업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적자생존으로 돌아가는 경쟁 시스템은 멀쩡하던 사람도 ‘늘 화가 난 사람‘이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이렇게 폭력이 만연한 풍토에서 어느 직종이라고 해서, 어떤 스펙으로 무장을 한들, 몇살이라고 해서 안전할 수 있겠느냐고요.
무엇보다 대다수 보호자가 내가 혹은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까봐 걱정하지만 내가 혹은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정해야만 이런 폭력적인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준이 어머니가 자식의 죽음을 걸고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도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지 말아야 내 아이도 지킬 수 있다는 호소라고요. - P160

세월호 가족 이야기가 그래서 좋았습니다. 5년이란 고통의 시간을 견딘 목소리가, 슬픔에 단련된 말들이 쟁쟁하게 빛나는 슬픔의 교과서. 해야 할 말과 해선 안 될 말이 무엇인지 배운 것만으로도 큰 공부였어요. 그리고 좋은 책이 그렇듯 삶과 사람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담겼고요. 슬픔을 다루는 법이 정신을 단련하는 길로 통합니다. - P171

도대체 상처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란 무엇일까. 그건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선생님은 세월호참사 때 말씀하셨어요. 결국 내가 사람답게 사는 사회에서 살고자 한다면,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묻습니다. 왜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요. 그럴 때 선생님에게 배운 아도르노의 말을 전합니다.
"나의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줄 알아야 된다." - P178

한 사람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주체적인 연애를 하기 위해선 평소에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대화하고, 그것을 실행하고, 그 실행에 실패할 기회가 필요하다고요. 레드 말대로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데 섹스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 P220

솔닛은 세상의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하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합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세상을 둘러싼 그 물의 일부가 되어, 기존의 이야기들을 훼손하거나 강화할" 거라고요. 그러니까 부당함에 침묵하지 말자, 반박하고 저항하는 말들이 물처럼 넘치도록 하자는 뜻이겠죠. - P237

글쓰기는 경험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죠. 의지보다 기술의 영역이라서 생각을 연마할 연장이 필요하답니다. 내면의 낡은 생각(기간제 교사는 무능하다)을 부수고 새로운 사유(수업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데도 기간제 교사는 왜 무능한 것 같고 정교사보다 낮은 보수를 받을까)를 만들어나가는 도구, 이걸 니체 Friedrich W. Nietzsche는 ‘망치‘라고 했고, 카프카 Franz Kafka는 ‘도끼‘라고 했습니다. - P241

자기와 거리를 두는 ‘바깥의 시선‘을 갖는 것만큼 ‘내면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도 중요한 것 같아요. 고통은 눈으로 보이지 않잖아요. 전적으로 ‘감‘으로 찾아오는 신호라서 자신에게 집중해 보지 않으면 느낌이 퇴화합니다. 캄빌리는 아버지 지시대로만 살다보니 자신보다 아버지의 감정과 기분에 집중하느라 자기 감각을 잃습니다. 시험성적을 받아보고는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라고 말해요. 아버지의 언어로 자기 상태를 해석하죠. 생각과 감정은 자꾸 표현해야 섬세해지고 발달하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아버지의 통제 구역인 집을 벗어나 고모, 사촌, 신부와 어울리면서부터 감정이 다양해지고 존중받는 기분이 무엇인지도 배워갑니다. - P138

저는 탁아소를 인간 대 자본의 투쟁이 일어나는 최전방의 상징으로 읽었어요.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에 제일 먼저 타격을 입고 가장 약한 이들이 모여 있기에 사회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탁아소가 쉽게 폐쇄되는 사회에서 청년들이라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긴축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고독하게, 그리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며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쁠 것이 분명하다‘는 어두운 전망을 품는 젊은이를 양산했다"고 지적해요.
……
그곳이 어디든지 성별, 나이, 직업, 종교, 성적 지향 등 사회적 조건이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 더 나은 세상을 그려보는 말들이 흘러들고 경합하는 곳이 ‘좋은 공동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갈 곳을 찾지 못해 다시 대학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죠. 그래도 순순히 타협하지 않고 방황하고 다른 삶의 자리를 모색하는 시간이, 그 결기가 당신의 존엄을 지켜줄 것입니다. "하나의 커뮤니티에서 담담하게 시작되는 변혁"을 들려주면서도 그러나 "지름길이란 없다"고 말하는 저자의 조언을 전하며, 인간다운 삶을 모색하는 그대의 계급투쟁을 지지합니다. - P273

당연한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로 세상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변화는 어슷비슷한 욕망의 재생산이 이뤄지는 집단이 아니라 상식과 규범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장에서 일어나겠지요. 어느 모임이든 헤어질 때 발걸음이 가벼운 곳으로 갑시다. 우리 삶에 이로운 곳은 몸이 알려줄 테니까요. - P280

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사는 작품을 만드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하다." 찾아 나서는 행위 자체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사는 동안 불행 상태가 해소되는 순간은 짧고, 지치고 불행한 채로 사는 시기가 더 길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의 해결사가 아니라 불행을 말해도 좋을 관계, 일단 밥이나 먹자고 할 사람이 아닐까요. - P284

떠나간 이들이 가끔 떠오릅니다. 쓸쓸한 마음이 들면서도 내 역량 밖의 일이라며 고개를 돌렸어요. 그런데 요즘은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게 돼요. ‘사람 쉽게 안 변한다‘는 말이 타인과 부딪치기를 꺼리는 게으름에 대한 자기정당화는 아닐까. 또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인데, 배우려고 온 사람이 배울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건 당사자의 용기 부족이라는 원인도 있지만 공동체의 무능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 P291

여자로 사는 일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이죠. 밤에 다니는 것도,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직업을 택하는 것도, 화장부터 결혼까지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한글 떼기부터 페미니즘까지 공부하는 이유도... 이 세상 ‘아버지들‘에게 설명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삶의 통로가 겨우 확보됐죠.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공감력이란 게 있다면 이 자기 증명의 혹독한 훈련 덕분일 것입니다.
인류를 둘로 나눠봅니다. 사사건건 자기 존재와 사정을 남에게 설명해야 했던 사람, 굳이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사람. 페미니스트에 반감을 가진 아들을 둔 엄마도, 걸 페미니스트도, 어긋난 대화로 고민하는 커트머리 여학생도 태어나서부터 전자의 삶을 산 경우겠지요. 남(자)의 기분을 헤아려 조심스럽게 말하고 이해시키는 건 여자의 임무라고 배웠으니까요.
저도 감정노동을 소통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설명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지적·정서적·감정적 노동을 한쪽에서 오래 전담했습니다. 이 관계의 불균형이 공감능력의 양극화를 낳고 있겠지요. 사실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은 그가 잠재적 피해자의 고통을 알면 사라질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몸을 돌려 타인의 입장으로 건너가보는 일은 지구를 반대로 돌리는 일처럼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게 희망입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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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이종숙 옮김 / 창비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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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

당신이 춤춘 그 모든 것을 그들은 당신에게서 앗아간다오
그것을 그냥 앗아간다오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들은 당신 안의 춤꾼을 죽여버린다오
그녀를 서서히 뭉개버린다오,
해골로 만들고, 연기로 만들어버린다오,
그녀가 이 춤을
당신과 함께 추기 전에.

그들은 당신의 룸바와 탱고를 부숴버리고,
당신을 부숴버리고,
당신의 사육제를 오줌 속에 녹여버리고,
당신 음반의 피막에 바늘을 찔러 넣는다오.
그들은 트럼펫을 칼처럼 쓰고
당신의 바이올린을 산산이 부숴버린다오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들은 당신을 번호 없는
벽 속에 가둔다오,

재로 덮인 거울과 노래 사이에,
그들은 당신의 손에, 당신의 발에, 당신의 쇄골에 자물쇠를 채우고
자 춤춰봐 이 병신아 춤춰
이 니미씹할, 자, 춤춰라고 말한다오.
그들은 당신을 무덤형에 처하고, 당신을 모래로 문지른다오.

그러니 춤을 춥시다
내 사랑하는 이여,
그들이 우리가 춤춘 그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으니
-바로 지금,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라
누군가가 반짝이는 군화를 신어보고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지금. - P94

우리는 모두 반향이다. 원형적이고 발단적인 어떤 것의 그림자다, 물림옷이고, 잔여물이며, 앞으로 나타날 유토피아적인 어떤 것에 대한 예감이다. - P118

이 시편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가 통역하고자 하는 것도 피해당사자들에 의한 직접적인 증언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증인들은 억류되었고, 증발되었고, 살해당했으며, 그들이 당한 피해의 경험은 침묵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삐노체뜨가 1973년 9월 11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흔적도 없이 청소해버린 그 수천명의 "억류되고 사라진 사람들" (losdetenidos desaparecidos)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증언은 그들이 뒤에 남긴 빈자리를 통해, 남겨진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의 고통과 그리움, 슬픔과 분노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고, 시인은 그렇게 전달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통역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잡혀가고 사라지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뿐 상세한 정황 설명은 듣지 못한다. 보고되고 통역되는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로 감정적인) 파장이다. 사건은 거의 언제나 그 반향에 의해 반향을 타고 전달된다. - P123

이 시편이 증언하는 바 고통으로 연대된 칠레의 안과 밖은 (잔인하게도) 정치가 개인적 삶의 내밀한 구석구석까지 후비고 들어올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냥 내버려뒀으면 계속 평화로웠을 일상이 어느날 갑자기 찢겨져나가고, "살아 움직이는 비명처럼/목구멍을 걷어차는 발길질처럼"(「나는 가끔 ...」) 충격적인 방식으로 정치와 사적인 삶의 연속성이 드러나면서 개인의 목소리는 정치의 세계로 끌려나오게 된다. "그들은"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만 내 세계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내 꿈 속에서"
"그대"를 죽인다(「혼례식」). 그리하여 이들의 얘기 하나하나에 담긴 개별적 슬픔은 그 자체로서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 되고 칠레 역사의 기록이 된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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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읽기

1
내가 사랑하는 시인 헤르베르트는 책 읽기의 무용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누군가 그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그 책들이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그 책들을 읽은 뒤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랬다. 늘 무언가를 읽고 있었으니 읽은 만큼 삶이 바뀌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현명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헤르베르트처럼 읽은 책들의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느 날은 책장에서 언젠가 꼭 읽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책을 문득 꺼내 펼쳐보고는 내가 좋아하는 펜으로 내가 좋아할 법한 문장에 밑줄이 쳐진 걸 보고 놀랄 때도 있다. 이 책을 언제 읽었더라?

2
"세계는 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계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은 독일 시인 슈나이더의 이 문장으로 저자 서문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 빨간 수첩과 내 머릿속은 이렇게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한 타인의 문장들로 가득하다. 가끔은 내가 이름 없는 낡은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 속 인물같이 느껴진다. 출처를 쉽게 잊는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조각들이 어디서 왔는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나 학술 작업을 할 때를 빼고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조각의 출처를 기억하는 놀라운 편집증의 소유자는 드물다. 보르헤스 소설의 주인공, 기억의 천재 푸네스 정도?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죽고만 싶었던 숱한 순간에 나를 살린 누군가의 문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도 회복의 과정도 전부 잊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삶을 연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고백했던 헤르베르트를 봐도 그렇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한 뼘이라도 더 훌륭해지는 건 아니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쉼 없이 읽었다. 그리스·로마 고전, 과학적 사회주의, 우주비행, 벌의 삶에 관한 책들, 키츠 같은 시인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플라톤, 데카르트, 스피노자, 니체 같은 철학자들의 책, 우파니샤드 같은 종교서 등등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의 고백처럼 책 속에서 연명했던 것이다.

3
프루스트는 위고를 열심히 읽었다. 그는 『되찾은 시간에서 "풀은 자라야 하고 아이들은 죽어야 한다"는 위고의 말을 인용한 뒤 덧붙인다. 예술의 잔인한 법칙은 존재들이 죽어야 하고 우리 자신도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고 죽어야하는 것이라고. 진실하지만 서늘한 말이다.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카프카, 울프, 카뮈, 베유, 톨스토이, 플라스, 니체, 아렌트・・・・・・ 여기서 다룬 저자들은 다 그렇다.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소송이거나 400년 내내 분투한 뒤에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소망,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윗돌, 보상 없이 행하는 사랑, 끝없이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겨울 숲 같은 것이다. 또는 내 속에 울음이 사는 시간, 경멸을 통해서 극복되는 운명의시간, 사회가 찍어내는 자동인형 같은 삶에 맞서는 시간이다.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고,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 P7

실비아 플라스도 똑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도로 인부들, 선원과 군인들, 술집의 단골손님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 목마른 갈망―이름 없이, 귀 기울여 들으며, 기록하며, 난장판의 일원이 되고 싶은 갈망이―이 모든 게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망가져버리고 만다. 공격당하고 포격당할 위험이 상존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온 마음을 사로잡는 이런 관심은 그들을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은밀한 관계로 유인하는 도발로 곡해되는 일이 흔하다. 아, 제기랄, 그렇다. 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야외에서 잠을 자고, 서부로 여행을 하고, 밤에 마음껏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 - P30

한나 아렌트의 구분법대로라면, 타자를 전제하는 활동인 대화는 ‘행위action‘에 속한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인 작업과 달리, 행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그런데 행위에는 불안이 따른다. 나와 다른 욕구와 관심을 가진 타인들이 내 의도대로 반응하지 않아서 행위의 결과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불안이란 대부분 이런 것이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통제 과정에 속해서 불안을 제거하려는 욕구가 생겨난다.
‘행위‘하는 대신 ‘기능‘하려는 욕구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요아힘 페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기능하기 functioning‘는 행위하기를 멈추는 것임을 강조한다.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된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부모든, CEO든, 총통이든) 한 명이면 족하고 나머지는 그 계획에 따라 기능하면서 예상한 결과를 얻으면 된다. 대화는 불필요하다. 매뉴얼을 숙지하고 실행하라. 만일 최고 결정권자가 머릿속에서 지옥을 그리면 지옥의 질서가 그대로 실현된다. 이것이 기능적 안전성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안전하게 지옥에 도착했다! 그녀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게서 안전성에의 터무니없이 멍청한 열정을 발견했다. 그리고 기능하기는 복종의 쾌감을 주는 변태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행위하기가 기능하기로 대체될 때 대화와 설득의 공간인 공적영역은 사라진다. 상명하복의 원칙을 신봉하고, 공무원과 국민은 자기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만하면 된다고 여기는 최고 결정권자가 있다고 하자. 자신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이라 확신할 테지만, 아렌트는 망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그의 마음이 설령 진심일지라도 정치는 실종되고 만다. 그가 유일한 진리의 담지자를 자처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소통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대화하고 행위할 가능성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 P43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외쳤던 연인에게 바치는 소설이라면 소설의 주인공에게 모든 행복과 사랑을 다 줄 법도 한데 작가는 그러지 않았다. 올랜도의 완벽함은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필연적 어긋남과 빈 구멍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처럼 활용된다. 심지어 그토록 아름답고 총명해서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올랜도이건만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러시아 공주 사샤에게는 버림받는다. 사샤가 더 멋진 사람을 사랑해서 올랜도를 배신한 것도 아니다. 사샤는 올랜도와의 야반도주 약속을 저버리고 러시아로 떠나는 쪽을 택했다. 버지니아는 우리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네 안에 사랑받지 못할 어떤 결핍, 열등함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저 너의 사샤는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나갔을 뿐이야.
400년이 흐르도록 올랜도는 사샤를 떠올리고, 여성의 육체에 더 끌리고 여성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늘 사랑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올랜도 역시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여러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소중하지만 자신이 짜 넣을 인생의 무늬들이 모두 관계로만 환원된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랜도는 고독을 사랑하는 실존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전기작가는 그가 굼뜬 것이 그가 종종 고독을 사랑하는 성향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랍상자 따위에 걸려 넘어지는 올랜도는 당연히 고독한 장소나 광활한 전망들을 좋아했고, 자기가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혼자라고 느끼기를 좋아했다." - P33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해."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 P61

그는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연명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떠올리면 벽 위의 그림자처럼 느껴질만큼 학교, 군대, 사무실, 집, 저녁 파티, 이 모든 곳에서 그는언제나 창백하고 흐릿한 존재였다. 이 지독하게 평범한 삶에 대해 그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어떻게 아내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힘은 긴장하고 있었노라고 어리석은 짓 하지 않고 꼬임에 속지 않고 더 강한 자와는 어울리지 않기 위해서

그는 평범함을 유지하려고 애써왔다. 평범함은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우리가 그 상태를 지키기 위해 인생의 한순간도 교활하거나 타협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순간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그는 우리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여 발언한다. 그래서 그가 왜 내가 항상 피로와 불안과 고통을 느끼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도대체 나는 언제쯤 쉴 권리를 가지게 되는 거냐고 질문할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도 그 답이 가장 궁금하기 때문이다. - P96

"고통이나 비참함 앞에서 달아나지 마라. 덧없는 이익들, 특권들, 일시적인 명예들 때문에 네 자신 안에서 네가 그리도 잘 느끼고 있는 것의 가장 작은 조각까지도 양보하지마라." 이렇게 말했던 루오는 노년에 발표한 판화집 『미제레레』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미제레레 miserere‘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라는 라틴어 성경 구절에서 온 제목이다. - P107

시인은 오래전의 시 「6월」에서 썼다. "어딘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아름다운 힘은 없을까/ 동시대를 함께 산다는 친근함 즐거움 그리고 분노가/ 예리한 힘이 되어 모습을 드러낼". - P110

시인들은 목록의 단순한 양식이 주는 기쁨을 잘 알고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즐거움」을 보라.

아침에 처음으로 창밖 내다보기
다시 찾아낸 오래된 책
감격에 겨운 얼굴들
눈, 계절의 바뀜
신문

변증법
샤워, 헤엄치기
옛 음악
편안한 신발
이해하기
새로운 음악
글쓰기, 어린 식물 심기
여행하기
노래하기
친절하기 - P112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은엉겅퀴, 라이너 쿤체

……
신성해진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위해 사랑을 흘러넘치게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타자를 위해 물러서며 자신을 한껏 움츠리는 일이다. - P126

히피는 타락한 마약쟁이 집단에 불과하다고 폭로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약에 절어 몽롱한 상태로도 서로를 돌보고 채식주의와 명상을 고집하고 체포, 집단강간, 성병, 임신, 폭행, 굶주림을 피하는 법을 알리는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조앤은 거기서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 애쓰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고 확신한다.
……
이 예리한 글들을 읽다 보면, 공정, 불공정, 진보, 보수와 같이 우리 사회를 떠도는 말에 대해 우리가 너무 막연한 수준의 지지와 반대만을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단순한 결론을 향해 가는 언어 말고 제대로 듣고 충분히 관찰한 뒤에 생겨나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언어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되자는 간곡한 요청을 그녀에게서 듣게 된다. - P135

카뮈에 따르면, 비극은 피해야 할 게 아니라 자각하고 응수해야 할 운명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싸우든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어렵다. 조금 전진한 기분이었는데 도로 제자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P141

베유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랑을 지키는 겁니다.’ 인간의 사랑은 보잘것없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 싶어도 세계의 난폭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유는 부재하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에 대한 경애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뭐든지 하기"는 인간을 운명의 중력에서 뜯어내어 영원 속으로 들어 올리는 사랑이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은 승리에 대한 상상 없이, 미래의 보상을 구하지 않고 전투에서 목숨을 거는 병사와 같다.
……
인류에게 공통적 처참함을 만들어내는 몰개성적인 힘의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몰개성적인 사랑뿐이라는 뜻이다. 「신을 기다리며』에 실린 한 에세이에서 베유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줄 사람들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라고 말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즉 "당신의 고통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는 일일 뿐이다. 우리는 그 물음을 통해 나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 끔찍한 불행과 만나 천형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거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불행한 사람을 집합체의 단위로서나 ‘불행한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회 계급의 하나로 보지 않고 말이다." 자신도 언제든 불행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수난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고통을 경험한 이를 비난하거나 사물처럼 무시하게 된다. 현실에서 수난은 평범한 이들 모두에게 닥친다는 정확한 인식만이 약자에 대한 경멸을 막을 수 있다." - P148

"아! 매일 아침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이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져 우리들 자신의 손에서 탄생되어 나올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위대한 삶이 되랴!" 닦고 치우는 일을 통해서, 나아가 일상을 이루는 크고 작은 일들을 직접해봄으로써 삶을 갱신하는 것은 예술적인 작업이다.
……
바슐라르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한결 더 깊이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사물들에 스스로를 주고 스스로에게 사물들을 줌으로써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살림살이의 영역이든 또 다른 노동의 영역이든 우리가 장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느낌 속에서 일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눈길이란 무엇인가. 몽상가의 새로운 눈길은 사물에 대한 깊은 몽상을 통해서 그가 새로운 이미지를 살(체험)게 되었을 때 생겨난다. - P162

그래서 푼크툼은 꼭 별난 순간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다만 거기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난 데라고는 전혀 없는 사진들 속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특별할 것도 없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찍고 그것을 계속 바라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타임라인을 흐르는 그토록 많은 구름과 노을 사진들. 그것은 우리가 금세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있었다는 다정한 증언이자 그들이 가버린 뒤에도 계속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조금은 쓸쓸한 약속이다.
사진 속의 연인, 친구, 강아지와 고양이들. 우리는 떠난 이들을 쉽게 보내지 못하고 그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을 담아서 ‘밝은 방‘에 자꾸 쌓아두려고 한다. 네가 거기 있었지. 나는 너를 보았지. 이제 안녕, 안녕....... 언제나 사진은 작별 인사인 동시에 지금 곁에 없는 너와 만나는 재회의 인사다. - P184

‘백인식 소유자white man keeper‘는 "재산을 돌고 도는 선물의 순환 고리에서 빼내 창고나 박물관에 두는 사람이다. 선물은 정확히 이러한 백인 소유자의 본성에 반대한다. 우리가 받은 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나눠 주는 것이 선물의 원리이다. 그런데 인디언식 선물은 서로 주고받는 게 아니다. 대체로 받은 것은 제삼자에게 건네지고 그에 의해 또 다음 사람에게 건네진다. 이처럼 선물이 대가 없이 건네질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는 느낌과 생기가 생겨난다. 수건돌리기가 놀이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듯 선물 - P193

은 계속 돌아가며 사람들 사이에 결속감을 부여하고 느낌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하이드는 예술 작품도 선물처럼 움직인다고 말한다. 시를 한 줄도 읽어본 적 없는 시인, 소설을 한 편도 읽은 적 없는 소설가가 있을까? 좋은 작가들은 언제나 좋은 독자였다. 그들은 다른 예술가의 작품에서 자극받은 생기를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 다른 독자에게 선물하는 독자다. 선물을 받은 인디언이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은 선물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동하듯 예술가는 받은 선물을 증식시켜서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작품에 헌신한다. 우리가 종종 재능이라고 부르는 선물의 출처가 꼭 선배 예술가들인 것만은 아니다. 노발리스에게는 열일곱 살에 요절한 약혼녀가, 네루다에게는 민중이 영감의 원천이었다. 재능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든 좋은 시와 그림, 음악과 영화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늘 느낌이 생겨나고 정서적 유대 속에서 서로 접촉하는 공동체가 마술처럼 생겨난다. 아, 우리는 이 시, 이 소설, 이 음악을 사랑해. 우리는 함께하며 고통을 통과할 수 있어. - P194

다른 존재들을 구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늘 하던 대로, 그러나 에너지의 방향을 조금 바꿔서, 매일매일 움직이면 될 뿐. 우리의 사랑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듯 구원도 혁명도 그럴 것이다. - P20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대낮에는 별들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들을 대낮처럼 환한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별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결과로 생겨나는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제 안에서 춤추는 별을 찾게 된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라. 심지어 행복을 원하는 마음까지도. 니체는 춤추는 별을 언급한 다음, 행복을 찾아다니는 것은 비천한 인간의 일이라고 덧붙인다. 행복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새로운 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에서 우리가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당한다고 말한다. 행복이 지배의 기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은 이제 우리가 따라야 할 절대적으로 올바른 길로 간주된다. 이를 확인해주는 기본 지표들도 있는데, 결혼이나 안정된 가족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많은 부모가 이렇게 말한다. ‘얘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너의 행복뿐이다. 그러니 네가 뭘 하고 싶든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해라. 때 맞춰 결혼하고 행복한 주부, 행복한 가장이 되어라. 빨리 안정을 이루어라........‘
그러나 세상의 아이들아,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는 삶은 불행할 거라는 협박에 굴하지 말고, 혼돈을 기꺼이 맛보며 천천히 네 자신이 되어라. 남이나 스스로에게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점점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우리를 향한 그의 다정한 전언이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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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에세이&
김현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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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동사,라고 어느글에 쓴 적 있고. 덧붙이자면 일렁이다는 여름 동사의 일종. 겨울의 동사는 속삭이다. 봄의 동사는 어른거리다. 가을의 동사는 흘러가다. 어른거리고 일렁이고 흘러가 속삭이는 마음의 사계절. 동사를 활용해 마음의 사계절을 그려보세요. 그것이 바로 당신을 설명하는 일. - P26

고요히 한 생각 머물면
앞 강물도 지워지고
앞산 숲도 지워진다

너는 말없이 말하고
나는 들리지 않게 듣는다

-강상기 묵언(默言) 부분 - P66

폭력 피해 여성 없는 세상을 꿈꿨던 (여성인권운동가) 이문자님의 자취에 마음이 동하여 그가 일흔살에 남긴 이런 말을 몇번씩 되뇌어보는 하루.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디뎠고,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았다. - P83

언젠가
내 얼굴이 나의 얼굴을 내려다보게 될 때
나는 내게 묻게 되리

봄이 저 멀리 아득해지는 이유를
여름이 콸콸 쏟아지는 이유를
가을은 어디까지 떨어져 내리는가
겨울은 왜 마음을 쌓아 올리는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리

나는 살아왔으므로
이유도 모르고 살아왔으므로

(…)

살아 있다는 것
신이 결코 알 수 없는 것

신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불행한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행복한 것

친구들
그대들이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빛을 채워주는 날
작고 따뜻한 손으로 내게 말 걸어주시오

우리는 평화로운 영혼임을
우리는 확신에 찬 신념임을
우리는 다정한 우정임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음을

그리하여
언젠가 내 얼굴이 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들의 곁에서 다시
첫 우정의 말을 시작할 것이니

고맙소, 친구들이여 - P85

어쩌면 많은 작가들이 조장하고 있는 것은 빛나는 미래에 대해 꿈꾸기일 것이다. 전진하지 않고 후퇴하는 현실의 이야기를 바꿔 쓰는 사람. 그 행동하는 몽상가를 작가라 달리 부르는 것이기도 하리라.
오랫동안 성소수자 해방에 헌신한 운동가 피터 태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신이 원하는세상을 꿈꾸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꿈이 생겼으니,
이제 나아가자고. - P120

언젠가 한번 한 책방에서 열린 문학 행사의 진행자가 되어 작가와의 만남을 이끈 적이 있다. 참여 인원이 적어서 행사라기보다는 정모 같은 분위기가 되었는데,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에 한 여성이 말했다.
-저는 마음에 병이 있습니다.
듣자 하니 그이 마음의 병은 말을 살아지 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날 그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헤아려 적은 글에서 나는 마음에 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지. 나도, 너도 마음에 말이 있지. 다 말해버릴까, 하는 고민을 최근에 꽤 여러번 했다. 그 가운데 한번은 말했다.
-내가 받은 고통을 생각해봤어?
그러나 그러니까 누군들 할 말이 없겠는가. - P180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시는 사치가 아니라고 썼습니다. 1977년에 백인 아버지들은 생각하므로 존재한다 말하지만, 흑인 어머니는 느끼므로 자유롭다 (꿈속에서) 속삭인다. 시는 그 꿈의 실행을(혁명적 요구를) 선언하는 새 언어를 만들어낸다. 시를 사치라고 폄하한다면 그것은(여성됨이라는 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얘기하지요. 오드리 로드의 ‘행동을 위한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 <시스터 아웃사이더>(후마니타스 2018)는 1984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34년이 지나서야 한국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삶을 성찰할 때,라는 말로 시작해 우리가 진실을 말한다면,이라는 말로 끝납니다. 삶을 성찰해야만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울화의 불씨가 진실의 불씨가 된다는 말. - P206






그리고 어깨

강아솔의 노래를 들으며 사랑을 달리 부를 수 있는 말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고 고개를 먼저 끄덕였다. 봄. 정말 봄이구나. 창밖을 내다보니 마침 회갈색 직박구리 한마리가 날개를 펴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생명의 몸짓에서 사랑을 보았다고 한다면 믿으실지 손님이 한명도 없는 카페에 앉아 실로 오랜만에 말갛게 미소 지었다. 식은 사과차에 미지근한 물을 넣어 마셨는데도 제법 따스한 기운이 몸에 돌았다. 몸이 따뜻해지는 일도 역시 사랑이고, 들키는지도 모르고 혼자 웃는 일도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말없이 어깨를 낮추는 것은 각각 아름다운 일이지만, 역시 엇갈리지 않고 동시에 이루어질 때 더 사랑스럽다. 나란히 숨을 고르는 일. 사랑은 모쪼록 그런 일.
……
빛과 내가(그림자가) 정말 좋아하는 ‘우리의 일’은 잠이 들기 전에 서로의 이마를 짚어주거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아주었다 놓는 일. 먼저 잠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거나 발등을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그런 사랑의 일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했다. 강아솔은 우리가 우리의 일을 그토록 아끼는 까닭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마음이 순해지는 일, 사랑.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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