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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그녀는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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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에 읽는 책선정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게으른 활자중독자는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읽는다.
너무 몰입도가 높은 책 빼고
너무 진지하거나 어려운 책 빼고
그냥 무난한 거 아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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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장면, 영상을 연출하는 듯한 묘사를 한다.
마치 영화를 찍는 사람이 쓴 글 처럼
머릿속에 장면이 잘 그려지고 책장이 잘 넘어가는 편한 글.
그리고 일본 소설 특유의 잔잔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살짝 막장의 연애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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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연애소설이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연애소설인 줄을 미리 알았다면 안 읽었을 거야.
일본연애소설은 잔잔한 척 하면서 사람 기빨리게 하는데 전매특허가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딱히 희망적인 메세지를 던지지도 않으니까.
그런 일본소설 특유의 감성을 좋아했던 한때도 있었지만
나이 먹을 수록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은 생각만 들어서
잘 안 읽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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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책장이 잘 넘어가긴 하는데 넘어갈 수록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을까아...
그런 회의감이 드는 거야
남의 지루한 연애 훔쳐보는게 뭐 재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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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는 여성 등장인물의 외모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참 불편했다.
등장인물들은 다 하나같이 미인이고 그녀들의 외모에 대해 참 자세히도 묘사한다. 유독 여자들만 외적 묘사에 치중한다. 꼭 필요한 묘사였을까. 의문이다.
이제와서는 남주인공 시각에서 소설이 전개되니까
남주 시각에서 자연스러운 것일 지도 모른다는 관대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ㅎㅎ (이렇게까지 철저히 늘 모든 여자들을 성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보편적인 남자들의 속성이란 말인가 ㅎㅎㅎ)
읽고 있을 때는 여성캐릭터의 외모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시작될때마다
양판소에서 새 등장인물 나올 때마다 키는 몇이고 눈색 머리카락 색이 뭔지부터 설명해주던 게 생각났다.
뭐야 이건. 아저씨들을 위한 할리퀸 연애소설인가 싶기도 했고.
(이건 진짜 여담인데 일본소설에서는 유난히 여자들의 패티큐어에 성적 의미를 부여하는 걸 자주 본다. 아니 도대체 왜 ?
이 인간들은 집단적 성도착증이라도 있는 것인가?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만큼이나 강한 거부감이 있는데
그들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여성을 향한 시선 - 성적대상화에 대한 거부감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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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읽어갔던 건 ,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사랑을 향한 기대도 없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 자체가 내겐 없는게 아닌가 의구심을 품고서
그렇다고 독신주의를 선언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뭐하나 적극적으로 애쓰는 것 없이,
한번도 사랑을 적극적으로 먼저 잡아본 적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 멀어질 때 조차 붙잡기는 커녕 도리어 더 밀어내 버리는,
좋은 것을 공유하며 사랑하길 갈망하면도
싫은 것을 공유하는 사랑에 안주하고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는,
정신과의사 주제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 주인공.
그런 무색무취의 삶이 나와 닮은 점이 있다고,
또 어쩌면, 최근에 내가 잃어버린 그 사람과도 닮은 면이 있다고 느껴서.
그리고 반복되는 메세지
- 과연 함께 하는 사람의 사랑을 어떻게 확신할수 있겠는가?
그 마음의 진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사랑의 뜨거움은 한순간에 지나가는데 .
상대방은 커녕 자신의 마음조차 우리는 스스로 알지 못하지 않는가 ?
그 의문에 공감하는 면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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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로 가면서 좋았다.
잔잔하고 지루하게 끌고 가다가 후반부에 빵 터뜨리는게 이 작가의 특기인가 싶을 정도로.(이하 스포)
하루가 죽었다는 게 밝혀지고 약혼녀가 사라지면서부터의 전개가 좋았다.
일본소설 읽을 때 종종 갖는 감정
- 그래서 뭐 어쩌라고 ? 란 의문을 남기지 않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네가 잃어버리고 놓친 것을 다시 찾으라고.
너는 마치 처음부터 그런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고. 그런 뜨거움이 네게 있었다고.
그런 메세지를 던져주어서 난 좋았던 것 같다.
죽은 첫사랑이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나
첫사랑과 의미가 있었던 장소 - 심지어 인도 해변에서 사라진 약혼녀를 재혼하는 결말은
음. 지나치게 작위적인 만화적 연출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의 메세지를 던지며 끝맺는 결말을 좋아한다.
교섭 끝에 사과 하나를 획득한 그녀가 후지시로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내기하자!" 별안간 큰 소리를 지르는 야요이를 보고 놀란 후지시로가 숨을 집어삼켰다. 사육사도 난처해하며 주위를 신경쓰듯 둘러보았다. 원숭이들이 새 사과를 노리며 무리지어 다가왔다. "이 사과를 어느 원숭이가 먹을까. 둘이 내기해." 야요이는 딱히 신경쓰는 기색도 없이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그런데 뭘 걸죠?" 기세에 눌린 후지시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사과를 공중으로 한 번 던졌다 다시 잡은 후 대답했다. "만약 내가 이기면, 다음 주에도 후지시로 군을 또 만날 거야." "내가 이기면?"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해. 어때?" "왠지 가슴 아픈 내기네요." "그래, 가슴 아프지. 그래도 할 거지?" "그렇게 중요한 걸 원숭이가 정하게 해도 될까요?" "그럼, 어떻게 정하면 좋을 것 같아?" "하긴, 원숭이가 정해주는 게 딱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가슴이 떨리고, 웃음이 솟구쳐 올랐다. 역시 야요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 없는 눈빛. 장난스럽게 웃는 아름다운 입술. 뜨거운 감정을 품고 있는데도 더욱 차갑고 맑아지는 목소리. 그녀의 이런 면을 자기가 원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야요이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독수리 발톱처럼 펼쳐지며 사과를 거머쥐었다. 미래를 움켜쥐는 것 같은 그 손가락 속에서 사과가 빨갛게 반짝였다.
"그런데 내 생각은 그래요. 사람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고독해진다고. 그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니까."
나는 사랑했을 때 비로소 사랑받았다. 그것은 흡사 일식 같았어요.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똑같이 겹쳐진 지극히 짧은 한순간의 찰나. 거역할 수 없이 오늘의 사랑에서 내일의 사랑으로 변해가죠. 그렇지만 그 한순간을 공유할 수 있었던 두 사람만이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난 생각해요.
잰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자, 짙은 남색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바다 끝에 작은 섬에 거대한 석상이 서 있었다. 푸른색과 흰색과 오렌지색으로 그러데이션이 진 하늘이 성스러운 석상의 실루엣을 그렸다. 인도양과 아라비아해와 벵골만, 세 해류가 교차하는 성지야. 그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완만하게 경사진 해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어스름한 모래사장에 모인 수천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모래사장에 늘어선 사리를 입은 여성들. 파도가 밀려드는 물가에 서서 바다에 몸을 절반쯤 담그고 수평선 끝을 바라보는 수도승들. 군중속에 뒤섞인 후지시로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끝으로 흐릿한 빛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출을 놓치지 않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안에 모여든 새들처럼 움직였다.
수평선이 붉은 빛으로 스며들어 흔들리더니 아침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한 빛의 화살이 눈 속으로 날아들었다. 땅을 뒤흔드는 듯한 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환호송도 노호도 아니다. 너무나 성스러운 것을 접한 인간만이 낼 수 있는 소리의 집합. 군중이 일제히 아침 해를 향해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수도승이 거친 파도를 맞서며 잇달아 바다로 들어갔다. 아침햇살을 받아 에메랄드그린 색으로 바뀐 바다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앞에 있는 거대한 석상의 온화한 미소가 후광과 함께 서서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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