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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이라고 말해
우웸 아크판 지음, 김명신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아마도 여태껏 읽은 책 중 가장 슬프고 속상한 책인 것 같다.

나는 표제가 한편(meanwile) 이라고 말해, 라는 뜻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Say You‘re One of Them.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해학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특히 <럭셔리 영구차>는, 정치적 갈등, 석유 이권, 종교 갈등, 폭동과 학살 등의 정치/사회/종교 전반에 아우리는 광범위한 소재와 주제를 잘 버무려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천재적인 작품.
연극으로 재해석해도 대박일 것 같다.

그렇게 독자들은, 전반적으로 흐르는 해학적인 분위기와 이 작가의 천재성에 취해 방심하고 있다가,
맨 마지막 <부모님의 침실>에서 카운터 펀치를 퍽 맞게 되는 것이오.

곱씹을 수록 자꾸만 더 슬퍼지고 무거워지는 글.


주변사람들에게 많이 권하고, 특별히 아이들에게 많이 읽히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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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군주론 완역에서 완독까지 1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종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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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재미는 없었지만
유명하니까 한번쯤 읽어보고 싶었다. 인문고전 추천 1번 이길래..
자기계발서의 고전 같은 느낌이다.
지금 무시하는 자기계발서 중에 핫한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고전으로 남을지도 모를일.

인간사에 대한 시니컬한 통찰은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옳은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해야 한다

인간을 짐승만큼 사납고 위험하지만 그보다 더 탐욕스럽고 잔인한 존재로 그렸다.

인간은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자유 의지를 지닌 고귀한 존재였다.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혼란이 지속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지연시킴으로써 그저 당신에게 불리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고 가서, 사정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만큼 더 나쁘게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강력해지도록 원인 역할을 한 사람은 몰락한다

불만을 가진 자와 변화를 갈망하는 자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당신이 획득한 것을 보유하고자 할 때는, 당신을 도와준 사람들과 당신이 진압한 사람들 양쪽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

당신은 그들을 만족시킬 수도 파멸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회가 가기만 하면 당신은 그 국가를 잃게 될 것이다.

점령당하고 나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또는 그 점령으로 얼마나 이익을 보았는지에 상관없이, 이것들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어떠한 조치를 취하든, 그 주민들을 분열시켜 찢어놓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자유의 이름과 전통의 방식을 잊지 않을 것이며, 기회가 나기만 하면 이런 대의를 위해 들고 일어날 것이다.

잔혹한 행위는 한번에 저지르고 끝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은 그것의 가혹함을 덜 느끼고, 감정도 덜 상하게 될 것이다. 반면 시혜는 조금씩 베풀어야 그 향취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자신이 받은 혜택만큼이나 자신이 베푼 혜택에 의해서도 구속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요컨대, 다른 사람의 갑옷과 무기는 당신에게는 너무 헐겁거나, 너무 무거워 짐이 되거나, 너무 꽉 조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자신의 힘에 기초하지 않은 권력에 대한 명성만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은 없다"

후하다는 평판을 얻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탐욕스럽다는 평판을 듣게 되어, 미움을 받으면서 비난도 받게 되는 것보다는, 인색하다는 평판을 얻어 비난을 받을지라도 미움을 사지는 않는 편이 훨씬 더 지혜롭다.

사람들이 한 약속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다른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는 군주는 몰락하고 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를 가할 때 덜 주저한다. 사랑은 보답이라는 끈으로 유지되는데, 인간은 비열한 존재라서, 자기만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끈은 끊어지고 만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에 의해 유지되는데, 처벌에 대한 공포는 결코 잊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죽음은 금방 잊어버려도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잃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나는 요새를 세우는 사람과 세우지 않는 사람을 모두 칭찬하지만, 요새를 믿고 인민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비난할 것이다.

군주는 또한 진정한 친구이자 진정한 적일 때 존경받는다. 다시 말해, 거리낌 없이 분명하게 한쪽을 지지하고 다른 한쪽에 반대한다고 자신을 드러낼 때 존경받는다. 이러한 방침은 중립을 지키는 것보다 언제나 유익할 것이다

좋은 조언은 그것이 누구에서 나오는지 상관없이 군주의 분별력에서 비롯한 것이지, 군주의 분별력이 좋은 조언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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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그녀는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시험기간에 읽는 책선정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게으른 활자중독자는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읽는다.
너무 몰입도가 높은 책 빼고
너무 진지하거나 어려운 책 빼고
그냥 무난한 거 아무거나.

*
장면 장면, 영상을 연출하는 듯한 묘사를 한다.
마치 영화를 찍는 사람이 쓴 글 처럼
머릿속에 장면이 잘 그려지고 책장이 잘 넘어가는 편한 글.
그리고 일본 소설 특유의 잔잔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살짝 막장의 연애소설.

*
그래. 연애소설이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연애소설인 줄을 미리 알았다면 안 읽었을 거야.
일본연애소설은 잔잔한 척 하면서 사람 기빨리게 하는데 전매특허가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딱히 희망적인 메세지를 던지지도 않으니까.

그런 일본소설 특유의 감성을 좋아했던 한때도 있었지만
나이 먹을 수록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은 생각만 들어서
잘 안 읽게 돼.

*
그래서 책장이 잘 넘어가긴 하는데 넘어갈 수록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을까아...
그런 회의감이 드는 거야
남의 지루한 연애 훔쳐보는게 뭐 재밌다고.

*
특히 나는 여성 등장인물의 외모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참 불편했다.
등장인물들은 다 하나같이 미인이고 그녀들의 외모에 대해 참 자세히도 묘사한다. 유독 여자들만 외적 묘사에 치중한다. 꼭 필요한 묘사였을까. 의문이다.

이제와서는 남주인공 시각에서 소설이 전개되니까
남주 시각에서 자연스러운 것일 지도 모른다는 관대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ㅎㅎ (이렇게까지 철저히 늘 모든 여자들을 성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보편적인 남자들의 속성이란 말인가 ㅎㅎㅎ)

읽고 있을 때는 여성캐릭터의 외모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시작될때마다
양판소에서 새 등장인물 나올 때마다 키는 몇이고 눈색 머리카락 색이 뭔지부터 설명해주던 게 생각났다.
뭐야 이건. 아저씨들을 위한 할리퀸 연애소설인가 싶기도 했고.

(이건 진짜 여담인데 일본소설에서는 유난히 여자들의 패티큐어에 성적 의미를 부여하는 걸 자주 본다. 아니 도대체 왜 ?
이 인간들은 집단적 성도착증이라도 있는 것인가?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만큼이나 강한 거부감이 있는데
그들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여성을 향한 시선 - 성적대상화에 대한 거부감은 아닌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읽어갔던 건 ,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사랑을 향한 기대도 없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 자체가 내겐 없는게 아닌가 의구심을 품고서
그렇다고 독신주의를 선언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뭐하나 적극적으로 애쓰는 것 없이,
한번도 사랑을 적극적으로 먼저 잡아본 적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 멀어질 때 조차 붙잡기는 커녕 도리어 더 밀어내 버리는,
좋은 것을 공유하며 사랑하길 갈망하면도
싫은 것을 공유하는 사랑에 안주하고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는,
정신과의사 주제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 주인공.

그런 무색무취의 삶이 나와 닮은 점이 있다고,
또 어쩌면, 최근에 내가 잃어버린 그 사람과도 닮은 면이 있다고 느껴서.


그리고 반복되는 메세지
- 과연 함께 하는 사람의 사랑을 어떻게 확신할수 있겠는가?
그 마음의 진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사랑의 뜨거움은 한순간에 지나가는데 .
상대방은 커녕 자신의 마음조차 우리는 스스로 알지 못하지 않는가 ?
그 의문에 공감하는 면이 있어서.


*
후반부로 가면서 좋았다.
잔잔하고 지루하게 끌고 가다가 후반부에 빵 터뜨리는게 이 작가의 특기인가 싶을 정도로.(이하 스포)











하루가 죽었다는 게 밝혀지고 약혼녀가 사라지면서부터의 전개가 좋았다.

일본소설 읽을 때 종종 갖는 감정
- 그래서 뭐 어쩌라고 ? 란 의문을 남기지 않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네가 잃어버리고 놓친 것을 다시 찾으라고.
너는 마치 처음부터 그런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고. 그런 뜨거움이 네게 있었다고.

그런 메세지를 던져주어서 난 좋았던 것 같다.

죽은 첫사랑이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나
첫사랑과 의미가 있었던 장소 - 심지어 인도 해변에서 사라진 약혼녀를 재혼하는 결말은
음. 지나치게 작위적인 만화적 연출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의 메세지를 던지며 끝맺는 결말을 좋아한다.

교섭 끝에 사과 하나를 획득한 그녀가 후지시로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내기하자!"
별안간 큰 소리를 지르는 야요이를 보고 놀란 후지시로가 숨을 집어삼켰다.
사육사도 난처해하며 주위를 신경쓰듯 둘러보았다. 원숭이들이 새 사과를 노리며 무리지어 다가왔다.
"이 사과를 어느 원숭이가 먹을까. 둘이 내기해."
야요이는 딱히 신경쓰는 기색도 없이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그런데 뭘 걸죠?"
기세에 눌린 후지시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사과를 공중으로 한 번 던졌다 다시 잡은 후 대답했다.
"만약 내가 이기면, 다음 주에도 후지시로 군을 또 만날 거야."
"내가 이기면?"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해. 어때?"
"왠지 가슴 아픈 내기네요."
"그래, 가슴 아프지. 그래도 할 거지?"
"그렇게 중요한 걸 원숭이가 정하게 해도 될까요?"
"그럼, 어떻게 정하면 좋을 것 같아?"
"하긴, 원숭이가 정해주는 게 딱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가슴이 떨리고, 웃음이 솟구쳐 올랐다. 역시 야요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 없는 눈빛. 장난스럽게 웃는 아름다운 입술. 뜨거운 감정을 품고 있는데도 더욱 차갑고 맑아지는 목소리. 그녀의 이런 면을 자기가 원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야요이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독수리 발톱처럼 펼쳐지며 사과를 거머쥐었다. 미래를 움켜쥐는 것 같은 그 손가락 속에서 사과가 빨갛게 반짝였다.

"그런데 내 생각은 그래요. 사람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고독해진다고. 그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니까."

나는 사랑했을 때 비로소 사랑받았다.
그것은 흡사 일식 같았어요.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똑같이 겹쳐진 지극히 짧은 한순간의 찰나.
거역할 수 없이 오늘의 사랑에서 내일의 사랑으로 변해가죠.
그렇지만 그 한순간을 공유할 수 있었던 두 사람만이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난 생각해요.

잰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자, 짙은 남색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바다 끝에 작은 섬에 거대한 석상이 서 있었다. 푸른색과 흰색과 오렌지색으로 그러데이션이 진 하늘이 성스러운 석상의 실루엣을 그렸다. 인도양과 아라비아해와 벵골만, 세 해류가 교차하는 성지야. 그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완만하게 경사진 해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어스름한 모래사장에 모인 수천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모래사장에 늘어선 사리를 입은 여성들. 파도가 밀려드는 물가에 서서 바다에 몸을 절반쯤 담그고 수평선 끝을 바라보는 수도승들. 군중속에 뒤섞인 후지시로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끝으로 흐릿한 빛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출을 놓치지 않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안에 모여든 새들처럼 움직였다.

수평선이 붉은 빛으로 스며들어 흔들리더니 아침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한 빛의 화살이 눈 속으로 날아들었다. 땅을 뒤흔드는 듯한 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환호송도 노호도 아니다. 너무나 성스러운 것을 접한 인간만이 낼 수 있는 소리의 집합. 군중이 일제히 아침 해를 향해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수도승이 거친 파도를 맞서며 잇달아 바다로 들어갔다. 아침햇살을 받아 에메랄드그린 색으로 바뀐 바다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앞에 있는 거대한 석상의 온화한 미소가 후광과 함께 서서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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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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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베트남 결혼 이주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소개된 인스타를 보고 영업 당해버렸다.

에세이가 늘 그렇듯,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고 생각이 안 맞는 부분도 있지만

글을 워낙 잘 쓰셔서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간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좋게 말하면 냉소주의였고, 정확하게 말하면 비겁했다. 불의를 질끈 잘 참는다. 타인들이 원하는 연기를 잠시 해주면 내 자유가 더 확보된다는 걸 일찍 영악하게 깨우친 거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 같은 것인지.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고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없어도 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근대적 의미의 개인을 존중해본 경험 없이 탈근대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 아닐까?

그러나 진화론, 뇌과학, 심리학이 밝혀낸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며, 그런 비합리성까지 고려해 인간과 사회를 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합리적 태도‘는 오히려 더욱더 필요하다.
현대의 합리적 개인은 자신의 비합리성까지도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로 전락하여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마저 저해할 뿐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사 박문수나 판관 포청천처럼 누군가 강력한 직권 발동으로 사회정의를 신천하고 악인을 엄벌하는 것을 바란다.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혜안 있는 영웅적 정치인이 홀연히 백마타고 나타나서 악인들을 때려잡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링위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독재에 대항한다는 학생운동 세력 역시 ‘의장님을 목숨으로 보위하자‘는 수준의 전체주의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투사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후배들에게 직장에의 헌신을 강요하는 꼰대로 변신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집단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고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를 끝낸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이런 소리를 하면 이 사회에 끔찍한 불의와 비극이 가득한데 기득권자로서 자기 행복만 추구한다며 부끄럽지 않으냐는 질타를 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늘 그런 부채의식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런 질타에 머리를 숙이고 싶지도 않다. 세상을 아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심리를 투영하여 과잉 열광하거나 조금이라도 자기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면 배신자 취급을 하며 돌을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하루하루를 분노, 절망, 투쟁, 당위만으로 채우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불행하다. 그리고 그들이 이끌고 가는 곳에 행복한 유토피아가 있을 리 없다.

나는 소박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을 채워가는,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는 일에는 주저 없이 자기 힘닿는 범위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고 싶다.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비극이 가득했지만, 그 어떤 불행한 시대에서도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어난 것도 내 의사가 아니었으니 사라진 후에 대단한 흔적을 남기고 싶지도 않다

나는 좁은 성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걸 부인하면 위선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 안에 갇혀 있는 죄수는 되지 말아야겠다.

폐쇄적 특권 집단에서 사회에 필요한 많은 직업군의 하나로. 더디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는 흐름이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발전하고 있고, 어떻게 보면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무엇에 주목하느냐의 문제라면 나는 이왕이면 발전하는 모습에 주목하고 싶다. 냉소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그 누구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수치를 모르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본성은 전자발찌를 채워야 할 상습 전과자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선비질’을 해야 한다.

이런 세상에서 불에 홀려 다가가는 부나비들을 어리석다 비웃고만 있으면 될까. 불에 덮개를 씌워 더이상 타죽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미래를 스스로 공동구매하지 않으면 강제배급받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림자를 강조하기 위해 빛을 애써 지울 필요도 없고, 빛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다

이념 문제 아닌 것을 이념 문제화하는 강박증은 두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실제적으로 필요한 토론과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각 방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따지는 머리 아픈 과정을 ‘우리 편의 주장인지 적들의 주장인지’로 광속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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