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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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크고 좋은 말들을 가져다 아무때고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약탈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안산에서 이제는 말 몇 개가 아닌 문법 자체가 파괴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이 이제 우리의 시각을 대신할 거다. 세월호 참사는 상像으로 맺혔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콘택트렌즈마냥 그대로 두 눈에 들러붙어 세상을 보는 시각, 눈目 자체로 변할 것이다.

놓칠 것 같았고, 놓치고 나면 속을 것 같았다. 되도록 모든 걸 보고, 누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기억해두려 했다. 지금 진도에 ‘사실’은 차고 넘치나 ‘진실’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망가진 문법더미 위에 앉아 말의 무력과 말의 무의미와 싸워야 했다. 어떤 말도 바다 속에 가 닿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바로 설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한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마냥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2년 전 이자영씨를 떠올리며 내가 가까스로 발견해낸 건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 ‘바깥’에 서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또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 세대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다만 뭔가를 자주 보고, 듣고, 접했단 이유로 타인을 쉽게 ‘안다’고 해선 안 되는 이유도,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이름에 담긴 한 사람의 역사가, 시간이, 그 누구도 요약할 수 없는 개별적인 세계가 팽목항 어둠 속에서 밤마다 쩌렁쩌렁 울렸다. 낮에도 새벽에도 아침에도 울렸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길을 가다, 밥을 먹다, 청소를 하다, 아랫배를 얻어맞은 듯 허리가 꺾였다.

그때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상복을 입은 내가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 중 하나가 ‘삶의 생생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슬픔 속에 숨기려 해도, 환멸 안에 감추려 해도, 냄새처럼 기어코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의 그 ‘어쩔 수 없는 선명함’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 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요즘 나는 자꾸 저 말이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고 간 질문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 경사傾斜를 어찌하나. 모든 가치와 신뢰를 미끄러뜨리는 이 절벽을, 이윤은 위로 올리고 위험과 책임은 자꾸 아래로만 보내는 이 가파르고 위험한 기울기를 어떻게 푸나.

그러자 곧 거기 모인 이들의 분노와 원망, 무기력과 절망, 죄책감과 슬픔도 결국 모두 산 자의 것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건, 죽은 자들은 그중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거였다. 산 자들이 느끼는 그 비루한 것들의 목록 안에서조차 그들이 누릴 몫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그게 바로 자신의 힘으로 나아지는 길이다. 우리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으로 선출한 권력은 자신을 개조할 권한 자체가 없다. 인간은 스스로 나아져야만 하며, 역사는 스스로 나아진 인간들의 슬기와 용기에 의해서만 진보한다.

과연 역사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는가? 말했다시피 이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지혜로워진다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착각이다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며,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역사는 진보한다고 우리가 착각하는 한, 점점 나빠지는 이 세계를 만든 범인은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은 또한 우리의 것이기도 한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자신의 실수만을 선별적으로 잊어버리는 망각,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무지,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나만은 나아진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해도 보수는 부패로 망하지 않는다. 분열엔 의리가 없지만 부패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선량하게만 살다 떠나지 말고, 좋은 세상을 남기고 떠나라

수치심은 외적 권위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되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긍심과 명예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그 결핍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수치심은 자기 고양을 욕망하는 고결한 존재der Edle가 갖는 감정이다. 고결한 자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알며, 그 역량을 미처 사용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역량, 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 세계에서 내 처지는 어떤가.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 역시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세계를 왜 이렇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라고 묻는 입장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신의 노여움을 잠재울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하는 게 아닐 것이다. 세상은 분명 질문에 대답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질문하는 사람 자리로 슬쩍 바꿔 앉는 순간에 붕괴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그렇게 상투적인 위령慰靈의 제스처를 용납하지 않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철저하게 심문하고 처벌하도록 요구하는 부류인 것이다.

리버럴한 것은 이제 상상적 매혹이 아닌 참혹한 리얼리티였다. 가족, 공동체, 친구, 이웃, 직장, 학교, 사회가 내적으로 침식되어 있었다. 모두가 리버럴하고, 모두가 자신을 기막히게 표현하고, 모두가 미적이고, 모두가 예술적인 세계. 그러나 기실 모든 것이 썩어가는 악취를 풍기는 시대.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짐작하기 어려워진 시대. 하나의 노래와 하나의 세계가 단절되어갔다.

‘바로 그 노래’가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로 부르고 싶은 노래가 없을 때, 나는 할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으며, 누구 앞에 존재를 걸고 나설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떼로 익사하는 와중에 가진 자들은 이를 방조하면서 기회주의적으로 피신하는 야수성. 죽음을 방기하는 반인본주의.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 되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대체의 가장 명백한 결과는 공공영역의 민영화 내지는 사유화에 그치지 않고, 바로 ‘자기 경영’이나 ‘자기 계발’이라는 익숙한 말들이 나타내듯이 주체성 자체의 사유화이자 사유화된 주체성의 생산으로 확장된다.

사고는 ‘사실’과 관계하는, ‘처리’와 ‘복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사건은 ‘진실’과 관계하는, ‘대면’과 ‘응답’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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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rpose Driven Life (Paperback, 영국판) - What on Earth Am I Here For?
릭 워렌 지음 / Zondervan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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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의 도시
데이비드 베니오프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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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반짝 반짝하고 빛난다. 읽은 즐거움을 넘어서서,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내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는 글이 있다. 갯벌에서 진흙에 묻힌 보석을 찾아내듯 귀중한 것의 진가를 찾아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종류의 기쁨 말이다.

유명한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배경으로, 1441년 6월 독일군이 도시를 포위하고 이듬해 겨울, 도시를 탈출하지 못한(또는 않은) 사람들은 굶주림을 견디는 자기만의 기술을 터득해 간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역사 깊은 도시의 문화재는 땔감으로 불태워지고, 장서는 ˝도서관 캔디˝로 가공된다.

태반이 굶주려 죽고 남은 자들은 그 굶주려 죽은 사체의 인육으로 아사를 모면하는 상황에서도, 삶이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는 철갑상어의 알, 고급 와인, 소고기 편육이 대접되는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생명을 담보로 그 결혼식 케이크에 쓰일 달걀을 구해오라는 임무를 받고. 그러나 그들은 분노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어떠한 긍정적인 효력도 있지 못한 감정의 소진에 낭비할 열량이 그들에겐 없다. 다만 그들은 문학에 대하여, 체스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또 배고픔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전선으로 나가기엔 너무 어려 옥상에 올라가 망이나 보고 폐허가 되어가는 도시의 허드렛일이나 하던, ˝신체 건강한 모든 영혼들이 도망쳐 버린다면 레닌그라드는 파시스트에게 함락당할거에요. 그리고 레닌그라디가 없다면 러시아에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라고 외치던 정의감에 불타는 소년, 그러나 자신의 핏 속의 두려움이 수챗구멍 사이로 오수가 빠져나가듯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는 시니컬한 소년은 어느 날 밤 추락하는 독일군병을 발견한 것으로 계기로 어처구니없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모험이라는 단어가 적당한지 잘 모르겠다. 그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설렘, 용기, 희망 같은 것과는 너무나 멀어서. 다만 그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도시를 걷고, 도시 밖을 걷고, 전선을 걷는다. 그 여정 속에서 비로소 소년은 배고픔을 넘어선 전쟁, 그 날 것의 잔혹함과 비극을 보게 된다.

열일곱 소년은 그 모든 것을 아주 담담하게 담백하고도 해학적인(시니컬하면서도 위트있달까) 이야기로 전달한다.
소년이 모든 상황을 보고 겪으면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이 그와 여정을 함께한 친구의 존재감이었듯, 미친 전쟁통에서도 조증 상태를 유지하는 그 별난 캐릭터 덕분에, 독자도 소년이 전달하는 모든 것들을 함께 바라보고 겪으면서도 그 무게에 질색하지 않을 수 있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 보석같고, 몰입감, 문장, 완급조절, 엔딩처리까지 모두 내 취향에 딱 맞는 책이라 이런 보석같은 책을 내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둔 채 읽지 않았을까 한탄했다. 간만에 별 다섯짜리 책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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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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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있어 보이는 제목 탓에, 들고 다니면 ‘뭐 이런 어려운 책을 읽느냐‘는 이야기를 좀 들었다.
‘넹? 이거 그냥 소설인데요?‘
별 다섯 개 짜리 ‘자기 앞에 생‘의 작가인 에밀 아자르의 또 다른 대표작이라, 그냥 믿고 사서 읽었다.
이게 단편집인 줄도 몰랐다.
특별한 때가 아니고 서는 단편에 대한 선호가 낮은 편이고,
처음에는 ‘기대보다는 그저 그런데?‘ 라고 생각했지만, 뒤로 갈 수록 좋았다.

나는 이 작가의 인간에 대한 통찰과 날카롭고 정확한 문장이 좋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만 꼽아보려고 했는데, 꼽아보려고 보니, ‘역사의 한페이지‘부터는 다 좋았다.
처음엔 표제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만 따로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앞부분을 몽땅 다시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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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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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다 읽은 책이 너무 좋아서
옥상 같은데 올라가서 이거 완전 좋다고 막 소리치고 싶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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