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들의 도시
데이비드 베니오프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좋은 글은 반짝 반짝하고 빛난다. 읽은 즐거움을 넘어서서,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내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는 글이 있다. 갯벌에서 진흙에 묻힌 보석을 찾아내듯 귀중한 것의 진가를 찾아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종류의 기쁨 말이다.

유명한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배경으로, 1441년 6월 독일군이 도시를 포위하고 이듬해 겨울, 도시를 탈출하지 못한(또는 않은) 사람들은 굶주림을 견디는 자기만의 기술을 터득해 간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역사 깊은 도시의 문화재는 땔감으로 불태워지고, 장서는 ˝도서관 캔디˝로 가공된다.

태반이 굶주려 죽고 남은 자들은 그 굶주려 죽은 사체의 인육으로 아사를 모면하는 상황에서도, 삶이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는 철갑상어의 알, 고급 와인, 소고기 편육이 대접되는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생명을 담보로 그 결혼식 케이크에 쓰일 달걀을 구해오라는 임무를 받고. 그러나 그들은 분노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어떠한 긍정적인 효력도 있지 못한 감정의 소진에 낭비할 열량이 그들에겐 없다. 다만 그들은 문학에 대하여, 체스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또 배고픔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전선으로 나가기엔 너무 어려 옥상에 올라가 망이나 보고 폐허가 되어가는 도시의 허드렛일이나 하던, ˝신체 건강한 모든 영혼들이 도망쳐 버린다면 레닌그라드는 파시스트에게 함락당할거에요. 그리고 레닌그라디가 없다면 러시아에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라고 외치던 정의감에 불타는 소년, 그러나 자신의 핏 속의 두려움이 수챗구멍 사이로 오수가 빠져나가듯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는 시니컬한 소년은 어느 날 밤 추락하는 독일군병을 발견한 것으로 계기로 어처구니없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모험이라는 단어가 적당한지 잘 모르겠다. 그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설렘, 용기, 희망 같은 것과는 너무나 멀어서. 다만 그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도시를 걷고, 도시 밖을 걷고, 전선을 걷는다. 그 여정 속에서 비로소 소년은 배고픔을 넘어선 전쟁, 그 날 것의 잔혹함과 비극을 보게 된다.

열일곱 소년은 그 모든 것을 아주 담담하게 담백하고도 해학적인(시니컬하면서도 위트있달까) 이야기로 전달한다.
소년이 모든 상황을 보고 겪으면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이 그와 여정을 함께한 친구의 존재감이었듯, 미친 전쟁통에서도 조증 상태를 유지하는 그 별난 캐릭터 덕분에, 독자도 소년이 전달하는 모든 것들을 함께 바라보고 겪으면서도 그 무게에 질색하지 않을 수 있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 보석같고, 몰입감, 문장, 완급조절, 엔딩처리까지 모두 내 취향에 딱 맞는 책이라 이런 보석같은 책을 내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둔 채 읽지 않았을까 한탄했다. 간만에 별 다섯짜리 책 발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