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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취하라
보들레르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 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새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대로 아무튼 취하라.
그리하여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방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 깨어 일어나, 취기가 벌써 줄어들거나 사라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달아나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이 몇 시인지,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끈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대로."
보들레르 산문시집<파리의 우울>. 99쪽의 詩.
"취해서 살아라." 여고때 담임 선생님이 해준 말이다. 취해서 살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잊지 않고 살아 왔다. 좌우명까진 아니어도 내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꽤 부리지 말고 열심히 살라는 귀언貴言으로 받아 들였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니 '취하다'라는 광의의 말뜻을 알아 차린다.
산문시를 읽고 있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재혼, 술과 마약,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속에서 자신의 불안과 우울을 창작에 불태우다 마흔 여섯의 생을 마감한 보들레르를 이해까지는 아니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말이 쉽지 "취해" 산다는 건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보들레르 자신도 이런 시를 쓰지 않았을까.
고맙다. 철모르는 아이에게 삶의 지침을 일러준 오래전 선생에님, 불안과 가난 속에서 예술적 야망을 승화시켜 좋은 작품을 보여준 보들레르, 어려운 문학작품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옮겨준 불문학자 황현산님, 무슨 시 바람이 불어 그간 모은 용돈을 탈탈 털어 시집 코너에 쭈그려 앉아 골랐다며 네댓 권의 시집을 사 온 고딩 1학년인 작은 녀석도 참 고맙다. 이 시집은 가을에 읽을 책 목록에 넣어두고 있던 책이다.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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