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겁나게 이쁘게 피었어야."

"대문 한 짝을 다 덮어버렸어야."

"사진기라도 있으면 몇 판 박아 놨다가 담에 너 오믄 보여주고 싶은디 져불면 어쩐디야."

"혼자 보기 아깝다야."

아침 전화수화기 너머로 엄마 목소리가 들떠있다.

엄마집에 능소화가 피었단다.

6월달에 갔을땐 꽃망울이 보일말락 했었는데​

혼자 사는 엄마한테 능소화가 피었다는 건 대단한 사건이겠다.

평소보다 엄마 목소리가 한옥타브는 높다.

능소화 소식보다 더 반갑다.

평소 전화하면 늘 여기저기 아프다는 말로 시작해 기운없는 음성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곤 하셨는데

오늘 아침은 아픈데가 하나도  없는 목소리다.

"엄마, 능소화꽃 못 봐 정말 아깝네. 근데 시방은 뭐하셔?"

"뭐하기는 야야. 마루에 앉어 너헌티 전화함시롱 능소화보고 있제."

"한 목에 옴막 펴서 대문짝이 뻐얼게야."

"엄마 근데 그때 내가 모종한 능소화는 잘 크고 있어?"

6월엔가 시골 갔을 때 꽃밭으로 번진 어린 능소화를 반대편 대문아래 옮겨 심어놓고 왔었다. 

엄마가 능소화 말을 하니 갑자기 생각난다

" 겁나게 커서 넝쿨 뻗길래 대문으로 타고 올라가라고 줄 쳐 주었다야."

" 모르긴해도 내년쯤이면 이짝 대문에서도 꽃 볼 것 같은디."

능소화한테 고맙다.

앞으로 능소화가 질 때까지는 엄마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지진 않을테니까.

연일 이어지는 열대야 잠 못 이루는 날이 이어진다.

아침에 까지소리를 들었는데, 엄마한테 꽃소식을 들으려고 그랬나보다.

오늘부터 8월이다.

아침부터 매미가 울어댄다.

한 달 동안 얼마나 더울까 싶지만 이대로 가면 막바지 여름도 서서히 꼬리 내리겠지.

 

능소화덕분에

엄마 덕분에

8월 첫 날, 느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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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꽃 저녁에 줍다 루쉰문고 6
루쉰 지음, 김하림 옮김 / 그린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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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난다.  한 낮 실내온도가 29도다. 뭘 해야겠다는 의욕도 없다.  대돗자리 위에 선풍기와 앉은뱅이 책상 하나를 가져다 놓고 책<아침꽃을 저녁에 줍다.2003>을 읽었다. 이 책은 루쉰의 산문집인데, 이욱연 서강대 교수가 중국의 사상가 루쉰의 수많은 산문 중에 가려 뽑은 책이다. 루쉰 하면 내게는 청소년기 때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던 아Q정전이 생각난다.  지금 겨우 책 제목만 기억할 뿐이다.

 

이 작품집은 중국의 암흑기나 다름없는 근대사(1930년)를 살아가면서 지성인으로 고뇌하고 중국 현실을 질타한 과거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문장을 읽어가다 보면 그의 성정이 얼마나 곧고 강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악인을 단죄할 때는 "물에 빠진 개는 더욱 때려 줘야 한다" 고 했는가 하면 힘없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희생되는 걸 보지 못할 정도로 여리고 섬세한 인물이었다는 걸 문장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생활인으로서의 루쉰은 유머와 위트도 있다.  그중 '여름 벌레'에 대한 내용이다. 벼룩, 모기, 파리 이야기인데 이 셋을 비교해 놓은 걸 보면 지금이 여름인지라 은근히 재미있다.

 

"벼룩은 피를 빨아먹는다. 가증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 소리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빨아먹는 점은, 솔직하고  시원시원하다. 그런데 모기는 아니다. 단번에 피부를 쿡 찌르는 면에서는 어느 정도 철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찌르기 전에 웽웽거리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이 딱 질색이다. 만일 그 웽웽거림이. 사람의 피는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 존재한다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질색이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천만다행이다.(...)

 

 파리는 한참을 윙윙거리다가 내려앉아서는 몸의 기름이나 땀을 조금 핥을 뿐이며, 간혹 상처나 부스럼을 만나면 횡재를 하기도 한다. 파리는 아무리 좋고 아름답고 깨끗한 것일지라도 가리지 않고 파리똥싸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땀을 핥아먹거나, 오물을 떨어뜨릴 뿐이어서 감각이 마비된 사람들은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로 내버려 둔다. 중국인들은 파리가 전염병을 옮긴다는 것을 아직 잘 모르기에 파리 잡기 운동은 아마 크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파리의 운명은 장구할 것이고 더더욱 번성할 것이다." (86~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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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음.​

 

영화 '부산행'을 봤다. 갑자기 보게 된 영화라서 사전정보없이 그냥 봤다.

놀랐다. 고속철도 KTX에서 좀비영화라니,

그러고 보니 좀비영화는 티비에서 한 두어 번  봄직하다.

한국영화에서 좀비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기억속 좀비와는 완전히 다른 한국 좀비들이었다.

오래전 영화에서 좀비는 뭐랄까.

무표정에 느린 움직임, 허수아비같은 나약함에 비해

부산행 좀비는 혼이 움직이는 디테일한 동작에 속도감과 공포감까지 ,... ​

 

부산행 KTX 열차 안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올라 타면서

열차 안 승객들이 하나 둘, 정체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전국에 재난발령경보가 내려진 이유는 바로 공포의 좀비 바이러스때문이다.

 

열차 안은 삽시간에 좀비 바이러스가 칸칸으로 번지고

아비규환 속에서 사람들의 본능은 민낯을 드러낸다.

아내에게 아이(수안분)를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탄 아빠(석우분)는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딸에게 다그쳐 세우며

"지금 이런 순간엔 너만 생각하는 거야."한다.

그 말이 이기적이기보다 딸을 지켜야 하는 아빠로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에 공감이 간다.

9호칸에서 좀비들을 뚫고 구하러 온 공유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13호 칸 김의성(용석분)

"여기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달려드는 석우에게 "이 새끼 감염됐어" 라는 대사가 소름 끼쳤는데

더 무서운 건 그말에 동요 돼 이들을 쫓아내는 13호칸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늘 그렇다. 현실에서든 영화든 문제가 발생하면 인간은 문제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려 들지 않고 각자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분란으로 인해 공멸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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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아서 - 보통엄마가 만든 행복한 그림책 로드맵 그림책이 좋아서
제님 지음 / 헤르츠나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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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냥 그 아이가 좋았습니다. 바라볼 때마다 벅차 올랐죠. 그렇게나 사랑하는 아이를 험난한 사교육의 파도 속에 떠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경쟁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그림책이라 믿고 싶었습니다. 도서관이라고 여겼습니다.  감성을 깨우고, 상상력을 키우고, 공감력을 높이고, 독서의 힘을 기르고,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냥 우리는 그림책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그림책을 통해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용기 있는 엄마이며 <그림책이 좋아서>란 책을 낸 제님 작가의 말이다. 이 글은 책표지를 열면 아이(은재)의 사진과 함께 한 장 한 장 담담하게 써 있는 글들을 한데 옮겨 봤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마냥 좋아 가슴 벅차고 설렌 감동으로 아이를 한번 잘 키워보겠다는 다짐?이 나한테도 있었던 기억이 오롯해서, 구십팔 프로 공감이 가서 책장을 천천이 넘긴 책이다.

책 1장은 그림책을 읽어주는 엄마로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에 대한 궁금증과 그에 대한 답을 자세하게 올려 놓았다.

특히 이 장에서는 작가가 그림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수 있는 꼭지가 있다. 바로 아이와 함께 도서관을 ​드나들며 보고 듣고 느꼈던 소소한 얘기와 그날 그날 빌려온 책들의 목록을 일기 형식으로 담아 놔 한번쯤 그림책에 관심있는 엄마라면 한번쯤 따라쟁이가 될 필요도 있겠다 싶다.

2장은 그동안 읽은 그림책을 주제별(친구, 분노,미술 가족,인권 심리,상상,등)로 묶어 여러 그림책을 소개한다.

3장은 해외 여러나라 그림책 작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이 쓰고 그린 그림책들을 엄마의 감성으로 들려준다.

그중에서 에즈라 잭 키츠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다. 흑인 아이 피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눈오는날>,<피터의의자>,<피터의편지>,피터의 안경>을 다 갖고 있기도 하다. 내가 읽은 그림책을 다른 사람도 읽고 공감한다는 일종의 공통분모같은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렇다. 에즈라 잭 키츠에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색채의 마술사로 평가받는 에즈라 잭 키츠는 어느날, 1940년대 잡지 (Life)에서 오린 흑인 꼬마 사진을 보고 생각에 잠깁니다. 그 후 20년 동안이나 그의 작업실 벽에 붙어있던 그 사진은 '피터'라는 흑인 남자 아이로 키츠의 작품 속 주인공으로 태어나죠.그는 최초로 그림책에 흑인을 등장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지금이야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지만 1960년대 당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작가는 피터의 생활을 소재로 피터가 성장하면서 겪은 내면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담아 냅니다."(304쪽)

그리고 맨 마지막 4장에서는 그림책을 장르별로 감상할 수 있게 묶어 놓았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책, 옛이야기 관련책, 그리스로마신화처럼 재밌는 우리 신화 이야기, 동시다먹기 놀이 등 그림책 속에 담긴 세상을 작가는 자기 아이에게 들려주듯 다정하게 읽어준다.​

 

아이가 그냥 좋아서, 그냥 그림책이 좋아서, '그냥'이라는 말에는 묘한 끌림이 있다.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할까. '그냥' 좋은 거다.  무조건 좋아서 하는 거다. '그냥'이라는 말의 어감처럼 이 책은 그림책과, 아이를 좋아해서  그 속에 푹 빠진 진정한 아마츄어가 행복을 담아낸 책이다. 그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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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과학은 내친구 16
칸자와 토시코 글, 쿠리바야시 사토시 사진, 엄기원 옮김 / 한림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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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서가에 이 책이 꽂혀있다. 아이들용 반딧불이에 관한 사진 책이다.

이 걸 언제 들였지?  책표지를 열고 면지를 보니 큰애와 작은 애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고

그 옆에 2007. 4. 9이라고 씌어 있다.

 

2007년이면 열여덟 살인 작은 녀석이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 땐가 보다.

맞아. 그때 한창 녀석이 곤충에 관심 많아 사슴벌레며 장수풍뎅이를 키우곤 했지.

 

'반딧불이' 하면 유년 시절 여름밤이 아련하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진 집이다. 

집 앞은 너른 들판이고 뒤는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산이어서 해지면 사방에서

풀벌레 소리가 흥건했다.

여름밤이면 생풀로 피운 모깃불, 덕석 위에 도란도란 앉아 먹던 수제비, 팔베개하고 누워 잠들기 전까지 바라보던 밤하늘,... 그 속에서 추억 하나를 꺼낸다면 반딧불이 욘석 얘기다. 

 

친구한테서 첨 들은  욘석의 이름 개똥벌레. 이름이 재밌어서 그 후론 개똥벌레. 개똥벌레 하고 불러줬다.

해가 어둑어둑하면 친구들이랑 빈 병 하나씩 들고 논가나 풀밭을 헤치고 다니면서 반딧불이를 잡겠다고 쏘다니곤 했다. 

수풀 사이에서 반짝반짝하면 금방 잡을 것 같다가도 다가가면 이내 사라지곤 했다.

허탕 치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멍석 위에 누워 있으면  눈앞에서 놓친 녀석들이 번 해지곤 했지.

 

 그때 그 반딧불이가 책 속에 들어와 살고 있다.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에서 빛을 발하는 욘석들의 삶을 일본의 사진작가가 공들여 찍어 놨다.

어둠 속에서 파르라니 빛나는 욘석이 밤하늘의 별 같다.

우리 삶이 바뀌면서 주변에 흙이 사라지고 아스팔트나

바닥을 메우고 있으니 반딧불이를 사진으로 보는 게 당연하다.

 더워지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녹록지 않으니 들꽃은 식물도감 속으로 들어가고

벌과 나비를 보려면 곤충도감을 들춰 봐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꽁무니에 불을 켜고 풀잎에 아스라하게 앉아  있는 반딧불이를 보려면

부러 시간을 내 오지 들판을 가거나 지자체에서 상품화한 반딧불이 축제를 찾아가야 한다.

 

그 때문일까. 이 사진 책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더 반갑다. 여름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면 그때 놓친 반딧불이가 생각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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