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브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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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데뷔작 『아몬드』로 100만 독자의 사랑을 받은 작가 손원평의 장편소설. 작가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실패한 사람이 다시 성공하는 이야기를 추천해달라는, 지금 자신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너무나 필요하다는 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소설이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사업을 벌이고 주저앉는 일을 반복해온 남자가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일으켜 세우고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을 놀라운 흡인력으로 그려낸 이번 작품은 사소한 변화를 통해 인생을 회복해나가는 인물의 눈물겨운 분투기를 담았다.

여기 여러번 사업에 실패하여 빚더미에 오르고 가족과도 멀어진 뒤 끝내 자살하기로 결심한 한 남자가 있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중년 남성 김성곤 안드레아. 그런 그가 자살에도 실패한 뒤 멈춰 서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본다. 우연히 듣게 된 ‘변화’라는 메시지에 꽂힌 그는 ‘자세를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한 광고 문구를 보고 작은 습관을 고쳐보기로 결심하는데, 놀랍게도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튜브』는 여러모로 데뷔작 『아몬드』와 연장선에 있다. 『아몬드』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소년이 주변인들과 소통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라면, 이 작품은 삶의 감각과 감정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하게 살아온 중년 남성이 그것을 회복하려는 변화의 과정을 담았다.

책 소개

더럽게 차갑군.

『튜브』는 자살을 결심하고 강물을 만져본 김성곤 안드레아의 대사로 시작한다. 소설은 총 4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김성곤이라는 인물이 왜 죽음의 문턱까지 나와있는지 보여준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의 말에 의하면 김성곤의 삶은 대체로엉망이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김성곤 안드레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시작하자. 당신은 길을 가다가 어떤 중년 남자와 부딪혔다. 그러자 당신을 휙 쳐다보고 실례했다는 뜻인지 위아래로 훑는 건지 애매하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는 무표정한 남자. 세월이 살을 조금씩 집어삼킨 듯 가운데가 볼록한 배에 끝이 희끗희끗한 머리, 무뚝뚝하고 성마른 표정.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특징적일 게 없어서 그 일을 묘사하려면 오십 전후로 보이는 남자와 부딪혔다는 것 말고는 떠오를 말이 없을 것 같은, 아니, 돌아선 순간 부딪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될 어떤 사람. 바꿔 말하면 이제 인생이 막 저물기 시작하려는 나이대의 남자들 중 흔하게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 그게 김성곤 안드레아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어떤가. 이런 사람을 떠올리면 된다. 매번 어떤 일을 호기롭게 벌이고 뒷수습은 남들이 하게 만드는 사람, 좋게 말하면 사업가 기질이 있으나 나쁘게 말하면 일단 호언장담으로 무장해, 진격해야 할 때 돌격하고 한발 물러서야 할 때 위로 껑충 뛰고 신중하게 지켜봐야 할 땐 누구보다도 빠르게 도망치는 사람. 그리고, 아니 그래서, 매우 애석하게도, 결과적으로는 한번도 인생에서 큰 성공을 맛본 적이 없는 사람.

가정으로 향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가족에게 하는 칭찬이 매우 인색한 사람. 자신은 칭찬이라 생각하고 던진 말이 상대에겐 칭찬으로 전달되지 않는 사람. 사소한 일에 핀잔을 주고 성이 나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제일 먼저 감정을 드러내는, 밖에서보다 조금 더 별로인 아버지이자 남편.

김성곤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성공을 해본 적이 없는 남자, 김성곤은 자살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매섭도록 차가운 칼바람을 방패 삼아 그날 밤 강 위를 떠났고, 연탄과 번개탄을 피워 차에서 죽겠다는 다짐은 불법주차를 한 취객 신분으로 차에 탄 채 견인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김성곤은 다시 돌아온 집에서 사업이 실패한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박스더미 사이에서 울부짖었다. 그러다 문득 유리 액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는데, 못생겼다는 말이 단박에 튀어나오는 몰골이었다. 김성곤은 어디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휴대전화의 사진첩을 뒤적였다.휴면 게정을 살리는 귀찮은 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진입한 과거에서 그는 딸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다. 썩어문드러져 가던 김성곤의 마음 속에는 이제껏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던 소망이 싹텄다.

그는 사진 속의 남자가 되고 싶었다.

김성곤은 과거의 사진과 같은 자세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현재와 무엇이 다른지 하나하나 뜯어보며 파악하기 시작했다.

- 늙었다. 머리숱이……없다…… 좀더, 조금 더 …… 못 생겨졌다.

스스로 한 말인데도 누군가의 험담을 엿들은 것처럼 화가 치밀었다. 인정 . 다 인정. 그래, 외모부터 상황까지 모든 게 달라졌다는 거 인정. 그런데 바꿀 수 있는 건 없는 건가? 정말 하나도 없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정말, 단 한 개도 없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김성곤은 다른 건 모르겠고, 자세 하나만 고쳐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다른 일에 집중하면 자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꾸자꾸 꺾였지만 김성곤은 묵묵히 해나갔다. 매일같이 사진을 찍고, 벽에 모눈종이를 붙여 기록을 하는 것으로 1부가 마무리된다.


2부에서는 김성곤이 피자가게를 운영했을 당시에 근무했던 한진석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피자가게가 망하고 3년이 지난 후에, 두 사람은 라이더라는 같은 신분으로 마주친다.

색으로 치자면 진석은 밝은 쪽에 속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 애는 회색이었다. 하지만 진한 회색, 연한 회색, 베이지가 섞인 회갈색, 때론 대리석처럼 빛나는 영롱한 조각을 품은 다채롭고 신비한 회색이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그 오묘함 앞에 아싸, 라는 단어가 폭군처럼 나타나 이 애는 들여다볼 필요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조롱하며 단정 지었다. 그 말 앞에서 진석은 그저 무의미하게 말라비틀어진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싸 직원과 아싸 사장은 예전과는 다른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진석에게 우리가 그 정도로 친했냐고 물어보던 성곤은 그를 자신의 오피스텔에 초대하게 된다.

- 있잖아, 진석아. 난 그동안 뭘 할 때마다 늘 목표를 생각했거든. 근데 그 목표들이 순수하지가 않았어. A는 B를 위한 행동이고 B는 C를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랬거든? 근데 그게 다 부질없게 느껴지더라. 최종 목표가 무너지면 중간에 했던 A부터 Z가 전부 무의미해지더라고. 그래서 이제 그렇게 거창한 목표 같은 걸 안 세우기로 했어. 행동에 목표를 없애는 거지. 행동 자체가 목표인 거야.

유튜브와 함께 음악 작업을 병행하던 진석은 성곤의 오피스텔을 오가며 그가 변화를 기록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규칙을 정하였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다.

2부에는 박실영이라는 이름의 버스 기사도 등장한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도중, 성곤은 항상 여유로운 태도로 웃음을 잃지 않는 그를 발견하게 된다. 성곤은 건너편의 박실영을 보면서 비가 오면 저 웃음도 사라지겠지, 짜증나는 상황이 닥치면, 여기서는 절대 여유롭게 굴지 못하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그 예측은 번번이 빗나갔다. 매일 같은 태도로 삶과 사람을 대하는 박실영에게 다가간 성곤은, 감각에 집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밖의 조언을 듣게 된다.


박실영의 조언을 잊지 않은 성곤은 꼬박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금세 익숙해져버릴 감각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3부에서는 마침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소한 변화부터 만들어가는 '지푸라기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그는 반복되는 실패로 인해 안 좋은 감정만 남긴 채 별거 중이던 아내 란희와 딸 아영에게 인정을 받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고로 인해 한순간에 인생이 뒤바뀌기도 한다. 3부는 그야말로 스펙타클하다. 김성곤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잘됐다는 생각과 함께 불안이 엄습했다.

튜브의 가제본 표지에는 #동기부여 #인생리셋 #습관형성 #변화가필요할때 #전환점이되는책 이라는 해시태그가 적혀있다. 그 해시태그에 어울리게, 죽음을 결심했던 김성곤이라는 인물이 죽고 싶을만큼 인생을 리셋하고 싶을 때, 변화가 필요할 때 자세 바로잡기 라는 사소한 습관을 형성하여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소설이다. 튜브가 3부에서 막을 내렸다면, 김성곤을 대단한 성공을 거둔 소설 속 주인공으로 기억할 수는 있었어도 책장을 다 덮은 뒤에 좋은 책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4부에서 다시 새로운 벽을 마주하여 다시 변화하는 혹은 다시 되돌아가는 김성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전과는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이 소설은 마지막 에필로그가 완벽한 결말을 완성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손원평의 『튜브』를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마지막장까지 빼놓지 말고 읽어나가길 바란다.

"이 프로젝트는 여러분이 스스로 만든 지푸라기에 바람을 넣어줄 겁니다. 지푸라기가 엄청나게 커다란 튜브가 될 때까지, 그래서 여러분이 당당하게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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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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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과 정치적 충성이 개인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운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준다”는 평과 함께 『밀크맨』으로 50주년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애나 번스의 데뷔작 『노 본스』가 창비에서 발간되었다.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대담하고 능란한 서술과 훨씬 더 날것 같은 생생한 언어와 천연덕스러운 블랙 유머로 애나 번스의 천재적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밀크맨』과 마찬가지로 북아일랜드 분쟁 시기, 즉 ‘트러블’을 배경으로 벨파스트 북부의 한 마을에 사는 소녀 어밀리아와 가족,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문제, 골칫거리, 소요를 뜻하는 영어 단어 ‘trouble’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정관사가 붙고 복수형이 된 ‘The Troubles’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 걸쳐, 지리상으로 아일랜드섬에 속하나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에서, 과거에 한 나라였던 아일랜드와 재합병하려는 가톨릭교도 세력과 현재 속한 국가인 영국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는 개신교도 세력이 충돌하며 수많은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민간인을 포함해 35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만명의 부상자, 실종자를 낳은 현대사의 크나큰 비극이다. 올해 3월에 국내에 개봉하고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자전적 영화 「벨파스트」도 이 트러블 시기의 초반을 다루고 있다. 『노 본스』의 주요 배경인 ‘아도인’이라는 마을은 가톨릭교도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작가 애나 번스가 실제로 나고 자란 동네이다. 번스는 부커상 수상 당시 소감에서 “나는 폭력과 불신, 피해망상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가능한 최대로 스스로 알아서 생존해야 하는 곳에서 성장했다”고 아도인을 묘사한 바 있다.

책 소개

the Troubles :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약 30년간 계속된 북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둘러싼 혼란기.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 내에서 친영국 진영과 친아일랜드 진영이 무력 충돌을 일으키며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3,5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노 본스』는 트러블이 처음 시작되었던 1969년에서 시작한다. 아도인에 살고 있는 어밀리아는 친구 보시에게서 트러블이 시작될 거라는 소식을 듣는다. 더 이상 밖에 나와서 놀 수 없을 거라는 얘기를 어밀리아는 믿지 못한다.

'평소처럼 지낼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지? 길 어귀에서 못 놀 정도로 나쁜 일이 뭐람?'

트러블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도, 어밀리아의 삶에는 별다른 변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밀리아는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하루하루 날짜를 꼽고 있어서 알았다) 정말 그런 게 일어나고 있는지 확신이 안 들었다. 아직 여기에서 그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밀리아가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트러블은 시작되었고, 많은 이들의 일상을 무너뜨렸다. 무고한 사람들의 집이 하나둘씩 불에 탔고, 거리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어밀리아의 엄마는 널판으로 창문을 막고, 막대기와 벽돌과 칼과 부지깽이를 준비하고, 집안 곳곳에 물을 받아두고 긴 호스를 수도꼭지에 연결해서 놓았다. 더 이상 집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책 첫 부분에서 어밀리아는 애나 번스가 어렸을 때 실제로 살았던 동네이기도 한 아도인이라는 지역에 사는 일곱살짜리 아이로 등장한다. 소설은 "트러블은 목요일에 시작됐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밀리아는 이 '트러블'이라는 것 때문에 앞으로는 친구들과 길에 나와 놀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도, 길에서 못 놀 정도로 나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순진하고 그저 평범한 아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트러블이 그뒤로 30년 가까이 계속되며 사람들을, 일상을 처절하게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폭력으로 가득하다. 국가의 폭력, 무장단체의 폭력, 학교 선생님들의 폭력, 가족 안에서의 폭력이 겹겹이 어밀리아의 삶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옮긴이의 말中

소설은 1994년 정전 선언을 했던 시기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도인이라는 작은 지역을 중심으로 단편 소설처럼 각기 다른 인물들의 삶을 비추어준다. 서평 작성을 위해 전달받은 가제본은 전체 소설의 50%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3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몇 번이고 읽기를 멈추었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소설이지만, 트러블은 과거에 북아일랜드에 실제로 존재했던 독립투쟁기이다.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갔을 이들을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혀왔다.

1969년, 영국군인 제임시는 처음으로 벨파스트에 발을 들였다. 어머니께 벨파스트에 친척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들뜬 마음을 안고 가족을 만나러 나섰다. 처음으로 마주한 러빗 가족은 브라이드 톤의 아들이라는 말에 꽁꽁 닫아두었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하지만 이후에 파견을 나온 제임시는 더 이상 러빗 가족과 편안하게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영국군은 더 이상 아도인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들여보내주실래요, 이모?"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머라이어 이모?" 다시 불러보았다.

"묵주기도 중이야." 여자가 대답했다.

"저도 같이 해도 돼요?"

다시 침묵이 흘렀고, 그러다 이모가 배 속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안돼. 가라. 넌 잉글랜드 놈이잖아. 이제 오지 마."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소설에서는 따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폭력에 노출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심리를 묘사해줄 뿐이다.

1994년을 향해 시간이 흘러갈수록 성장하는 어밀리아와 함께 아도인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정상'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폭력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망가뜨려 놓는지를 계속 곱씹으며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들여다보는 건 분명 글자인데 행간에는 십자포화가 쏟아진다. 충격과 비극의 여진을 수습할 틈 없이, 살과 피와 뼈를 지닌 언어가 멱살을 잡고 흔든다. 내 말을 믿기 어렵다면, 부디 이 책을 집어들고 중간 아무 챕터든 펼쳐보기 바란다. 페이지마다 쌀알만한 평화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에서, 읽는 동안 머리가 울리고 영혼은 옥수수처럼 털릴 테니까.

소설가 구병모 추천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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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2
우오토 지음, 하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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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신앙이 모든 사회 질서의 중심이었던 15세기 유럽.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나머지 천체가 그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이 주류를 지배하던 시대. 이 '절대불변의 진리'에 의심을 품는 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단자들이 모조리 처형당하는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지는 '지동설'을 주창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 그럼에도 역사를 움직이기 위해, 지구를 움직이려는 자들의 여정은 시작된다.

천동설과 지동설,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고 대립했던 역사에 작가의 독자적인 상상을 더한 SF만화 『지.』. 작품의 일본어 원제인 『チ。』에는 대지의 '地', 지성의 '知', 그리고 피를 뜻하는 '血'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지구의 전부를 알기 위해 합리와 이성으로 설명되는 세계를 넘어, '광기'라 불리는 영역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걸 주저하지 않는 자들.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지.』는 스펙터클한 가상 역사 판타지이자 지성과 신념을 둘러싼 뜨거운 인간드라마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작품이다.

책 소개

모든 이들이 천동설을 믿고 있었던 15세기의 유럽은 모든 이단자들이 처형당하던 시대였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수재 라파우는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뛰어난 두뇌로 천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라파우였지만, 천체 관측 따위는 그만 두고 앞으로는 모든 시간을 신학 연구에 쏟아야 한다는 의부님에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뜻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 금지된 연구를 하다가 이단자로 붙잡혔던 의부님의 후배, 후베르트 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다짜고자 자신을 위해 천문을 연구하라며 협박해오던 그는 라파우를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진 관측지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천문학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다.

우주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네, 지구가 중심이고 모든 천체는 그 주위를 복잡하게 돌고 있죠.

그럼 그 진리는, 아름다운가?

이 우주는,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못한 우주에 살고 싶지 않다던 후베르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라앉고 있음을 주장한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행성이 돌고 있는 게 아니라, 지구가 자전과 공전이라는 두 가지 운동을 하고 있다고.

어디 보자 이걸… '지동설' 이라 불러볼까.


지동설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소년이 어떤 결단을 내린 뒤로 10년이 흘렀다. 살인으로 먹고사는 대리 결투사 ‘오크지’. 매사에 비관적인 그에게, 동료 ‘그라스’는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희망’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것은 ‘화성’의 관측기록이었다.

2권은 라파우가 '어떤 결단'을 내린 뒤 10년이 흐른 시점에서 시작된다. 숭고하고 장엄한 하늘은 하등한 지구따위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며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는 대리 결투사 오크지와 가족을 모두 잃은 뒤에 화성을 과측하는 것에서 절대적인 희망을 찾으며 살아온 그리스. 하지만 그리스의 희망은 이동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던 화성이 완전히 멈추고 심지어는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가면서 완벽한 원궤도를 완성시키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관측을 그만둔 두 사람은 다음 날 이단자 수송 경비 일을 맡게 된다. 이단자와 함께 마차 뒷칸에 몸을 싣고 이동하던 두 사람은 그에게서 의미심장한 말을 듣게 된다.

지금의 이 C교가 정말 자네들을 구원해줄까?

아니, 애초에 그들이 말하는 천국이란 정말로 존재할까?

그저 자신들의 불안을 부추기기 위해 헛소리를 하는 거라며 코웃음을 치던 그라스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단자의 말에 현혹되어 가고 있었다. 그저 허무맹랑한 소리라 치부하며 무시해도 될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으면서 도가 지나칠 정도의 과한 반응을 보인다.

'이단'이라. 자네가 그렇게 부르는 자를 왜 두려워하는지 잘 알겠군. 나 같은 이단자를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니야. 오히려 반대지. 자네 자신이 내심, 천국을 완전히 믿지 않기 때문이지.

"이렇게 괴롭고 혼란스러운 곳에 태어났는데, 실은 천국 따위는 없고 죽으면 그걸로 그냥 끝이 아닐까."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이단자의 말 앞에서 그라스는 혼란스러워 한다. 이단자는 그라스에게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만큼 괴로웠던 이 별이 우리가 살아갈 값어치가 있는 그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멀리 보이는 산 중턱에 있는 돌 상자 속에 그 근거가 담겨있다고 이야기한다. 인생 최초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에 도전할 권리를 얻은 거라는 이단자. 마음 편히 믿을 수가 없는 그의 말에 휘둘리던 그라스는 결국 이단자의 손을 풀어주고 그와 함께 마차에서 뛰어내린다. 얼떨결에 그라스와 같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오크지 역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데, 성직자에 공격에 결국 덜미를 붙잡힌다. 도망칠 새도 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오크지. 그는 온몸을 내던지며 자신을 구하러 온 이단자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대신 칼을 맞으면서 죽음을 맞이한 이단자는 이렇게 말한다.

부탁하네. 역사가 자네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


내가 저 시대 사람이었다면,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2권의 마지막장을 덮는 순간까지 이 물음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모두가 이단자라고 손가락질 하는 세상에서 소신있게 자신의 주장을 이어가던 용기를 가진 인물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만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전체적인 내용과 잘 어우러지는 그림체와 연출이라고 생각하는데, 소재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는 대사와 장면연출까지 아쉬울 게 없는 작품이었다. 결단을 내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라파우의 눈빛과 이제야 하늘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 오크지의 뒷모습을 각각 1,2권의 최고의 순간으로 꼽고 싶다.

라파우의 눈빛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는 오크지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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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1
우오토 지음, 하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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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신앙이 모든 사회 질서의 중심이었던 15세기 유럽.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나머지 천체가 그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이 주류를 지배하던 시대. 이 '절대불변의 진리'에 의심을 품는 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단자들이 모조리 처형당하는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지는 '지동설'을 주창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 그럼에도 역사를 움직이기 위해, 지구를 움직이려는 자들의 여정은 시작된다.

천동설과 지동설,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고 대립했던 역사에 작가의 독자적인 상상을 더한 SF만화 『지.』. 작품의 일본어 원제인 『チ。』에는 대지의 '地', 지성의 '知', 그리고 피를 뜻하는 '血'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지구의 전부를 알기 위해 합리와 이성으로 설명되는 세계를 넘어, '광기'라 불리는 영역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걸 주저하지 않는 자들.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지.』는 스펙터클한 가상 역사 판타지이자 지성과 신념을 둘러싼 뜨거운 인간드라마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작품이다.

책 소개

모든 이들이 천동설을 믿고 있었던 15세기의 유럽은 모든 이단자들이 처형당하던 시대였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수재 라파우는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뛰어난 두뇌로 천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라파우였지만, 천체 관측 따위는 그만 두고 앞으로는 모든 시간을 신학 연구에 쏟아야 한다는 의부님에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뜻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 금지된 연구를 하다가 이단자로 붙잡혔던 의부님의 후배, 후베르트 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다짜고자 자신을 위해 천문을 연구하라며 협박해오던 그는 라파우를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진 관측지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천문학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다.

우주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네, 지구가 중심이고 모든 천체는 그 주위를 복잡하게 돌고 있죠.

그럼 그 진리는, 아름다운가?

이 우주는,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못한 우주에 살고 싶지 않다던 후베르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라앉고 있음을 주장한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행성이 돌고 있는 게 아니라, 지구가 자전과 공전이라는 두 가지 운동을 하고 있다고.

어디 보자 이걸… '지동설' 이라 불러볼까.


지동설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소년이 어떤 결단을 내린 뒤로 10년이 흘렀다. 살인으로 먹고사는 대리 결투사 ‘오크지’. 매사에 비관적인 그에게, 동료 ‘그라스’는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희망’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것은 ‘화성’의 관측기록이었다.

2권은 라파우가 '어떤 결단'을 내린 뒤 10년이 흐른 시점에서 시작된다. 숭고하고 장엄한 하늘은 하등한 지구따위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며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는 대리 결투사 오크지와 가족을 모두 잃은 뒤에 화성을 과측하는 것에서 절대적인 희망을 찾으며 살아온 그리스. 하지만 그리스의 희망은 이동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던 화성이 완전히 멈추고 심지어는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가면서 완벽한 원궤도를 완성시키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관측을 그만둔 두 사람은 다음 날 이단자 수송 경비 일을 맡게 된다. 이단자와 함께 마차 뒷칸에 몸을 싣고 이동하던 두 사람은 그에게서 의미심장한 말을 듣게 된다.

지금의 이 C교가 정말 자네들을 구원해줄까?

아니, 애초에 그들이 말하는 천국이란 정말로 존재할까?

그저 자신들의 불안을 부추기기 위해 헛소리를 하는 거라며 코웃음을 치던 그라스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단자의 말에 현혹되어 가고 있었다. 그저 허무맹랑한 소리라 치부하며 무시해도 될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으면서 도가 지나칠 정도의 과한 반응을 보인다.

'이단'이라. 자네가 그렇게 부르는 자를 왜 두려워하는지 잘 알겠군. 나 같은 이단자를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니야. 오히려 반대지. 자네 자신이 내심, 천국을 완전히 믿지 않기 때문이지.

"이렇게 괴롭고 혼란스러운 곳에 태어났는데, 실은 천국 따위는 없고 죽으면 그걸로 그냥 끝이 아닐까."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이단자의 말 앞에서 그라스는 혼란스러워 한다. 이단자는 그라스에게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만큼 괴로웠던 이 별이 우리가 살아갈 값어치가 있는 그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멀리 보이는 산 중턱에 있는 돌 상자 속에 그 근거가 담겨있다고 이야기한다. 인생 최초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에 도전할 권리를 얻은 거라는 이단자. 마음 편히 믿을 수가 없는 그의 말에 휘둘리던 그라스는 결국 이단자의 손을 풀어주고 그와 함께 마차에서 뛰어내린다. 얼떨결에 그라스와 같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오크지 역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데, 성직자에 공격에 결국 덜미를 붙잡힌다. 도망칠 새도 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오크지. 그는 온몸을 내던지며 자신을 구하러 온 이단자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대신 칼을 맞으면서 죽음을 맞이한 이단자는 이렇게 말한다.

부탁하네. 역사가 자네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


내가 저 시대 사람이었다면,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2권의 마지막장을 덮는 순간까지 이 물음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모두가 이단자라고 손가락질 하는 세상에서 소신있게 자신의 주장을 이어가던 용기를 가진 인물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만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전체적인 내용과 잘 어우러지는 그림체와 연출이라고 생각하는데, 소재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는 대사와 장면연출까지 아쉬울 게 없는 작품이었다. 결단을 내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라파우의 눈빛과 이제야 하늘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 오크지의 뒷모습을 각각 1,2권의 최고의 순간으로 꼽고 싶다.

라파우의 눈빛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는 오크지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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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의 형제 1 -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이리의 형제 1
허교범 지음, 산사 그림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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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독자가 열광하는 추리소설로 아동문학의 새로운 장을 연 허교범 작가가 새로운 판타지 시리즈로 돌아왔다. 자신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믿는 ‘노단’, 반대로 자신이 인간처럼 평범한 존재이기를 원하는 ‘유랑’, 그리고 어제보다 조금 더 강해지고 싶은 소년 ‘연준’이 하유랑시라는 도시를 무대로 인간과 괴물, 선과 악의 경계를 부수는 여정을 시작한다. 빠른 박자로 넘어가는 전개, 또렷하고 감각적인 문체, 독특하고 신비로운 세계관을 통해 독서의 쾌감을 선사할 것이다.

책 소개

맹수의 눈을 지닌 아이, 노단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왜소한 체격에 창백하고 병약해 보이는 얼굴. 태어난 이후로 줄곧 병원에서만 시간을 보내왔던 노단에게 남은 수명은 세 달.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인간을 부하와 먹이로 삼으면서 그들의 수명을 빼앗는 방법뿐이다. 원체 약하게 태어난 노단과 다르게 높은 자리에서 많은 이들을 다스리며 살아온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하유랑시에 두고 떠난다. 일평생을 약한 존재로만 살아왔던 노단은 부하도 강하고 눈에 띄는 사람보다 힘 없고 작아 보이는 사람으로 골랐다. 성적이 떨어져서 부모님께는 꾸중을 듣고, 학교에서는 덩치 큰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는 연준이 바로 첫 번째 부하가 된다. 노단은 인간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보여주면서 공포심을 심어주고, 보통 인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힘을 안겨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연준을 꾀어낸다. 30일 동안 정체불명의 체리맛 음료를 먹어야 하는 의식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연준이 싫어하던 영식이라는 아이를 먹이로 삼기 위한 의식도 바로 진행했다. 노단에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게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쯤, 유랑이라는 아이가 등장한다.

유랑은 선생님의 말에 하나도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난 전혀 두렵지 않아. 이건 무서운 것과 다른 문제야.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런 존재가 되는 게 싫은 거야. 저 아이는 사람이잖아. 나도 저 아이처럼 사람같이 생겼어. 그러니까 나도, 아마 나도 사람일 거야.

인간의 수명을 빼앗으며 살아가는 노단과 다르게, 유랑은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아닌 잔인한 존재, 유랑이 속해있기도 한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쫓기면서 떠돌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유랑은 아직 어린 10대 아이일 뿐이지만, 자신들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수명을 잔인하게 빼앗아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모습이 끔찍하게 보였던 것이다. 떠돌이는 노단과 같은 존재들로부터 배척당해왔기에 그들이 없는 곳에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래서 해유랑시로 왔던 유랑은 갑자기 나타난 노단으로 인해 소중한 보금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길어봐야 10년이 조금 넘는 짧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찾아왔던 해유랑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유랑은 노단의 부하인 연준과 대화를 시도한다.

포기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에 그들에게 속아서 부하가 된 사람은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야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는 이미 자신의 생명이 주인에게 달렸고 공범으로 많은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을 주인의 뜻과 일치시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원래 그런 일에 익숙하다. 그래서 명령을 받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쁜 짓도 저지른다.

연준은 유랑을 통해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노단은 인간의 수명을 빼앗으며 살아가기 위해 해유랑시에 온 거고, 부하로 살아가는 연준의 목숨 역시 그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이다. 노단이 죽은 이후, 연준은 새로운 주인을 찾지 못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노단은 아직 영식을 먹이로 맞이하는 의식을 끝마치지 못했고, 연준이 그에게서 벗어나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유랑을 만난 이후, 연준의 생각에는 조금씩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인간을 그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먹이로만 바라보는 노단과 그에게 발이 묶여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연준, 노단과 같은 존재이지만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온 유랑.

세 아이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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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단의 입장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연준의 입장이었다면, 노단을 외면하고 유랑을 돕는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유랑의 입장이었다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고 떠돌이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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