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브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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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데뷔작 『아몬드』로 100만 독자의 사랑을 받은 작가 손원평의 장편소설. 작가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실패한 사람이 다시 성공하는 이야기를 추천해달라는, 지금 자신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너무나 필요하다는 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소설이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사업을 벌이고 주저앉는 일을 반복해온 남자가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일으켜 세우고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을 놀라운 흡인력으로 그려낸 이번 작품은 사소한 변화를 통해 인생을 회복해나가는 인물의 눈물겨운 분투기를 담았다.

여기 여러번 사업에 실패하여 빚더미에 오르고 가족과도 멀어진 뒤 끝내 자살하기로 결심한 한 남자가 있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중년 남성 김성곤 안드레아. 그런 그가 자살에도 실패한 뒤 멈춰 서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본다. 우연히 듣게 된 ‘변화’라는 메시지에 꽂힌 그는 ‘자세를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한 광고 문구를 보고 작은 습관을 고쳐보기로 결심하는데, 놀랍게도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튜브』는 여러모로 데뷔작 『아몬드』와 연장선에 있다. 『아몬드』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소년이 주변인들과 소통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라면, 이 작품은 삶의 감각과 감정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하게 살아온 중년 남성이 그것을 회복하려는 변화의 과정을 담았다.

책 소개

더럽게 차갑군.

『튜브』는 자살을 결심하고 강물을 만져본 김성곤 안드레아의 대사로 시작한다. 소설은 총 4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김성곤이라는 인물이 왜 죽음의 문턱까지 나와있는지 보여준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의 말에 의하면 김성곤의 삶은 대체로엉망이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김성곤 안드레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시작하자. 당신은 길을 가다가 어떤 중년 남자와 부딪혔다. 그러자 당신을 휙 쳐다보고 실례했다는 뜻인지 위아래로 훑는 건지 애매하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는 무표정한 남자. 세월이 살을 조금씩 집어삼킨 듯 가운데가 볼록한 배에 끝이 희끗희끗한 머리, 무뚝뚝하고 성마른 표정.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특징적일 게 없어서 그 일을 묘사하려면 오십 전후로 보이는 남자와 부딪혔다는 것 말고는 떠오를 말이 없을 것 같은, 아니, 돌아선 순간 부딪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될 어떤 사람. 바꿔 말하면 이제 인생이 막 저물기 시작하려는 나이대의 남자들 중 흔하게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 그게 김성곤 안드레아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어떤가. 이런 사람을 떠올리면 된다. 매번 어떤 일을 호기롭게 벌이고 뒷수습은 남들이 하게 만드는 사람, 좋게 말하면 사업가 기질이 있으나 나쁘게 말하면 일단 호언장담으로 무장해, 진격해야 할 때 돌격하고 한발 물러서야 할 때 위로 껑충 뛰고 신중하게 지켜봐야 할 땐 누구보다도 빠르게 도망치는 사람. 그리고, 아니 그래서, 매우 애석하게도, 결과적으로는 한번도 인생에서 큰 성공을 맛본 적이 없는 사람.

가정으로 향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가족에게 하는 칭찬이 매우 인색한 사람. 자신은 칭찬이라 생각하고 던진 말이 상대에겐 칭찬으로 전달되지 않는 사람. 사소한 일에 핀잔을 주고 성이 나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제일 먼저 감정을 드러내는, 밖에서보다 조금 더 별로인 아버지이자 남편.

김성곤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성공을 해본 적이 없는 남자, 김성곤은 자살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매섭도록 차가운 칼바람을 방패 삼아 그날 밤 강 위를 떠났고, 연탄과 번개탄을 피워 차에서 죽겠다는 다짐은 불법주차를 한 취객 신분으로 차에 탄 채 견인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김성곤은 다시 돌아온 집에서 사업이 실패한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박스더미 사이에서 울부짖었다. 그러다 문득 유리 액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는데, 못생겼다는 말이 단박에 튀어나오는 몰골이었다. 김성곤은 어디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휴대전화의 사진첩을 뒤적였다.휴면 게정을 살리는 귀찮은 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진입한 과거에서 그는 딸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다. 썩어문드러져 가던 김성곤의 마음 속에는 이제껏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던 소망이 싹텄다.

그는 사진 속의 남자가 되고 싶었다.

김성곤은 과거의 사진과 같은 자세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현재와 무엇이 다른지 하나하나 뜯어보며 파악하기 시작했다.

- 늙었다. 머리숱이……없다…… 좀더, 조금 더 …… 못 생겨졌다.

스스로 한 말인데도 누군가의 험담을 엿들은 것처럼 화가 치밀었다. 인정 . 다 인정. 그래, 외모부터 상황까지 모든 게 달라졌다는 거 인정. 그런데 바꿀 수 있는 건 없는 건가? 정말 하나도 없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정말, 단 한 개도 없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김성곤은 다른 건 모르겠고, 자세 하나만 고쳐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다른 일에 집중하면 자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꾸자꾸 꺾였지만 김성곤은 묵묵히 해나갔다. 매일같이 사진을 찍고, 벽에 모눈종이를 붙여 기록을 하는 것으로 1부가 마무리된다.


2부에서는 김성곤이 피자가게를 운영했을 당시에 근무했던 한진석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피자가게가 망하고 3년이 지난 후에, 두 사람은 라이더라는 같은 신분으로 마주친다.

색으로 치자면 진석은 밝은 쪽에 속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 애는 회색이었다. 하지만 진한 회색, 연한 회색, 베이지가 섞인 회갈색, 때론 대리석처럼 빛나는 영롱한 조각을 품은 다채롭고 신비한 회색이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그 오묘함 앞에 아싸, 라는 단어가 폭군처럼 나타나 이 애는 들여다볼 필요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조롱하며 단정 지었다. 그 말 앞에서 진석은 그저 무의미하게 말라비틀어진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싸 직원과 아싸 사장은 예전과는 다른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진석에게 우리가 그 정도로 친했냐고 물어보던 성곤은 그를 자신의 오피스텔에 초대하게 된다.

- 있잖아, 진석아. 난 그동안 뭘 할 때마다 늘 목표를 생각했거든. 근데 그 목표들이 순수하지가 않았어. A는 B를 위한 행동이고 B는 C를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랬거든? 근데 그게 다 부질없게 느껴지더라. 최종 목표가 무너지면 중간에 했던 A부터 Z가 전부 무의미해지더라고. 그래서 이제 그렇게 거창한 목표 같은 걸 안 세우기로 했어. 행동에 목표를 없애는 거지. 행동 자체가 목표인 거야.

유튜브와 함께 음악 작업을 병행하던 진석은 성곤의 오피스텔을 오가며 그가 변화를 기록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규칙을 정하였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다.

2부에는 박실영이라는 이름의 버스 기사도 등장한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도중, 성곤은 항상 여유로운 태도로 웃음을 잃지 않는 그를 발견하게 된다. 성곤은 건너편의 박실영을 보면서 비가 오면 저 웃음도 사라지겠지, 짜증나는 상황이 닥치면, 여기서는 절대 여유롭게 굴지 못하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그 예측은 번번이 빗나갔다. 매일 같은 태도로 삶과 사람을 대하는 박실영에게 다가간 성곤은, 감각에 집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밖의 조언을 듣게 된다.


박실영의 조언을 잊지 않은 성곤은 꼬박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금세 익숙해져버릴 감각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3부에서는 마침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소한 변화부터 만들어가는 '지푸라기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그는 반복되는 실패로 인해 안 좋은 감정만 남긴 채 별거 중이던 아내 란희와 딸 아영에게 인정을 받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고로 인해 한순간에 인생이 뒤바뀌기도 한다. 3부는 그야말로 스펙타클하다. 김성곤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잘됐다는 생각과 함께 불안이 엄습했다.

튜브의 가제본 표지에는 #동기부여 #인생리셋 #습관형성 #변화가필요할때 #전환점이되는책 이라는 해시태그가 적혀있다. 그 해시태그에 어울리게, 죽음을 결심했던 김성곤이라는 인물이 죽고 싶을만큼 인생을 리셋하고 싶을 때, 변화가 필요할 때 자세 바로잡기 라는 사소한 습관을 형성하여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소설이다. 튜브가 3부에서 막을 내렸다면, 김성곤을 대단한 성공을 거둔 소설 속 주인공으로 기억할 수는 있었어도 책장을 다 덮은 뒤에 좋은 책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4부에서 다시 새로운 벽을 마주하여 다시 변화하는 혹은 다시 되돌아가는 김성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전과는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이 소설은 마지막 에필로그가 완벽한 결말을 완성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손원평의 『튜브』를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마지막장까지 빼놓지 말고 읽어나가길 바란다.

"이 프로젝트는 여러분이 스스로 만든 지푸라기에 바람을 넣어줄 겁니다. 지푸라기가 엄청나게 커다란 튜브가 될 때까지, 그래서 여러분이 당당하게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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