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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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과 정치적 충성이 개인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운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준다”는 평과 함께 『밀크맨』으로 50주년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애나 번스의 데뷔작 『노 본스』가 창비에서 발간되었다.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대담하고 능란한 서술과 훨씬 더 날것 같은 생생한 언어와 천연덕스러운 블랙 유머로 애나 번스의 천재적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밀크맨』과 마찬가지로 북아일랜드 분쟁 시기, 즉 ‘트러블’을 배경으로 벨파스트 북부의 한 마을에 사는 소녀 어밀리아와 가족,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문제, 골칫거리, 소요를 뜻하는 영어 단어 ‘trouble’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정관사가 붙고 복수형이 된 ‘The Troubles’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 걸쳐, 지리상으로 아일랜드섬에 속하나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에서, 과거에 한 나라였던 아일랜드와 재합병하려는 가톨릭교도 세력과 현재 속한 국가인 영국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는 개신교도 세력이 충돌하며 수많은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민간인을 포함해 35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만명의 부상자, 실종자를 낳은 현대사의 크나큰 비극이다. 올해 3월에 국내에 개봉하고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자전적 영화 「벨파스트」도 이 트러블 시기의 초반을 다루고 있다. 『노 본스』의 주요 배경인 ‘아도인’이라는 마을은 가톨릭교도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작가 애나 번스가 실제로 나고 자란 동네이다. 번스는 부커상 수상 당시 소감에서 “나는 폭력과 불신, 피해망상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가능한 최대로 스스로 알아서 생존해야 하는 곳에서 성장했다”고 아도인을 묘사한 바 있다.

책 소개

the Troubles :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약 30년간 계속된 북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둘러싼 혼란기.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 내에서 친영국 진영과 친아일랜드 진영이 무력 충돌을 일으키며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3,5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노 본스』는 트러블이 처음 시작되었던 1969년에서 시작한다. 아도인에 살고 있는 어밀리아는 친구 보시에게서 트러블이 시작될 거라는 소식을 듣는다. 더 이상 밖에 나와서 놀 수 없을 거라는 얘기를 어밀리아는 믿지 못한다.

'평소처럼 지낼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지? 길 어귀에서 못 놀 정도로 나쁜 일이 뭐람?'

트러블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도, 어밀리아의 삶에는 별다른 변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밀리아는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하루하루 날짜를 꼽고 있어서 알았다) 정말 그런 게 일어나고 있는지 확신이 안 들었다. 아직 여기에서 그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밀리아가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트러블은 시작되었고, 많은 이들의 일상을 무너뜨렸다. 무고한 사람들의 집이 하나둘씩 불에 탔고, 거리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어밀리아의 엄마는 널판으로 창문을 막고, 막대기와 벽돌과 칼과 부지깽이를 준비하고, 집안 곳곳에 물을 받아두고 긴 호스를 수도꼭지에 연결해서 놓았다. 더 이상 집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책 첫 부분에서 어밀리아는 애나 번스가 어렸을 때 실제로 살았던 동네이기도 한 아도인이라는 지역에 사는 일곱살짜리 아이로 등장한다. 소설은 "트러블은 목요일에 시작됐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밀리아는 이 '트러블'이라는 것 때문에 앞으로는 친구들과 길에 나와 놀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도, 길에서 못 놀 정도로 나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순진하고 그저 평범한 아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트러블이 그뒤로 30년 가까이 계속되며 사람들을, 일상을 처절하게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폭력으로 가득하다. 국가의 폭력, 무장단체의 폭력, 학교 선생님들의 폭력, 가족 안에서의 폭력이 겹겹이 어밀리아의 삶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옮긴이의 말中

소설은 1994년 정전 선언을 했던 시기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도인이라는 작은 지역을 중심으로 단편 소설처럼 각기 다른 인물들의 삶을 비추어준다. 서평 작성을 위해 전달받은 가제본은 전체 소설의 50%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3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몇 번이고 읽기를 멈추었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소설이지만, 트러블은 과거에 북아일랜드에 실제로 존재했던 독립투쟁기이다.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갔을 이들을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혀왔다.

1969년, 영국군인 제임시는 처음으로 벨파스트에 발을 들였다. 어머니께 벨파스트에 친척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들뜬 마음을 안고 가족을 만나러 나섰다. 처음으로 마주한 러빗 가족은 브라이드 톤의 아들이라는 말에 꽁꽁 닫아두었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하지만 이후에 파견을 나온 제임시는 더 이상 러빗 가족과 편안하게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영국군은 더 이상 아도인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들여보내주실래요, 이모?"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머라이어 이모?" 다시 불러보았다.

"묵주기도 중이야." 여자가 대답했다.

"저도 같이 해도 돼요?"

다시 침묵이 흘렀고, 그러다 이모가 배 속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안돼. 가라. 넌 잉글랜드 놈이잖아. 이제 오지 마."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소설에서는 따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폭력에 노출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심리를 묘사해줄 뿐이다.

1994년을 향해 시간이 흘러갈수록 성장하는 어밀리아와 함께 아도인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정상'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폭력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망가뜨려 놓는지를 계속 곱씹으며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들여다보는 건 분명 글자인데 행간에는 십자포화가 쏟아진다. 충격과 비극의 여진을 수습할 틈 없이, 살과 피와 뼈를 지닌 언어가 멱살을 잡고 흔든다. 내 말을 믿기 어렵다면, 부디 이 책을 집어들고 중간 아무 챕터든 펼쳐보기 바란다. 페이지마다 쌀알만한 평화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에서, 읽는 동안 머리가 울리고 영혼은 옥수수처럼 털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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