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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 우수상 수상작
이은소 지음 / 새움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 넘어가는 게 아까운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읽어가는 게 아쉽고 계속 언제까지고 이야기 속에 빠져 있고 싶었다. 정말 보석을 만난 기분이었다.
때는 조선시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거늘, 억압적인 층층시하 신분제도와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사회의 굴레가 상존했던 시대이다. 분명히 아픈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아프기에 병으로 인식도 못했을 터인데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의사가 있었다.
상처입은 치유자, 유세풍
1957년 나이 25세에 사제로 서품을 받고 하버드 대학 교수이자 설교자, 저술가로 종교를 넘어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헨리 나우웬은 그의 역작으로 불리는 책 《상처입은 치유자 (Wounded Healer)》에서 상처가 있기에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며 그 상처의 치유에 자신의 상처가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 속에서 비록 가공의 인물일지언정 조선에도 상처입은 치유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유세엽이다. 오늘날 표현으로 의료 사고 의혹으로 그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트라우마에 빠져 침을 들기만 해도 공황장애 증세를 보여 침을 못 놓는 의원이 된다. 수술 못하는 외과의사 정도 되려나? 그러나 그는 마음의 눈으로 병증을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읽어내고 곁에서 지켜주고 말을 걸고 들어준다.
환자의 눈높이에서 비난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마음의 치유를 얻는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준다.
개인의 문제 vs 사회구조적 문제
병자호란 때 청으로 끌려가서 아들을 낳고 생면부지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으나 화냥년을 집안에 둘 수 없다며 사약을 먹고 죽으라는 시어머니 등쌀에 결국 자기를 버린 남편. 늙어 치매에 걸려 아들 풍이를 그리고 또 그리는 할망.
시집간 지 하루만에 병약했던 남편이 죽자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며 구박하는 시어머니로 인해 우울증에 걸려 몇 번이고 자해를 시도했던 현령의 딸 은우.
강박증과 결벽증 증세를 보이는 10대소녀는 알고 보니 의붓아비에게 상습적으로 강간당하고 있었으나 생명을 부지하려 같은 방에서 숨 죽이며 묵인하는 어미.
서자라고 학대받는 오줌싸개가 된 도령, 사람들의 멸시의 눈빛이 두려워 알코올 중독에 빠진 천민 광대, 능력이 안 되는데 10여년간, 고생하며 고시 뒷바라지한 아내의 바람대로 꾸역꾸역 과거 공부를 하다가 발기부전에 걸린 고시생,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통했다며 집안의 수치라며 결국 살해당한 비구니, 중도실명한 맹인과 학대로 한 팔과 한 다리를 잃은 장애인은 서로 의지하며 길거리를 떠돌고...
이들의 사연 하나하나에 작가가 개인의 탓을 하지 않고 남존여비사상, 신분제도 등 사회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남자는 아내를 죽어도 아무 문제 없지만 여자가 과부가 되면 온갖 차별을 받는다. 재가하더라도 자녀가 양반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같은 약자이기에 더 비열해질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을 보여준다. 며느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난 시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유세풍은 그들도 병자이고 상처받은 이들임을 알아챈다. 딸이 자기와 같은 방에서 남편에게 강간을 당해도 입을 다무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이다. 경제력이 없기에 남자에게 의존하여 인륜을 저버린 범죄를 은닉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조 공동체
계 의원집에는 언제나 왁자지껄 조용할 날이 없는 대가족이지만 혈연으로 연결된 이는 하나도 없다.
계 의원은 첫사랑, 지켜주지 못했던 그녀의 딸 입분을 딸 삼았고, 자폐 스펙트럼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청년 장군을 아들 삼았다. 호란 중에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와 이제는 노망난 할망과 귀화한 여진족의 후손이지만 사람들의 배척이 겁나 남해 출신으로 하고 지내는 남해댁, 그리고 침을 놓지 못하는 의원 유세풍, 생명처럼 그를 따르는 종 만복,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 불리며 우울증에 자해소동을 벌인 20대 청상과부 은우가 모두 함께하는 공동체이다.
말은 시궁창같이 거칠지만 이들은 피보다 진한 애정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계 의원 정말 입은 망나니이지만 진정한 의원, 걸출한 인물이다. 숨을 그늘이 넓디 넓은 커다란 느티나무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술에서 별맛 나는' 로맨스
우울증에서 벗어나 여성 의원으로 발돋움하는 은우와 마음이 아픈 자들 곁에서 동행하는 심의 세풍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사랑에 빠져간다.
잠든 은우의 모습을 보며 "술에서 별맛이 나는구나."라고 읊조리는 세풍. 이 둘은 영원히 함께하기로 약속한다. 예스럽고 고전적인 수줍지만 강렬한 해바라기 같은 헌신의 사랑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세풍의 의료 사고 의혹이 모두 해결되어 다시 출세길이 보이지만 허전하기만 한 그들은 다시 소락마을의 계 의원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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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이면 휴머니즘, 로맨스면 로맨스, 유머면 유머 그 어느 하나 과함도 부족함도 없는 멋진 책이었다. 입에 착 감기는 대사하며 조연들의 충성스럽고도 익살스러운 모습하며 매력이 철철 넘친다.
작가님 후기에 이야기를 만드는 본인의 취미가 독자의 기쁨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진정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팬이 돼버렸다.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란 (나만의) '올해의 책'의 가장 유력 후보가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