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독자의 여행 - 형과 함께한 특별한 길
니콜라스 스파크스 지음, 이리나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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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독자'와 '여행'이라는 모순되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에서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되었다고 할까?


니콜라스 스파크스는 미국의 '이치카와 다쿠지' 같은 느낌이다. 이치카와 다쿠지는 영화로도 제작된 동명의 원작 소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저자이다. 두 작가 모두 지고지순한 순애보적 사랑을 고집스럽게 아름답게 그리는 작가인 데다가 연령대도 60년대 초중반 출생으로 비슷하다.


맨디 무어의 아름답고 청순한 모습과 청아한 목소리로 내게 가장 소중한 영화 중 하나로 남은 《워크 투 리멤버》가 너무 좋아서 원서로 사서 읽기도 했다.


이 작품은 작가 니콜라스 스파크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여행기,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 5명을 아내에게 남겨두고 여행을 떠나는 프롤로그 부분을 읽고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책장이 넘어감에 따라 웃었다 울었다 울다가 책장을 덮다가 다시 펴서 읽곤 했다.


애틋한 자매 사이의 우정, 끈끈한 동기간의 결속과 달리 형제 간에는 데면데면한 면이 있을 것 같은데 형과 함께 여행을 나선다. 그것도 아이 다섯과 엄청나게 밀려오는 원고 마감의 쓰나미를 앞두고말이다. 세계여행의 각 여행지에서의 소회와 함께 저자의 삶의 기억들을 날실과 씨실을 수놓듯이 아름답게 엮어낸다.


저자의 부모님은 학생 부부로 너무나 가난했지만 자녀들은 셋이서 뭉쳐서 늘 즐거웠던 유년시절을 지낸다. 멋진 외모와 대담한 배포를 가진 형, 그 형을 동경하면서 자신도 인정을 받기 위해 공부와 달리기에 열중하는 저자의 모습, 조용하고 영적이고 사랑스러운 여동생 데이나는 여느 형제자매들처럼 투닥거리고 경쟁심도 느끼지만 기본적인 신뢰와 애정으로 인생의 동반자로서 성장해간다.


이제 좀 살 만해졌을 때, 즉 극빈층에서 중산층에 진입했다고 생각됐을 때, 그리고 악화일로로 향하던 저자의 부모의 관계가 조금씩 개선의 기미기 보일 때, 저자의 어머니는 늘 꿈이었던 말을 사서 주말에는 말을 타는 시간을 가지는데 어느날 갑자기 말이 날뛰는 바람에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늘 밝고 다부졌던 어머니, 인생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었지만 자녀들에 대해 늘 긍정하고 사랑을 쏟아주었던 그 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는 원래도 정신적인 이슈가 있었는데 어머니의 존재로 인해 많은 부분 결함이 메워졌던 것인지 어머니 사후, 여러 가지 정서적 문제가 나타나며 오랜 시간 괴로워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라는 큰 위기 앞에서 저자의 삼 남매는 더욱 더 깊은 사랑으로 결속하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이른 나이에 인생의 사랑을 찾은 저자와 달리, 형은 '헌신'을 하지 않고 늘 나비처럼 많은 연애상대를 전전한다. 이들 형제에게 시련은 계속된다. 《워크 투 리멤버》의 여주인공의 모델이기도 했다는 사랑스러운 여동생 데이나가 뇌종양으로 몇 년간 투병하다가 쌍둥이 아들들을 남겨두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저자의 둘째 아들 라이언의 병명을 알 수 없는 발달지체...


인생의 파고 앞에서 저자는 사건들의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을 더욱 신뢰하고 신앙을 더욱 붙잡는 반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려가버린 신을 이해할 수 없는 형은 신앙으로부터 멀어져간다. 두 사람 모두 이해가 되었다. 그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삶에서는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사회적으로는 저자는 데뷔작 발표와 동시에 일약 스타 작가가 되어 문단과 독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백만장자가 된다. 후속작들도 발표하는 족족 베스트셀러와 영상화 작업이 이뤄진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


결국 형제만 남게 된다. 그렇기에 저자는 모든 삶의 실타래들을 내려놓고 형과 여행을 떠났어야 하는 것이다. 바쁘게 달려오던 길에서 멈춰서서 현재 있는 곳을 떠나 이 책의 표지에 그려진 열기구를 타고 삶의 길을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했던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위에서 조망해 보고 다시 방향을 정하고 걸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일중독자인 저자의 삶의 사건들과 그가 느껴온 인생의 무게.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분 단위로 할 일을 정해 놓고 잠 잘 시간을 깎아가며 살아온 그야말로 워커홀릭의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인생의 하프웨이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어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끄럽고 감칠맛나는 번역으로 두 중년 남성의 인생의 여정, 그리고 가족의 의미, 사랑과 헌신, 신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 또한, 소중한 가족과의 여행길에서 여백마다 읽을 수 있어서 더욱 값지고 아름다운 독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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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준비생의 런던 - 여행에서 찾은 비즈니스 인사이트 퇴사준비생의 여행 시리즈
이동진 외 지음 / 트래블코드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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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소주 광고 하면 당연스레 청순한 얼굴에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진 사랑스러운 여배우나 아이돌을 연상할 것이다. 마치 술이 아니라 진짜 이슬 같은 이미지를 전해준다. 90년대 후반, 2000년 대 초반에 학부 및 대학원을 다녔을 때, 고된 하루의 노동의 괴로움을 잊게 해 주는 도수 높은 노동자의 술, 서민의 술이었던 소주의 도수를 조금씩 낮추고 광고 모델로 한참 청순하고 한국적인 미인으로 주가를 높이던 이영애 씨가 기용되어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진짜 선녀가 마시는 이슬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자아낸 것이다. 기존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그 이후, 아예 트렌드로 자리잡았지만 최초의 시도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 책에서는 기존의 관점과 각도를 달리하는 '재정의',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가치를 '재발견'하거나 해오던 방식에 변화를 주는 '재구성'이라는 세 개의 꼭지로 비즈니스 인사이트를 제공해 준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철학 입문서로 손꼽는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도 철학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는 방법론, 사고의 과정에서 통찰력을 찾아야 한다고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들이 소개하는 각각의 사례들은 '귤이 회수를 건너 북쪽으로 오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우리나라의 환경에는 100%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저자들이 소개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흥하게 된 아이디어, 인과관계, 역학관계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재정의

기존 업의 정의, 업계의 상식을 깨고 성공적으로 사업을 궤도에 오른 곳들이 있다.

책이라는 상품을 재정의하여 초판본, 저자 서명이 담긴 '희소성'을 가진 상품인 책을 파는 '골즈보로 서점',

고가의 헬스기구로 무장하여 원가를 뽑으려고 고액 혹은 장기 계약으로 유도하는 헬스클럽이 아니라 각자에게 알맞는 '운동 솔루션'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재정의한 '바디즘',

고가의 주방용품보다는 일상의 요리에 즐거움과 편리함을 더해 주는 주방용품 업체 '조셉조셉'


재발견

영화를 단순히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를 '경험'하는 새로운 가치를 재발견한 '시크릿 시네마',

벨기에 초콜릿 등으로 대표되는 초콜릿의 가치를 원재료 카카오에서 발견하고 원산지 아프리카를 주목하고 아프리카 풍으로 꾸민 '다크 슈가즈',

미술용품의 기존 고객인 전문가에서 초보자라는 보다 넓은 새로운 고객층을 발견하여 미술을 저변으로 확대하려는 비전을 가진 '카스 아트',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잡지의 영역을 발견한 '모노클'와 '더 모노클 카페'


재구성

패션의 다양한 장르와 영역을 재구성하여 하나의 멋진 편집숍을 만들어낸 LN-CC,

포도의 산지와 제조지가 같아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산지와 제조지를 재구성한 와이너리 '로버슨 와인',

5성급 호텔의 고급스러움과 3성급 비즈니스 호텔의 효율성을 재구성, 결합한 시티즌M 호텔


인상깊었던 몇 가지만을 소개했다. 전체적인 인상은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이 높은 성숙한 경제사회에 접어든 런던의 사례들이어서 그런지 사례가 대부분 하이엔드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하이엔드 비즈니스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점점 비즈니스라는 것이 양분화되는 것 같다. 소비를 통해 '나는 너희들과 달라'를 주장하고자 하는 고객들과 '가성비'가 가장 중요한 실속파 고객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규직, 비정규직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비즈니스가 호응을 받을지 모르겠다.

네 명의 공저자들은 국내외 유수의 기업과 전략 컨설팅 회사에서 잔뼈가 굵어온 전문가들이다. 그렇기에 같은 것을 보고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저자들은 단순히 도로변에 있는 매장을 보고 그저 지나치지 않고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그것을 분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네 명 모두 필력이 장난이 아니다. 분석적, 논리적이면서도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흥미롭게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다.

퇴사하기 전에 이 저자들의 시리즈물 《퇴사준비생의 도쿄》, 《퇴사준비생의 런던》, 《퇴사준비생의 베이징(출간 예정)》, 《퇴사준비생의 타이페이 (출간 예정)》을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회사를 전혀 관둘 예정이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불가항력적으로 퇴사하게 되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방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름대로의 내 진로를 찾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쉽다. 그리고 퇴사 전 남편과 6개월 시애틀에 거주하면서 이 저자들 같은 마인드와 지식이 있었다면 <퇴사준비생의 시애틀> 한 권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도 해 본다.

한편으로, 선진국, 대도시만큼 개발도상국의 한참 부흥하는 도시, 중소도시도 다뤄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성숙한 도시의 평균소득 4만불 이상 되는 곳과는 또다른 인사이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퇴사준비생 시리즈 앞으로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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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들한들
나태주 지음 / 밥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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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잠시동안 좋아했던 시의 세계에 40대가 되어 다시 빠져본다.

난해하여 시인의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그런 시 말고 마음을 보듬어주고 새로운 삶의 기운을 나눠주는 시가 좋다. 나희덕 시인과 조병화 시인의 시를 참 좋아했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어느새 국민 애창시가 된 것 같다. 짧고 리듬이 느껴지는 강렬하면서도 순박한 시이다. 무엇보다 시인의 진심과 삶 자체가 담겨서 울림이 있는 것일 것이다. 오늘도 아이들과 남편과 벚꽃이 만개한 봄날의 산책을 하며 개미를 찾는 아이와 함께 키 작은 꽃들을 자세히 보았다. 냉이꽃, 보랏빛 제비꽃, 하얀색 제비꽃, 민들레, 꽃마리, 별꽃, 봄까치꽃(공식 명칭은 '큰개불알풀'이지만 이 사랑스러운 푸른 꽃에 너무나 망측스러운 이름이어서 부르고 싶은 이름 '봄까치꽃'이라 하련다) 등 고개를 들면 보이는 벚꽃의 향연 못지 않은 들꽃의 향연이 풀밭에 펼쳐져 있었다.

'풀꽃 시인' 나태주 시인의 시집 《한들한들》의 개정판이 나왔다.

기독교 신앙인이신가, 곱고 겸손한 시어에서 신앙이 묻어난다. 저녁에 잠들 때면 후회와 아쉬움뿐, 결코 나 자신을 용서 못하며 자책하며 잠자리에 눕는 나에게 고운 눈의 시인은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오늘의 잘못들을 스스로 용서하고 잊으라고, 그리고 하나님한테 용서받을 수 있으니 감사한 것이라고...

저녁에

저녁에 잠든다는 건
내일의 소망을
가슴에 안는다는 일이고

오늘의 잘못들을
스스로 용서하고
잊는다는 것이다

<한들한들> 84쪽


감사

살아서 숨 쉴 수 있음에 감사
너를 만날 수 있음에 감사
목소리 들을 수 있음에 또다시 감사
사랑할 수 있음에 더욱 감사

하나님한테 용서받을 수 있음에
더더욱 감사

<한들한들> 16쪽

시인은 시를 읽으며 바른 마음을 갖고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삶에 대한 욕구도 생겼다며 '시에게 빚을 졌다'고 밝히고 있는데, 나야말로 나태주 시인의 시에 빚을 지고 있다.

좋은 시를 골라 읽음으로 자신의 내면의 어둠을 밝히고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정말로 좋은 시를 읽으면 바른 마음이 생기고 어두운 마음이 조금씩 밝아지고 삶에 대한 욕구도 생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약 나에게 이러한 시 읽기바저 허락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

시한테 진 빚, <한들한들> 168쪽

아름다운 사계와 자연의 모습을 노래하는 시들,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들, 그리고 70평생을 살아오며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시들... 참으로 곱고 순하다.

또 그뿐만 아니라 정말 생활밀착형 시들도 많다. 40년 가까운 단골식당인 순댓국밥집 '경북식당', 평생 자동차 없이 버스, 택시, KTX 타고 전국으로 강연 다니시는데 '나 좀 태워 주세요'라서 존함이 나태주라는 시 '나태주', 신나게 달리는 자전거를 줄여서 신달자, 여류작가의 이름이기도 한 '신달자'라는 시 등 정말 읽다가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고, 어릴 적 살았던 동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넉넉한 마음, 오래 지긋이 바라보는 여유로운 마음, 가까운 것들, 늘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축하해요

날마다 반복되는 하루하루 그날이 그날
지루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그래서 때로는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당신, 큰 병에 걸려 병원에 오래
갇혀서 사는 사람이라 생각해봐요
기약 없는 여행길 떠나 먼 나라
흰 구름으로 떠돈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지금 그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겠어요?
날마다 그럭저럭 보내는
그 날이 그 날인 날로 돌아오고 싶겠어요?

축하해요! 축하해요!
당신의 하루하루
아무 일도 없는 무사한 날들을 축하하고
평상의 작은 시간들을 축하해요.

<한들한들> 152~153쪽

일상을 뒤흔드는 대사건들을 겪으며 심장이 쪼그라드는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하고 무사하고 지루하고 무미건조해서 감사하는 날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축하해요! 축하해요! 감사해요! 감사해요! 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말이다.

요즘 잠시 일상이 무료하여 잊고 있었던 감사를 다시 되새기게 된다. 시의 힘, 문학의 힘이 놀랍지 않은가? 내 속에 잠시 잊혀졌던, 잠시 자고 있던 감사를 되살려주고, 행복을 되살려주니말이다.

만 스무 살의 나이로 군대에서 세상을 떠났던 예전 친구의 장례식 이후, 아침에 일어나면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라고 짧은 기도의 말을 20년 넘게 하고 있으며, 우리 큰 아이가 임신 26주를 넘기자마자 태어나버려 온 세상이 전복된 경험을 하고난 이후, "심심하고 아무 일 없어서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기도의 말을 하고 지냈는데, 요새 잊고 지냈었다.

언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구원하는구나.
아름다운 시인의 아름다운 시집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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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잠시동안 좋아했던 시의 세계에 40대가 되어 다시 빠져본다. ​

난해하여 시인의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그런 시 말고 마음을 보듬어주고 새로운 삶의 기운을 나눠주는 시가 좋다. 나희덕 시인과 조병화 시인의 시를 참 좋아했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어느새 국민 애창시가 된 것 같다. 짧고 리듬이 느껴지는 강렬하면서도 순박한 시이다. 무엇보다 시인의 진심과 삶 자체가 담겨서 울림이 있는 것일 것이다. 오늘도 아이들과 남편과 벚꽃이 만개한 봄날의 산책을 하며 개미를 찾는 아이와 함께 키 작은 꽃들을 자세히 보았다. 냉이꽃, 보랏빛 제비꽃, 하얀색 제비꽃, 민들레, 꽃마리, 별꽃, 봄까치꽃(공식 명칭은 '큰개불알풀'이지만 이 사랑스러운 푸른 꽃에 너무나 망측스러운 이름이어서 부르고 싶은 이름 '봄까치꽃'이라 하련다) 등 고개를 들면 보이는 벚꽃의 향연 못지 않은 들꽃의 향연이 풀밭에 펼쳐져 있었다.

'풀꽃 시인' 나태주 시인의 시집 《한들한들》의 개정판이 나왔다.

기독교 신앙인이신가, 곱고 겸손한 시어에서 신앙이 묻어난다. 저녁에 잠들 때면 후회와 아쉬움뿐, 결코 나 자신을 용서 못하며 자책하며 잠자리에 눕는 나에게 고운 눈의 시인은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오늘의 잘못들을 스스로 용서하고 잊으라고, 그리고 하나님한테 용서받을 수 있으니 감사한 것이라고...

저녁에

저녁에 잠든다는 건
내일의 소망을
가슴에 안는다는 일이고

오늘의 잘못들을
스스로 용서하고
잊는다는 것이다

<한들한들> 84쪽


감사

살아서 숨 쉴 수 있음에 감사
너를 만날 수 있음에 감사
목소리 들을 수 있음에 또다시 감사
사랑할 수 있음에 더욱 감사

하나님한테 용서받을 수 있음에
더더욱 감사

<한들한들> 16쪽

시인은 시를 읽으며 바른 마음을 갖고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삶에 대한 욕구도 생겼다며 '시에게 빚을 졌다'고 밝히고 있는데, 나야말로 나태주 시인의 시에 빚을 지고 있다.

좋은 시를 골라 읽음으로 자신의 내면의 어둠을 밝히고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정말로 좋은 시를 읽으면 바른 마음이 생기고 어두운 마음이 조금씩 밝아지고 삶에 대한 욕구도 생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약 나에게 이러한 시 읽기바저 허락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

시한테 진 빚, <한들한들> 168쪽

아름다운 사계와 자연의 모습을 노래하는 시들,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들, 그리고 70평생을 살아오며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시들... 참으로 곱고 순하다.

또 그뿐만 아니라 정말 생활밀착형 시들도 많다. 40년 가까운 단골식당인 순댓국밥집 '경북식당', 평생 자동차 없이 버스, 택시, KTX 타고 전국으로 강연 다니시는데 '나 좀 태워 주세요'라서 존함이 나태주라는 시 '나태주', 신나게 달리는 자전거를 줄여서 신달자, 여류작가의 이름이기도 한 '신달자'라는 시 등 정말 읽다가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고, 어릴 적 살았던 동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넉넉한 마음, 오래 지긋이 바라보는 여유로운 마음, 가까운 것들, 늘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축하해요

날마다 반복되는 하루하루 그날이 그날
지루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그래서 때로는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당신, 큰 병에 걸려 병원에 오래
갇혀서 사는 사람이라 생각해봐요
기약 없는 여행길 떠나 먼 나라
흰 구름으로 떠돈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지금 그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겠어요?
날마다 그럭저럭 보내는
그 날이 그 날인 날로 돌아오고 싶겠어요?

축하해요! 축하해요!
당신의 하루하루
아무 일도 없는 무사한 날들을 축하하고
평상의 작은 시간들을 축하해요.

<한들한들> 152~153쪽

일상을 뒤흔드는 대사건들을 겪으며 심장이 쪼그라드는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하고 무사하고 지루하고 무미건조해서 감사하는 날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축하해요! 축하해요! 감사해요! 감사해요! 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말이다.

요즘 잠시 일상이 무료하여 잊고 있었던 감사를 다시 되새기게 된다. 시의 힘, 문학의 힘이 놀랍지 않은가? 내 속에 잠시 잊혀졌던, 잠시 자고 있던 감사를 되살려주고, 행복을 되살려주니말이다.

만 스무 살의 나이로 군대에서 세상을 떠났던 예전 친구의 장례식 이후, 아침에 일어나면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라고 짧은 기도의 말을 20년 넘게 하고 있으며, 우리 큰 아이가 임신 26주를 넘기자마자 태어나버려 온 세상이 전복된 경험을 하고난 이후, "심심하고 아무 일 없어서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기도의 말을 하고 지냈는데, 요새 잊고 지냈었다.

언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구원하는구나.
아름다운 시인의 아름다운 시집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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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일레븐
데니스 홍.홍이산 지음, 정용환 그림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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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거의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지나가면서 우연히 데니스 홍이라는 분에 대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저명한 대학 로봇 연구소에서 이름을 빛내고 계신 분이셔서 관심을 갔다.

예전에는 로봇 하면 산업 현장, 공장 등에서 사용되는 무기질적인 기계로서만 인식이 되었는데, 최근 들어, 인간의 신체와 모습도 유사하고 움직임도 유사한 휴머노이드 로봇의 등장이라든가, 간병 및 장애인 활동 보조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는 로봇들이 계발되고, 바둑기사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매치로 인해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며 이젠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게다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이기에 더더욱 관심이 생겼다.

이 책은 데니스 홍 소장과 아들 이산 군이 함께 쓴 책이다. 기계든, 로봇이든 본질은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기에 간단하게 '이런 게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라는 기초적인 필요를 먼저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답게 정말 귀여운 발상이 나타나 있고, 그것을 또 유머러스하고 정감이 느껴지는 삽화로 표현하고 있다. 누구나 생각해 본 적이 있을 법한 로봇들이 등장한다. 어깨 주물러주는 로봇, 세상 귀찮은 목욕 시켜주는 로봇, 맛있는 요리를 뚝딱 만들어주는 로봇, 아빠 대신 회사 가고 출장 가는 로봇... 정말 웃음이 나왔던 것은 레고 블럭 치워주는 로봇이었다. 어질러진 레고 블럭 밟아보지 않은 사람은 생각도 못할 로봇이다. 그 아찔하고 짜릿한 고통과 블럭 치우는 귀찮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해 봤을 것이다.

 

 

 

아들이 느끼는 이런 필요들을 늘 함께 얘기하고 그것을 기술력을 활용하여 로봇으로 구현하는 멋진 아빠라니... 그런 기술이 있다는 것, 그 분야의 거장(천재라고도 하더라)이라는 것도 대단하지만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대화하고 수용하고 공유하는 모습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느닷없이 등장하는 외계인들의 침공.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는 뚱딴지 같고, 뭔가 기승전결의 흐름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먼저 이 책을 다 읽고 9살 아들에게 읽어보라고 줬더니 너무나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외계인 나오는 부분이 재미있다며 어제 읽고 나더니 오늘 또 재독하는 것이다. 요며칠은 이 책에 빠져 있을 것 같다.

역시 아이들의 눈높이와 어른의 눈높이는 달랐다. 아이가 푹 빠져서 읽고 흥미를 갖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는 개발되어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로봇 일레븐 (11종류의 로봇)'이 소개되어 있어서 정보로서도 매우 유용하다. 인간의 신체와 비슷한 휴머노이드 로봇부터 그저 기계장치로만 보이는 형태의 로봇이 소개되어 있고 엔터테인먼트 목적의 친화력 높은 로봇이 있는가 하면 우주 탐사, 지뢰 제거, 원자력발전소 내부 작업 등 위험하거나 사람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특수 임무를 위하여 제작된 로봇들도 있다. 아이의 방학 동안 한두 번 심심하면 인천국제공항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기도 하는데 공항 로비를 돌아다니는 귀여운 로봇이 있어서 같이 사진도 찍기도 했었다. 아이도 그 로봇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데니스 홍 저자님이 우리 부모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적어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겨본다.

- 자기만의 빛을 발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을 찾아 그것을 꿈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

- 미래를 이끌 우리 어린이들이 가져야 하는 중요한 역량인 리더십, 협동심, 공감 능력, 배려심, 사랑.

-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이라는 지혜. 그리고 공유와 나눔의 힘.

- 질문과 대화를 통해 키우는 호기심과 상상력.

from <로봇일레븐>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가진 아이로 키우고 싶다. 그리고 실력으로 무장하고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아이로 자라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도록 실패를 허락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

아이의 눈높이에 딱 맞는 로봇에 대한 재미있는 스토리와 지식을 얻었는데, 덤으로 자녀교육관까지 얻었다.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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