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의 기원 - 어디에도 없는 고고학 이야기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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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문] '문사철'은 계속 연재됩니다!
- '문사철'의 부활을 꿈꾸며


1.

어릴적 꿈은 '고고학자'였다.

중년이 된 지금 가끔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 무슨 원대함이나 간절함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실은 그 또래 다른 친구들이 '과학자'가 꿈이었던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태권V를 보고 나중에 커서 그런 로봇을 만들고 싶어서 '과학자 김박사'가 되고 싶었던 어느 친구가 있었던 것처럼, 아직 공룡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공룡을 발굴하고 싶었거나, 취학 전 TV에 들어갈 듯 빠져들어 보던 마징가에 나오는 기계수와 전투수 악당들을 '발굴'하고 싶어서 '고고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 나오던 19세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고고학자'들을 만났을 때는 이미 내 꿈은 더 이상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장편 추리소설에 처음 맛들인, 꿈 따위는 아랑곳 없던 사춘기 소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우연히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를 알게 되었고 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를 따라 고대 미케네 문명을 발굴한 독일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심장이 잠시 뛰었다. 그러나 역시 스무살의 나는 '고고학자'를 꿈꿀 나이가 아니었다. 심지어 하인리히 슐리만이나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고고학자'는 아니었다. 19세기 말 설형문자 해석으로 대홍수 신화를 역사로 증명한 조지 스미스도 그렇고, 20세기 초에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을 발굴한 하워드 카터도 엄밀히 말해 제대로 배운 '고고학자'가 아니었단다. 

'문사철' 또는 '인문주의' 또한 꼭 '전공'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2.

"개인적으로 새로운 기원을 찾아가는 고고학이야말로 가장 미래지향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발굴하면서 수많은 유물을 발견해나가면 기존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밖에 없다고요. 그걸 해내는 학문이 바로 고고학입니다."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에필로그 : 새로운 과거를 찾아가는 고고학>, 강인욱, 2023.


우리 고고학자 강인욱 선생의 책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은 고고학 서적이라기 보다는 '수필집'에 가깝다. 저자 또한 우리 고고학계의 시조와 같은 삼불 김원용 선생(1922~1993)이 1950년대에 유물 발굴을 하면서 남긴 수필들을 언급하는데, 고고학을 대중들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 신문에 짧은 에세이를 연재해온 듯 하다. 이 글들을 책으로 엮으면서 '잔치'와 '놀이', '명품'과 '영원' 같이 인류에게 친숙하며 생존에 불가결한 테마로 분류하고 있다.

1부 '잔치'에서는 막걸리와 소주, 해장국과 김치, 삼겹살과 소고기 등의 역사를 다루며 사물의 기원보다는 현재의 발전형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부 '놀이'는 고인돌, 씨름과 축구, 여행과 낙서, 개와 고양이까지 인류 '유희'의 역사를 돌아본다.
3부 '명품'에서는 석기, 실크와 황금, 도굴과 모방 등을 다루며 인류 문명에서 석기의 '창조'부터 '도굴'의욕망, 문명전파와 새로운 창조의 계기로서 '모방'을 조명한다.
4부 '영원'은 벽화와 문신, 미라와 발굴괴담, 점복과 메신저 등을 통해 영원한 삶을 욕망해 온 인류의 유물과 기록을 살펴본다.

이 책은 '고고학'과 '역사학'을 구분한다.
고고학의 재료는 '유물'이고 역사학의 재료는 '문헌'인데, 새로운 유물의 발굴로 인해 고고학적 성과는 새롭게 갱신되고 있는 있는 반면, 역사학에서는 과거를 송두리째 바꿀만한 완전히 새로운 문자나 문헌이 발견되는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래 보존되기 어려운 '문헌' 자료들이 이미 거의 발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고학자인 저자는 은연 중에 '고고학'을 미래지향적 과학으로 규정하고, '역사학'을 과거라는 시간의 범주로 두고 있다.

이는 한 편으로 보면, '고고학'과 '역사학'의 관계를 '과학'과 '철학'의 관계처럼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학'은 '개별'이고 '철학'은 '보편'이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관계도 그렇다.

저자는 고고학 유물 이야기인 책의 제목을 [세상 모든 것의 기원(The Origin of Everything)]이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인류의 손을 거친', '사람이 만든'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고고학에 깃든 '문사철', 또 다시 '인문주의'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고고학의 인문학적 접근이다.

'고고학'의 개별적인 과학적 성과는 결국,
'역사학'의 보편적인 인문학적 성과로 종합된다.


3. 

청년 시절의 한 때는 '소설가'를 꿈꿨다.

역시 돌아보면, 어린 시절 '고고학자'처럼 구체적이지도 간절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뜻대로 잘 풀리지 않던 삶을 떠나 문자들 속으로 도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단편소설 습작 몇 편 끄적이다가 말았다.
대신, 그 동안 읽어두었던 책들을 '서평'이라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썼고, 짧은 '소설'의 형식을 입혀 다른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19세기말 쿠바의 담배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독사(讀師)'가 있었다는데, 나 또한 그런 '책 읽어주는 노동자'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적지 않은 글들을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의 테마로 분류해 왔다. 
이른바 '주간 문사철'이다. 

나는 '주간 문사철'을 통해 우리 삶을 바꾸는 '인문주의' 부활을 꿈꾼다.
나와 동시대 사람들이 많은 책들을 통해 다양한 '인문주의'적 독해와 해석을 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주간 문사철'은 계속 연재된다.

***

1. [세상 모든 것의 기원(The Origin of Everything)], 강인욱, <흐름출판>, 2023.
2. [인류의 진화 -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우리가 우리가 되어온 여정], 이상희, <동아시아>, 2023.
3. [독서의 역사(A History of Reading)](1996),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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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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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공양제' 문명과 [역경]의 비밀
- [상나라 정벌(翦商)], 리숴,  2022.


1.

아주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의 인류는 일종의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는 [의식의 기원](1976)에서 고대 인류의 '양원적 정신(Bicameral mind)'이 붕괴되는 과정에서의 '의식의 기원'을 추적했다. '양원적 정신'은 우리 두뇌가 이성-감성의 좌우 영역으로 나뉜 것처럼 인류 의식의 역사에도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천이 있다는 건데 고대 인류는 우반구가 더 활성화되어 '신의 음성'을 진심으로 들었다는 설이다. 기원전 2천년경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측 뇌 뿐만 아니라 온몸의 장기를 통해 신들의 음성을 직접 듣고 인생에서 닥치는 온갖 선택의 스트레스를 견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기원전 신석기-청동기 문명교체기의 조상들을 '상상의 친구들'과 함께 노는 '어린아이'로 생각했던 거다.


2.

중세 유럽의 축제 '카니발'은 '식인 축제'였다고도 하고, 지금도 석기시대처럼 사는 부족은 얼마전까지 '식인'을 했을지 모른다는 설을 들으면 역겨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포심과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다. 그래서 기원전 1천년경 고대 중국의 은-주나라 교체기 문명에서 '인신공양제사'가 만연했다는 주장을 담았다는 책을 얼마전 우연히 소개받고는 그 900쪽의 책을 덥썩 읽기 시작했다.


"초기와 중기 상(商)나라의 존속기간은 모두 합쳐서 약 300년인데, 그 사이에 '인신공양제사' 행위는 신속하게 증가했고, 도살방식도 갈수록 잔인해졌다. 인간 희생 대신 청동기를 매장하는 개혁적인 시도가 있었을 수도 있으나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상문명의 기본 특징은 이미 틀이 정해졌다. 문자와 청동기술, 거대한 성지, 폭력을 숭상하고 '인신공양제사'에 열중하는 문화가 그것이다."
- [상나라 정벌], <7장. 인신공양제사의 번영과 종교개혁운동>, 리숴, 2022.


대략 3,400년 전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를 대체한 은나라는 아마도 본격적인 청동기라기보다는 신석기 문명으로 시작했을 텐데, 초기 청동기 제련술과 대규모 군대운용으로 황하 이북의 영역에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여 각 부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넓혔다. 아마도 동아시아 대륙의 동쪽에서 발원했을 용산 문화의 은나라 종족은 보통 '상(商)'족으로 불리는데 은허의 중원을 장악하고는 강족의 땅인 서방으로 더 확장했다. 관중을 넘어 서쪽 깊은 땅은 청동기 문명에서 중요한 구리가 많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청동기 문명 초기의 이 정복전쟁은 활발한 '인신공양제사'의 문화와 풍습을 남겼다. 아마도 식량이 부족했던 석기시대에는 불가피한 '식인' 풍습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청동기 정복전쟁 문명에서는 지배종족의 부족장이 왕조로 확립되면서 신과의 소통을 독점하고자 했다. 왕조의 사유재산과 그 독점권을 지키기 위한 '국가권력'의 기원이다. 이 국가권력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소나 양, 개와 서부의 말을 희생물로 바쳤는데, 여기에 인간 순장과 같은 '인간 희생'도 포함시키게 되었단다.

은나라 중후반과 말기는 '은허'라는 수도 지역을 중심으로 '은상(殷商)' 문화로 불리는데, 상나라는 관중 넘어 중국 대륙 서부를 식민지배하면서 토착부족인 강족을 포로로 잡아다가 상나라 왕족의 하느님이었던 '상제(上帝)'에게 바쳤다. 상나라 수도 은허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제사와 무덤 유적에서는 수많은 순장자의 유골이 사지가 해체되거나 머리가 잘린 상태로 더 나아가 인간 희생의 머리가 청동시루에 쪄진 상태로 발굴되었단다. 이는 제사나 장례 등의 예식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 희생물이 해체되고 요리되어 먹혔다는 고대 인류의 '식인'의 증거다.

이 문화는 왕족은 물론 민간과 청동기 제련작업장에서 만연했다. 청동기 제련 작업장의 건물기반에는 수많은 인간 제물이 묻혔고 수도 은허를 너머 서부와 이어지는 식민지 숭국 같은 곳의 민간에서도 이러한 '인신공양제'와 '식인' 풍습이 횡행했다.

여기서 서부 강족의 일족인 앙소 문화의 '주(周)족'이 등장한다.


"공자는 상나라 왕족의 후예이니, 주공이 상족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고, 그들을 대신해서 피비린내 나는 '인신공양제사'의 기억을 없애서 후세의 자손들이 치욕 속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게 해준 데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주공의 이런 관용과 위대한 사적은 그 자신에 의해 500년 동안 묻혀 있다가 또 결국에 공자에게 다시 암호가 해독되고 말았다."
- [상나라 정벌], <에필로그: 주공에서 공자까지>, 리숴, 2022.


중국의 역사학자 리숴(李碩)가 2022년에 발표한 [상나라 정벌(전상:翦商)]이라는 그 책 제목은 '상나라를 베다'라는 뜻이다. 

은-상나라 마지막 주왕을 치고 주나라를 연 왕은 주무왕이지만, 이 혁명을 준비한 사람은 주무왕의 부친 주문왕이다. 주족의 성씨는 '희(姬)'씨였으니 주문왕의 이름은 '희창', 주무왕은 '희발'이다. 상나라 왕족은 '자(子)'씨라고 하나 원래 은상은 성씨가 없이 종족의 성만 있었고 '자'씨는 이후 주나라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주족의 성씨인 '희'씨는 주로 여성이 썼고 남성은 '주창'이나 '주발'로 썼다. 주문왕 주창은 주족의 기반을 닦은 고공단보의 손자로서 상나라에 충성하면서 주족의 생존을 책임졌다.

역사에서 1차 사료는 '문헌'이고 '고고학' 사료는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은상 문화에서 만연한 '인신공양제사'의 '고고학'적 증거는 제사갱과 갑골문자 등의 발견으로 차고 넘치는데 '문헌'적 증거는 없다.

그러다가 500년 후 주공단의 봉국인 노나라 출신이자 상나라 왕족의 후손인 공자에 의해 '인신공양제사'의 '문헌'적 비밀이 밝혀진다.

그 '문헌'은 바로,
[역경(易經)] 또는 [주역(周易)]이다.


"괘사와 효사의 번잡하고 어지러운 현상 이면에는 사실 세계의 운행법칙에 대한 주창(주문왕)의 탐색이 들어있었다. 괘상의 배열과 조합에 따른 변화를 통해, 현존하는 세계 질서가 영원한 게 아니라 변화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왕조의 통치도 이와 같다는 사실이다... 유리의 감옥에서 주창은 몸은 도망칠 수 없었으나 64괘로 짝을 맞추는 원칙을 연역, 추론하여 스스로 신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으니 이것은 바로 '상나라 정벌(翦商)'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상나라 정벌], <20장. 상나라 정벌과 [역경]의 세계관>, 리숴,  2022.


사실 주문왕의 조부 고공단보가 상나라와 타협하고 관중의 주원땅에서 종족의 생존권을 보장받은 비밀 또한 리숴는 [상나라 정벌]에서 밝히는데, 주족은 상나라 왕조의 '인신공양제사'에서 희생되는 포로들의 공급책이었다. 즉, 상나라와 그 식민지 숭국의 지시를 받고 주변 강족을 잡아다가 바치는 일을 도맡으면서 독립된 종족으로 생존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할당량이 모자라면 자신의 부족으로 충당했을 수도 있다. 현재 중국 한족의 뿌리라는 '화하족(華夏族)' 문명의 시조이자 농업 문명의 신 후직의 후예인 앙소 문화 주나라 족속의 흑역사다.

실제로 주문왕은 상나라 서부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상나라 주왕의 견제를 받았고, 상나라 수도 은허의 인근인 유리라는 지역에 구금되었는데 그 전에 이미 주문왕 주창의 큰아들 '백읍고', 즉 주읍은 상나라 주왕의 인질이 되어 주왕의 마차를 몰았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무왕 주발은 실제로는 주문왕 주창의 둘째 아들이었고, 주나라 건국 후 주무왕의 아들 주성왕을 섭정하며 국가의 기초를 세운 주공단 역시 주문왕의 아들이자 주무왕의 동생이었다.

상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은허에서 목격한 주문왕 주창은 자신의 집 지하 토굴에서 몰래 상나라 갑골 점술과 그 문자를 독학하며 주족의 미래를 점쳤는데, 언제 자신의 부족이 상나라의 잔혹한 문명의 희생자가 될지 어떨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결국 문왕 자신이 구금되어 인신공양제물이 될 위험에 빠졌고 실제로 장자 주읍이 인간 제물이 되었다. 심지어 문왕과 무왕 및 주공단 부자는 아들이자 큰형인 주읍의 고기와 국물까지 억지로 먹게 되면서 상나라에 대한 피맺힌 복수를 본격적으로 기획하게 된다. 이 엽기적인 제례는 상나라 식민부족의 수령인 '백(伯)'을 임명하는 일종의 '전통'이었겠지만, 주문왕 부자들에게 이 악마같은 주왕의 패악질은 잔악하기 그지없는 상나라 멸망의 제일 명분이 된다. 
유리에 구금된 주문왕 주창은 [역경]의 기본인 64괘를 더욱 열심히 연구하면서 상나라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고, 구금에서 풀려나 관중의 주원(호경)으로 돌아간 후에 즉시 스스로 '문왕'을 칭하며 혁명을 준비한다.


리숴의 [상나라 정벌]은 문왕이 연역하고 풀이한 [역경]의 64괘 괘사와 효사의 은유적이고 난해한 내용을 통해 상나라 '인신공양제사'의 현장을 읽어내고 있다. 

주문왕은 큰아들을 비롯한 자신까지 빠져든 인간 제물의 위험 속에서 그 '인신공양제'의 현실을 일일이 [역경] 64괘 해석에 담았고 그 과정에서 세상 만물의 운동과 변화, 그리고 변증법적 전환의 원리를 읽어내고 말았다. 즉, 하나라가 상나라에 의해 대체되었듯이 상나라의 운명도 언젠가는 멸망하게 될 예정인데, 그 주역이 자신의 종족인 주족이 될지 아니면 '혁명'이 실패하여 주족 전체가 인간 제물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점을 치고 64괘를 해석했다. 

'변혁'과 변화의 경전, 
[역경]의 시작이다.


"... 무왕은 자기로서는 부친(주문왕)이 열어놓은 이 정의롭지만 미친 사업을 계승할 역량이 없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주(周)나라 왕의 지위를 계승하고도 감히 자기 연호를 쓰지 못하고, 여전히 문왕이 천명을 받은 이후의 연호를 이어서 썼다. 그는 신과 소통할 능력이 없으니, 그저 하늘에 있는 부친의 영령이 계속해서 주나라를 보우해 주기만 기원할 뿐이었다... 주공(단)도 분명히 자기의 위상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그는 부친(주문왕)이 시작한 이 정의롭지만 미친 사업을 혼자 감당할 역량이 없음을 알았으나, 이 사명과 거기에 수반된 압력은 그들 형제(주발/주단)가 함께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 [상나라 정벌], <25장. 목야에서 용맹을 떨치다>, 리숴, 2022.


문왕이 상나라를 멸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의 신을 빼앗는 것이었다. 즉, 상나라가 인신공양을 하면서까지 모신 '상제'와 직접 소통하기 위해 왕처럼 갑골점을 직접 치고 직접 갑골문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왕 주창은 '상나라 정벌'의 준비과정에서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무왕 주발은 부친의 '정의롭지만 미친'([전상], <25장>) 혁명사업을 감당하기 버거워 했다. 

주무왕은 아버지 문왕처럼 상제신과 직접 소통하지 못했고 [역경]의 비밀도 풀지 못해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그래서 참모 같은 동생 주공단에게 의지했다. 주공단 역시 내심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지만 형과는 다른 방법을 고안했다. 즉, [역경]을 통한 '혁명 이론'을 구축한 것인데, 주공단의 이념은 바로 '덕(德)'이었다. 

500년 후 춘추시대 공자가 제창한 '유가' 또는 그 후세 '유학'의 기본이념 중 하나로서 '덕'의 기원이다.
'인신공양제사' 풍습의 잔혹한 '상(商)'나라 문명을 '베었던(翦/전)' 기원전 1046년 목야의 대전은 한순간이었다. 상나라 권력은 이미 내부로부터 와해되었고 주나라를 건국한 주족은 강족과도 화해했지만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문명의 창조였다. 

'인문주의'의 출현이다.


"... 왕조의 흥망과 교체의 교훈... 
그(주공단)는 이 일의 배후에 '하늘(天)-상제(上帝)'의 변화의지가 있으나, '천명(天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바로 사람의 '덕(德)', 그러니까 현실 문제를 처리하는 인간의 준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공은 '하늘을 믿을 수 없다(天不可信)'라고 하면서, 사람이 상제의 뜻을 짐작하려는 것은 지나친 욕망이니, 그저 인간 세상에서 해야할 의무를 잘 이행해야 할 뿐이라고 했다."
- [상나라 정벌], <26장. 주공의 새시대>, 리숴,  2022.


'인(仁)'을 강조한 춘추시대 역사문헌학자 공자는 '덕(德)'의 이념을 강조한 주공단으로부터 500년 후학으로서 주공단의 유학 이념을 더욱 확대발전시켰다. 물론 주공단 시대에는 본격적인 유학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신석기 시대부터 상나라까지 2~3천년간 이어져온 잔혹한 '인신공양제'와 '식인'의 문명 일체를 동아시아에서 끝장냈다. 비록 국가권력에 의한 정복전쟁을 멈추지는 못했지만 '상제' 같은 인격적 신이 아닌 '하늘'로부터의의 '천명'으로 대체했다.

주나라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후 '인신공양제' 문명을 철저히 파괴하면서 향후 그러한 풍습의 재발을 방지하고, 변화의 경전 [역경]에서 '인신공양제' 해석을 삭제하고 재편하면서 주공단이 의도한 것은 잔인하고 포악한 문명의 종말은 물론 '인신공양제'에 부역했던 주나라 종족의 흑역사를 은폐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3.

리숴는 [상나라 정벌]에서 집요하게 '인신공양제사'를 파고든다.

그 잔인한 식인 문명은 수천년 이상 이어 내려온 인류의 자취였다. 식량이 부족한 선사시대에는 어떤 면에서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벼농사가 정착하기 전의 상고시대에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전쟁에 필요없는 이른바 '잉여' 인력을 제사나 식량으로 소모했을 수도 있다. 국가의 출현 이후로는 신이나 종교를 명목으로 반역자나 '잉여' 인간들을 처분하는 주요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은상에서 주나라로의 문명교체기를 통해 '인문주의'는 이렇게 수천년 이어진 잔혹한 문명을 끝장낸 이력이 있다. 인간의 일은 어찌 되었든 인간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수많은 '혁명'이 있었다.
그 중 삼봉 정도전은 고려말 잔혹한 현실을 혁파하는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했다. [대학]과 [중용]은 물론 '변화의 경전'인 [역경] 또는 [주역]의 현실주의적 원리에 따라 변혁을 실천한 그 중심 사상 또한 '인문주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무왕 같은 권력자는 매일 전전긍긍하며, 혁명은 실천했으되 상나라문명을 실제로 혁파하지 못했다.실제로 문헌에 의하면 주무왕이 상제에게 처음 제사를 올릴 때 '인신공양'으로 상나라 지배계급에게 복수를 했다고 하며 그의 아우 주공단은 이러한 상나라 풍습을 철저히 혁파하겠다는 의지를 '덕'의 '인문주의' 이념을 통해 더욱 강화했고 이후 그의 치세 기간에 '인신공양'의 역사 자체를 없애버렸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주무왕 같은 현실 권력자로서 정치적 손익을 재었겠지만, 삼봉 정도전은 민중을 중심으로 한 공자의 '인(仁)'과 맹자의 '의(義)', 더 거슬러 올라가 주공단의 '덕(德)'을 현실에서 혁명으로 실현하고자 했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현실 정치를 넘어서는 '인문주의'의 힘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정복전쟁이 여전히 수많은 '인신공양'을 해대고 있는 현재까지도 '인문주의'는 변함없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인신공양제'와 검투사 산업의 소멸은 모두 외래문화의 간섭에서 비롯되었다. 로마인은 나중에 기독교에 귀의했고, 전통적인 아즈텍 종교는 식민주의자들의 천주교로 대체되었으나, 은상(殷商)은 그와 달랐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한 뒤에 '인신공양제사'는 주나라 사람들에 의해 소멸했으나, 주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 않고 세속적인 '인문주의' 입장을 채용하여 극단적인 종교 행위와 거리를 두고, 그것이 현실 생활에 관여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른바 '귀신을 경외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는 것이었다. 이것은 후대 중국문화의 토대를 닦아놓았다."
- [상나라 정벌], <프롤로그>, 리숴, 2022.

***

1. [상나라 정벌(翦商/전상/Conquest of the Shang Dynasty)](2022), 리숴(李碩), 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2024.
2. [의식의 기원](1976), 줄리언 제인스, 김득룡/박주용 옮김, <연암서가>, 2017.
3. [주역 - 왕필 주](3세기), 왕필,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4.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2014.
5.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푸른역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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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지문 - 사라진 문명을 찾아서
그레이엄 핸콕 지음, 이경덕 옮김 / 까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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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지문'을 남겨야 할지도
- [신의 지문], 그레이엄 핸콕, 1995.


"마지막으로 기자에서 멀리 떨어진 '남극 대륙'의 빙원 아래에 있는 지형에 대해서 엄밀한 조사를 하면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라진 문명의 완전한 유적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남극 대륙'이기 때문이다."
- [신의 지문], <8-52. 밤의 도둑처럼>, 그레이엄 핸콕, 1995.


지도 한 장으로부터 기묘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해군 제독이었던 피리 레이스가 제작한 지도에는 남극 대륙이 있다. 남극 대륙이 발견된 게 19세기인 1818년인데도 16세기 지도에 등장한 것인데, 아마도 피리 레이스는 남극에 가보지는 못했을 터, 오래전부터 전승된 지도를 베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가 기묘한 이유는 지도의 남극 대륙이 지금처럼 빙하에 뒤덮힌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1만3천년 전 플라이스토세 말기에는 온 지구가 빙하기였다는데 남극 대륙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기묘한 이야기는 16세기 의문스러운 지도 한 장을 매개로 하여 '남극 대륙'에서 출발하여 다시 '남극 대륙'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대홍수' 신화 속에 기묘하지만 확실히 지성을 가진 인도하는 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피부색이 하얗고 수염을 기른 사람이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오시리스는 이 보편적인 사람의 이집트판이다. 오시리스가 마지막으로 행한 것 가운데 하나가 나일강 유역에 사는 원시적인 사람들의 식인 풍습을 없앤 것이었다. 중앙아메리카의 비라코차는 '대홍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명을 전파하는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케찰코아틀은 제4태양이 파괴적인 '대홍수'에 의해서 사라진 후에 멕시코에서 옥수수를 발견하고 곡물을 전했으며 수학과 천문학과 세련된 문화를 전달했다.
이 신화들은 마지막 빙하시대에 살아남은 구석기의 부족들과 동시대를 빠져나온 정체를 알 수 없는 높은 지성을 가진 문명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 [신의 지문], <5-32.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하는 말>, 그레이엄 핸콕, 1995.


20세기말 잠시 유행했던 책의 이야기다.

영국의 기자 그레이엄 핸콕(Graham Hancock)은 '사라진 문명'을 찾아 전 세계를 다닌 기록을 [신의 지문](1995)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세기말 당시야 종말론이 유행했지만 당시의 내게는 흥미거리도 되지 않았다. 신이든 신의 심판으로서 종말론이든  죄다 과학적이지 못한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던 내게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은 어릴적 우연히 읽었던 U.F.O나 '7대 불가사의' 따위를 다룬 찌라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잊혀졌던 [신의 지문]은 21세기에 어느덧 중년에 들어선 나의 눈에 들어왔다. 중국의 역사가 리숴(李碩)가 [전상(翦商)](2022)이라는 책에서 기원전 2세기 전 고대 중국의 은나라까지 횡행했던 '인신공양제' 이야기를 다뤘고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는 이 잔혹한 문명을 인문주의적 풍습으로 대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읽고 있던 터라, 고대 잉카나 마야 문명의 '인신공양제'가 궁금하기도 했던 거다.

결론적으로, 
20세기 청년이었던 나는 [신의 지문]을 무시했지만,
21세기 중년이 된 나는 [신의 지문]이라는 음모론이 흥미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 들면 다시 어려진다는 말처럼.

그레이엄 핸콕은 페루 잉카 문명의 나스카의 거대한 지상 그림을 하늘에서 내려보며 거미 형상의 몸통 세 개 점에서 오리온 별자리를 보기도 하고 원숭이 그림에서 동심원 꼬리와 같은 거대 문양의 정밀성을 통해 다시금 아주 오래전 지적인 문명의 흔적을 본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 '신'이나 '외계인' 등으로 쉽게 그 근원을 돌리지 않는다. 이 지점이 내가 오래전 비과학적인 관념론으로 보았던 [신의 지문]을 새로운 유물론의 시각으로 본 지점인데 '지문'을 남긴 주체는 오래전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문명이며 그 배경은 빙하기와 대홍수 재난을 동반한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레이엄 핸콕이 찾은 사라진 고대 문명의 일차적 증거는 남아메리카 잉카 문명의 신화속에 등장하는 '비라코차'의 등장이다. 원주민과 달리 하얀 얼굴에 긴 턱수염과 롱코트를 입고 바다로부터 와서 잉카 문명에 신문명을 전하고 다시 바다로 떠났다는 이 구세주와 같은 존재는 흡사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도 겹친다. 원주민과 다른 외래종족으로서 '비라코차'는 중앙아메리카 마추픽추와 같은 마야 문명으로 가면 '케찰코아틀'이라는 신화적 존재로 다시 나타난다. 마야 문명의 인신공양제는 역시 하얀 얼굴에 긴 턱수염을 한 '케찰코아틀'로 인해 폐지되었는데 신석기 시대였던 당시에 옥수수 재배 등 신문명을 전했던 '케찰코아틀'이 '테스카틸포카'라는 내부 반란자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아즈텍 문명에서는 또 다시 인신공양제와 같은 잔인한 문명이 부활했다고 한다. 여기서 '케찰코아틀'은 다시금 '구세주' 또는 '메시아'로 현상하는데, 아즈텍인들은 그가 다시 재림하여 잔혹한 현실을 뒤바꿔줄 거라 믿었다고 한다.

남아메리카 잉카 문명의 '비라코차'와 중앙아메리카 마야 문명의 '케찰코아틀'은 대서양 건너 이집트로 가면 '오시리스' 신화로 반복된다. 고대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 농업 기술과 정밀한 건축술 등의 문명을 심어주고 역시 '인신공양제'를 없앤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 또한 의형제 세트와 72인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았지만 신화속에서 다시 부활한다.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의 압권은 고대 이집트 기자 지구의 대피라미드군과 스핑크스다. 기원전 2,5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진 기자 지구 대피라미드와 중소형 피라미드 2기, 그리고 스핑크스는 핸콕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이 아닌 1만년 전에 지어졌다는데, 이 피라미드는 다른 곳의 무너진 조악한 피라미드 무덤과 달리 인류 문명 이전의 지적인 고대 문명의 흔적('지문')이라는 주장이다. 즉, 기자 지구 대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 아니라 오래전 사라진 지적 문명이 빙하기였던 1만년 이후 다시금 시작될 미지의 문명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일종의 수수께끼 '기계'라는 말이다. 피라미드 3기는 오리온 성좌와 일치하며 피라미드 크기 및 각도와 통로 경사각 등의 비율은 천재적인 수학적 원리로 이루어진 바, 빙하기 말기의 '대홍수'라는 전 세계 공통의 재난 이후 다시금 시작될 후세 문명에게 지구 문명의 멸망과 부활의 주기로 약 1만3천년의 시간을 수학적으로, 천문학적으로 남긴 일종의 '지문'이라고 한다. 하늘의 춘분점과 추분점의 정동 방향을 바라보는 스핑크스 또한 1만년 전 빙하기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스핑크스 몸에 새겨진 침식 흔적이 사막의 모래로 인한 게 아닌 물에 의한 그것이라는 건데, 이집트 기자 지구가 사막이 아니었던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대홍수'의 흔적이기도 하다.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들과 스핑크스는 사라진 고대문명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남긴 '지문'이다.

이 책의 제목 [신의 지문]은 원제로 보면 [Fingerprints of the Gods]로 '일자(The One)'로서의 '신(The God)'이 아닌 다수의 '신들(Gods)'이다. 하느님이나 외계인이 아닌 지구상의 오래전 다른 문명에서 온 신문명의 전파자들로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나 남아메리카 잉카의 '비라코차'와 중앙아메리카 마야의 '케찰코아틀'이 그들로 추정된다. 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황하 문명의 삼황인 수인, 신농, 복희 및 주나라 시조 후직 등 농업 문명을 전파한 자들도 1만년 전 이야기라면 역시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 나는 그 문명이 '해양 문명'으로 항해자들의 국가였음이 틀림없다고 추측하기 시작했다. 이 가설을 지지해 주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경이로운 고대의 세계지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배', 마야의 놀라운 역법체계에서 볼 수 있는 천문학적 지식, 케찰코아틀과 비라코차처럼 바다를 항해하는 신의 전설 등이 그 예이다.
... 이 건축가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특징적인 '지문'을 세계 각지에 남겨놓은 듯 하다."
- [신의 지문], <8-50.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니다>, 그레이엄 핸콕, 1995.


기묘한 남극 지도로 시작하여 아메리카와 이집트 문명을 돌아본 그레이엄 핸콕이 [신의 지문]의 거대한 문명 퍼즐 조각을 미쳐 다 맞추지 못하고 좌절하던 순간, '도서관의 천사'가 나타난다. 일을 그만두게 된 핸콕의 조수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말한 것처럼 사라진 고대 문명이 3천 킬로미터 이상의 넓은 대지와 높은 산맥들, 그리고 바다와 물 등의 자연조건이 없으면 안된다는 주장에 더불어서 핸콕은 우연히 어느 학자 부부의 '남극 대륙'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자 지구의 수수께끼 문명 기계인 피라미드와 잉카 문명 나스카 거대문양, 마야 문명의 마추픽추 건축물 등은 지구의 '세차 운동'과 그로 인한 빙하기 기후변화 주기를 암시하고 있는데, 1만년 이전의 남극 대륙은 지구의 끊임없는 지각변동으로 인해 동토의 땅이 아닌 온화한 지역으로 다른 대륙의 빙하기 땅과 달리 지금의 인류와 같은 선진 문명을 구가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결론이다.

그레이엄 핸콕이 [신의 지문]에서 찾아다닌 증거들은 이 가설을 증명하는 퍼즐 조각이었던 것이다. 
1950년대 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의 '인류세' 또는 21세기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의 '자본세'라고도 불리는 1만년 간의 현재의 '홀로세'는 인류의 문명 개발로 인해 기후위기가 재촉되고 있으나 한편으로 '신들의 지문'에 의하면 결국 1만3천년의 주기로 빙하기나 대홍수, 대행성 충돌 등과 함께 멸망할지도 모른다. '공룡 대멸종' 이후 인류 문명 전체가 붕괴되는 이른바 46억년 지구 역사상 '여섯번째 대학살'이다.

로마를 비롯한 수많은 문명이 지구적 기후변동으로인해 몰락했다는 학설도 있는데, 이런 '소빙기'들을 넘어 1만3천년의 주기로 전 지구적 '대빙하기'와 빙하기 말의 '대홍수'들은 공룡시대든 인류문명이든 한 시대 일체를 쓸어버렸고 또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앞으로 올 미지의 문명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지문'을 남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출발점이 다시 남극이든 화성이든 다른 그 어디든 말이다.

***

1. [신의 지문 - 사라진 문명을 찾아서(Fingerprints of the Gods - The Evidence of Earth's Lost Civilization)](1995), Graham Hancock, 이경덕 옮김, <까치>, 1996.
2. [전상(翦商)](2022), 리숴(李碩), 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2024.
3. [기후의 힘], 박정재, <바다출판사>, 2021.
4.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5. [로마의 운명](2017), 카일 하퍼, 부희령 옮김, <더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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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힘 - 인생의 무기가 되는 12가지 최소한의 수학도구
올리버 존슨 지음, 노태복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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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이제 여기까지만
- [수학의 힘], 올리버 존슨, 2023.


1.

며칠 전, 
어머니가 둘째 누나한테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어머니는 팔순을 훌쩍 넘기면서 하루하루 노쇠해진 일상을 통해 사람이 별 일 없이도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가는 과정을 내게 보여준다. 
방금 했던 말과 행동도 돌아서면 다시 반복하는 어머니 이전에, 이태 전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통해 나는 '죽음'이라는 게 내 삶의 직접적 일부이자 궁극의 종착점임을 처음으로 실감한 바였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내게 삶을 주었고 최초로 먹는 법과 말하는 법 등 살아가는 기본은 물론 종국에는 죽음까지도 실질적으로 가르쳐주는 그런 것이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를 앞으로 몇 년간 나는 함께 사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통해 죽음에 관해 또 다시 새로 배울 차례가 오고 있다. 
모르는 남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죽음은 내 것일 수 없었다. 나는 죽음 앞에 그저 구경꾼이었다. 심지어는 십년 전 둘째 누나의 죽음 또한, 슬픈 일이었지만 마흔넷 누이의 죽음 앞에서도 나는 방관자에 불과했었다.

이제 연로하신 어머니가 갑자기 오래전 죽은 둘째 딸이 보고싶다 한다.

내일은,
둘째 누나의 55세 생일날이다.


2.

나의 둘째 누나는 수학을 잘했다.

딸 셋에 아들이 나 하나였던 우리집은 가난하여 그나마 대학은 내 몫으로 애진작에 정해져 있었다. 큰 누나는 꿈또 꿀 수 없었고 셋째 누나는 형제들에게 양보해야 했기에 애초에 기회조차 없었다. 아마도 같은 운명이었을 둘째 누나는 아버지한테 계속 대들고 요구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특히 수학을 잘해서 이과를 선택했고 무려 의대에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한테 대들다가 빰을 맞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보다 네 살이 많았으니 둘째 누나가 오랜 투쟁 속에 의대는 못 갔지만 의대 편입을 꿈꾸며 생물학과에 진학했을 때 중학생이었던 난 그녀가 내 누나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나의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니다가 숱하게 싸우시던 부모님을 보며 나는 덕수상고에 진학하여 빨리 졸업하고 은행에 취업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겠지만, 특히 집안을 뒤집어 놓으며 대학에 진학한 둘째 누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 뿐인 남동생이었던 나만은 본인이 대학까지 가르치겠다고 장담했다.

수학을 잘했던 이과생 둘째 누나와 달리 나는 타고난 문과생이었다. 누나가 몇 번 수학 과외를 해주겠다고 나섰지만 자고로 공부와 운전은 식구한테 배우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도와주겠다는 둘째 누나의 손을 뿌리치고 나의 길을 갔다. 가난한 집이었지만 하나 뿐인 외아들을 대학까지 보내겠다는 부모님의 염원이 컸다. 그런데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직에 종사할 수 있게끔 공대를 보내고 싶었던 어머니와 천생 이과생 둘째 누나의 바람과 달리 나는 수학에 재능이 없어 그냥 기본수학의 정석 문제들을 외워야 했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통계과학연구소장인 올리버 존슨(Oliver Johnson)이 코로나 팬데믹 시기 전염병 확산을 예측하기 위해 각종 '수학모델'을 만들었을 때, 수학자인 올리버 존슨의 자세는 'number crunch'였다. 우리말로 하면 '수학사랑' 또는 '숫자덕후' 정도 아닐까 싶다. 이를 '구조'와 '무작위성', 그리고 '정보'를 키워드를 통해 '수학모델'과 수학적 사고방식에 관한 글로 엮은 책의 제목이 [Number Crunch](2023)다. 이듬해 우리말로 번역된 책 제목은 [수학의 힘](<더퀘스트>)이다.


"수학모델은 2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로 기존의 데이터를 설명하고, 둘째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수학자는 숫자나 다른 정보들에서 패턴을 포착한 다음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일한다. 뉴턴의 방정식 덕분에 닐 암스트롱은 아폴로 11호에서 달에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달의 중력이 어느 정도일지 알고 있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애초에 달에 도착할 로켓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뉴턴의 방정식을 이해한 덕분이다."
- [수학의 힘], <들어가며: 수학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올리버 존스, 2023.


나는 애석하게도 수학을 잘하지 못했지만, 고대에 인류가 세계의 근본원리를 찾고자 했던 철학의 중요한 방법으로서 수를 통해 정확히 표현하고 증명하려는 수학의 중요함은 이해했기에 수학을 잘 하고 싶어하기는 했다. 그러나 수학이나 관련 과학 전공자가 아닌 고등학교 일반수학이 그렇게까지 어려워야 하는가 싶은 의구심은 고등학생 자녀 남매를 둔 학부모인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은 각자 다양한 법, 의대를 가고 싶어했던 둘째 누나 같은 사람들은 아마도 세상만물을 '수학모델'을 통해 이해하는 게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학은 잘 모르지만 철학이라는 광범위한 학문의 이름으로 세계의 운동원리를 이해하고 싶어하며, 그 사유방식으로 '존재'가 '의식'보다 일차적이라는 '유물론'과 만물은 모순속에서 운동 및 변화한다는 '변증법'을 결합시킨 '유물변증법'을 채택하고 있다. 유물변증법은 항상 당대의 과학발전에 따라야 하므로 나는 이해를 다 하지는 못하더라도 '양자역학'이나 '수학' 관련 책은 가끔 펼쳐본다.

역시,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내 삶에서 수학은 숫자나 공식 또는 그래프가 아니다. 모든 수학 대중서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혼란하고 무작위적이며 우연으로 점철된 세상만사 속에서 확률과 통계를 통해 앞으로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단단한 사유방식인 것이다.
미국의 수학천재 조던 엘렌버그의 [틀리지 않는 법](2014)도 그랬지만, '귀무가설'과 '대수의 법칙', '베이즈추론'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해했다.
일본 수학자 하타무라 요타로의 [직관수학](2004)을 통해서는 딱 떨어지는 숫자가 아닌 대략의 숫자로 추산하는 접근법을 배웠다.
영국의 보험수리학자 앤드류 엘리엇의 [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2018)을 읽고는 지수로그방식을 통해 큰 수를 보는 법과 비교수치를 통해 이해하는 법 등을 어렴풋이나마 익혔다.


"... 수학이야말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이용할 만한 올바른 도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함수가 어떻게 증가하는지, 무작위성과 불확실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 어떤 질문이든 수학적 기법들이야말로 감정과 개인적 편향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통찰을 준다. 구조(1부), 무작위성(2부), 정보(3부)의 핵심 도구들은 여러분의 사고과정에 위력적인 도구를 제공한다."
- [수학의 힘], <4-13. 오류에서 배우는 교훈>, 올리버 존슨, 2023.


세계는 혼란스럽고 복잡하기 그지없지만,
철학자들이 도달하지 못할지 모르는 '보편적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듯,
수학자들도 각종의 추상적 '수학모델'을 만들어 세계운동의 원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아인슈타인도 죽기 전 책상에서 세상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신의 방정식'을 구하고자 했단다.

숫자는 정확하고 엄말함을 추구한다. 그러니 수학이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올바른 도구'일 수 있다. 다만, [수학의 힘]의 저자 올리버 존슨은 선입견과 과거의 수치, 지난 시절의 수학모델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시대는 매번 변하니 항상 조건들과 가정들을 의심하고 같은 모델을 적용하지 않으며 오류가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틀리지 않고 올바른' 수학의 힘이다.


3.

언제나 지금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늘 더 나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던 용감했던 둘째 누나가 다시 못 올 먼 곳으로 돌아간지 십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수학을 잘 했지만 누나가 정확하거나 올바른 삶을 살았을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혼란하고 무작위적이었을 길지 않은 인생의 파고를 넘던 중 어느날 갑자기 떠났다.

둘째 누나는 소설가를 꿈꾸던 이십대의 나를 늘 안쓰럽게 바라보며 능력도 안되면서 본인이 책임질테니 나보고 하고싶은 거 다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둘째 누나만큼 용감할 자신이 없던 나는 여전히 누나의 손을 뿌리쳤다. 

이제 나도 '수학'은 여기까지 하련다.
사실 몇 권을 읽고 또 읽어도 다 비슷한 내용으로 보이고 더 이상 흥미도 없다.
한편으론 수학을 잘 하던 둘째 누나의 안쓰런 눈빛과 애절한 손길이 그립다. 만일 다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땐 나의 둘째 누나에게 말만이라도 따뜻하게 전해주고 싶다.

아니, 아직 팔팔한 동생 대신 하루하루 노쇠해지고 잠들기 두려워 매일 저녁 캔맥주를 드시고 주무셔야 하는 연로하신 우리 어머니나 잘 돌봐주기를 바란다.
몇 해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어머니와의 무작위한 생활을 내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도록.

오늘,
십여년 전 누나가 가던 날처럼 햇살이 눈부시다.

***

1. [수학의 힘(Number Crunch)](2023), Oliver Johnson, 노태복 옮김, <더퀘스트>, 2024.
2. [틀리지 않는 법(How Not to Be Wrong) - 수학적 사고의 힘(The Power of Mathematical Thinking)](2014), Jordan Ellenberg, 김명남 옮김, <열린책들>, 2016.
3. [숫자로 읽는 세상의 모든 것(Is That a Big Number?)](2018), Andrew Elliott, 허성심 옮김, <미래의창>, 2021.
4. [직관 수학](2004), 하타무라 요타로, 조윤동 옮김, <서울문화사>, 2005.
5. [단 하나의 방정식(The God Equation)](2021), 미치오 카쿠, 박병철 옮김,<김영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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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철학 베스트 50 - 철학의 탄생부터 더 나은 삶을 찾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이해하는 위대한 생각들을 한 권에!
히라하라 스구루 지음, 이아랑 옮김 / 더디퍼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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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哲學), '개념의 공예'
- [철학 베스트 50], 히라하라 스구루, 2016.





"다소 거칠게 표현하면 철학은 한마디로 '개념'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형성해가는 활동이다. 철학에서는 이를 '공통 이해의 언어게임'이라 부른다... 마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을 '개념'으로 완성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개념의 공예'라고 생각할 수 있다."
- [철학 베스트 50], <들어가며>, 히라하라 스구루, 2016.


1.

스무살, 대학 신입생 때 내가 가입했던 영문과 '현대철학반'은 거룩했던 그 이름과는 달리 '현대철학'을 거부했다.

1993년은 30년 이상의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문민정권이 출범한 해였다.
광주항쟁의 학살자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쿠데타 대통령을 처벌하자는 민중들의 요구가 있었고, 공권력없는 학생들이 '전두환 체포조'를 자청하며 연희동을 순찰하던 시대였다. 문민정부 또한 이러한 거리의 요구에 부응하듯 군부 잔존세력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부정부패를 정화하기는 하던 시절이었다.

그 해 대학 신입생이었던 우리 '93학번은 이른바 '문민정부 학번'이었다.
한 해 선배인 '92학번까지는 군사독재에 항거했던, 더 좌측에서는 백기완 민중대통령 후보의 득표 1%를 위해 거리에서 노숙을 했다던 험한 시절이었다면 '93학번은 찬란한 세대였다. 그래서 정권과 언론은 우리를 '신세대'라 불렀고, 우리 사회 진정한 '90년대의 시작은 1993년부터였다.

철학도 '신세대'에 맞게 '현대적'이어야 했겠지만, 내가 속한 영문과 학회 '현대철학반'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현대'와 마르크스주의에서 멈췄다. 우리에게 철학을 가르친 '90~92학번 선배들은 자기들이 아는 게 마르크스주의 뿐이라고 했고 그래도 학회의 주교재가 고대로부터 마르크스주의까지의 철학사를 다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였으니 2학년 학회 '교사'가 된 우리에게 시대에 맞게 '현대철학'을 펼쳐보라 권했다.

그러나 막상, 이제 본격적으로 '현대철학'을 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여전히 '현대철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2.

며칠전, 1970년대 일본 노동운동의 대부라는 타카다 모토무의 [유물론 vs. 관념론](1974)을 읽고는 우리 '현대철학반'의 주교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의 기원을 추측하게 되었다.

내친 김에 역시 일본인의 책이라 께름직하긴 했어도 일본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의 [철학 베스트 50](2016)를 연이어서 읽어보았다. 

고대철학의 출발은 역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시작했는데 타카다 모토무나 영문과 '현대철학반'(이하 '현철반')과 달리 19세기말 프리드리히 니체와 20세기 에드문트 후설을 넘어 마르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를 지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점인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까지 철학의 고전 50권을 요약한 책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윤리 시간에 짧게 배웠던 철학사가 재미있었는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서 출발했던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만 알다가 대학에 들어와 '현철반' 교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이하 '철철사')를 통해 나는 고대 그리스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유물론'적 기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의 전쟁터로 규정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관점에서 본 철학의 역사다. 
타카다 모토무와 '철철사'의 시점이다.

1986년생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는 다시금 우리의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처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시작한다. 저작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과의 [대화편]을 통해 '보편성'으로서의 철학이라는 학문의 길을 연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근원이 '물'이라 했던 탈레스, '무한'으로 본 아낙시만드로스나 '공기'라 했던 아낙시메네스, '원자론'의 헤라클레이토스 등은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를 그리스 신화에서 개념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철학 베스트 50], <1장>). 그러나 이들은 과학이라는 학문분과가 있을 수 없이 그 자체가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뭉뚱그려져 있던 고대에 그나마 '과학자'들이었던 것이고, "세계의 근거를 '선(善-행복)'이라는 가치에 두었던 (철학자) 플라톤의 통찰은 기존 철학의 수준을 현저히 발전시킨 획기적인 것"(같은책, 같은장)이라고 저자 스구루는 적고 있다. '유물론'의 경향을 갖지 않는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는 철학사에서 과학적 발견의 기원보다는 철학이라는 '보편성'의 학문적 전통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대 신화를 철학적 보편성으로 표현한 플라톤이나 중세 종교의 '시녀'였으나 보편성의 끈을 놓치 않았던 스콜라철학, 내용은 종교와 같으나 형식이 다르다는 근대철학자 헤겔 등의 '관념론'이 진짜 정통 철학으로 부각된다. 고대 그리스 '자생적 유물론'과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유물론'적 요소나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은 이 보편성의 철학사를 보완하는 요소가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사에서 항상 '유물론'의 승리를 보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철학자 스구루는 '보편성'이라는 관념론으로 언제든 회귀한다. 물론, '관념론'에 치우치고 싶지 않은 스구루는 이 철학의 '보편성'을 '공통의 이해'(같은책, <들어가며>)로 치환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수많은 철학자들의 고전 50권을 본인만의 시각으로 쉽게 요약해주고 있는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에게 "철학은 한마디로 개념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형성해가는 활동"(같은책, <들어가며>)이다. 복잡다단한 세계와 이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개별적 현상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적용할 '개념'을 도출하는 철학의 '관념론'적 요소를 저자는 이렇게 규정하면서 '현대철학'적으로 철학은 '언어의 게임'이라 부른다. 

'현대철학'은 더 이상 종교와 같은 '관념론'적 요소를 강조하지 않는다. '보편성'을 담지하는 '개념'과 '진리'를 향한 목적지향성은 철학의 불가피한 학문적 본질이겠지만, '현대철학'은 신이나 절대자 또는 '일자(一者)' 따위를 더이상 세계의 근본으로 두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이 항상 앞서고 철학은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황혼녘에 날개를 펴듯 늘 과학의 뒤를 따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자생적 유물론자'들이고 철학자들은 과학적 성과의 '개별성'을 '보편성'으로 종합하는 지식의 총결산에 복무한다.

'현대철학'에서 과학과 철학의 학문적 구분은 더욱 명확할지 모르나, '보편성'을 지향하는 학문의 본질상 인문과 자연 각 분야의 과학자들 모두가 철학자가 된다.

"주관은 어떻게 객관을 올바로 인식하는가를 묻는 '주객일치'의 구도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이란 '욕구에 상관한 가치평가'로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니체 '인식론'의 기본 원리다."
- [철학 베스트 50], <4장. 현대 1 - 니체부터 하이데거까지>, 히라하라 스구루, 2016.

히라하라 스구루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높이 평가한다. 50권 중 3권이나 니체의 저작을 소개하면서 말이다. 스구루에 의하면 니체는 철학의 전통적 '인식론'에 인간 '욕망'이라는 혁명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현대철학'을 시작했다. 스구루가 말한 인간의 '욕구'는 '욕망'이다. 철학은 '보편성'의 학문이라 주체인 인간이 객체로서의 세계를 어느정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에서도 주체의 인식이 객체를 어느정도 반영할 수 있는지가 고전적 주제였다. 주체가 먼저인가 객체가 우선인가를 묻는 '존재론' 다음으로 나오는 철학의 주요 주제가 바로 '인식론'이다.

'유물론'은 '존재론'에서 객체의 일차성을 강조하다보니 '인식론'에서도 인간의 의식 자체도 두뇌라는 물질적 요소를 통한 '물질적 반영'이라고까지 주장하면서 철학의 '관념론'적 요소를 배제하고자 했다. 이에 니체는 '인식론'에서 주객일치의 '보편성'을 향한 경로를 이탈하면서 인간의 '욕망'에 의한 '가치평가'가 인식론을 좌우한다고 한 것이다. 근대의 신을 죽이고 현대를 연 니체가 철학적 '인식론'에서 인간 '욕망'을 개입시키면서 '보편성' 또한 죽이고 말았다. 이제 진리를 아는 건 철학의 '보편성'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는 '초인'으로서 주체다. 철학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전선을 이탈하고 주체로서의 인간(욕망)을 중심으로 하는 생의 철학과 실존주의 등 현대철학의 문을 연 것이 니체라고 철학자 스구루는 보고 있다.

[철학 베스트 50]에서 히라하라 스구루의 결론은 철학사를 통해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을 개념으로 완성'하는 철학은 '개념의 공예'라는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보편성'은 거추장스러워졌지만 '공통의 이해'를 지향하는 '개념'을 다듬고 또 다듬는 공예 활동이 바로 '철학'이라는 결론이다.

이를 위해 철학사의 고전 50권은 '읽지 않고는 죽을 수도 없는', 즉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하는 [철학 베스트 50]이 된다.


3.

'현철반'의 선배들이 떠나고 남은 우리 현철반 4인방, 철이엄마와 정박아와 지진아와 벅스터는 결국 '현대철학'과 인간 '욕망'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실존주의는 고민했겠지만 다루지 못했고, 현상학은 무시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은 철학으로 보지도 않았다. 당시 1990년대 초반에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20세기 초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리라. 1995년까지 시대는 북유럽 사민주의가 '개량주의'와 비겁한 '기회주의'로 비판받던 시절이었다.

오래전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학습 지침서](1989)까지는 아니지만,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철학 고전들을 읽어주는 히라하라 스구루의 [철학 베스트 50] 같은 책은 여전히 친절하고 고맙다. 살펴보니 비록 나는 50권의 10분의 1인 5권 밖에 읽지 못했지만,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의 말마따나 '철학'은 지식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세계운동의 원리와 이에 대한 사고방식, 공통이해(보편성)를 향한 개념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세상의 '이데아'를 꿈꾸며 '개념'을 지속적으로 다듬어 가는 '공예' 활동으로서 '철학'에 동감한다. 
결국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끊임없이 도전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고, 철학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

1. [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철학 베스트 50](2016), 히라하라 스구루, 이아랑 옮김, <더디퍼런스>, 2024.
2.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학습 지침서], 모리스 콘퍼스, 이진영 옮김, <새물결>, 1989.
3. [유물론 vs. 관념론 - 철학의 근본문제, 유물론 대 관념론: 역사적 갈등](1974), 타카다 모토무, 최미선 옮김, <책갈피>, 2024.
4.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이병수/우기동, <돌베개>, 1987.
5. [1990's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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