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좀 빌려줄래? - 멈출 수 없는 책 읽기의 즐거움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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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되돌아보기에, 나를 되돌아보기에 책이 주는 의미는 충분하다.


사람으로 살아갈 수명은 늘어났지만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수명, 직장인의 유통기한은 급격히 줄어드는 세상이다. 아직도 직장에서의 성공으로 삶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하고 있다면 하루빨리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이제 내 삶을 중심에 놓고 직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직장인‘ 인가, 직업인 ‘인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을 직업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혹은 직업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직장에 다닌다는 뜻으로 오해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직장 place of work은 남이 만들어놓은 조직이지만, 직업 profession은내 몸과 머리에 남는 개인기이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돈과 교환할수 있는(팔 수 있는) 기술이다. 이제 자신을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으로 바라봐야 삶에서 진정 성공할 수 있다. (p7)

우리는 종종 전략 수단과 목표(목적)를 혼동한다. 직장생활이나 승진, 높은 연봉은 모두 수단에 속한다.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읽고 싶은 책이나 경험을 사고, 가족과 가고 싶은 여행을 갈 수 있게 해주며, 아이들에게 더 좋은 교육의 기회를 줄 수도 있고, 때로는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는 목표와 연결될 때 의미가 있다. 물론 목표는 삶의 지짐 (예를 들어 나이)이나 상황(예를 들어삶에서 갑자기 마주하게 되는 기회나 위기)에 따라 때로는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삶의 목표 없이 그저 직장에서 승진을 의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결국 공허함과 만날 뿐이다. 돈을 벌고, 승진을 해서 나는 내 삶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걸까? (p23)

앞에서 나는 좋은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 방향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워라밸 역시 동일하다. 워라밸에서 제일 중요한 질문은 "내가 원하는 균형이란 무엇인가?" 인데, 달리 말하면 "나는 무엇과 무엇을 균형잡고싶은 것일까?"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워라밸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워라밸이라는 말에서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삶인지를 자신의 맥락안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해석하는워라밸이란 다음과 같다.

워라밸 = 남을 위해 내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활동 (A)과나를 위해 내 시간을 쓰는 활동(B) 사이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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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2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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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책은 ‘글쓰기 이론‘의 맥락에서, 글을 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게 글쓰기는 삶이자 생계이다.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리저리 서가를 기웃거리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깨달은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앎(knowledge)의 목표와 방법은 같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플라톤과 주디스 버틀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앎의 이유와 목표는 자신을,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있다. ‘주제 파악을 하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의미라기보다는, 행위는 곧 행위자라는 뜻이다. 행위자(나)를 알려면 자기 행위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가 아는 지식을, 내가 쓴 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는 ‘나‘를 알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탐구로 바뀌어야 한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자신을 아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어떤 대상과의 동일시인 정체성(正體性,identity),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거나 부정되는 당파성(partiality, 당파성은 영어 표현 그대로 부분성이다).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적 주체로서 유목성,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위치성(positioning), 글과 글쓴이와 독자 사이의 사회정치적 맥락 상황, 흔히 성찰로 번역되는 재귀성. 이 책을 읽으면서 위의 개념들을 떠올리면 가성비 높은 독서가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장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p13~14)

침묵으로 불리는 다양한 상황이 있다. 단지 아는 것이 없어서 과묵, 슬픔과 고통으로 할 말을 잃음, 모르는 외국어가 요구되는 상태, 대응할 논리가 없음, 상대를 괴롭히려는 의도, 육체의 마비, 말할 기운이 없음, 기회주의, 사회적 약자의 언어 없음, 말하기 싫음, 저항 -. 모두 소극적 의미의 침묵이다.

막스 피카르트(1888~1965년)는 말로서의 침묵을 주장한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침묵은 독자적인 실체이고, 능동적인 완전한 세계다. 침묵과 말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지 못하는 것은 말을 못 하는 것이다. <침묵의 세계>는 침묵의 가치를 가장 널리 알린 책일 것이다. 읽으면서 침묵하고 있는 기분, 동시에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즐길 수 있다.

내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자아와 침묵‘ 편에서 침묵이 자기 발전, 변신과 맺는 관계이다. "침묵은 인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인간이 과거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침묵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침묵이 결여된 오늘날의 인간은 더는 변신할 수가 없다. 다만 발전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 발전이 그렇게 중요시되는 것이다. 발전은 침묵이 아니라 우왕좌왕하는 논란 속에서 생겨난다."(64쪽)

한국 사회에서 발전은 대개 좋은 의미다. 경제 발전이든 자기계발이든 한 방향으로 향상, 곧 경쟁력 강화다. 발전은 ‘타인보다 앞선다‘에 초점이 있다. 발전은 타인과의 관계인 반변 변신은 과거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변신은 자기 내부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수평의 상승이자 성장이다. (p34~35)

현대 사회의 가장 흔한 착각 중의 하나가 대중성이라는 관념이다. 덩달아 대중적이라는 말도 남발된다. 대중(大衆)은 형태 없는 덩어리이지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다. 읽는 고통(진저리)을 주는 글은 대중적이지 않다는, 재미없다는 생각은 오해이고 모순이다. 독자를 배려하는? 이런 표현 역시 있을 수 없다. 어떤 독자를 배려한다는 것인가. 모든 독자를 배려하는 글쓰기는 불가능하거나 사기다. (p58)

‘뒤처진 인생‘이란 결국 타인에게 뒤처졌다는 얘기인데, 다른 이들도 똑같이 뒤처졌으므로 덜 괴로워해도 되지 않을까. 더구나 당대 자본은 나이에 맞는 지위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지위를 초과 달성한 이들을 원한다. 어차피 웬만한 사람은 다 ‘루저‘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마스터플랜을 쥐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남들 보기에?" 인생 진리 중 하나는 남들은 나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신과의 투쟁이다. 10년을 여관방에서 시나리오만 쓴 영화감독, 기약 없는 무명 시절을 견딘 배우, 20년 습작 시간을 거쳐 마흔에 데뷔한 작가 - . 삶은 할 일로 채워지는 것이지 안정과 성취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다. 나는 조금 태평해지기로 했다. (p62)

<근대성과 육체의 정치학_다비드 르 브르통>

저자는 노화의 실제 현상보다 시선, 이미지, 인식에 집중한다. 몸은 세월 앞에 노출되어 있지만 몸의 이미지는 인생의 초창기에 형성되고 내내 학습된다. 하지만 노화는 전 생애에 걸쳐 진행되므로 사실 노인의 범주는 임의적이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노령의 개념이 다르다. 삶은 누구에게나 질병과 피로와 나이듦의 시간이다. 그래서 나이듦은 느낌이다. 타인의 시선을 내재화한 자기 감정인 것이다.

‘노화는 오랫동안 발아기에 있는 씨앗과 같다. 밖에서(사회) 주는 양분에 따라 때로는 뿌리가 빨리 자라고 때로는 느리게 자라는 것처럼, 타인의 감정에 따라 노화는 달라진다. 노화는 생물학적 나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만이 인지하는 지표들이 망라된 것이다. 나이는 자기 마음대로 들지 않는다. 우리는 사유(cogoto)의 경험처럼 명백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도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젊다고 믿을 수도 있다. 노화는 감정이다."(176쪽) (p83)

<지나간 미래_라인하르트 코젤렉>

"시간은 단수(單數)이고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가 있다. 인간은 노력으로 미래를 실현할 수 있다. 시대에 뒤처지면 안 된다." 익숙한 이 언설은 사실이 아니다.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좋은 말로 발전주의가 작동하려면 이 같은 시간 개념이 필수이다. 역사에는 수레바퀴가 달려서 기술이든 민주주의든 전진한다고 믿는 사고 체계, 이것이 근대성의 핵심이다. 미래는 곧 발전을 의미하게 되었다.백인은 문명화 사명을 띤 인류의 대표를 자처했고, 그들의 미래는 비서구인에게 식민주의와 인종 말살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는 이것이다. "하면 된다." 하면 무엇이 되나? 해서 되는 일이 하나라면, 안 되는 일은 아흔아홉 개다. 우리는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뜻한 바가 많을수록 좌절과 불행이 동반 방문한다. 더 큰 문제도 있다. "하면 된다"는 근대화 정신은 "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상식을 잠식한다.

글자 그대로 미래(未來)는 아직 오지 않음이다. 이전과 이후를 인식하는 그 순간이 현재다. 본디 과거나 미래는 순환할 뿐 순서도 위계도 없었다. 더구나 미래 개념의 근본 문제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없는 자에게는 더욱 예측 불가능한 도박이다. 미래는 시간 개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간으로만 상상할 수 있다. 세계 10대국, 노벨상 수상 국가, 좋은 집, 합격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는 삶의 형태지, 시간이 아니다. (p112)

그림은 글씨보다 쉬운가? 왜 책을 읽는가. 책은 줄거리인가. 만화<토지>, 드라마<토지>, 소설<토지>는 어떻게 다른가. 앞서 말한 청중은 만화<토지>를 읽고 소설<토지>에 흥미가 생겨서, 결국 소설을 읽은 학생이 있다며 만화의 효용성을 주장했다. 이런 식의 논리는 예술로서 독자적인 장르인 만화를 차별하는 사고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화가라면 모욕을 느낄 것 같다. 만화나 드라마는 소설 읽기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보조 장르도 아니고, 중간 다리도 아니다. 미디어가 메시지다. 형식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세 가지는 모두 다르다. 다른 경험, 다른 효과, 다른 학습이다.

만화나 영화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세계가 있듯이, ‘지루한 독서‘만이 선사하는 경험이 있다. 주변에 표절 시비가 많다 보니, 나는 표절을 하더라도 직접 타자를 치는 것과 다운로드 하는 것은 다르다고 농담하는데, 방법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책읽기는 내용 습득이라기보다는 읽기 과정에서 느끼는 혼란과 즐거움이다. 특히 청소년기의 책읽기는 중요한 훈육이다. 입시 제도와 별개로, 무엇을 하는 한 가지 일에 몇 시간 정도 집중하고 노동을 견디는 것은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다.

책은 책으로 읽어야 한다. 번역본도 읽지 말라는 이들이 있는데 비현실적이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원서의 어감은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렇게 오만한 것이다. 쉽게 쾌락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드라마 <미생>에서 완전 감동받은 대사 "회계가 재무의 언어"이듯이, 회계는 회계대로 영상은 영상대로 활자는 활자대로 각자의 장치가 있다. 회계라는 언어의 전문성이 있고 따로 힘들게 공부해야 하듯이, 활자 역시 만만치 않다. 활자는 단순 글자가 아니다. 다른 매체에는 없는 심오한 행간, 오식(誤識)으로 인한 우연한 앎의 가능성, 투지(透紙, 종이가 찢어지도록 뚫어지게 봄)가 책 내용을 만든다.

독서의 목적은 생각하는 긴장과 외로움, 쾌락을 얻기 위함이다. 독서는 이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명작‘보다 ‘킬링 타음‘용 책이 낫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인 ‘펄프 픽션‘은 요약본이 없다. 책의 본문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안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한다는 강박과 읽은 것을 전제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이다. 독서는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다. 자기만의 사고와 태도, 시각은 과정에서만 얻을 수 있다. (p120~121)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 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p165)

여성 혐오는 인류 문명의 가장 강력하고 독자적인 문화적 기반이다. ‘인종 역할‘, ‘계급 역할‘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성 역할(gender role)이란 말이 널리 쓰이는 것은 성차별이 부정의가 아니라 지켜야 할 규범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차별은 심한데 인식이 낮은 사회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다. 남성의 자연스런 일상이 여성에게는 모욕, 차별, 생명 위협이다. 남성은 자신의 행동에 대응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행복권 침해‘ 로 생각하고 증오와 피해의식을 느끼기 쉽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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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1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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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삶은 옮고 그름이나 일의 가치를 기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생의 목적? 의미를 추구하는 삶? 신성한 노동? 이런 가치들은 소통하기 어렵다. 전쟁은 이런 것이 있다는 가정, 즉 정치경제적 이유와 ‘진리는 하나‘라는 확신 때문에 발생한다. (p124)

인생=길이라는 통념은 다양한 경험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상투성의 원단,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단지 선택하지 ‘않은‘ 삶일 뿐이다. 선택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갈 수 없는 길이고 이미 삶이 아니다. 외출 준비에 한나절 이상 걸리는 장애인, 여성이 피하는 밤거리, 치매와 광장공포증 환자에게 길은 도전이자 치열한 정치다. 비장애인의 걷기, 걷기 투쟁이 많지만 이진섭, 이균도 부자에게 길은 그들과 같지 않다. (p128)

모든 이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이의 평화도 가능하지 않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 전쟁과 평화는 같은 말이다. 평화의 어원은 침략자, 강자의 승리를 뜻한다. 공격 후 민사 작전, 다시 말해 점령 지역을 평정하여 반란을 진압한다는 뜻의 ‘pacify‘에서 ‘peace‘가 나왔다. 우리말의 평화(平和)는 1889년 창립된 ‘일본평화회‘의 기관지 <평화(平和)>에서 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평화가 ‘peace‘보다 낫다. 하지만 ‘화(和)‘가 온누리에 ‘평(平)‘할 수 있을까. (p139)

세월호로 타살된 이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삶에 대한 고민 자체를 빼앗겼다. 이 사실이 가장 나쁘다. 존재 이전에 존재의 의미를 없앤 것이다. 유목과 무명의 인생을 고민하고 설레어하고 마침내 그렇게 살다가, 홀로 황량한 언덕에 서 있는 삶도 영광이다. 삶과 죽음의 가장 큰 차이는 가능성이다. 행이든 불행이든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가능성. 인간은 행복이 아니라 가능성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래서 너무 일찍 죽으면 안되는 것이다. (p201)

누구나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보호의 현실 또한 간단하지 않다. 세월호를 둘러싼 가장 비등한 여론은 ‘누가 우리를 보호해주냐?‘라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국가가 강력한 보호자이기를 희망하는 것은 세월호의 대책이 아니라 원인에 가깝다.
기존의 보호는 보호자(주체)와 피보호자(대상)를 전제한다. 피보호자는 보호자에게 세금, 충성, 자유의 부분적 포기 같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기존 보호 개념의 가장 큰 문제는 보호자가 보호할 대상과 그렇지 않을 대상을 결정하는 권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보호자 남성은 여성을 성(性)과 외모 혹은 아버지가 누구냐를 기준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구분한다. 보호자에게는 차별할 권리가 주어진다. 국가가 보호자일 때 국민이 어느 지역과 계급에 속했는가에 따라 보호 의지가 다르다. 지역 차별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은 이마저도 아니고 "왜 그런 걸 요구하세요?"라고 반문한다.(p204)

의지는 적재적소의 미덕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의지는 재앙이다. 지나친 의지,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는 목표가 무엇이든 바람직하지 않다. ‘열심‘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아서일까. 내게 ‘열심‘은 치열하거나 성실하다는 의미보다 완장 차고 설친다는 인상이 강하다. 환경 파괴는 덤이다. (p214)

처음 한자를 배울 때 좋을 ‘호(好)를 이해하는 방식은 대개 "남자랑 여자랑 있으면 좋다."다. 배병삼의 지적이 없었더라면 나도 계속 그렇게 알았을 것이다. 1899년 발견된 갑골문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여성이 어린 자식을 가슴에 끌어안고 꿇어안아 있는 모습(好)을 좋음,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한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와 자식이다. 유고의 장례인 삼년상(三年喪)은 ‘好‘, 즉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일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느낌에 주목하는 것. - 상실감의 고통, 황폐한 심정, 다시 만날 수 없는 공허감을 느껴보길 촉구하는 의례가 삼년상"이다. 어미와 자식이 껴안고 있다가 한 사람이 사라졌다. 부정하고 싶은 이 상황을 실감하는 과정이 삼년상이요, 시묘다. 삼년상은 유아기 3년의 절대적 의존 기간에 근거한 것이며 꼭 3년일 필요는 없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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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파트너, HR 애널리틱스 (HR Analytics)
이재진 지음 / 온크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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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 애널리틱스 관련 단비같은 소개서. 아직 한국에는 생소한 분야. 결국 시간이 흐른다면 우리에게도 익숙해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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