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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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그 허구는 언제나 현실의 진실에 맞닿아 있다. 소설은 어떤 형태로든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반영을 통해 어둠에 가려져 은폐되었던 현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로’로서의 역할 때문에 때로 소설작품은 탄압의 대상이 된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의 종주국이었던 구소련이나 현재 중국 등지에서 수많은 작품들이 금서로 지정된 것은 이런 서적들이 실제로 체제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오웰의 <1984>는 세 개의 초대국가(超大國家)가 정립(鼎立)하는 미래의 사회를 다루는데, 이 국가들은 구소련과 중국과 같은 전체주의체제를 취하고 있다.(이런 이유로 20세기 소련과 중국에서 조지 오웰의 <1984>는 금서였다) 오웰은 <1984>를 통해 그의 생존 당시 인류 앞에 드리운 어둠으로서 전체주의를 주목했고, 불행하게도 오웰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따라서 <1984>가 반영하는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주목하고 우리의 현재를 반성해 보는 것, 나아가 우리가 실존하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해 보는 것이 오웰을 읽는 모든 이의 과제가 될 것이다.

 

전체주의라는 테제

 

    ‘전체주의’는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전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없으면 전체 자체의 존속도 있을 수 없고, 이 전체주의에 내재한 모순 때문에 결국 극소수의 상류계층에게만 부와 권력이 집중되게 된다. 이런 결과는 극우적 이념인 나치즘과 파시즘이 전체주의와 결합한 경우나, 극좌적 이데올로기인 스탈린주의의 경우 모두에 마찬가지이다. 이 체제 아래에서 극소수 지배계층(빅브라더)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국민을 기만하고 위협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반대세력을 철저히 억압하고,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는 결과에 이른다. <1984>의 배경인 오세아니아는 이런 전체주의적 통제사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물론 다른 초대국가인 유라시아와 동아시아도 마찬가지이다). 통제라는 것은 지배세력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강제력의 행사이며, 통제를 통해서 권력은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권력은 본성에 따라 스스로를 강화하며 마침내 폭력의 행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합법적’이란 사실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발터 벤야민이 보여준 것처럼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기 위해 법의 제정이라는 형식을 취하는데, 이로서 법률적 불법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폭력으로서의 전체주의

 

    <1984>는 바로 체제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폭력에 대한 탐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폭력을 좁은 의미의 유형력의 행사에 국한해선 안 된다. 폭력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이 형태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린 <1984>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책 밖의 현실에 존재하는 폭력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사실 개개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도 전체주의의 폭력적 전략 중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슬라보예 지젝이 폭력의 종류를 정치(精緻)하게 분류한 것의 도움을 받도록 하자.

 

   지젝은 폭력을 객관적 폭력과 주관적 폭력으로 나누었는데, 이중 ‘주관적 폭력’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의 경찰이나 군조직, 정부요원들을 도구로 국민을 폭행하거나 납치하고 고문하는 것에서 장발단속과 미니스커트 규제와 같은 풍속통제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통제하는데 유형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정상적이지 못한 행태로서 우리가 쉽게 인식가능하다. <1984>에서 윈스턴과 줄리아는 사상경찰에 의해 체포되고(p.269-273), 신체적 고문과 정신적인 개조(이것이 <1984>3부의 중심 내용이다)를 당해 마침내 자신을 파멸시킨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관적 폭력의 행사에 해당한다. 제3세계 국가의 독재정부가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하는 것이나, 평화롭게 시위하는 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있는 현실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 폭력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도 결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객관적인 폭력이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폭력은 이중으로 은폐되어 있다. 이는 비가시적인 형태를 취하며,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객관적 폭력의 한 양상인 ‘상징적 폭력’을 주목하자. 이는 언어에 의해 구현되는 폭력을 말한다. 단순히 욕설이나 저속한 농담, 저주 등은 상징적 폭력의 가장 조야한 형태이다. <1984>체제하의 사람들이 벌이는 ‘2분 증오’의식에서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해 사람들을 선동하고 증오로 광분케 하는 것(p.19-26에서 ‘2분 증오’의 과정이 자세히 서슬되어 있다)도 다른 형태의 상징적 폭력이다. 그러나 오웰이 본문에서 사용하고 부록 ‘신어의 원리’에서 자세하게 밝히고 있는 ‘신어(新語)’를 통한 방식이야말로 언어를 통한 상징적 폭력의 유형으로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신어의 체계에서는 단어가 일정한 방향의 의미로만 활용될 수 있어서,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체제의 부당성과 자신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지젝이 ‘구조적 폭력’이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상황으로 여겨지고 있는 상태 자체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예컨대 현대에 전지구적(全地球的)으로 퍼져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빈부격차가 증가하고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데, 이러한 심각한 불균형은 폭력적인 것으로 인식되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것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점점 조급해지고, 삶의 의미를 따지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계속해서 힘들게 노력해도 상황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모두 정상적인 상황이며, 이를 의심하는 자는 이상한 사람이다. <1984>의 세계에서는 전체주의 강령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의심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한편, <1984>에서 당원과 ‘노동자’라 불리는 벙어리 대중(p.254에 등장하는 표현)을 구분하여 각자를 다른 방식으로 규율하는 사실(p.256이하)은 폭력이 스스로를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단계적·효율적인 방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회에는 한정되고 단순한 지식만을 가지고 필요한 물자를 만들어 내는 노동자가 필요하고,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면 전체주의 사회체제를 더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노동자는 실질적으로 노예로서 인격이 박탈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위협요소가 되지 않는 이유는 빅브라더가 그들을 비인간화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서 폭력의 또다른 양태가 드러난다.

 

전체주의의 변형

 

    물론 현재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도 무너지고 명목상으로 전체주의 국가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남아있다해도(중국이 대표적인 예다), 개방의 물결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나 나치즘에만 전체주의가 있는 것은 아니며 전체주의가 특정 이데올로기에만 수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전체주의라는 괴물은 정체를 감추고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내부에 숨어있을지 모른다. 예컨대 전체주의는 시장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또 다른 형태로-이를테면 ‘시장전체주의(도정일 교수의 표현이다)’라는 것으로 변형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제적 구조는 정치권력과 융합하여 더욱 공고히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닐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 또다른 형태의 전체주의적 폭력은 은폐된 채로 여전히 우리를 억압하는 것은 아닌가? 수없이 많은 감시카메라와 전자장비들, 고도로 발달한 과학지식과 컴퓨터 기술 등은 이런 모종의 전체주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는 아닐까? 매스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고 점점 편협해져가는 사람들과 피폐한 일상, 경찰국가화 되는 세상의 모습은 실제로 우리가 또다른 전체주의와 폭력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 것일까?

  

   심지어 이제는 우리의 내면까지 감시자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푸코가 말한 파놉티콘의 형태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감시하며 제한하려드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오웰의 <1984>가 예언한 미래에 근접한 것만 같아서 두렵다.

 

 

결어 : 희망

 

    이처럼 현재도 유효한 오웰의 문제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우리 앞에 놓인 길이 작중의 윈스턴이나 줄리아가 걸은 길이라면? 작품 속에 묘사된 오세아니아의 상황이 바로 가까운 미래일까?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이 책에서 오웰은 이런 의문들에 온전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묵묵히 우리 앞에 반영으로서의 소설을 던지고 우리 스스로 답을 찾길 바라는 것 같다. 우리가 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이 작품을 교사로 삼는다면 어쩌면 무언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암시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빅브라더를 사랑하는 자로 최후를 맞을 수도 있는 운명 또한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가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답을 결정하는 이는 바로 과거의 오웰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존엄한 인격으로서 스스로 설 수 있고, 실존으로서의 의마를 실현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그렇기에 오웰은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지켜볼 것이다. 미셸 푸코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기억하자.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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