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근본적인 방식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석기시대 사람들이다. 식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석기시대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제아무리 월계수 잎사귀와 다진 회향풀을 흩뿌린 요리라고 하더라도,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모두 석기시대의 음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플 때, 우리를 괴롭히는 것 역시 석기시대의 질병이다. - P53

상당수의 유럽 국가의 주택에서 문이 그렇게 낮았던 까닭, 그리하여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종종 무심코 문 위의 벽에 이마를 찧게 되었던 까닭은 단순히 옛날 사람들이 키가 더 작아서 굳이 높은 문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때는 정말 그랬다고 추정했지만, 먼 옛날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조리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문이 작았던 까닭은 그 당시에 창문이 작았던 까닭과 똑같았다. 즉 만드는 값이 비쌌기 때문이다. - P77

‘침실[bedroom]’이라는 표현은 1590년경에 셰익스피어가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사실 그때는 침실 안의 공간을 가리킨 것에 불과했다. 이것이 오직 잠을 자는 데에만 쓰이는 방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는 것은 다음 세기의 일이다. - P82

우리는 전기가 도입되기 이전에 이 세상이 그야말로 끔찍스러울 정도로 어두웠다는 사실을 그냥 잊고 산다. 양초 하나 — 그것도 좋은 양초 하나 — 의 밝기는 100와트짜리 전구 하나의 100분의 1에도 간신히 미칠까 말까이다. 여러분이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나타나는 빛이 18세기 대부분의 집에서 사용하던 빛의 총합보다도 더 밝은 셈이다. 역사의 상당 부분 동안, 밤의 세상은 실제로 매우 어두웠다. - P142

전기가 도입되기 이전의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은 해가 떨어지지마자 잠자리에 들었다는 식의 믿음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것은 밝은 조명이 없다면 짜증 때문에라도 잠이나 자러 가지 않겠느냐는 추측에 의존한 주장인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아주 일찍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기가 도입되기 이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반적인 취침 시간은 9시에서 10시 정도였으며, 어떤 사람들, 특히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그보다 더 나중인 경우도 있었다. - P143

전기가 도입되기 이전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좀더 일찍 침대로 가게 만든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지루함이 아니라 피곤함이었다. - P145

영국에서 커피에 세금을 매기는 방식(갤런 단위) 때문에, 커피 하우스에서는 커피를 잔뜩 끓여서 식힌 상태로 통 속에 보관하다가, 손님이 오면 조금씩 덜어서 덥혀서 내놓았다. 따라서 영국에서 커피의 인기는 그 음료 자체가 훌륭해서라기보다는 커피가 일종의 사교적 윤활유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잡담을 하기 위해서, 최근의 잡지(journal)와 신문(newspaper) — 이것 역시 1660년대 당시로서는 새로운 단어이며 개념이었다 — 을 읽기 위해서, 그리고 각자의 생활과 사업에 가치 있는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 커피 하우스를 찾았다. - P224

식당이 존재하게 된 까닭은 전적으로 그 용도로만 사용되는 공간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는 갑작스럽고 보편적인 충동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체로 새로 구입한 소중한 천 씌운 가구가 기름때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려는 여주인들의 단순한 욕망 때문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당시에는 천 씌운 가구가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이를 자랑스러워해 마지 않은 집주인으로서는 누가 거기에 손가락을 문질러 닦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 P231

전화는 원래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치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면 날씨 정보, 증권시장 뉴스, 화재 경보, 음악 연주, 심지어 보채는 아기를 달래기 위한 자장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말이다. 어느 누구도 이 장치가 남의 험담이나 사교 행위, 또는 가족과 친구를 연결시켜주는 데에 주로 이용되리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다. 주기적으로 직접 만나는 누군가와 전화로 잡담을 나눈다는 발상은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어처구니없이 여겨졌으리라. - P282

우리는 시궁쥐를 가난한 환경과 결부시켜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이놈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며, 가난한 집보다는 부유한 집을 당연히 더 선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대식 주택은 시궁쥐에게 오히려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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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좋아한다. 이전에는 책만 좋아했고, 책 읽기까지 좋아하지는 못 했다. 내 삶에서 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음을 안 후에야 비로소 어떻게 하면 내가 진짜 책을 읽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지금은 책 읽기를 즐기게 되었다.

이건 말하자면, "나도 책 좀 읽어야 하는데..." 매번 반성하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 하는 삶과 비슷하다. 더 잘 살고 싶어 연말연시를 핑계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지만 실천하지 못 하는 삶과도 비슷하다. 거기에는 아주 중대한 물음이 빠져 있다. "왜?"라는 물음. 애초에 나는 왜 책을 읽어야 하지? 혹은, 왜 나는 더 잘 살고 싶어야 하지?

여러 자기계발서가 도구와 방법론에 집중한다면, 이 책 《계획이 실패가 되지 않게》는 아홉 번째 챕터, 〈마음에서 우러난 목표, 눈에 보이는 핵심 결과〉에서 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인간은 왜 사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머리를 싸맸다. 하지만 꼭 이 질문에 대답이 필요할까? 인류는 자신의 삶에 너무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인간은 엄청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가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뿐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각자에게 한정된 삶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어진 시간을 되도록 즐겁고 행복하게 쓰고자 한다.

본문 140쪽


나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OKR(Objectives and Key Results)를 직접 적용해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쓴 방법이 딱 이런 건 아니었더라도 비슷한 방식을 적용해 책 읽는 척하지 않고 제대로 책 읽기에 성공했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나 자신을 납득시키려면 나만의 이유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내 삶을 바꾸고 싶다면 이 목표 역시 나만의 이유가 필요하다. 나는 《계획이 실패가 되지 않게》가, 냅다 본론으로 직진하는 대신, 시작점을 짚어 주는 책이라서 좋았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는 책 읽기를 제대로 시도하기 위해서 먼저 야심찬(?) 목표인 "책 읽기"를 설정해두고, 핵심 결과로 읽은 책을 알라딘 북플, 굿리즈, 북적북적 같은 앱에 기록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독서 통계가 쌓이면서 눈으로 확인하는 소소한 만족감을 보상으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책을 읽을 때 나만의 별점을 매기는 습관이 생겼다. 이 별점은 내 삶의 목표나 계획과 마찬가지로 굳어진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책의 마지막 장까지 나와 함께 달리는 꽤나 동적인 수치인데, 위에서 인용한 대목을 만나면서 내 별점은 4.0점에서 5.0으로 올라갔다.

저자의 말처럼, '왜'라는 물음에 우리가 무조건 답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물음에 답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이 이유를 찾기 전까지 나는 딱히 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살아 있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치열하게 계획을 세우고 성취를 쌓아가며 '잘' 살아가고 싶었을 리 만무하다. 나는 이 답을 찾고 싶어서 과학책을 많이 읽었다. 과학책을 읽는 책 모임에 참여한 지도 벌써 3년을 넘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명한 과학자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내놓는 답은 의외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답에 물리적인 혹은 논리적인 근거와 사례가 장황하게 딸려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우리는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사는 거다. 그러니까 사실 잘 살 필요도 없다.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건 나의 선택이지, 우리 존재의 운명 같은 뭐 대단한 소명은 아니다. 그러니까 오늘 그냥 콱 죽어버린다고 해서 자연계에 뭐 대단한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그냥 콱 죽어버린다"는 선택지를 상상하는 인간의 정신 상태가, 애초에 인간이 날 때에는 프로그래밍된 적 없는 일종의 버그 혹은 변이이며, 이걸 후대 인간들은 '우울증'으로 대표되는 정신 질환으로 정의내렸다는 것, 딱 이 정도가 내가 독자로서 아주 얄팍하게 훑어본 의/과학계가 내게 내려준(정확히는 내가 해석한) 답이다. 나는 최근에야 나의 버그를 인정하고, 살아 있으니 살아가자는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심지어 계획을 세워 잘 살아가자는 마음으로까지 발전했다면, 그건 꽤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뭔가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음을 '기회'로 인지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잘 살아가자"는 목표와 그에 걸맞는 계획을 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뭐, 물론 여전히 그러지 않을 선택지가 우리에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침내 계획을 세울 마음을 먹었다면, 이 책은 좋은 지침서이자, 과거와 미래의 나를 점검하는 훌륭한 기준 수치(바로미터)가 되어 줄 것이다. 다양한 예시를 훑으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겪어온 계획과 실패를 곱씹어 보았다. 내내 게으르게 누워 지냈던 것만 같은 내 삶에도 피아노, 달리기, 영어 공부, 코딩 등 여러 시도의 경험이 존재했다. 다행인 건, 적어도 그중 일부는 현재 내게 성공의 경험으로 남았다는 점이다. 앞서 내가 '책 읽기'에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 '오늘' 나의 실패와 성취, 그리고 내 기분을 생생하게 느끼며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그럼 오늘이 어제가 되고, 새로운 오늘이 찾아왔을 때 예전의 기억과 감정을 지금의 나와 내 감정에 비교해 보며 내가 나아갈 길과 그 방향을 좀 더 세밀하게 설정할 수 있다.

현재는 내 귀중한 자산이 되었지만, 한때 내가 실패로 낮잡아 취급했던 경험들을 돌이켜 보면,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내 앞에 놓인 삶과 그 삶을 이어갈 계획은 나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꽤나 오래 삶의 모습과 계획을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것' 혹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다들 하니까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일'로 채웠다. 그렇게 나의 계획과 나는 착실한 평행 노선을 걸었고, 최근에야 겨우 살림을 합쳤다(?).

넷플릭스에서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다큐 중에 〈환성의 버섯〉이라는 작품이 있다. 거기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설명을 읽고 나는 마음이 푹 놓였다. 언어라는 건 공감각(서로 다른 두 개 이상 감각의 혼합)을 동원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책 읽기를 꾸준히 하려면 글자의 형태를 내 두뇌가 소화할 수 있는 정보로 해독하기 위해 집중력과 훈련이 필요한 게 당연하고, 영어를 좀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도 인위적인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걸 다르게 풀어 쓰자면, 우리가 책을 잘 읽지 못하는 것과 외국어(혹은 모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값이라는 거다. 그러니 딱히 실망할 이유가 없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냥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처럼, 뭔가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싶다면 그저 인위적으로 꾸준히 해당 자극에 나를 노출시키려는 훈련을 하면 된다.

몇 년간 과학 관련 책을 꾸준히 읽으면서 내린 결론이 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범상치 않은 수준의 지성을 이룩했다는 점이 제법 특별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애초에 인간의 삶은 다른 지성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극을 좇고, 위험을 경계하며, 보상에 기뻐하는 존재다. 내가 런던에서 함께 살며 돌봤던, 지금은 대구에 살고 있는 강아지 사진을 보며 내가 매일같이 읊조리는 말이 있다. 오늘도 밥 잘 먹고 산책 잘 하고, 재밌게 놀고 잘 자.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우리 강아지에게 바라는 삶의 모습이, 내가 바라는 내 삶의 모습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황 없는 십 대 시절부터 꾸준히, 나 역시도 영문도 모른 채 이런저런 삶의 목표를 주입받았다. 좋은 대학에 가고, 안정된 직장에 가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도 하고 고운 자식도 낳거라. 나는 '구경이' 씨처럼 원체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왜 이대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기 전까지 이 지침을 정직하게 등지는 삶을 살아 왔지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 나름의 답을 찾고 나니, 어릴 적 내가 주입받은 지침대로 살았어도 세상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이야말로 더욱 더 이 지침을 따를 생각일랑 없지만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 《계획이 실패가 되지 않게: 반드시 결과를 내는 탁월한 실행의 기술》이기는 하지만, 내가 본문을 통해 읽어낸 숨은 맥락은 실패해도 되고, 반드시 결과를 낼 필요도 없다. 근데 그냥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는 삶이야. 같은 느낌이다. 내가 편집자가 되어 같은 본문을 가지고 제목을 정한다고 하면, 나라도 책 제목은 전자처럼 짓겠지만. "여러분이 세운 계획이 실패가 될 수도 있고요, 결과를 내지 못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한번 실행해 보면 좋아요." 같은 제목으로 나온 책이라면 나부터도 매대를 스치듯 안녕할 테니까.

아, 하나 나 혼자 사사로이 느낀 이 책의 아쉬운 점을 꼬집으며 마무리해야겠다. 내가 자의적으로 해석한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본질은 "네가 원하는 삶을 찾아라"에 가까운데에 반해, 띠지의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문구는 어떤 마케팅 전략을 의도했는지 대강 짐작이야 가지만, 독자가 거스르길 바랐던(자의적 해석22) 사회적 통념에 좀 더 가까운 표현이라서, 이 문구를 보면서 공감하고 마음이 동할 예비 독자들은 많겠지만, 왠지 그냥 이 표현을 뺐거나, 다른 수식을 썼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다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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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펐지만, 시간은 모두를 미래로 내몰았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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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기는 매우 흥미로운 기간이었습니다. 주식은 회사가 아니고, 회사는 주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P69

부라는 것은 결과에 대한 평가입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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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나 산과 같은 풍경의 요소와 달리, 사람은 발이 있다. 사람은 더 좋은 기회가 있는 장소로 움직이고, 나중에 친구와 친척까지 초대한다. 집단들이 섞이면서 풍경은 프랙탈처럼 바뀐다. - P423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자. 긴 평화가 핵 평화라면, 이것은 바보들의 낙원인 셈이다. 하나의 사고, 하나의 오해, 고귀한 체액에 집착하는 한 명의 공군 장군만으로도 묵시록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면밀한 검토에 따르면 핵 절멸의 위협이 긴 평화에 기여했다는 가설은 사실이 아니다. - P467

민주 국가를 포함하여 모든 국가가 처음에는 호전적인 상태로 시작하고 어떤 국가이든 갑작스럽고 끔찍한 전쟁에 허를 찔릴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앙에서 배우는 능력은 민주 국가가 더 낫다. 정보에 대한 개방성과 지도자가 짊어진 의무 때문이다. - P507

명예, 영광, 이데올로기에 덜 고무되고 부르주아적 삶의 쾌락에 더 유혹되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덜 살해된다. - P533

금전적 유인책이 있을 때 미워하는 적이 아니라 중립적인 관계자에게 양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체면을 유지할 기회가 된다. 시에라리온의 유엔 실무자 데즈먼드 맬로이는 이렇게 관찰했다. "평화 유지군은 협상 분위기를 조성한다. [양보는] 자존심의 문제인데, 그것은 인간의 특성이다. 그러니 존엄과 자존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협상 매커니즘이 필요하다." - P544

"사람들은 인간이 ‘동물처럼’ 잔인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동물들에게 천부당만부당하고 모욕적인 말이야.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잔인하진 못해. 인간처럼 기교적이고 예술적으로 잔인할 수는 없어. 호랑이는 그저 물어뜯어 죽일 뿐이지. 호랑이가 사람의 귀를 못에 박아 하룻밤 놓아두는 일은 결코 없어. 만약에 그럴 능력이 있더라도 그러지 않을 거야." - P555

상업 활동은 도시에 집중되는 편이거니와, 그 자체가 도덕적 혐오를 일으키는 방아쇠이다. 9장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의 직관적인 경제 감각은 구체적인 물건이나 서비스를 등가의 것과 바꾸는 일대일 교환에 뿌리를 둔다. 닭 세 마리와 칼 한 자루를 바꾸는 식이다. 마음은 돈, 이익, 이자, 임대료처럼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현대 경제 도구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직관적인 경제의 시선에서, 농부와 장인은 구체적이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한다. 반면에 상인과 중개인은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은 채 물자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이익을 취하므로, 기생충이다. - P567

초크와 요나손이 말했듯이,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에는 통치자들만이 뉴스를 생산했지만, 20세기에 처음으로 피통치자들이 뉴스를 만들었다." - P577

내 요지는 인류가 물병좌의 시대—통념에 따르면 자유, 평화, 우애의 시대—에 접어들어 지구 상 최후의 일인까지 영원히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내 요지는 폭력이 실제로 상당히 줄었다는 것이고, 이 현상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P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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