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자본주의 백과전서 - 주성하 기자가 전하는 진짜 북한 이야기
주성하 지음 / 북돋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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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두 지도자가 죽은 후 새로운 젊은 "수령"을 맞이하여 최근 많은 환골탈태를 보이는 양상입니다. 전향적으로 동계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한 결정도 그렇고, 이 결정이 연쇄 파장을 일으켜 사상 초유로 거행된 미- 북 정상 회담까지 이어진 경위를 봐도 그렇습니다. 아직 저들의 정확한 저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확실한 건 우리 쪽의 자세,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통일을 대비하는 자세가 종전과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점 정도이겠습니다.

상대를 적대하든 이해하든, 절멸의 타깃으로 삼든 뜨거운 포옹을 시도하든 간에, 가장 최우선에 놓여야 할 과제는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동아일보 등에 여러 칼럼, 기사를 기고하며 이제는 한국에서도 꽤 지명도가 높은 주성하 기자의 책이며, 북한 사회의 심도 있는 분석이나 고위층에 대한 해박한 지식 면에서 그를 능가할 만한 전문가가 극히 드문 만큼, 여태 단편적인 인식에 그친 우리 독자들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며, 실제로 책을 다 읽고 많은 점을 배우게도 되었네요.

몇 달 전 어느 일본 저널리스트가 쓴 책을 읽었는데 그 중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거듭되는 국제 봉쇄와 제재 속에서도 경제의 자생력은 생각보다 강했으며...." 예전 김정일이 살아있었을 당시, 느닷 내려진 "화폐개혁" 조치에 대해 특히 평양 주민들이 큰 불만을 표시하면서 "저런 XX 같은 X" 같은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는 일부 보도를 접하고 의외의 느낌을 받은 적 있습니다. 유일체제이며 소위 "최고 존엄"에 대한 불경스러운 태도가 전혀 용납되지 않는 그들 사회에서 참으로 기대될 법하지 않은 반응이었기 때문이죠. 물론 이는 비교적 세련된 평양이나 그들 수도권 일대의 정서이며, 변경이나 농촌에서는 여전히 극히 낙후한, 미개한 복종 일변도의 정서이겠음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여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당국이 조장하건 억압하건 간에, 일부에서는 분명 자생적 자본주의 활동이 무시 못할 강도, 범위로 번져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PC방도 성행하며 남한 컨텐츠를 몰래 접하고 자극 받은 그 나름의 트렌드가 분명 북한 주민들에게도 "경제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운 건 사실인 듯합니다. 1%의 부자, 0.01%의 금수저... 사회주의적 평등을 표방하는 체제에서 일어나고 자리잡은 현상치고는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입니다만, 여튼 이런 움직임이 "당장 북한이 붕괴하는 결과만은 막는" 버팀목이자 기반임은 또 분명합니다. 동구권이 무너질 때는 소련의 탱크고도 그 추세를 막을 수 없었는데, 지금 북한은 중국의 원조조차도 넉넉히 못 받는 형편이면서도 요리조리 제재의 구멍을 파고들며 용케도 잘 버티는 형국 아니겠습니까.

한국에서는 특히 교사 등이 일등 신붓감으로 꼽히는데 북에서는 이런 교육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가장 열악한 처우를 받는 편이라고 하니 다시금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네요(하긴 정상인 게 뭐가 있겠나 싶지만서도). 그 와중에서도 유치원 교사, 혹은 김일성대 같은 명문 시설의 "교원"들은 선망의 대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찌감치 "정규 수입"의 범주가 의미없어지고, 가외로 올리는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풍조가 자리잡은 덕입니다. 특히 김일성대 교수의 경우는 당국에서도 특별 배려를 한다는군요.

여기 남쪽에서도 공무원들의 수뢰 때문에 사회가 골병이 드는데 공직자들의 부패상은 저쪽이라고 다를 바가 없나 봅니다. 생산성도 떨어지고 그나마 사회의 안정, 평등 말고는 기댈 데가 없는 체제에서 공직자가 부정까지 저지르면 무슨 답이 있겠나 싶은데, 여튼 민간에서 뭘 노리고 공무원에게 뒷돈을 찔러 주는 판이라면 역으로 시빌 섹터에 활력이(그게 무엇이든) 돌고는 있다는 방증도 됩니다. 애써서 좋게 해석해 주자면 말입니다. 아니 다 굶어 죽어가고 거지들만 들끓는다면 공무원한테 뭘 기대하거나 호의를 바랄 여지라도 어디 있을까, 뇌물을 줄 돈은 어디서 나오기나 할까 싶은 게 자연스러운 추론이죠.

예전에 소설가 황석영이 비밀리에 북을 방문하고 귀환하여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기행문, 수기를 계간 창비에 연재한 적 있습니다. 이 덕분에 백낙청, 리영희 양 교수가 당국에 연행되어 큰 고초를 치른 적도 있었죠. 그 글을 읽고서는 왠지 남한 사람시각으로 재해석된 내용이 아니라, 북측의 설명, 입장에 너무 경도된 것 아닌가 생각도 들었습니다(확고한 자신만의 관점을 지닌 유명 작가라서 더 기대가 컸는지도 모르지만). 그게 소위 내재적 접근법에 영향을 받은 소치일 수도 있겠으나, 여태 함께 호흡해 온 남쪽 독자를 더 배려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접을 수 없었죠.

그에 반해, 이 책은 북한의 엘리트가 쓴 책인데도, 적잖이 남한화한 지성인의 시야로 북을 재해석한 점이 돋보입니다. 책은 독자와의 소통인데 어떤 기존의 프로파간다, 교조만을 "충실히" 전달하는 건 문제가 있을 뿐더러, 우리가 호흡하고 그 혜택을 받는 자유체제의 취지와도 잘 맞지 않습니다. 북을 이해하는 데 생생한 팩트의 제시로 큰 도움을 준 이 책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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