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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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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없는 어둠 속에서의 투쟁

- 사사키 아타루 ‘야전과 영원’

 

 

 

언젠가 그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아주 단호하고 명쾌한 그의 문체에 단숨에 매료된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철학책들을 읽다보면 사상의 체계가 치밀할수록 읽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에 반해 깔끔하고 시원시원하게 말하고자하는 바를 전달하는 사사키의 문체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전과 영원>은 그의 사상의 전반적인 체계가 담겨있는 책이기 때문에 여느 철학책처럼 읽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어투에서 힘이 느껴지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교양서적이라기 보다는 인문학 도서에 가까운 책이었기에 읽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여기서는 책의 전반적인 인상에 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푸코와 라캉은 여러 인문학 도서에서 수도 없이 그들의 이름을 들어 왔으며, 그들의 치밀하고 독창적인 사상에 머리가 지끈거린 적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여는 것이 나에게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처음 책을 받고서 소위 ‘니체의 팬’을 자처했던 사사키가 니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딘가 섭섭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분명 푸코와 라캉, 르장드르의 탈을 쓴 니체와 사사키의 책이었다. 책을 조금씩 읽다보면 우리는 니체가 제시하는 방식에 따라 그의 글을 읽게 되는데, 이는 사실상 니체에 따라 푸코와 라캉, 르장드르 세 사람을 꿰어내는 것과 같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는 ‘읽음’, 즉 독자의 입장에서 ‘독서는 혁명’임을 어필했다면, 이 책에서는 읽기에 앞서는 작가의 입장에서 ‘씀’이라는 단계를 이야기한다. 사사키가 말하는 ‘씀’이라는 것은 아주 혁명적이고 고달픈 과정이다. 어떠한 텍스트를 읽어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글을 읽는 것에 지나지 않고, 저자의 전체를 통찰하는 위험하고 도전적인 일이다. 그에 선행하여 그 텍스트라는 것은 어떠한 정보에도 기대지 않고 계속적으로 스스로와 부딪힘을 통해 쓰여질 수 있는데, 여기저기서 긁어모아서 글을 쓰는 단순한 정보의 수집과는 명백히 다르다.

 

 

지극히 간결한 문제로 최대한 읽기 쉽게 설명을 하지만, 푸코, 라캉, 르장드르의 사상이 마냥 쉽지 않은 탓에 그의 글이 쉬이 읽히지만은 않는다. 사사키는 매번 ‘반복적인 읽기’를 매우 강조했는데 그 ‘반복적인 읽기’가 필요한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책을 중반쯤 읽다보면 그가 반복적 읽기를 유도하기 위해 이러한 글을 써내려간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너무나 다른 것 같은 세사람으로부터 출발해 셋을 관통하는 일관성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인 구조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어떠한 조건이나 기준에 나 자신을 맞춰버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한 구조 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과정 자체도 힘들뿐 더러, 벗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마련이다. 특히 사사키가 살아왔던 일본의 상황과 최근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리 동떨어진 생각은 아니다. 사사키가 푸코와 라캉, 르장드르, 그리고 니체의 사상을 통해 돌고 돌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주체를 가질 것을 제안하는 것은 아닐까. 그 힘들고 고독한 투쟁의 과정 속에서도 반드시 스스로와 마주할 것을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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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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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페이스'북

 

 

 

 

 

페이스북을 시작한 건 4년 전 이맘 쯤이었다. 당시는 SNS라는 용어 자체가 익숙하지 않던 시대였고, SNS라고 해봐야 싸이월드 미니홈피 정도였다. 친구의 추천으로 시작했던 페이스북은 조금 느린 나에게 너무 어렵기만 했다. 그때 친구들이랑 우스개소리로 페이스북이 왜 미국에서 인기를 얻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 거렸었는데, 매일 같이 뉴스피드를 채우곤 하는 그때 그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난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많은 SNS들의 발달은 우리 삶의 필수적인 매체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정보를 얻고, 소식을 들으며, 때로는 자신의 사업을 확장해나가는데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단순한 인터넷 세상이라고 치부하기에 SNS 시장은 우리들 삶,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게 된 것이다. 잊고 있던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페이스북은 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고, 이는 곧이어 사회적인 위치에서의 나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작은 프로필 사진 하나, 글 하나, 좋아요 버튼 하나까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었고, 곧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우리들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페이스북 심리학’은 페이스북 속에서 또 다른 자아를 생산해내며 집착하고, 통제력을 잃고, 사회로부터 도피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례들을 통해 우리들이 얼마나 페이스북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사회에서 도태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글에 얼마나 많은 댓글이 달리고 좋아요가 눌러지는지를 의식하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의식하곤 한다. 가장 이상적으로 편집된 모습을 사람들에게 어필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들이 얼마나 스스로가 아닌 타자에 의존을 많이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페이스북은 내 얼굴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내 얼굴을 보여주는 곳이 되어버렸다.

 

 

인간이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받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참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페이스북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참 교묘히 이용하는 매체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외로움을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채우고, 끊임없는 관심으로 어딘가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완성시키려한다. 나 또한 그랬다. 무의미하게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켰다 껐다 하며 끊임없이 사람들 속에 있음을 느끼려 했고, 글을 썼다 지우며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여질지를 의식하고 있었다. 일상에서의 결핍을 사이버 세상으로 메꾸고자 했던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현실 도피적인 세상을 갈망하는 우리들. 오늘부로 나는 다시금 페이스북에서 멀어지려한다. 조금 부족하면 어떠리. 살아가는 건 가상 속의 내가 아니라 현실 속의 나일 뿐이다. 조금 두렵더라도 그 모습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이 진정한 내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와 당신, 얼굴이 없는 나는 얼굴이 없는 당신을 마주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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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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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불안함을 인정한다.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에 사로 잡혔던 적이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밀려드는 오늘과 내일, 현재와 미래라는 거부할 수 없는 시간들. 어디선가 불어오는 그 불안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되어 이따금씩 나의 숨통을 죄어오곤 했다. 마냥 초조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그 불안 속에서 헤어나가고 싶어,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떠나고, 하루 종일 방에 틀어 박혀 잠에 들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내 주위를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잊을만 하면 불안은 내게 찾아온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때때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불안과, 나는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다만 그때와 지금 내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항상 불안 속에 살아가던 내가, 지금은 내 속 어딘가 작은 곳에 불안을 놓아두었다는 것이다. 한창 힘들었던 당시, 내가 간과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게 왜 ‘불안’이란 것이 찾아왔는지, 그리고 그 ‘불안’이란 무엇인지 하는 것이었다. 감정에 사로잡혀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나는 정작 그 근본적인 불안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조금만 쉽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불안에서 조금이라도 달아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그 불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한다.

 

 

나는 의사도 심리학자도 사회학자도 과학사가도 아니다.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불안에 대해 글을 쓴다면 나보다 훨씬 학술적 권위가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은 종합이자 르포르타주다. 역사, 문학, 철학, 종교, 대중문화, 최신 학술 연구에서 불안에 대한 탐구들을 한데 모으고, 이걸 정말로 나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의 직접 경험과 함께 엮으려 한다. (41쪽)

 

 

스토셀은 평생을 불안과 함께 살아왔다. 불안이 없는 삶은 그에게 낯선 삶이 되어버렸다. 어린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불안은 떠날 기미도 없이 오늘날 그의 곁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끝없는 막막함 속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바로 ‘불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개인의 사례에서 부터 의학적이고 전문적인 부분들까지 어느새 그는 불안의 대가가 되어 있었다. 불안에 대한 그의 두려움은 모든 분야에 걸쳐 불안에 대한 모든 것을 총망라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쩌면 이 한권의 책은 불안에 대한 에세이라기 보다는 불안에 대한 백과사전과 같다.

 

 

그는 내게 위로하지 않는다. 불안에서 헤어나갈 수 있을거라고, 너무 두려워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불안이 무엇인지, 어떻게 조금 더 불안을 이해하고 안고 나아갈 수 있는지 나지막히 알려줄 뿐이다. 사실 불안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상도, 우리가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먹는대로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은 좌절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토셀은 거꾸로, 어떻게든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유쾌하게 끌고 가야할지를 내게 알려줬다. 불안을 겪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전문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내가 겪는 불안이 마냥 막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용히 전해준다.

 

 

불안은 영원한 인간의 조건이다. (401쪽)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불안을 거절하고, 거부하고, 부정하기 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것이다. ‘불안’과 ‘우울’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은 내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고, 마음가짐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해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것을 인정하는 것, 불안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낯섦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불안함을 인정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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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항재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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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골의『외투』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 도스토예프스키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장롱 속에 깊숙이 박혀 큼큼한 냄새가 잔뜩 묻어있는 외투를 꺼내입어본다. 코끝이 시려오는 계절이면 길에는 외투로 온몸을 포근히 감싸고 서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외투를 입는다는 것은 춥고 시린 계절이 다가온다는 의미이며,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우리들의 모습 그 자체다. 이처럼 고골은 ‘외투’가 가진 상징성으로 하여금 당시에 처한 러시아의 모습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했다. 고골의『외투』는 ‘외투’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들을 작품 속 주인공 아까끼와 그의 외투를 통해 나타낸다.『외투』의 작가 고골은 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라 불릴만큼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단순한 소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 있는 작품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작품 속 사건은 주인공의 ‘새로운 외투’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에비치는 그의 인생에서 단 한번도 주인공의 자리에 서 본적이 없는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다. 관청의 말단 직원인 아까끼는 간단한 서류를 베껴 적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줄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묵묵히 몰두하는 모습은 우스움을 넘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느 날 아까끼는 자신의 외투가 너무 낡고 헤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선을 맡기려한다. 그러나 외투는 너무 낡고 낡아 더 이상 손 볼 수 없는 상태였고, 수선공은 그에게 새로운 외투를 살 것을 제안한다. 외투를 사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까끼는 외투를 위해 저녁마다 마시던 차를 끊고, 촛불도 켜지 않고, 심지어 저녁을 굶는 것에도 익숙해지기 이른다. 그러나 비록 삶은 이전보다 궁핍해졌지만 새로 생길 외투를 생각하는 아까끼는 이전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마침내 외투를 처음 입은 날, 아까끼는 이전과는 다른 동료들의 반응을 얻기도 하고, 파티에 초대되기도 한다. 그러나 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레 강도에게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 이리저리 외투를 찾아보려 발버둥 치던 아까끼는 끝끝내 외투를 찾지 못한 아까끼는 죽음을 맞이하고 유령으로 다시 나타난다.

작품 속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주인공 아까끼가 낡은 외투를 수선하다 못해 새로운 외투를 구입하게 되지만 결국 다시 강도에게 강탈당한다. 끝내 외투를 찾지 못한 아까끼는 죽음을 맞이하고 유령이 되어 이 곳 저 곳을 떠돌아 다닌다.

 

 

2. 희극적인 요소

 

작품『외투』속에는 작가 고골의 창조력과 문학적 상상력이 살아 숨쉰다. 곳곳에는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 즉 희극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며, 그 웃음에 담겨진 의미와 그 웃음 밑바탕에 깔린 작가의 의도는 다양하다.

주인공의 이름 ‘아까끼 아까끼에비치’가 지어진 과정을 보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산모는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고민하다 결국 맘에 드는 것이 없자, 그냥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까끼’라는 이름을 지어버린다. 사람의 이름이란 그 사람을 대표하는 만큼 매우 중요하게 여거진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서로 좋은 이름을 짓고자 여기 저기 도움을 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아까끼 아까끼에비치’는 예외였다. 그의 이름에 특별한 이유따윈 없었다. 더한 것은 ‘아까끼’라는 이름이 러시아어에서 ‘응가’를 뜻하는 단어와 어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안타까운 웃음을 유발한다.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 없고 키가 작은 그 관리는 약간 얽은 자국이 있는 불그스름한 얼굴에 눈에 띄게 안 좋았으며, 이마가 조금 벗겨지고, 양 볼에 주름이 진데다 치질 환자 같은 얼굴빛을 하고 있다.

 

책 속에서 묘사하는 주인공 아까끼의 모습은 매우 우스꽝스럽다. 아까끼의 동료 중 어떤이는 그가 마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머리가 벗겨지고 관리 제복을 입은 채 태어나기라도 한 것 같다고 조롱하기도 한다. 아까끼의 모습은 멀쩡한 부분이라는 눈뜨고 찾을 수 없을 만큼 여기 저기 엉성한 부분 투성이다. 이처럼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는 아까끼에 대한 묘사는 단순한 그려내기가 아닌 작가에 의해 의도된 과장과 뒤틀림이다. 아까끼가 대표하는 당시 소시민들의 애환과 뒤틀린 사회의 부패한 모습이 부조화스러운 아까끼의 얼굴에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제복은 녹색이 아니라 불그스레한 밀가루 색이었다. 제복의 깃이 좁고 낮아서 그 깃 사이로 비어져 나온 목은 사실 길지 않은데도 유별나게 길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러시아에 있는 외국인들이 너무나도 안고 다녀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석고 고양이 같았다. 제복에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묻히고 다녔다. 지푸라기나 어떤 실밥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아까끼는 매일같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다닌다. 그가 늘상 입고 다니는 외투는 천이 닳고 닳아 속이 훤히 비칠 정도여서 추운 뻬쩨르부르그의 날씨를 견디기에 무리였다. 그의 외투는 항상 동료들의 놀림감이었고, 그나마 하나 있던 그 외투마저도 구멍이 뚫리고 안감이 헤져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러한 복장에 대한 희화화는 작품의 중심이 되는 사건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제복으로 대표되는 당시 관료사회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없을 때에는 취미 삼아서 자기가 보관해둘 문서의 사본을 만들곤 했다. 문체가 아름답다거나 하는 것보다, 어떤 새로운 인물이나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가는 서류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경우 그는 반드시 복사해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마음이 흐뭇해지도록 정서를 하고 나면 그는 내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또 무슨 일거리를 주시려니 생각하고, 미리부터 내일 일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그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연봉 4백 루블의 초라한 자기 운명에 만족할 줄 아는 인간은 이렇게 평화로운 생활을 보냈다.


이름, 외모, 복장 뿐만 아니라, 그의 행동 또한 우리의 웃음을 자아낸다. 아까끼는 관청에서 문서를 정서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 그는 항상 기계적으로 문서를 베껴낸다. 길 한복판에서도 가지런한 필체로 쓰여진 글씨들에게만 정신을 팔고, 집에 돌아와서 음식을 기계적으로 먹어 치우며, 취미로 보관해둘 만한 서류를 정서한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아까끼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기 보다 로봇의 모습과 같다. 심지어 양심적인 국장이 새로이 주는 업무도 거절하며 그는 다시금 정서를 하는 자리로 돌아온다. 이러한 기계적인 반복은 아까끼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계로 느껴지는, 인간의 존업성이 말살된 사회의 상황에 대한 비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아까끼의 모습은 일에 치여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 모습과 닮았다.

 

 

3. 외투의 의미

 

주인공 아까끼의 삶은 아주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는 아주 낡고 헤진 누더기에 그치지 않는 외투를 입고서는 매일같이 정서하는 일에 몰두한다. 젊은 관리들이 그가 하숙집 할머니에게 얻어맞고 지낸다느니, 결혼식은 언제 올릴 계획이냐느니 하고 짓궂게 물을 때에도 그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 길을 걸을 때에도 마찬가지 였다. 그는 날마다 길거리에서 벌어지곤 하는 일,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에게 정서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사는 없었다. 이러한 아까끼의 모습은 주체적인 삶을 잃어버린 채, 기계적으로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겉모습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복장에 따라서 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패션은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까끼의 외투는 아주 비참하다. 이 추운 뻬쩨르부르크에서 구멍난 외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헤지고 닳아빠진 외투는 아까끼의 삶을 그대로 대변한다. 아까끼의 삶은 그의 외투처럼 정체성도 없고 개성도 없는 아주 비참함 그 자체였다.

 

아까끼 아까끼에비치는 저녁마다 마시던 홍차도 없애버리고, 밤에는 촛불도 켜지 않기로 했다. 부득이하게 뭔가 일을 해야 할 경우에는 하숙집 주인 노파의 방에 가서 거기 있는 촛불 빛 아래서 일을 하기로 했다. 한길을 걸을 때도 돌로 포장한 길에서 구두바닥이 빨리 닳을까봐 되도록 조심스럽게, 뒤꿈치를 드는 자세로 살금살금 걷기로 했다.

 

어느날 아까끼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새로운 외투의 구입’이다. 아까끼는 더 이상 수선할 수 없도록 낡고 또 낡아버린 외투를 자꾸만 수선해 입으려 한다. 수선공에게 아무리 애절한 부탁을 해도 아까끼에게 돌아오는 말은 새로운 외투를 맞추는 말 뿐이었다. 결국 아까끼는 더 이상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외투를 맞출 것을 결심하게 된다.

 

한 달에 한 번씩이긴 했지만, 달이 바뀔 때마다 그는 뻬뜨로비치를 찾아가 어디에서 옷감을 살 것인지, 나사의 색깔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 감을 얼마나 끊으면 될 것인지 등 외투와 관련된 것을 상의했다. 아직도 약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머지 않아 곧 옷감을 사다가 진짜로 외투를 지어 입게 될 날이 올 것을 생각하면 그는 언제나 흐뭇한 마음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예상과 달리, 새로운 외투를 마련하기로 결심한 아까끼는 평소보다 더 활기찬 모습으로 변해간다. 더 이상 그는 마셔오던 차도 마실 수 없었고, 밤에 키는 촛불조차 아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은 이전 보다 더욱 인간적여졌다. 처음으로 그에게 정서 이외에 목표가 생긴 것이다. 정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삶은 어디서 옷감을 살지, 어떤 색으로 할지, 얼마나 할지 등 외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에게 외투는 인생의 반려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까끼는 외투를 사기로 결심한 이후, 처음으로 정서를 하다가 글자를 틀리는 실수를 범한다. 이러한 모습은 아까끼가 점차 기계적인 삶에서 조금씩 멀어져 인간적인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외투를 손에 쥔 날을 ‘생애 최고의 날’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까끼는 행복해한다. 외투를 가진 후로 부터 아까끼는 조금씩 달라진다. 이전에는 아까끼를 두고 조롱하던 동료들도 오히려 새로운 외투가 생긴 아까끼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파티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 이전까지 전혀 정체성이란 없어 보였던 아까끼가 처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더 많아져서 그 가운데에는 화려하게 차린 귀부인들과 수달피 깃을 단 남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삥 둘러 도금한 못을 박은, 격자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초라한 영업용 마차들은 점차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 대신 새빨간 빌로드 모자를 쓴 멋진 옷차림의 마부들이 곰의 털가죽 무릎 덮개를 깐 고급 마차를 모는 모습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띄었다. 화려하게 장식한 자가용 마차들이 눈 위를 요란스럽게 달려갔다.

 

이전의 아까끼는 길을 걸을 때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거리를 지나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외투를 얻게 된 후, 마치 새로운 삶이 생겨난 사람처럼 변화한다. 조금씩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기도 하고, 마차와 마부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기도 한다.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던 아까끼. 그는 외투를 가지게 되면서 조금씩 자신의 삶을 찾아가게 되고, 보통 사람들의 삶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새로운 삶에 만족해하던 아까끼에게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외투의 상실’이다. 외투를 받은 첫 날, 아까끼는 지나가던 강도에게 그의 소중한 외투를 강탈당한다. 외투는 아까끼에게 있어 삶 전부였으며, 아까끼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수단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추운 러시아에서 ‘외투’는 단순한 의복의 의미를 넘어 자신을 보호해주는 안식처와 같은 것이었다. 소중한 외투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까끼에게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과 같다. 그는 외투를 찾기 위해 고위 관리들에게 찾아가 호소하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차디찬 내침일 뿐이었다. 결국 삶의 의미를 상실한 그는 식음도 전폐하며 외투를 그리워하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주인공 아까끼에게 있어 외투는 그냥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유행따라 입고 싶어진 욕망의 발현이 아니라, 없으면 뻬쩨르부르크의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바로 생명을 잃게 되는 아주 필요한 것이다. ‘외투’란 아카키 자신을 지켜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결국 그 자신을 의미한다. 외투가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결국 인간 실존에 대한 공포로 비춰질 수 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고서도 유령이 되어 외투를 되찾으려하는 모습은 마지막까지 삶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는 아까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 외투

 

고골의『외투』는극적 반전을 통해 신랄한 현실 비판을 하는 사실주의 기법과 풍자적 기법이 돋보인다. 직접적인 비판이 아닌 풍자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오히려 더욱 극적으로 당시 사회 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또한 작품 후반부의 덧붙인 아까끼가 유령이 되어 돌아오는 모습은 환상적인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날카로운 풍자 뒤에 한 가닥의 눈물을 곁들인 웃음에 이르게 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고골은『외투』를 통해 정체성을 잃은 채 획일화 되어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을 보여주고자 했다. 과거 말단관리로 일을 했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이처럼 고골은『외투』를 통해 우리 사회를 비판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씁쓸한 미소를 짓게끔 만들었다.

『외투』속 이야기는 작품 속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신분계층이 확연하게 있는 시대와 오늘날의 현실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사실 면밀히 따져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오늘날 신분과 계급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평등하다 말할 수는 없다. 제도적인 계급의 구분만이 없을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과거를 살았던 아까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소시민의 모습에 그친다. 우리 또한 아까끼 처럼 정체성을 잃은 채 기계적인 일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일인지, 무엇을 위해 하는지, 각자의 개성은 말살한 채 주어진 일 속에서만 만족하며, 그 속에서만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게도 아까끼에게 있어서의 외투와 행복이 있을지 의문이다. 아까끼는 밤마다 뻬쩨르부르크의 유령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는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강탈이라 할 수 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당신의 외투는 무엇인지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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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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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中에서

 

 

 

니체는 말했다. 우리는 영원한 회귀를 통해 우리가 겪었던, 우리가 겪은, 우리가 앞으로 겪을 일들이 어느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될 것이라고. 다시 말하자면,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존재에 대한 아주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이러한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리는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렇게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밀란쿤데라의 작품「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작된다. 소설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그의 표현에 의하면 같이 잠을 자는 사랑)을 구분하는 주인공 토마시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토마시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연인 테레자는 고향을 떠나 그의 집에 머문다. 진지한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는 토마시는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질투와 미움이 뒤섞인 두 사람의 삶은 점차 그 무게를 더해간다. 한편 토마시의 연인 사비나는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다니는 조국과 역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며, 안정된 일상을 누리던 프란츠는 그런 사비나의 ‘가벼움’에 매료된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역사의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네 남녀의 사랑은, 오늘날 ‘참을 수 없는’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는 우리들의 자화상과 다름없다. 존재의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으로부터 오는 두려움. 그리고 서로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시작하는 사랑. 조금은 어렵지만 날카로운 시선과 작가의 섬세한 표현력이 만나 한 편의 따뜻한 철학서와 같은 소설이었다. 세상에 대한 작가의 관찰이 이리도 돋보이는 작품이 있을까. 정체성을 찾기 위해 흔들리는 가치관 그들의 갈등과 소통의 부재. 누군가는 가벼움에 매혹되고, 누군가는 가벼움에 희생되며 모두들 참을 수 없는 그들만의 가벼움에 허덕이고 만다.

 

사랑과 성,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없이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우리는 인생이란 뗄 수 없는 무거운 짐을 계속해서 짊어 나가야하는 존재라고.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러나 과연 그런 무거움만이 진정으로 끔찍하고 반대로 가벼움은 아름다운 것일까? 인간 존재는 너무나 가볍다. 정말로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서 이 존재 자체를 견뎌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버거운 일이다. 그들이 참아내지 못한 그 가벼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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