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든 남성이든, 중세 유럽에서 글을 읽고 쓰는 일은 오로지 종교적인문헌에 관련해서만 사용되었다. 

중세 여성들이 책을 접할 방법은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시에 귀족 가문에서 딸을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수녀원에 보내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중세에 많은 여성 저술가들이 수녀원장을 맡긴 했지만, 힐데가르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유럽 최초로 대중을 직접 가르치고 설교한 수녀였다. 그녀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가 합쳐진 총체적 존재로 파악했다. 때문에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삶의 여러 측면을 파악할 수 있는 권위자로 비쳤다. 힐데가르트는 독일 전역을 돌며 평생 대중 곁에서 다가가고자했다. 

 책은 희귀하고 손에 넣기 어려운 물건이었으므로, 책 읽기란 여전히 귀족의 특권에 가까웠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1454년에 인쇄기가 발명되며 상황이 바뀌었다. 물론 활자로 인쇄하는 기술은 중국에서 문화가 발전했던송宋 왕조(960~1279년) 때 이미 발명되었다. 또한 고려 시대의 문인 이규보(1168~1241년)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보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성경을 인쇄하기 200년 전인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이라는 책이 뽕나무 종이 (상백지)에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독자적인 발명품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기록물 출판이 점차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이론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도 책을 소유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성경과 몇몇 교훈집, 시집을 제외한 책 대부분은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평민 남성들도 손에넣기 힘들었다. 그 당시 그려진 그림들은 신앙과 기도라는 맥락 안에서 책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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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와 진보 세력은 여성의 교육 기회 확대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맞섰다.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이끈 이들은 지적으로 뛰어난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지닌 지성의 능력을 확신하며 여성에게 불리한 환경에 반발하고 용감하고 당당하게, 결연히 떨쳐 일어났다. 이들 여성은 평판이 나빠졌고, 사회에서 소외 당하거나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으나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기존 질서는 여성의 지적 해방과 기록된 글의 잠재적 전복 효과를 두려워했다. 

세계 문학에서 최초로 이름을 알린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에 놀랄 이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엔헤두안나 Eulheduanna(기원전 2285~2250년) 공주 이전에도 글자를 적었던 서기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엔헤두안나는 처음으로 설형 문자판에 자기 이름을 적었으므로, 4300년 전에 생존했던 최초의 작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녀는 수메르 세게를 통일했던 아카드 제국의 정복왕 사르곤의 딸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귀족 혈통의 여인들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춤과 음악, 노래를 비롯한 예술 교육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시는 특히 중요했고,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여사제, 선지자, 시인으로 종교 제의에 활발히 참여했다. 

절세미인이었으며 기이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진 히파티아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885년에 영국의 라파엘 전파 화가 찰스윌리엄 미첼 charles, William Mitchel(1854~1903년)은 극적인 자세를 취한 히파티아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히파티아는 벌거벗고 제단 앞에 서 있다.
(제단은 히파티아가 사원에서 살해되었음을 의미한다). 길게 흘러내리는 금발은그녀의 몸을 감싸며, 그녀의 시선은 지식과 과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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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삶을 노예로 만들려는 모든 힘에 대항해서 싸우는 생각의실처이다. 

 중요한 건 탈레스가 비실용적일지라도 호기심 때문에 탐구를 계속해가는 특징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철학자는 개념을 만들어서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따라서 철학자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풀려는 문제가 무엇이었는지아는 일입니다.

탈레스는 보통명사로 생각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오

탈레스는 바로 이 따져 묻는 짓‘, 현대어로 ‘비판‘을여러 차원에서 가능하게 했습니다. 신이 아니라 보통명사로 세계를 설명하려 했고, 어떤 권위를 고집하지도 않았죠. 신을 버린 겁니다. 

탈레스가 살았던 시대는 민주주의와 관계되고,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사회이고, 그 사회 속에서 경쟁의 일환으로 철학 활동도발명되었습니다. 예술도 마찬가지죠. 희랍 예술이 최고에 이른 것도 그런 배경 속에서 납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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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령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언어로는 세상을 기술하기 어렵다‘, ‘언어는 불완전하기 그지없다‘ 등의 주장을 인문학은 언어를 통해 펼친다. 이렇듯 언어를 불평하는 행위마저언어로 실천하는 활동이 인문학이다. 

일단 원문으로 된 글을 읽을 때 잘 이해가 안 됐고, 반복해서 계속 읽다 보니 자기 식으로 이해하든지 그냥 용어만 외우든지 해서 아무튼 결과적으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남에게 설면하기는 여전히 요령부득이다. 이 상태로 글을 쓰면 글쓴이 본인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글이 완성된다. 더 중요한 건, 다른 전문가들의 역할이다. 대다수가 잘 모르겠으니, 서로 지적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나아가 그런 글이 유통되는 것에 침묵하거나 동참한다. 비평 담론의 부재, 논쟁의 부재는 산 증거다. 인문 병신체는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되, 감히 알려고 하라.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윤리다.

나는 교양을 위해 역사와 과학을 공부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인간과 자연을 더 많이 알게 해주니까. 철학이라는 말을 둘러싼 에피소드, 인물, 전문용어 등을 아는 건 도움이 될까? 나는 시간낭비라고 본다. 그걸 외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 중요한 건 ‘문제‘다. 어떤 문제를풀려고 하는가? 이게 철학함의 출발이다. 

철학한다는 건 더 용감하고 솔직하고 겸손하다는 뜻이다. 또한 더짓궂고 장난스럽고 무례하다는 뜻이다. 나아가 모든 권위를 비판하고손수 평가한다는 뜻이다. 철학자는 누구보다 깐깐하고 쪼잔하고 가혹하다. 철학은 관대하게 덕담 따윌 들려주지 않는다. 철학은 주례사도아니다. 철학은 단정한다. 철학은 생각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철학‘ 따윈 되도록 공부하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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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의 일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신간 소개글에 '체공녀 강주룡'의 작가 박서련이라는 것을 읽고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책을 구입했다.

체공녀 강주룡. 숨가쁘게 읽어내린 작품이다. 음성지원이라도 되는 듯 리얼한 서사는 실로 압권이었다. 강주룡의 이야기를 여러군데에 인용해서 쓸만큼 깊게 각인된 작품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기대가 너무 컸던걸까. 마르타의 일을 읽으며 몇번인가 작가를 확인했다. 서로 다른 결의 서사이고 주제의식이라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하면서도 그 단단한 결기는 다 어디로 간거지? 싶은 아쉬움이 내내 남았다.

 

페이스북에 그런 서비스가 있다. 내가 죽으면 내 계정을 닫아줄 사람을 지정하는..그 서비스를 처음 알았을 때 생각이 많아졌었다. 과연 누구에게 내 삶의 흔적을 닫아달라고 해야할지 바로 떠올라주지 않았다. 쉽게 '가족'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많았고 (농담처럼 가족끼리는 친구 맺는거 아니다~라고 자주 말한다) 스쳐가는 인연일 수도 있는 온라인의 관계들은 미덥지 않았다. 단 한명의 친구. 그 친구밖에는 없겠다 싶었지만 선뜻 등록하지 않았다. 친구의 의견도 들어봐야할것 같아서...

살아가는 동안 남기게 되는 나의 흔적들은 죽어서 서서히 휘발되어버리겠지만 어느 공간에든 기록되어 있는 흔적은 시간이 지나도 동굴 속 벽화처럼 먼지를 덮어쓰고 남아있을게다.

 

연년생의 자매. 동생의 죽음을 파고드는 언니의 이야기.

그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단함, 사람들의 평가와 비교, 가족들의 관계, 환락을 좇는 소위 지도층과 그의 자제. 사랑. 이 모든 이야기들이 떠돈다.

잘 응축되었다고 표현할 수 없어서 정말 아쉽지만 나는 읽는 내내 이야기들이 떠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배치하고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작가의 욕심이었을까.

개연성을 놓친 건 아닐까? 의심되는 지점도 있었다.

매니저 언니의 작중 포지션 같은...

 

어쨌든 문제제기는 탁월했다.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였고, 가시화 된 사건들도 있었던 것 같고..그것을 하나의 틀로 묶어낸 데에는 작가의 힘이 작동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누구나 생각했을 법한 문제는 양날의 검처럼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격한 공감을 끌어내거나 빤한 이야기에 김이 새거나.

김이 새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치달아가며 뭔가 힘이 빠지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작가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완성도로 따지자면 전작만 못했다고 매정하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시대를 타고넘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몇번의 만족스럽지 못함을 겪는다해도 기어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까닭이다.

 

어제 읽은 '단순한 진심'의 잔상이 남은 탓에 나도 모르게 비교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밑줄을 여러개 그었다. 작가의 개성과 목소리가 드러나는 곳이라고 생각해서..예리한 눈매가 겹치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서..

 

아쉬워서..어쩌면 부당한 내 기대를 탓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적어야 할 것 같았다.

조금 빼고, 조금 더 밀도있게..였으면

색이 고와서 한 입 베어 문 아주 조금 덜 익은 감을 먹은 것 같다.

달고 폭신한데 살짝 떫어서 잠깐 찡그리게 되는...그래도 색이 고와서 다행이다.

잘 익어가고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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