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버리고 가라 - 김재진



 

설령 당신이

백송이 수선화를 선물 받는다 해도

그 누구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가질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

이룰 수 있는 많은 것들 쌓여 있다 해도

어느 것도 당신이 포기하지 못해 괴롭다면

무슨 소용인가.

 

뜻대로 되는 것과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사랑해야 할 것들과

사랑해선 안 될 것들 사이에 끼어

당신의 마음이 한치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어질때

채울 수 없을 뿐 당신의 삶은 텅 비어 있다.

 

설령 당신의 하루가

당신을 필요로 하기보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에 의해 가득 찬다 해도

누구에게도 당신이 따뜻한 마음 낼 수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인가.

 

어느 날

당신이 가까운 이로부터 상처 나거나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워질 때

모든 것 다 버리고 가라

 

전쟁같이 하루가 힘겹고 외로울 때

다 버리고 한 번쯤 자신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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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무릇 - 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는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 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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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호


 

언제부터인가 나는

마음속에 자를 하나 넣고 다녔습니다

돌을 만나면 돌을 재고

나무를 만나면 나무를 재고

사람을 만나면 사람을 재었습니다

물 위에 비치는 구름을 보며

하늘의 높이까지 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가 지닌 자가

제일 정확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재가 잰 것이 넘거나 처지는 것을 보면

마음에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확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가끔 나를 재는 사람을 볼 때마다

무관심한 체하려고 애썼습니다

간혹 귀에 거슬리는 얘기를 듣게 되면

틀림없이 눈금이 잘못 된

자일 거라고 내뱉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번도

내 자로 나를 잰 적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아직도 녹슨 자를 하나 갖고 있지만

아무것도 재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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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롱나무의 안쪽 - 안현미

 

마음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찾아갔던가, 개심사,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앞에 가져와보라고 배롱 나무는 일갈했던가, 개심사,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 지를 달여 삶 쪽으로 기운을 뻗쳤던가, 개심사, 하여 삶은 차도를 보였던가, 바야흐로  만화방창 (萬化方暢)을 지나 천우사화(天雨四花)로 열리고 싶은 마음이여, 개심사, 얼어붙은 강을, 마음을 기어이 부여잡고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삭의 


* 만화방창 (萬化方暢) : 따뜻한 봄날에 만물이 나서 자란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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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생 칼린 지브란

 

절반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

절반만 친구인 사람을 접대하지 말라

절반만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지 말라

절반의 인생을 살지 말고, 절반의 죽음을 죽지 말라


침묵을 선택했다면 온전히 침묵하고

말을 할 때는 온전히 말하라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침묵하지 말고

침묵하면서 말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면 솔직하게 표현하라

감추지 말라

그리고 거절한다면 분명히 하라

불분명한 거절은 나약한 받아들임일 뿐이므로


절반의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말고

절반의 진실을 믿지 말라

절반의 꿈을 꾸지 말고

절반의 희망에 환상을 갖지 말라

절반의 물은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고

절반의 식사는 배고픔을 채우지 못한다

절반만 간 길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며

절반의 구상은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


그대의 다른 절반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그대

그대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절반의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

그대가 하지 않은 말이고

그대가 뒤로 미룬 웃음이며

그대가 하지 않은 사랑이고

그대가 알지 못한 우정이다

도달했지만 도착하지 않은 것이고

일했지만 일하지 않은 것이고

참석했지만 결국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대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고

그들을 그대에게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절반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지만

그대는 할 수 있다

그대는 절반의 존재가 아니므로

그대는 절반의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하는

온전한 존재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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