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미워해도 될까요?
다부사 에이코 지음, 윤지영 옮김 / 이마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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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엄마를 미워해도 될까요?"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지만 선뜻 펼치기 힘들었다. 책 속에서 내 엄마의 모습과 내 딸 엄마의 모습을 발견한다.

 

  1) 피아노는 싫어요!

 

 

  왜, 왜, 왜 피아노 따위를 너도나도 했을까. 엄마는 형편도 어려운데 나를 피아노학원에 보냈다. 난 피아노가 너무 싫었다. 늘지 않았다. 돈 좋아하는 원장은 석달만에 포커페이스 유지를 포기하며 말했다. "넌 이청멍이야. 이, 청, 멍!" 미친 건가? 하하하하.

  이 경험이 준 결과는 의외로 치명적이다. 떠밀려서 갔던 잘난 대학에서 피아노 연주 기술이 필수였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학교를 때려친 이유 중 '피아노가 싫다'라는 항목도 있다. ㅠ_ ㅜ 우허

 

 

 

  2) 똑바로 못하니?

 

 

 

  5살(만 3세)에 불과한 내 딸을 울 엄마가 붙들고 있는 걸 보다 짜증을 내곤 한다. 숫자잇기를 하면 못 기다려 다음 숫자를 가르쳐주고, 종이오리기를 직접 해주고 어떻게 만드는지 보라고 한다. 삐뚤빼뚤하면 눈에 안 차고, 느리면 기다리기 힘든 모양이다.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고, 못할까봐 두려워지게 하는 교육법이다. 내가 소심했던 이유였겠지.

 

 

 

  3) 나는 못난 사람

 

 

  85쪽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나도 그랬다. 거울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서도. 에이코가 자신이 일그러진 곱등이일거라 믿었듯 나도.

 

 

 

  4) "죽고 싶다"는 집요한 목소리

 

 

 

  난 거울조차 못 보고, 원하는 게 뭔지 알지도 말하지도 못 하고 그저 나이 먹었다. 성경책 텍스트 위에 붉은 색으로 휘갈긴 저주의 말들. 죽고 싶다, 죽고 싶다는 요란한 목소리. 메마르고 너덜너덜한 마음은 다시 밖으로 뻗쳐나가 다른 이들을 괴롭히곤 했다.

 

 

 

  5) 그리고 엄마가 되어 나는 딸을 괴롭힌다.

 

  돌고 돈다. 가끔이지만 나도 내 딸래미에게 소리를 꽥 지르고 엉덩이를 주먹으로 질러 버릴 때가 있다. "울지마!!!" "시끄러!!!!" "조용히 좀 핵!!"

  그러곤 가라앉으면, 꼭 안아준다. 상황만 보면 공포영화다.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라고는 하지만 내 딸도 에이코의 상황처럼 받아들이고 있진 않을까?

 

 

 

 

  "엄마를 미워해도 될까요?"

 

  다부사 에이코의 대답은 'YES'다. 그도 엄마를 미워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 타일렀고, 죄의식을 느꼈다. 남들이 뭐라할까 두려웠다.

  그러나 엄마는 에이코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뜻대로 만들려 했다. 에이코의 삶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는지 일장연설을 늘어놨다. 에이코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고, 서로 엉켜붙어 계단을 굴렀다.

  에이코는 자존감을 잃었고, 자신을 못난이라 믿었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에이코는 엄마를 미워해야 했다. 딸을 피 말리는 엄마를 평생 막아서지 않고, 에이코와 대화 한 번 않은 채, 되려 에이코가 나쁘다고 거드는 아빠도ㅡ 미워한다. 아빠도 아무 것 않으며 많은 악영향을 줬다.

 

 

  에이코는 엄마 그리고 아빠가 너무 싫어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진이 빠져 쓰러지고, 아이를 유산한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지 않기로 한다. 의사를 찾아가 상담 받고, 처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 화를 들여다 보며 조금씩 바꾸면서ㅡ 산다. 드디어 자신을 존중하며.

 

 

  부모된 자에게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자기 욕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었다면, 치유법이 뭘까, 무엇이 옳을까 스스로 찾을 기회가 온다. 스스로 돌아보지 못하고 자기를 돌보지 못한 부분은 스스로의 잘못이다.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정신 없어도, 정말 중요한 일을 하기위해 짬을 낼 수 있다. 

 

  에이코도 안다. 그러나 엄마를 바꿀 수는 없다. 에이코 자신을 구제하는 것조차 벅차다. 그래서 엄마는 포기한다. 미워하기로 한다.

 

  효녀인 척 하지 말고, 예수인 척도 의사인 척도 하지말고. 도저히 안 되겠다면. 포기하고 미워해 버리자.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자.

 

  '나'라도 구렁텅이에서 빼내야, 내 자식이 내게서 그 미운 얼굴을 보지 않을 거다.

 

  유교주의 오지라퍼들은 저리 꺼지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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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알라딘 특별판, 양장)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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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을 잘 읽잖아 들어보지 못한 제목이다. 리커버판을 5000부나! 찍었다니, 뭔가.

리커버 중 귀에 익은 다른 어떤 책보다 더 많은 양이다. 2000부 찍으나 5000부 찍으나 종이값이 거기서 거기라 부리는 출판사의 만용인가. 소설은 당첨운이라 기회비용을 뼈저리게 안겨주는 경우가 많아 일단 빌렸다.

 



  아, 520쪽. 느려터지게 문자들을 탐색하고 자빠진 눈깔로 언제 다.

  불경스럽지만, 자로 두께도 재봤다. 3Cm. 당장 이 무겁고 두꺼운 책을 반납하고 싶었다.

 

 

 

 

  집 책상 위에서 엎어치기 메치기로 며칠을 뒹굴리다 그냥 도서관에 들고 갔다.

  아, 씨발, 월요일 휴관. 그냥 열람실에 엉댕이를 부리고 읽는다.

  "이 맷집이 성경 동생 같은 놈을 읽어내면 독서감각은 좀더 늘 거 아니냐!"면서.

 

 

 

  세령호와 세령마을 지도가 있다는 걸 다 읽고야 알았다.

  왜 못 봤지. 텍스트만으로 저 곳을 그려내느라 혼자 낑낑댔다.

 

  어쨌든 완독. 그러나 몸이 다 힘들 지경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에서

  "해피 버스데이"로 끝나기까지 머리속은 온통 어두운 밤이다.

 

  이 봄의 선선한 바람과는 매질 자체가 다른 공간에 선 느낌.

  세령호와 세령마을 일대를 아침밤으로 메우는 안개를 눈삽으로 푹 떠내면 잠시 파인 그대로 있다가 안개가 느리게 구멍을 덮으며 미끄러질 것만 같다.

  세령호 안개에 어둠이 더해지면, 어둠은 그냥 빛이 물러가는 현상이 아니라 물리적인 매질 하나가 공기 중에 덧대어지는 듯하다.

 

  끈끈하고 퍽퍽하고 무겁고 답답해서 읽다 덮고 엎어쳤다,

  끝까지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또 읽다 덮으며 메치기를 여러 번.

 

  결국 다 보고 책을 덮으며 복잡한 눈물이 쪼로로 흐른다.

 

 

 

 

  다행히 주요 등장인물은 단촐하다.

  왕년의 야구인재 현수, 생활력 강한 아내 은주, 그들의 아들 서원, 서원의 룸메이트 소설가 승환, 나르시스트 치과의사 영제, 영제의 감옥에 갇힌 하영, 그들의 예쁜 딸 세령.

  누가 누군지 기억 못하는 혼란은 없다.

 

 

  아내와 딸을 자기 물건 쯤으로 여기고 그들이 사람노릇이라도 할라 치면 거침없이 벌 주고 '교정'하는 영제가 대단히 나쁜 놈이긴 하지만, 이 엄청한 사건을 만들고 여러 사람의 미래를 수장시킨 현수에 대한 동정심 또한 들지 않는다.

 

  우물에 빠진 제 아버지의 머리 위에서 죽어버리라고 발악을 했던 현수, 젖통이 큰 술집 작부였던 어머니 지니에 대한 경멸의 힘을 빌어 악착스레 살아낸 은주.

  서로의 트라우마를 알아주지도 감싸주지도 못한 채, 한 곳에 있을 뿐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형식으로 '살아내는' 일상의 사람들.

 

  왜 하필 현수는 술을 처마시고 시속 120Km로 빗길을 달렸는가.

  왜 영제에게 두들겨 맞고 앞니가 빈 채 도망가던 세령을 차로 튕겨내고 제 왼손으로 그 아이의 숨을 끊었나.

  영제의 복수에서 서원을 살리겠다고 댐을 개방하여 아랫마을에 잠든 사람들의 고유한 역사까지도 끝장을 내고.

 

  영제라는 또라이가 제 세계를 제가 설계한대로 지켜야겠다고 발광을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지만, 덩치만 산만 해서 유약한 진상 짓거리를 해대는 현수를 보며 더 속이 터졌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영제보다 현수들과 더 현실에서 가까우므로.

 

  현수가 죽어서 만회가 될 것도 없다. 승환이 집요한 취재로 써내려간 세령호 사건의 전말에 대한 소설 한 권. 서원을 쫓아다닐 무서운 트라우마의 그림자를 막았다는 것. 영제라는 감옥에서 하영이 벗어나게 됐다는 것이 그나마의 소득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두 '새끼'들이 저지른 사건의 소용돌이 안에 빨려들어가버린 그 모든 미래들은 회복되지 않겠지. 우헤헤

 

 

 

 

  요 몇 달 간 뉴스를 보며 가슴에 걸렸던 고구마 고구마 고구마 위에 또 굵직한 고구마 하나를 때려넣는 것 같아서 자꾸 잠들고만 싶었다.

  하잘 것 없은 보통의 일상을 덮치는 눅눅한 안개의 밤이 눈꺼풀을 누른다.

 

  '왜 그러는 거야.... 왜.... 왜 그렇게 약하고도 악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을 수 없는 건. 정유정의 언어 때문이었다.

  '슬펐다, 당황했다, 원망스러웠다, 분노했다' 따위의 단문으로 밖에 내뱉지 못하는 우리의 언어를 한참 뛰어넘는, 치밀한 관찰과 묘사 능력.

 

  문자 기호로써 현수와 서원과 은주, 영제, 하영, 세령, 승환이 있는 안개의 밤으로, 차갑고 까만 물속으로 훅 끌어가 읽는이를 지치게 만드는 엄, 청, 난 재주.

(아, 세령과 서원의 친구 냥이 어니도 거기에 있다.)

 

  읽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이 작품이 영화가 되면, 사방으로 뻗친 날캄한 잔가지와 풍성하고 싱싱한 잎을 모두 쳐내고 덩그러니 몸통만 남은 목재로서의 나무만 남는 꼴일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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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알고 있다 - 물속에 사는 우리 사촌들의 사생활
조너선 밸컴 지음, 양병찬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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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1) 노골적인 관음증



  우린 신혼여행 중에 자메이카 해변에 갔어요. 산호 군락을 따라서 스노클링 하려구요. 전 잠수 못해요. 신랑이 가르쳐주려고 애써도 안 되더군요. 우리 말고도 여러 팀이 산호 주위를 탐색하고 있는데, 오직 저만 수면에 떡 걸쳐 있는 거예요. 신랑이 답답해서 제 수영복 반쪽을 벗겨다가(아래....거?) 4m 50cm 아래 산호가지에 걸더니, 저더러 직접 가져오래요. 완전 당황해 뒤뚱거리고 있는데 구경꾼이 모여들대요. 다들 눈을 똥그랗게 뜨구 달랑 두 뼘만 가리고 발광하는 제 몸을 촘촘하게 감상하는 거에요, 세상에! 그 와중에!!!!! 신랑이 달려들어요. 혼자 흥분해서요! 구경꾼들도 덩달아 신나서 눈알을 어찌나 굴리던지! 하지만 죄송하게도~ 부력 때문에 섹시한 장면은커녕 둘이 엉켜서 파닥파닥 하다가 그냥 씨들해졌어요. 생 뽀르노를 고대했던 수많은 관객들은 김이 빠졌는지 흩어져 버리더군요.

 

  잡담 2) 손님 간보는 장사꾼
 

  낮에 머리 피러 동네 미용실에 갔는데, 역시나 바글바글한 거야. 이 언니 머리 만지는 솜씨는 좀 빠져두, 동네 돌아가는 소문도 잘 알지, 빈말이라도 귀에 설탕을 착착 발라주는데다 싸게 해줘서 좋아. ‘어머, 언니 왜 일케 오랜만이야 어쩌구’ 하더니, 스트레이트는 손이 많이 가니까 커트 손님 몇 명만 먼저 해주겠대. 단골이니까 사정 봐달라니 어쩌니, 늦게 온 사람까지 해줘서 두 시간을 기다렸어, 아 써글! 귓속말로 “언니 미안, 절반만 받을게.” 하니 참았지. 약 바르고 잡지 보고 있으니까 첨본 손님이 왔어. 근데 뜨내기라고 비싸게 부르대. 또 바가지 씌우네 했지. 그러거나 말거나 그 여자보다 훨씬 싸게 머리한 게 기분은 좋더라, 히히.

 

  1)의 호기심 가득한 관음증 환자들(?)은 산호아파트 주민 물고기다. 두 사람이 잠수연습을 할 땐 무심하다, 뭔가 요란한 '사건'이 벌어지자 심상찮은 낌새를 알아채고 바싹 다가와 들여다본다. 2)의 손님 간 보고 밀당하고, 만만하면 바가지 씌우는 '우리 동네 미용사 언냐'는 청소놀래기 이야기를 보자 떠올랐다. 그들은 노련한 사업가다.

 

 

  잘 빠진 파랑 물고기가 첫눈에 들어왔다. 이쁘다!

  책소개를 읽으며 내가 원하던 책이란 느낌이 왔고, 친구에게서 갈취했다.

 

  제러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Byond beef)]을 읽으려다 거의 책 두께 1/3을 차지하는 미주에 기가 질린 적 있다. 그 책을 쓰기 위해 만난 수많은 사람과 읽은 수많은 연구물과 책, 보고 듣고 뒤진 뉴스의 나열. 꼭 그 책을 써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와 오랜 노력을 증명하는 목록이 너무도 풍성했다. 

  리프킨은 오늘날 우리가 공장식 축산업 시스템에서 어떻게 동물을 생산해 죽이는지 알라고 증거자료를 들이민다.

 

  "네 식탁에 노릇노릇 구워 올려진 그 소 말야. 네 입에서 살살 녹자고 좁다란 틀에 갇혀 꼼짝 못한 채 물, 사료, 성장촉진제를 억지로 퍼먹었지. 겁나 우울하고 여기저기 아프겠지? 안 돼, 죽지마! 항생제도 때려넣을 거니까, 먹어. 널 죽일 적당한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라고! 널 갈갈이 찌져서 돈을 갖겠어허 ㅡ 이런 거지, 뭐. 

 

  응? 어때, 그 고기 맛 있어?"

 

  [물고기는 알고 있다]에서도 비슷한 삘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몇 년 전, TV에서 뉴스를 듣고 그야말로 기함을 했다.

  '물고기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모 대단한 선진국 연구진이 발표했습니다.'

  설마? 진짠가? 그럼 물고기를 먹으면서 가책을 느끼지 말라는 건가. 오호!?

 

  이 책을 보니, 그 빌어먹을 뉴스가 떠들어댄 연구를 언급한 것 같다. 물론 개소리 소소리 닭소리란다. '뇌에 신피질(neocortex)이 있어야만 고통을 느낀다'는 그릇된 전제로 '고로 물고기는 아플 수 없다'는 결론을 낸 거라나.

 

  여튼 그 뉴스를 보았고 이런 정보를 접하지는 못하는 누군가에게, 물고기는 그저 몸속 프로그램대로 파닥이는 '자동기계'로 남을 터이지만.

 

 

 

  내 부모님은 축산업에 종사했다. 아버지는 개, 돼지, 닭오리 따위를 직접 도살했다. 어릴적부터 꿈에 개, 돼지, 닭오리가 꾸엑꾸엑 소리쳐대는 걸 보며 울었다. "죽이지 마요! 죽이지 마요!" 그러다 내가 도살되는 꿈도 꿨다. "싫어! 싫어! 안 죽을래!" 언제부턴가 삶은 개다리짝을 품에 끼고 북북 뜯어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남의 살이 맛나서 도통 끊을 수 없는 거다. 개, 소, 돼지까지 끊고도 '치느님! 치느님!'을 부여잡고 양심과 싸우고, 먹고, 싸우고, 다시 먹고, 싸우다 또 뜯어먹고... 그, 랬, 다.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안다. 개, 소, 돼지, 닭오리도 고통을 느끼는 걸. 똥 무더기 위에 구르고 좁은 우리 안에 갇혀 미치다가 절단된다는 걸. 가축을 먹이기 위해 쏟아붓는 곡식과 물을 인간들이 나눠쓴다면, 누군가 굶거나 목 말라 죽는 일조차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심지어 난 지금 밖에 나가 똥구덩이나 녹슬고 작은 철창에 구겨져 처박힌 개, 소, 돼지, 닭오리를 사진 찍어올릴 수 있다. 돈사 옆에 구덩이를 파고 폐사한 돼지를 던져넣고 방치한다는 업자도 안다. 하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살을 안 먹기는 정말로 힘들다.

 

  하물며 표정 없고 피도 묽고 소리치지도 않는 물고기를???? 어림 없다.

 

 

 

  저자 조너선 밸컴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물고기 종은 척추동물 종 중 60퍼센트나 돼요. 데본기 화석 중에 '엄마물고기'란 녀석은 뱃속 아기가 탯줄로 엄마와 연결돼 있어요. 걔네도 섹스를 했단 거죠! 우리가 공기에 적응했듯, 물고기는 물에 잘 적응해서 계속 진화 중이죠. 우린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지만 물속에서 듣고 냄새 맡고 맛도 느껴요. 소통도 하고 학습도 하고, 오직 즐겁기 위해 놀이도 해요. 어쩌구저쩌구, 주저리주저리.

 

  텍스트만으론 못 믿겠어서, 솟구치는 의심을 풀기 위해 '위대한 구글신에' 독수리타법으로 기도문을 올렸다.

 

      fish.... use tools....

 

 

  헉, 조개를 바위에 패대기쳐서 깨먹는다.

 

      fish loves..... touch....

 

  헉?! 쓰다듬어 달라고 사람 손에 달라드는 녀석들이 보인다.

 

  초딩 수준으로 단어만 쳐넣어도 이미지와 동영상들을 찰떡같이 찾아주신다.

     

    fish playing, fish drawing circles.... 마구 두들여 본다.

 

 

 

 

   

  바다 안에 이글대는 저 태양을 보라!!!!

 

 

  자애로운 구글신께서 은혜를 베푸사 깨달음으로 충만해진다.

  ( "아버지 구글님 당신의 광신도가 되리니!" )

 

 

 

  헌데 벨컴이 원하는 건 '그저 아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물고기를 존중해달라 한다. 고통을 주지 말라 한다. 잔인무도한 대량학살을 멈추어달라 한다. 인간이 흘려보낸 화학물질과 쓰레기와 어업도구 때문에 바다가 오염되고 그들이 영영 멸종하고 말겠다고 안타까워 한다.   

 

  "제대로만 알면, 인간은 세상에서 훌륭한 공동선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

 

  이 책 마지막 문장이다.

 

 

  밸컴의 책을 덮고 나서, 고등어 대가리를 쳐내 두툼한 몸통을 딸래미에게 튀겨주었다. 그러면서도 노르웨이 고등어의 치밀하고 단단한 근육이 바다환경에 탁월하게 적응한 증거임을 알아보며 찜찜했다. 찬통 안에서 반짝이는 달짝지근한 멸치의 눈을 보며 차마 젓가락을 대지 못했다. 감옥을 탈출하려다 낚시바늘같은 갈코리가 내 몸을 관통해 아악 소리를 지르는 꿈을 꾸며 새벽에 깼다. 

 

  불행하게도 저자의 치밀한 계락에 한 년은 제대로 걸려든 거다.

  (이 게 출판사의 목적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ㅎㅎㅎ )

 

 

  다만, 누구라도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그저 물고기에 대해 알기만이라도 해주었으면 한다. 물고기를 존중하라고까진 않으니,

 

  길 가다 횟집 수조 안을 단 1분이라도 봐주시라. 유리 건너서 생기 잃은 눈으로 이쪽을 분.명.히.보.고.있.는. 물고기 하나와 마주해 주시라.

  그가 누구인지 잠시만 생각해주길 바란다. 그가 느끼는 공포와 서글픔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벨컴이 원한 '공동선'은 아주 더디게라도 한 독자 안에서 시작되고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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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문학과지성 시인선 494
서효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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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 본격 활용 전 잡담.

 

 

  오규원 <분명한 사건>과 서효인의 <여수>를 샀다. 오규원은 꼭 한 번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그냥 왔다갔다 하면서 어쩌다 듣고 어쩌다 수두룩한 시집도 (겉만) 보고, 언젠가 <<오규원의 현대 시작법>>이란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책도 (겉만) 본 탓이다.  후자는 여수, 광주 지역에 대한 개인적 인연이 있거니와, 같은 성씨이고 1981년 생이라는 데에 끌려 한참 고민하다 샀다. 쿨럭~ 사실 두 권을 사서 보온물병을 받으려 했다, 캬캬.

  독자로서 나름 시 고르는 '거창한' 기준이 있다. 1) 말이 쉬울 것. 언어가 소통하는 건지 혼자 씨불렁대라는 건지 구분 못하면 짜증난다. 진짜짜, 증, 난다! 2) 인간 이외 존재들을 지 꼴린대로 은유하지 않은 것. 인간 중심적 의인화 싫다. 니가 아는 거나 떠들길 바란다. 무생물에 빗대기는 그냥저냥 괜찮다. 최소한, 대상이 된 본인이 싫어하진 않을 테니. 

 
  첫 선택은 글렀다. 내게 오규원은 안 맞다. 2)의 조건은 차치하고, 1)부터 해결 안 된다. 말이 적고 행간의 내용이 많다. 오래 두고 생각해야 하겠다. 내 수준이 택 없이 낮다. 흙흙! 이 책을 사며 잃은 기회비용을 생각하며 찔끔 운다.

 

  헌데 물병에 대한 물욕이 부른 선택은 좋았다. 매우, 매우, 매우. 

 

 

 

[ 둘 ] 본격 활용.

 

  1) 책 뒷편 시인의 말을 읽는다.

 


     "나는 남성 시인이고 이성애자며 판정받은 장애가 없다." 광주, 1981년 생, 여자는 아니고 남자였구나. 지금, 여기, 내게 고질적인 차별과 불편이 없어도, 세상에 산재한 익숙한 폭력을 끊임없이 반성해야 한단다. "문학은 반성을 토대로 지속될 것이다" 생각하고 쓰고 고치고 묵혔다 다시 들여다 보는 과정 중에 내 안의 편견도 알고 바로잡는다. 작가의 반성, 깨달음, 쓰기 과정이 맘에 와닿는다.


  "문학의 이름을 빌려 자행되는 모든 위계와 차별 그리고 폭력에 반대합니다."

 
  흠, 청소년 강간범죄자 시인 'ㅂ'이 생각난다. 꼭 여자를 주무르며 술을 퍼마셔야 한다던 유명 작가 'ㄱ'의 소문도 떠오른다. 아이의 입을 여성 성기로 묘사해 욕 먹는 'ㄱ'도.

 

  그래, 경험에서 뉴스에서 익숙하게 만나지. 예술가랍시고 주접 떠는 고매한 스레기들을. 그래, 저 말도 맘에 든다. 읽을 맛이 났다.

 

 

 

  2) 차례를 펼쳐 내가 가본 곳에 동그라미 친다.

 

 

 

  열  개 남짓의 제목 이외는 어떤 지명이나 장소다. 중간중간 이모, 친구, 남자, 고기, 정체성 등을 '찾아서'라는 제목에서 여기저기 무언가를 찾아가는 여정인 듯하다.

  

 

 

  3) 동그라미 중 아무거나 펼쳐서 읽는다.

 

  각 시 사이 큰 맥락은 나중나중에 자연스레 알겄지 뭐. 우선 아무거나 본다. 거의 이야기식이라 잘 읽힌다.

  대학 다닐 때, 시 쓴다는 선배들 말하길 이런 건 '좋은 시'가 아니라고 했다. 주절주절 말이 너무 많다고. 너무 쉽게 쓴다고. 그런데,

 

  내 주제 파악을 하자. 언어의 달인이 되지 못할 바, 알아먹는 게 낫냐 못 알아먹는 게 낫냐. 시인이 잘 썼냐 마냐는 나중 문제. 내가 알아먹어야 그 말을 빌어 생각이라도 한다.

 

 

 

  4) 맘에 드는 데 줄 긋고 그 지역에 대한 내 기억도 막 쓴다.

 

 

   시인의 경험과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다. 일단 생각의 씨앗을 받아서 나도 어설프게 뿌려보는 거다. 지금은 단편적인 장면만 떠오르지만, 언젠가 남해에 진주에, 인천에 서울에 강릉에 다시 가면 그럴듯한 스토리 하나쯤 들고 오겠지. 그 때 다시 내가 보고 겪은 것과 견주어 보고 여백에 궁시렁궁시렁 쓰는 거지.

  

 

  5) 책장에 껴놨다가 1)부터 4)까지 반복 또 반복

 

 

 

 

[ 셋 ] 시집을 실용서로 쓰는 즐거움.

 

  난 하필, 문창과 곁에 상주하는 인문학과 학생이었다. 대학 다닐 적 경험에서 온 편견 탓에 '글 쓰는 사람'이 싫다. 아니, 좋진 않다. 흐~

 

  말과 행동의 완벽한 괴리. 지가 68혁명 때의 보헤미안인 줄 착각하는 방종. 후기 낭만주의스러운 퇴폐를 예술이라고 떠들어대는 꼬라지. 무겁게 두 개나 착용한 귀때기로 듣지는 않고 떠들기만 하는 주댕이. 사람을 알고 세상을 안다는 자만. 그 모든 짓들이 글 쓰는 데 양분이 될 거라 뻠쁘질하던 유명한 아주 유명한 선생들. 하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열정과 어리석은 자만을 통과하며 우린 자란다. 그 지랄지랄 떨던 문학도 중 몇몇은 치열한 공부와 반성 끝에 나같은 미생에게 뭔가 '꺼리' 하나쯤 던지고 있겠지.

 

  오늘 서효인의 시를 보며, 즐거움에 요란을 떨고 있잖은가. 여튼 고맙다, 참.

 

 

  시집 안 글자를 낱낱이 그러모아 밥을 지어 먹어봤댔자 한 끼 해결은 되려나 싶을 만큼, 詩가 안 팔리는 시대.

 

  동시에 누구나 '말하고 씀'을 꼭 해야한다고 권하는 이 시대, 생각하고 쓰고 말할 꺼리를 얻는 창구로 서효인의  <여수>는 매우 좋은 실용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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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연쇄 살인범 X파일 - 살인범과 사형수, 그 불편한 진실
양원보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난 반공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교과시간에 도깨비뿔 달린(실재 그림이 그랬다) 무장공비에 저항하다 입 양쪽이 걸려 쭉 찢겨죽은 '이승복 어린이'를 배우며 공포에 떨었다. 그러고 하교하는 길에서 희미한 최루탄 냄새를 맡곤 하던 시절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 으례 TV에서 만화를 해야할 시간인데 야속하게도 '청문회'라는 걸 했다. 난 왜 재밌는 만화를 취소하고 죙일 아저씨들이 잔뜩 나와 웅성거리고 소리나 지르는지 이해 못했다. 부모님은 화면 앞에서 무릎을 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어른들은 기뻐했고, 뉴스 속 할매들은 감격하며 울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기획다큐를 보고 난 충격을 받았다. 정말 저런 거짓된 시절이 있었다고? 그것이 우리 나라라고? 좆 같은 대통령을 욕할 수 없는 나라, 윗놈들이 수틀리면 누구든 간첩이 되어 생죽음을 당하고 불구가 될 수 있던 나라. 그 나라를 난 자랑스러워 했었다!

 

  대학생 때, 윤리학 류의 수업이면 으레 '사형제'에 대한 찬반 토론을 했다. 난 반대했다. 당시 마지막 사형집행이 된지 5~6년이 흐른 후였다. 인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고 선진국에서 대세라 하니 쓸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사법체계를 아직 믿을 수도 없었다. 수업 말미에 정리하며 선생님은 '악인이 교화될 수 있음'과 '인간의 판단이 만에 한 번은 어긋날 수 있음'을 강변했다.

 

  어느날 어떤 묻지마살인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단지 '예수쟁이'가 싫다는 이유로 교회로 가던 여성을 난도질해 죽인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사형제를 반대하던 내 윤리선생의 가족이었고, 고칠 수 없는 악인이 있다고 중얼거리게 된 선생은 스트레스로 암에 걸려 죽었다. 

 

  세상은 변했다. 합리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주도한다고 믿는다. '만에 하나의 오판'을 막을 수많은 제도적 장치가 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명확한 증거를 갖고 범인을 가릴 수 있는 과학기술과 전문가가 있다. 

 

  기어이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은 그 사상을 존중해줘야 한다. 나는 생명을 매우 중히 여기지만, 나와 달리 죽이기를 즐기는 인간이고 그 죄가 충분히 중하다면 그의 생명도 가벼히 여겨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이 반갑다. 저자의 말대로 사형은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단죄이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경고가 아니다. 사형제가 강력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크지 않다는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드러난 쓰레기라도 치워달라는 건데. 

 

  살인범들이 '어짜피 버린 인생 되는대로 살지'하며 한가로히 종교도 믿고 잘 먹고 잘 싸는 동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밥먹는 것도 죄스러워하다 병 걸려 죽어버렸다. 남은 자들이 죽은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고통 속에서 스스로 죽거나 병들어 죽는다는 사례가 많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제발 죽어마땅한 자는 죽어야 한다. 그들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다. 그들이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니 그의 의사를 존중해줘라. 법이 그를 죽이는 게 아니다. 그들 스스로의 선택이다.

 

  집행하자. 사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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