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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벌써 중요한 것은 제목에 다 나와 있습니다.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이 실은 계급투쟁이라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결과이며 이제 시작된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적습니다. 과연 지젝은 실제, 지금 사회에서 가장 밀접한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고민하는 이일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 어디에도 북쪽 따위는 없다는 것을 진즉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을 만나면 북쪽을 만난 양 마음 한 켠이 나아지는 기분이 듭니다. 아주 얇은 책이고 삼십 분이면 다 읽을 수 있지만, 생각은 한 달 보다 더 멀리 갈 것입니다. 


유럽 난민 사태는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하는 군사 분쟁등의 위기로 2014년 말까지 6천만 명이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로 발생한 실향민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습니다.(위키백과) 난민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지만, 당도하고 나서도 유럽 사회가 난민을 얼마나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우려로 더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실향해서 다른 땅을 찾아 나선 사람들. 난민에게 우선 쏟는 독설은 이런 것입니다.  


난민들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서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난민은 자신의 꿈을 스스로 검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 속에서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 66


비단 '난민'에게만 이르는 말일까요? 제게도 참 아픈 말이었습니다. 저는 난민이 아닌데도 늘상 불안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현실속에서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일침합니다. 게으르게, 외부의 탓으로 끊임없이 이 괴리의 탓을 돌리며 지냈던 것은 아닌지 말이지요. 난민이 유럽사회에 도달하면서, 유럽사회가 난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다른 생활방식, 종교, 다른 위치, 그 밖에 여러가지 문제들 앞에서 지젝이 사회에 제안하는 것은 두 가집니다. 첫째,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제한 내에서 다른 생활방식에 관용하는 것. 이 두 가지 약속 위에 우리가 해야할 것은 사적이고 감정적인 연대가 아닌, 계급 투쟁이라며 우리가 비로소 싸워야 할 본질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서는 '가난'을 이해하려는 자의 텍스트르 가져와 통렬히 비판합니다. 


주인님, 가난은 어떤 것의 결여가 아니라, 진짜 페스트입니다. 그 자체로 독성이 강하고, 콜레라처럼 전염되고, 더럽고, 죄악이고 악덕이며 절망입니다. 그저 몇 가지 증상만 꼽아본 겁니다 가난은 어떤 경우에도 멀리해야 하는 것이지 연구 목적의 대상이 아닙니다...


가난은 독자적 지위를 가지는 존재론적 실체다. 가난은 단지 돈이 거의 없다거나 아예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가난은 어떤 사람의 불운한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단히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 선량한 부자가 부유함을 누리면서 자기는 가난한 사람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틀렸다. 우리가 사회적 위상(계급)을 만들었다고 해도 모두 동등한 인간이라는 휴머니티의 영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99


그렇습니다. 사적이고 감성적인 연대 부분에서 세월호가 생각났습니다. 느슨한 연대를 비판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테지만, 연대 이후를 바라야 진짜 변화가 시작됨을 알아야 한다는 그답습니다. 기억하고 마음으로 아파하는 일은 쉽지만, 그래서 어디 꿈쩍이라고 하던가요. 세월호 참사는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다는 것만으로 해결이 멀고 멉니다. 그래서 마지막, 회심의 일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이다"(이 속담은 간디의 좌우명과 흡사하다.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 그럼 사람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노력을 방기하는 것은 게으름의 합리화일 뿐이다. ...우리가 의지할 위인은 없다는 뜻이다. 113


내가 의지할 위인은 없고, 내가 사는 지금은 더 무서울 수도 없이 진짜입니다. 거대한 아귀가 입을 벌린 방향으로 밀려들어갑니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더를 외치는 자본주의 팽창 속으로요. 그것은 존재를 초월해 우주라도 된 것일까요? 죽음을 알지 못할까요? 그럼에도 '언젠가 터져버릴 것'이라는 예언은 이미 시작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의 위치에서 조금도 내려가지 않은 채 마음 좋게 가난을 연민하든가, 나라를 등지고 유토피아인것처럼 다른 나라를 향해 동정을 사거나의 한계 속에서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개인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이 아귀를 우주로 돌려보내는 방법은, 아귀를 만든 사람의 손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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