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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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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이야기는 무너지고," *


 

 

 


 

목차는 반원으로 배치돼 있다활대 보이지 않는 시위가 팽팽하고작가의 손은 목차의 중간을 당겼겠다그래서 가장 가운데 솟아난 '매듭'부분을 읽어야 하겠지만첫 번째 실린 '살구'로 이미 마음이 어지럽다여기까지 쓰니, '매듭'을 중심으로 목차가 대구를 이루고 이루는 게 보인다시작은 '살구'끝 역시 '살구'.

 

솔닛은 '당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묻다가 "종종 이야기가 당신의 무릎 앞에 떨어진다."며 잠깐 상념에 잠기게 한다그런 적이 있던가있지기지그렇지 싶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100파운드의 살구 더미가 도착한 적 있다며 너스레다무슨 얘긴가 살펴보니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살구였다그렇다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살구는 무척 달지만 그 달콤함을 오래 간직하지 않는다무섭도록 쉽게 상해버린다게다가 자기들끼리 거리가 꼭 필요한데만진 곳마다 쉽게 멍들기 때문이다.


살구가 아니라 어머니그러나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것엔 윤리적인 문제가 걸려있다고 생각한다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 진실할 것인가의 문제로서어머니에게 더해진 늙음의 비참을옳은 일일까옳다면 무엇을 위해서 옳을까. 그런데 이런 윤리적인 판단을 뒤로하고 어머니에 대해 쓰는 일이 우선 '용감'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솔닛은 딸과 '어머니', 그것도 늙고 병든 어머니와 대면하며 생긴 '무너진이야기를 적는다나는 저자 소개를 여러 번 뒤지며 솔닛의 나이를 추측하려고 애썼다사진으로 보이는 그는 아마도 어머니에 대해서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원숙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도망하면서 '살구'를 다섯 번 읽는다수번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단어와 어미를 대입하고 변주하기도 했다그러자 솔닛의 이야기는 없고남는 것은 나와 나의 어머니다솔닛이 바라는 것은 내 앞에 도착했을그러나 내가 살피지 못했던 살구 더미 같은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야기에서 삶의 말년은 그 모든 세월이 지혜가 되는 황금빛 시기이지,

엉망진창인 어린 시절로 혹은 그 너머로 퇴행하고정신병처럼 보이는 질병으로 썩어 가는 시기가 아니다. 20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워 간신히 걱정할 수 있는 미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년뿐이다. '늙음'에 대해서 별로 고민할 시간 없이 사람은 늙어버린다대도시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골목마다 쏟아져 나온 쓰레기아니라 그 더미 속에서 재활용할 것을 찾아 헤매는 늙은 손 아니던가. "노년은 전쟁이다아니 노년은 대학살이다."*** 대학살을 지켜보는 자식들솔닛은 자신의 어머니 치매에 걸린 이후를 적는다그는 무척 화가 나 있는데그것은 우선 어머니가 "아들들에게는 당신의 문제를 늘 숨겨 왔"으며 딸인 자신에게는 늘 문제를 던지기 때문이다진창인 삶 뒤에서 마른 면포를 깔아야 하는 딸물러오는 진흙을 치워야 하는 딸딸에게 부여된 노동으로 지켜진 존엄을 아들들에게 보여주는 어머니가부장제를 지키는 것은 여성인 나의 '어머니'절망은 이런 순간에 깊다.

 

솔닛은 어머니를 고향에서 자식들이 가까운 노인 아파트로다시 노인 요양병원으로 옮긴다아니옮기게 된다그는 "무너지는 어머니와 할 대화라는 게 혼란스럽고 위험한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조용히 말하며할 수 있는 것은 집 색깔이나 꽃에 대해서 만이라고 담담해서 더 내려앉는다그러므로 저 '살구'는 어머니 처소를 옮기며 정리한 어머니의 일부다. "그건 구원의 행동이자 불안함관대함의 행동이었다. 25"이라고 술회하는 부분에 100파운드나 쌓여 있는 살구는 역시 '살구'겠으나 그것을 어머니인 듯 살피는 것은 당연하다제각각 익기의 정도가 달라서 썩은 것을 골라내고무르지 않게 종이위에 깔아 놓는 것해서 그 무더기를 보며 솔닛이 끌어안는 생각은 단연 '백미'이 단편에서가 아니라삶의 면면에서 잊지 말아야 할


"그 무더기는 세상의 반대편에 사는 불새의 꼬리 깃털을 가져오는 일이라든가수수께끼나 감당할 수 없는 역경처럼불가능한 임무라는 범주의 변종에 불과했다. 26" 


그동안 솔닛에 대한 오해 하나를 푼다. 멋진 제목의 페미니스트 저서로 일약 스타가 되었던 것인가. 아니다. 그의 삶에서 체화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비로소 빛날 수 있었던 것. 솔닛을 다시 기억하기로 한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 가 아니라 멀고도 가까운』의 솔닛으로.  

 






* 14쪽.

**김중혁악기들의 도서관나와 B, 365쪽. 변주.

***필립 로스에브리맨, 162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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