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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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대미문의 사건, 9.11 동시다발 테러를 모르는 이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01년 세계무역센터를 강타한 9.11이 아닌 1973년 칠레에서 일어난 9.11을 알고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합법선거를 통해 칠레 대통령이 된 최초의 사회주의자 아옌데는 1973년 9월 11일 대통령궁에서 직접 총을 들고 쿠데타 군과 싸우다 죽음을 맞았다.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저 유명한 독재자 피노체트의 쿠데타 군은 대통령 궁을 탱크로 둘러싸고 공군 폭격기로 미사일을 퍼부었다.

기아 문제를 이야기하는 책 소개에 웬 쿠데타냐고? 칠레의 9.11은 기아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옌데가 선거에서 내건 제1공약은 ‘15세 이하 어린이들에게 하루 0.5리터 분유 무상급식’이었다. 소아과 의사 출신이었던 아옌데가 당시 칠레 아이들의 심각한 영양실조 실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칠레에서 관련 산업을 독점하며 분유와 유아식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올리고 있던 다국적 기업 네슬레는 칠레정부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당연히 칠레정부는 제값을 치르고 분유를 사려했지만, 네슬레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미국의 입김도 작용했다. 아옌데의 개혁프로그램대로 칠레경제가 자립성을 높여 '사회정의'를 실현하면 자국의 국제기업들이 칠레에서 얻는 이익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결국 아옌데의 개혁프로그램은 실패하고, 칠레정부는 전복된다.

놀라운 일 아닌가? 자기 나라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제값을 주고 우유를 먹이는 일조차 미국과 다국적 기업들이 반대하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는 이처럼 놀라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는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살벌한 세계의 이면을 들추어낸다.

사실,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지구 전체로 보자면 세계인구가 모두 소비하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 아니, 지구는 현재보다 두 배의 인구를 부양할 수도 있다. 이미 1984년 FAO(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는 당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지구는 120억의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계산한 바 있다. 그러나 한편에선 “열 살 미만의 아이가 7초마다 한명씩 기아로 목숨을 잃고 있고, 6분에 한 명씩 비타민 A의 부족 혹은 썩은 물과 접촉함으로써 시력을 잃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늘어만 가는 음식물 쓰레기를 고민하고, 과도하게 축적된 칼로리를 제거하기 위해 다이어트에 골몰한다. 수치로 볼까?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을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 즉 만성적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은 세계적으로 8억 5천만명에 달한다. 선진국에서는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과체중과 비만에 시달린다. 이렇게 지독한 부조리와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문제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거나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4분의 1은 사람이 아닌 소가 먹어치운다. 세계 곡물시장은 먹을 것이 없어 당장 굶어죽을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식량으로 투기하는 이들의 이해에 따라 인위적으로 가격이 부풀려진다. 앞서 언급한 칠레의 아옌데처럼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프로그램을 가동시키려던 저개발국가의 정치인들은 기득권과 국제자본에 의해 쫓겨나거나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기아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비극’이라는 이야기다.

학교에서는 저개발 국가들의 가난에 대해 반쪽짜리 진실만을 가르치기 일쑤다. 선진국들과 다국적기업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는 구조에 대해서는 학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쉽게 이야기되기 않는다. ‘돈을 벌 권리’는 인정되는데 ‘굶어죽지 않을 권리’는 인정이 안 되는 꼴이다.

얼핏 복잡하고 머리 아픈 얘기일 것 같지만 장 지글러는 자기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기아에 대한 진실을 조곤조곤 알려준다. 책을 읽고 나면 기아와 가난이 경제발전과 세계화의 ‘부작용’ 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대로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 모로 세계에 대한 인식의 균형을 잡아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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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청춘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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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츠모토 타이요는 일반인에게보다 만화가들 사이에서 더 잘 알려진 작가다. 그의 팬을 자처하며 영향을 고백하는 만화가들만도 벌써 여럿 봤다. 비교적 높은 인기로 영화화까지 진행된 <핑퐁>같은 작품을 보면 그 팬심이 십분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칸을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동세연출은 확실히 독보적이다. 게다가 주로 두 명의 주인공이 짝을 이뤄 갈등하며 엮어내는 스토리 라인의 긴장감도 작가를 범상치 않은 범주에 포함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철콘 근크리트>, <제로>, <고고 몬스터>, 최근에 소개된 <넘버 파이브>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연출과 이야기의 짜임새는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작품들이 비슷비슷하다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오히려 <넘버 파이브>에서는 ‘마츠모토 타이요가 너무 멀리까지 나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독자들의 조바심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애니북스에서 <푸른 청춘>이 나왔다. 근 10년 전에 해적판으로 출간됐던 것을 판형을 키워 새롭게 냈다. 1993년 작품으로 비교적 초기작이다. 게다가 단편집이다. 국내에 번역된 대부분의 작품을 봐왔지만 단편은 처음이다.

불량청소년들의 우울한 청춘 군상을 그려낸 일곱 편의 단편들은 ‘가장 마츠모토 타이요 다운 작품’이라는 홍보문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초기작이고 단편인 만큼 이후의 작업들의 원천소스를 접하는 것 같은, 거꾸로 된 기시감마저 든다. 풋풋하고 거친 듯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작업들이다. 

제일 앞에 실린 ‘행복하다면 손뼉을 치자’에는 학교 옥상 베란다의 바깥쪽에 서서 손을 놓은 채 누가 더 손뼉을 많이 치는가를 겨루는 ‘베란다 게임’이 나온다. 무료한 날들이 계속되는 와중 게임의 2인자는 신기록을 세우고 옥상에서 떨어져 ‘멋있게’ 죽는다. 가히 향후 ‘마츠모토 타이요 월드’에 등장하게 될 갈등하는 히어로들의 원형이라 할만하다.

상식을 허용하지 않는 초현실적인 풍경들의 나열은 마츠모토 타이요의 세계에서는 일상과도 같다. 단순무식한 추격전의 끝장을 보여주는 ‘끝장이네 이거’의 경우, 달려서 지하철을 따라잡는다든가 차에 치여 머리가 깨어졌는데도 벌떡 일어나 추격을 계속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추격전 자체가 아니라 추격전을 드러내는 연출방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리볼버’에서는 우연히 권총을 손에 넣게 된 삼인조가 총으로 인해 좌충우돌하다 바닷가에 가 러시안 룰렛을 벌인다. 이유는 단 하나, ‘살아있다는 긴장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단편집을 지배하는 가장 커다란 정서는 권태다. 단지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주인공들은 베란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손뼉을 치고, 톨루엔(환각제의 일종)을 물고 다니고, 이유 없이 폭력을 휘둘러 대고, 패밀리레스토랑을 순회하며 시간을 죽인다.

작가는 후기에서 학창시절 불량청소년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사진을 찍던 에피소드를 공개한다. 불량청소년들은 하나같이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즐겼는데 작가가 사진을 신경 써서 찍을라치면 씨익 웃어대며 ‘괜찮으니까 그냥 찍기나 해라’고 쑥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는 거다. 작가는 이에 대해 “현재를 이미 과거의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카메라라는 아이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이해가 갑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푸르지만 우울한 청춘, 불투명한 미래와 빠르게 과거에 잠식당하는 현재 사이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분출하는 감정들. 이 모두를 아우르는 것은 압도적인 권태다.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대사들의 남발이라든가, 직선 따윈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자유분방한 그의 선, 자칫 과잉으로 보일법한 연출방식 등이 낯설지도 모르지만 그 낯설음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신도 마츠모토 타이요 월드의 시민이 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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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ksy Wall and Piece 뱅크시 월 앤 피스 - 거리로 뛰쳐나간 예술가, 벽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네다
뱅크시 지음, 리경 옮김, 이태호 해제, 임진평 기획 / 위즈덤피플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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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6,180,998 유로의 경매낙찰 총액, 경매횟수 102회, 최고 낙찰가 1,166,540 유로. 안드레아 거스키, 안젤름 키퍼, 신디 셔먼, 길버트와 조지, 줄리앙 슈나벨 등 기라성 같은 거장들을 제치고 22위 랭크. 미술시장 분석 전문회사 아트프라이스가 1945년 이후 출생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2007년 7월부터 2008년 6월까지의 판매기록을 분석한 차트에서 이 같은 기록을 보유한 작가는 누구일까.

문제가 너무 어려운가? 조금 더 쉬운 힌트.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등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 전시중인 작품들 사이에 태연자약하게 걸어놓는 방식으로 ‘도둑전시’를 했다. 재밌는 것은 그의 작품이 발견되자마자 떼어내고 폐기처분한 전시장이 있는가하면 대영박물관 같은 경우 원시인이 쇼핑카트를 끌고 있는 그의 작품을 영구소장하기로 결정했다는 거다.

그래피티 작업을 주로 하는 그를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그를 인터뷰한 한 언론에 의해 이름과 1974년생 고등학교 중퇴자라는 일부 경력만이 밝혀졌을 따름이다. 그는 ‘얼굴 없는 작가’, ‘아트 테러리스트’, ‘그래피티의 살아있는 전설’ 등으로 불린다.

국내에서도 이 작가의 작품은 블로그와 각종 사이트를 통해 수없이 퍼날라지고 복제되었다. 복면을 한 채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대의 모습, 총을 들고 헬맷까지 착용한 경직된 경찰의 얼굴자리에 들어가 있는 스마일 마크, 아나키스트의 상징을 그리고 있는 영국 왕실 근위병의 모습, 폭탄을 사랑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소녀의 초상, 열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정복차림의 경찰 동성애 커플 등 통념을 뒤집고 상식의 허를 찌르는 그의 작품은 많은 이들을 열광케 했다.

이제 아시겠는가? 그의 이름은 뱅크시. 영국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그는 이미 위의 수치에서 확인했듯 더 이상 뜨내기나 얼치기 예술가가 아니다. 주류예술계에서도 몇 손 가락 안에 꼽히는 중요한 작가가 되어버린 뱅크시의 작품과 그의 짧은 글들을 소개한 책이 나왔다. <뱅크시, 월 앤 피스>는 우연한 계기로 출간되었다. 영화감독 임진평이 뱅크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국내에 출시된 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판관계자에게 뱅크시를 소개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수많은 미술인들을 제쳐두고 영화감독을 통해 출간되었다는 게 아리송하긴 하지만, 아무튼 덕분에 우리는 뱅크시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웹에서 만날 수 있던 그의 작품들을 보는 것이 산발적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면 <뱅크시, 월 앤 피스>는 그 갈증을 조금은 풀어준다. 원숭이, 경찰, 쥐, 소, 아트, 거리의 조각상 등 소재에 따라 분류된 책은 뱅크시의 작품을 조금 더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접근해 분석의 여지를 마련해 준다. 주로 해프닝식으로만 알려졌던 미술관 도둑전시에 대한 그의 입장들과, 그래피티에 대한 태도,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패러디 등 그의 촌평들은 짧고 거칠지만 뱅크시의 작품들이 가진 특성들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업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스템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며 시스템에 함몰되지 않고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나도 모르게 고심하게 된다. 특히 팔레스타인을 격리하고 있는 벽에 진행한 그의 작업들과 일화는 그가 예술가인 동시에 명민한 활동가의 속성 역시 가지고 있음을 훌륭히 보여준다.

그의 말을 하나만 인용해 보자.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보여준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고찰을 보는 것만 같다.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그의 공격은 가차없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며 언제나 핵심을 찌른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지금부터다. 해설을 쓴 이태호 교수는 “그의 작품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가로 매매되기 시작한 이후, 과연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를 주목할 것이다”라고 글 말미에 밝히고 있다. 첫머리에 쓴 것처럼 그는 이제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가의 잘 팔리는 작가가 됐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데미안 허스트와 뱅크시를 동급에 놓기도 한다. 물론, 작가로서의 자기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둘은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시 뱅크시가 제도화된 반항을 넘어 예술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태호 교수가 던진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책을 손에 든 이들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뱅크시의 앞날을 주목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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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씨의 유쾌한 이별 공식 오늘까지만 사랑해
김수박 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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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날 밤, 옛 애인의 전화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가? 반대로 내일 결혼할 옛 애인에게 전화해 본 경험은? 뻔한 얘기다. 여자는 옛 애인의 결혼 전날 전화해 다음날 만나자고 한다. 그리고 무작정 선운사로 달려가 기다린다. 결혼식을 마친 남자가 짬을 내 전화하지만, 여자는 안 오길 잘했다고 한다. 눈물처럼 동백꽃이 후두둑 떨어지는 이곳에 왔으면 너는 결코 나를 떠나지 못했을 거라고.(송창식, 선운사)

여자는 꿈이 뭐냐고 묻는다. 남자는 질문을 회피한다. 흔한 얘기다. 서로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란 걸, 피해서는 안 될 대답이란 걸 알면서도 묻고 또 얼버무린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은 시간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격렬한 어긋남을 빚어낸다. 그들은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멀어진다.(롤러코스터, Last Scene)

「지하철 1호선 - 사람의 곳으로부터」와 「아날로그맨」등 독특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은 만화가 김수박이 한 음악사이트에 약 1년간 연재한 만화를 엮어 책을 냈다. 추억이나 회고담을 7080의 전유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김수박의 작품들은 8090 세대의 가요 40곡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들이다. 박인수나 송창식부터 양희은, 나미, 이선희, 푸른하늘, 김현철, 이상은, 015B, 여행스케치, 봄여름가을겨울 등 누구나 한 곡쯤은 마음속 한켠에 아름답게 혹은 가슴저리게 간직하고 있을만한 노래들이 하나하나의 단편과 짝을 이뤘다.

「오늘까지만 사랑해」는 삶에서 응축시켜온 감정과 경험의 농도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여기에는 각종 이별이 다 있다. 내 얘기인 듯 남 얘기인 듯 닳고 닳은 이야기다. 뻔하디 뻔하고 흔하디 흔하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상투적인 경구의 사랑 버전 총합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사람을 울린다. 울린다고 하면, 괜히 질질 짜게 만드는 구질구질함이 있지 않냐고 물을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걱정 마시라, 작품에선 외려 산뜻함이 묻어나니까.

프리미어의 허지웅 기자는 처음 10쪽을 보면서 웃고 울었다는데, 나는 아무래도 감수성이 무딘가보다. 처음 볼 땐 노래를 하나씩 찾아들으며 한편, 한편 음미하듯 즐겼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지하철이었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기억의 옛 페이지들이 역류해 눈으로 넘치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을 나와서도 새빨개진 눈으로 울며 걸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 30여년, 그리 헛헛하게만 살지는 않았나보다 하는 안도감보다 어디서 이런 아슬아슬한 안타까움이 솟아났을까 하는 어리둥절함과 그럼에도 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기억해두고 싶다는 알 수 없는 고집과 미련이 앞섰다.

뻔하다는 건 그만큼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강력한 정서의 환기가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상투성의 늪에 빠질 위험도 높은 부분이다. 그러나 「오늘까지만 사랑해」는 진부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박씨의 유쾌한 이별 공식’이라는 책표지의 어깨제목처럼 이별을 통해 조금씩 강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개인들의 모습이 돋보인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작가가 고른 노래들이 소환하는 추억과 감정,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작가는 당연하게도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간다. 줄거리가 새롭지 않다고 드라마를 마다하는 이들은 없다. 작가는 짤막한 이야기들에도 다양하게 엮이는 사연들을 생기 있게 오밀조밀 배치하는 마법을 부린다. 슬쩍슬쩍 통념의 경계를 벗어나는 연출이 그렇고, 대사의 감칠맛과 기분 좋은 손글씨가 그렇고,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몽타주가 그렇다.

책의 마지막까지 보게 되면 모든 에피소드들이 작가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다. 단편 단편 어지러이 얽힌 이야기들이 질서를 찾고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스토리를 이룬다는 것도 중반 이후에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웬일인지 순대국에 소주 한잔이 간절해진다.

당신은 테스트를 하지 않고 못 배길 거다. 왜냐구? 궁금할테니까. 자신이 담아온 세월과 그 모든 사연들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킬지 실험해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테니까. 작가의 블로그에 가면 노래와 함께 에피소드 몇 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서비스. 그의 팬이 되는 것은 그 다음에라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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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씨의 유쾌한 이별 공식 오늘까지만 사랑해
김수박 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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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응축시켜온 감정과 경험의 농도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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