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아이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진일상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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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하엘 콜하스>는 2013년, ‘매즈 미켈슨’ 주연으로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를 볼 땐 단순히 복수극으로 보였는데, 소설로 읽으니 감상이 좀 다르다.
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머물고 싶지 않소. 발로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겠소.
주인공의 이 외침은 작품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공권력이 더 이상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할 때, 정의 구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작가는 질문한다. 우리의 주인공이 선택한 방법은 사적인 복수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았다. 그것은 정의로운가.
대부분, 복수하는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 등지에서 주인공이 복수를 하느라 행한 폭력에 대해서는 묵인한다. 별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재산을 잃거나 했을 텐데 그건 괜찮은 걸까.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처럼 보인다.

<O... 후작 부인>은 요즘에 발표됐다면 대단한 논란을 불러올 작품인데, 성폭력을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쓰이고 발표된 1800년대엔 묵인됐을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어떻게 읽힐지 상당히 궁금하다.
작품 외적으로 이 작품이 진실을 숨기고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방법이 눈길을 끈다. 작가가 이 시대에 추리소설을 읽었을 리는 없고, 굉장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진상을 숨기고 있는데, 이는 추리소설 장르에서 범인의 알리바이를 교묘하게 위장하거나 생략하는 방법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추리소설의 구조와 비슷하게 흘러가는 건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칠레의 지진>은 사형 집행을 앞둔 연인을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수감자가 지진의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연인을 만나지만 행복도 잠시, 죗값을 치르라는 대중의 고발에 위기에 처하는데 엉뚱하게도 다른 사람이 그 폭력에 희생된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건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동의 주된 테마인 ‘오인된 남자(the Wrong Man)’가 엿보인다는 사실. 또한 종교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나름의 도덕성을 무기로 죗값을 치르기를 요구하며 마구잡이식 눈먼 폭력을 휘두르는 군중들은 ‘앙리 클루조’의 ≪까마귀(le Corbeau)≫, ‘히치코크’의 ≪하숙인(the Lodger)≫, ‘폴란스키’의 ≪세입자(the Tenant)≫ 등의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위기에 처한 애인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는 여자의 이야기인 <산토 도밍고의 약혼>은 한 편의 멜로드라마로 읽힌다. 여인의 주검 앞에서 자살하는 남자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을 생각나게 한다.

아주 짧은 소품인 <로카르노의 거지 노파>는 어둡고 차가운 귀신 이야기다. 귀신은 친절에 대해선 보답하지 않고 불친절한 사람에게는 보복을 한다. 짧은 분량에 할 얘기만 하는데도 으스스한 감상은 남다르다.

파렴치한 양아들의 패륜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버려진 아이>는 막장 드라마 같다. 폭력의 상호성을 고발한 <미하헬 콜하스>나 일방적이고 무분별한 집단성, 익명의 가면을 앞세운 폭력을 고찰한 <칠레의 지진> 같은 작품들과 비교하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니콜로’가 양어머니에게 위협을 가하는 행동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유언장의 행방 (Wireless)>의 ‘찰스’와 거의 똑같다.

<성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과 <결투>는 전설이나 구전 동화 같은 면이 강한데 선과 악의 극렬한 대립, 악이 패배하는 결말, 갈등 해소와 문제 해결 과정에서 개입되는 ‘성령’의 힘 등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종교 영화나 ‘전설의 고향’ 같은 시리즈로 만듦 직하다.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의 기억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다. 작가가 태어난 해가 1777년이고 주요 활동 시기가 1800년대라 문장이나 대화가 예스럽고 장황하고 지나치게 친절한 나머지 중언부언한다. 게다가 그 시대 독일 사람들 인명이 도대체 너무나 길고 어려워서 처음엔 적응하기가 힘들었지만 처음의 고비를 넘기면 읽는 데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 이야기마다 매력이 있고 재미있다.

작가는 당시 주로 소설, 희곡 등을 발표했고 정기 간행물 발간인으로도 활동했지만 어느 하나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연애에도 소질이 없었던지 평생 외롭게 살다가 드디어 만난 여자가 유부녀. 두 연인은 함께 자살로(당시 작가 나이 34세) 생을 마쳤다고.
작가는 근대에 이르러 겨우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18세기 독일 문학의 기수로 추앙받는다고 한다.
작가의 희곡이 거의 대부분 번역되어 있고, 이 책엔 작가가 발표한 모든 단편이 실렸다고 하니 소장 가치도 좋다. 내가 읽은 ‘책세상’ 판은 절판이고, ‘창비’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책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수록작은 순서까지 똑같다. 번역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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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서성란 지음 / 강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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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의 두 사람, 부부 관계를 화두로 한 두 작품,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와 <봉희>는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삶의 지향점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성인이 된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제도로 한데 묶였을 때, 그 관계가 사랑을 기반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두 사람은 얼마나 오래 같이 살았든, 얼마나 깊은 사랑을 했든, 얼마나 많은 자손을 봤든, 나는 네가 아니고, 네가 될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너 역시 내가 아니고, 내가 될 수도 없듯이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지 않을까.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의 아내는 실직하여 방에 처박힌, 드럼 세트를 사고 싶은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완벽한 식사를 구상하고 요리하지만, 정작 그의 욕구나 고통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 그저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려고 할 뿐, 시모가 아들을 위해 준비해 보낸 음식마저도 귀찮아하며 방치한다. 완성된 완벽한 스테이크는 결국 여자의 입에 들어간다.
이 작품에서, 서로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인 부부 관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감정이 소외된 남편에게 다소 치우쳐져 있다면, <봉희>에서는 아내의 메마른 삶이 좀 더 두드러진다.

‘성중’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혼한 ‘봉희’는 29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결심을 한다. 이 작품은 ‘권태’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데, 남편에 대한 억누르기 어려운 혐오감(199쪽)과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감정(202쪽)엔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저 우연히 순간의 일탈을 경험하고(피아노 학원의 초록색 소파, 익명의 남자와 들어갔던 호프집) 숨어 있기 적당한 장소(205쪽, 도서관)를 찾아 나선다는 사실 뿐. 이후 봉희는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은(207쪽) 욕구에 갈등하는데, 자서전을 쓰고자 하는 욕망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되짚어 보는 기회를 갖고자 하는 필요에 의한 것처럼 보인다. 봉희에게 자서전 쓰기는 거짓과 왜곡에서 자유로운(207쪽)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독자들은 성중 역시 봉희와 같은 마음이었음을 결말에 알게 되는데, 이로서 권태라는 감정을 딱히 설명하지 않았음에 면죄부를 제공한다.

<좋은 어머니들>은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다. 몇 개의 매듭을 꼬며 시작했다가 진행하면서 서서히 풀어 보이는 이야기엔 각박한 현실에서 엄마보다 ‘어미’가 되어야 했던 여자들의 애환과 고통, 슬픔이 녹진하게 흐른다.
작품이 주는 절절한 감정과는 달리, ‘좋은 어머니들’이란 제목엔 이중의 뉘앙스가 있는 것 같다. 혹자에 따라서는 화자의 어머니를 비롯한 ‘그곳’의 여자들을 비난할 여지도 충분해 보이기 때문인데, 이를 주제로 토론하는 것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 중 가장 좋아했던, 인상 깊었던 작품이었다.

이어지는 세 작품,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존, 로베르트, 은희>와 <이규호, 노먼 테일러>는 같은 주제를 변주한 작품들이다.
‘해외 입양’을 소재로 한다. 문화 수출로 콧대가 있는 대로 높아진 우리나라의 치부를 드러냈달까. 그것 이상으로 관련 시스템의 부재, 마구잡이식,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행정엔 기가 찬다. 몇 년 전 미디어를 통해 보도된 사건이라고 하니, 이후 관련 행정이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궁금하다.
세 작품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느낌이 다른 건, 인물과 배경, 관점을 각각 달리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 작품 중, 사건의 당사자가 주인공으로 나선 <이규호, 노먼 테일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위 세 작품은 현실 비판, 사회 고발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표제작인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는 문학작품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갖추고 있다.

<회촌의 달>은 작가의 자기고백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다. 창작자로서의 고뇌와 고단함, 더 이상의 생산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걱정과 두려움을 처음 방문한 장소가 주는 낯설음과 공포에 빗대어 잘 표현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지극히 사적이어서 아무것도 아닌 이런 작품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건, 호기심과 긴장감으로 문장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가의 역량 덕분인 것 같다.

<유채> 역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누구나 알 만한 작품이다. 강요된 희생과 침묵으로 거의 넋이 나간 부모의 모습을 작가는 조금도 서두름 없이, 비인간적일 정도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보여준다.
다소 평범한 시작과 혼란과 궁금증으로 독자들을 긴장시키며 이어지다가, 충격적인 마무리로 이어지는, 독자의 감정을 휘몰아치는 전개가 일품이다.
이 역시, 사회를 고발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목적이 있는데, 이를 앞세우기보다 문학적인 완성도를 우선시한, 소재와 감정에 함몰되지 않은 작가의 거리감이 남다르다. 울부짖거나 외치는 대신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늘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외에, 불법체류자를 통해 외국에 나가 소식도 없는 (입양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리워하는 부부를 그린 <피아라 식당의 손님>, 목사라는 신분을 위장한 출소자를 중심으로 이방인 혐오를 보여준 듯한 <O리의 목사>가 실렸다.
위 두 작품은 좀 어렵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읽게 된, 중소 출판사의 책이라 쉽게 눈에 띄지 않고 쉽게 손이 가지 않아 읽을 기회조차 갖지 못할 뻔했던 책이다. 출판사의 영향력, 폭력적인 마케팅, 이런 걸 떠나 독자들에게 알려질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도태되는 훌륭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무릇 책을 좋아한다면, 주류 출판사 외의 책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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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아이를 차로 치고 말았어
그렉 올슨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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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를 빌미로 한
양심과 도덕, 믿음, 배반의 이야기.

범죄가 흘러가는 양상도 재미있지만
그것을 계기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며 망가지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작가의 의도 역시 범죄 자체는 그저 리트머스 시험지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친절과 선의, 도덕성이나 윤리 같은 것은 인간성의 기본값일까.
아니면 그것을 구성하는 작은 퍼즐 조각조차 되지 않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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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이스트
다카야마 마코토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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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흔한 ‘퀴어 로맨스’에서 벗어난 점에서 무척 새로웠다.
이 이야기는, 뭐랄까…, 사랑의, 사랑에 대한, 사랑을 위한, 사랑에 의한 이야기랄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폭과 층위가 넓고 깊다.

두 명의 연인, 그리고 두 명의 엄마.
시작과 끝, 그리고 끝에서 비롯되는,
마치 화재로 폐허가 된 땅에서 움트는 새싹처럼
힘과 생명력을 갖춘 이야기였다.
책의 마지막 장 이후엔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지 궁금해졌다.

화해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도,
받아들임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단순히 외로운 개인과 개인의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아마도 이조차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보다 높고 넓은 무언가가 그 위에 있음을
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고 감동적이게 보여준 것 같다.

영화도 있다고 들었는데
활자가 준 감동과 심상이 깨질까 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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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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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많은 노작가+대작가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
스릴러와 호러, 미스터리, 고어(gore)를 능숙하게 배제하면서도 상상하게 만들어 몸서리치게 만드는 인질극까지.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캐릭터들은 인간적인 매력을 지녔고 상호 간의 앙상블도 보기 좋다.
적당히 공감은 가지만 호감은 줄 수 없는 악당까지.
이야기의 리듬도 좋고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리다가도 어느 한 순간 숨통을 틔워주는 완급과 균형도 좋다.
이런 구성은 말 할 것 없고, 장면들마다 취사선택을 위해 심사숙고를 거친 태가 나, 어느 하나 낭비가 없어 보인다.

사실 스티븐 킹의 소설에 완성도 어쩌고 하는 게 불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작가의 재능이 돋보였단 말도 필요없지 않을까.
그냥 ‘재확인’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무릇 소설이란 이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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