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박성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에 대해 논증하는 막스 베버의 대표작이다. 언젠가 꼭 읽으리라 다짐하면서 읽지 못했던 이 책을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꼭 완독하리라는 결심으로 읽게 되었지만 솔직히 완독은커녕 그냥 읽었다라고 말하기도 쑥스러울 지경이다.(이번엔 끝까지 읽긴 했다.)

 

무릇 완독이라 함은 말 그대로 책에 씌여 있는 모든 문자를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느끼며, 머리로 완전히 이해한다라고 정의한다면 그동안 읽은 책중에서 내가 완독한 책은 거의 없을 것이지만, 눈으로만 읽기에도 이 책은 300여 쪽 중에서 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본문에 육박하는 100여쪽이나 되기 때문에 도저히 다 읽을 수 없었다는 점을 고백한다.

 

하긴, ()까지 다 읽었다 하더라도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맑스의 자본론과 더불어 죽을 때까지 완독하지 못할 책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엄살이 지나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본문도 학술논문의 위용을 자랑하듯 기독교 종파와 계층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포함하여 경건주의, 칼뱅주의, 매서디즘 등의 개념을 여기저기 서술해 놓아 이해하기도 무척 어렵다. 또한 종교사회학에 기반하여 광범위한 자료를 토대로 한 베버의 치밀하고, 논증적인 글쓰기 태도가 일반독자의 이해에 큰 장애가 된다. 이런 형편이니 천학비재한 나는 오독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닥치는 대로 읽고, 나름대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버는 중국이나 인도 등에서 (자본)’에 대한 욕망과 획득에의 충동, 이윤과 화폐의 추구는 있었지만 이것은 자본주의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하는데, 무릇 서구의 자본주의라 함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직업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주의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이는 바로 자본주의 정신과 연결된다.

 

베버가 이 책의 집필에 착수하던 무렵인 1904년 그의 아내 마리안네와 함께 3개월간 미국여행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인지 자본주의 정신을 설명하면서 벤저민 프랭클린의 설교를 상당히 길게 인용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벤저민 프랭클린이 필그림 파더스의 직계후손 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청교도의 후손인 것만 확실한 것 같다)

시간이 돈임을 잊지 말라, 매일 노동을 통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는 오락을 위해 6펜스만을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된다. 그는 그 외에도 5실링을 더 지출한 것이다. 아니 갖다 버린 것이다. 신용이 돈임을 잊지 말라. ~ 돈이 번식력을 갖고 결실을 맺는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잊지말라. ~ 근면과 검소 이외에 모든 일에서 시간엄수와 공정보다 젊은이를 출세시키는 것은 없다.(34,35쪽 발췌)

 

위와 같이 베버는 기회비용과 이자의 중요성, 근면과 검소을 강조하면서 종교개혁이후 칼뱅주의와 청교도주의를 언급하는데 바로 이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이룬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직업 소명금욕 주의가 그 핵심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234절의 부자가 되려 애쓰지 말라는 경구는 만일 신이 너에게 너의 영혼이나 타인의 영혼에 해를 주지 않고, 다른 방법보다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는 합법적 방법을 지시하는데, 네가 이를 마다하고 보다 적은 이익을 주는 방법을 따른다면, 너는 네 소명(calling)의 목적하나에 역행하는 것이며,~ 당연히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서 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괜찮다. ~ 직업의무의 행사로서의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명령된 것이기 까지 하다.(129,130쪽 발췌)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에 입각한 부의 추구와 자본의 축적은 재투자로 이어져 산업자본으로 성장해 갈 것이지만, 베버는 맑스를 의식해서인지 하부토대로의 경제 결정론과 부르주와의 자본축적과정에서의 노동자 착취와 억압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유보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게도 금욕을 통한  자본가의 자본축적과 공리주의적 생산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 정신과 연결하다보니 경제활동에 있어 소비부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근대  자본주의로의 발전과 모순될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 한다. 다시말해 분업에 따른 임금노동자와 식민지 착취 구조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베버는 이 책의 결말 부분에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의 존재와 방식, 그에 더하여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이 그 형성과 특성에서 사회적 문화조건 전반, 특히 경제적 조건을 통해 영향 받은 방식도 밝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근대인이 전반적으로 그 최선의 선의에도 불구 하고 종교적 의식내용이 생활방식, 문화, 민족성에 대해 갖는 중요성이 실제로 얼마나 큰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 그렇다고 일방적인 유물론적문화, 역사해석을 역시 일방적으로 정신주의적인 인과적 문화·역사해석으로 대체시킬 의도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146,147)라며 다소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어찌됐든, 베버의 이 책은 상당히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데, 책 뒤쪽에 있는 앤서니 기든스의 해설(283~300)은 꼭 읽어 볼 만하다. 여기에 베버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잘 정리되어 있다. 먼저 칼뱅주의 윤리가 실제로는 부의 축적을 신성화하기는커녕 반자본주의적이라는 주장과 서구가 아닌 아시아 일본의 자본주의적 성장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가 먼저 눈에 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후발주자의 경제성장에 대해 하버드대의 투웨이밍 교수가 주장하는 신 유교 윤리가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비약적 성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베버가 면죄부를 준 이래, 이제 이 엠병할 자본주의신자유주의와 교배하여 괴물 '리바이어던(Leviathan)'을 낳고, 이 세상의 모든 ‘~주의‘~이즘을 집어 삼키며 인류를 영원히 지배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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