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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아이들 -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 이야기 문학동네 청소년 8
박영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요근래 북한과 조선족에 관한 영화와 책들을, 다른때보다 비교적 많이 접하게 됐다. 그 시작은 장률 감독의 두만강 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로 짐작된다. 처음 그 두만강을 보았을 때의 주요화두는 탈북자를 비롯한 사람이었지만, 만주의 아이들을 읽으니 그 영화가 보여준 이야기의 범주가 넓어진다. 극중 주인공의 집은 엄마가 한국으로 돈벌러 나갔던 상황이었던 것.. 그때는 그런 설정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결국은 <만주의 아이들>을 통해 본 책뿐만 아니라 이전에 봤던 영화를 되새기며.. 하나의 작품에서 보지 못한 것들을 다른 작품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흔히, 재일동포, 재중동포 출신의 감독,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때면 모국에 대한 정체성이 입방아에 오르곤 한다. 정작 그것이 주제가 아닐지라도 한번쯤은 언급되며, 대체 무슨 답을 원하는지도 모를 질문들이 앞선다. 한때 축구선수 정대세의 상황을 보며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봤던 사람들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자국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는 정작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그 시선자체의 모호함이 더 문제 된다고 생각한다. 으레 그런 고민은 어른들에게만 주어진 것처럼 생각되지만, 오히려 그 혼란은 어른이 되기까지의 아이들에게 더 크다. 그럼에도, <만주의 아이들>에서 취재한 아이들은, 국가의 정체성을 뒤로하고 가족이란 의미의 정체성을 찾는데도 너무나 벅찬 아이들이었다.(나는, 국가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이 그럴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라고 말하고 싶은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 너무나 당연해야 할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내쫓겨져 있는 조선족 아이들.. 늑대로 상징되는 유/무형의 수많은 위기에 노출된 아이들.. 그들을 보호해야할 부모들은, 자신들의 진짜 역할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은 작가가 3년 전 김좌진 장군의 딸 산조의 족적을 따라가던 중 한 하숙집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는 동안 한국에 돈 벌러 나간 아버지를 둔 미혜의 이야기를 듣게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 후로 작가는 만주를 찾을 때마다 그런 남겨진 아이들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결국 2010년 4월 16일 한국을 떠나, 중국 요녕성 심양으로 부터 시작해서 길림성 집안/통화/유하/매하구/용정/왕청 그리고 흑룡강성 하얼빈/해림/목단강을 거치며 아이들을 취재 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의 말대로, 그는 취재를 할 수록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또한 아주 할 이야기 많아질 것이다. 

기본적인 구조는 작가가 조선족 거주지역을 이동하면서 만나는 아이들을 인터뷰 하는 과정이라 주된 이야기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학교의 선생님이나 조부모, 친인척, 혹은 한국에서 돌아온 부모 등의 인터뷰 또한 실려있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빌려 현재 4가구 중 1가구 정도가 이혼하는 조선족 사회의 현실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조선족 사회가 이렇게 된것을 살펴보면, 중국이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기 부터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앞으로 살 길을 인민들스스로 꾀하라는 지침이었던 '각자도생'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소수민족이었던 조선족에게는 무척 힘든 현실이었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이 개최될 무렵에 조선족들의 '각자도생'에 물꼬가 터졌다. 그간 미국에 예속되어, 못사는 나라라고 일컬어졌던 남한의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92년 한중수교가 맺어짐에 따라서 '각자도생'의 문은 완전히 활짝 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각자도생'이라는 것이, 총체적인 가족이 아닌, 구성원 각자에게, 심지어 아이들에게 까지도 '각자도생'의 길을 열어놨다는 것이다.

 

온기를 잃은 아이들

어른들에게, 그 각자도생의 길이란 다름아닌 한국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었다. 2년이었던 비자가 한중수교후에 5년까지 연장되면서 표면적으로는 그 길은 마치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로 보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곧 행복을 벗어나는 지름길 이었다. 멀리가지 않아도, 집안의 서기관과 인터뷰 하는 부분에서 그 폐단이 드러난다. 황무지를 개척하며 억척같이 살던 조선인, 굳건한 의지와 휘몰아치는 교육열로 타 소수민족에게 그 귀감이 되기도 했던 조선인들은 그 잘못된 각자도생의 길을 걸으면서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집안의 학교들은 15년동안 24개의 학교가 문을 닫고, 전체 학생 70퍼센트의 학부모들이 한국으로 돈을 벌러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 거의 절반은 이혼한 상태라고 한다. 

"생일날만이라도 엄마가 곁에 있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철마다 이 생각을 함다. 엄마가 끓여 준 미역국이 간절하게 그립단 말임다. (45)     

누구나 부모를 필요로 하지만, 어릴 때는 유독 더 그렇지 않은가. 그다지 즐겁지 않은 공부를 시작하며, 실제로 여러가지 의무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시기. 경험이 부족하니 많은 것들이 두렵고, 유혹은 도처에 넘처나는데 그것을 이성적으로 구분할 재간이 없는 나이. 그.래.서 더욱 더 보호가 필요한 나이.. 누구도 부모란 존재를 대신 해줄 수 없는 시기. 유년기에는 그저 본능적으로, 좀 더 자라난 청소년기에는 혼란까지 받아들여줄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한 시기.. 

 

엄마 곱니 아빠 곱니 누가 누가 더 곱니   

엄마 없던 하루 세 끼 비빔밥만 먹었구요  

아빠없던 날 밤새도록 도깨비 꿈만 꾸었대요 

엄마야 아빠야 우리 우리 함께 살자 

해도 있고 달도 있는 푸른 하늘집처럼 

(246) 


한국 바람이 불면서 3개월 동안이나 동북3성 노래방에서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던 노래, <엄마 곱니 아빠 곱니>  
부모 기다리는 아이들이 제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면서도, 몰래 눈물 흠치며 불렀을 노래... 그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엄마와 아빠와 함께 살길 바라는 아이들의 순박한 바람은.. 왜 이리도 힘든 이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무너지는 아이들  

"한 학생이 고백한 건데, 성적이 떨어지니까 부모와의 정마저 떨어지더랍니다. 기실학생들의 심정이 이러할진대 어찌 부모님 요구대로 사회에 나가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거야말로 부모 생각 다르고 자녀 생각 다른 이율배반이 아닐까요. 두 대의 기차가 평행선을 향해 치닫고 있단 말입니다."  (중략) "앞으로 10년 뒤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가족에 대해 뭘 좀 알아야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거 아닌가요?" (82)  

우리가 수학공식과 과학원리를 배우기 전에, 체득하는 것은 사랑이다. 비록 어렸을적에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머리가 인지하기전에 마음이 먼저 인지하는 것.. 관심과 사랑. 그것들이 부재한 채로, 정말 필요할 때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하는 공부의 의미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먼저 배웠어야 할,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큰 것을 배우지 못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배워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위태로웠다. 공부에는 돈이 필요하지만, 돈 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더 좋은 학원, 더 좋은 과외를 해주면 우수한 학생이 될것이라는 부모들의 기대와 실제로 공부하는 학생의 괴리감은 이토록 큰 것이다. 생업에 바빠 자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할 시간이 없는 것과 아예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것은 꽤 다른 일이 아니지 싶다.

"엄마는 있지만 진짜 엄마는 없슴다. (중략) " 나는 엄마처럼 아이 살 겁네다. 엄마가 따박따박 부쳐 오는 송금도 졸업만 하면 그만 받을 생각임다. 통화 한 번 없이 돈만 부치는 엄마, 진짜 엄마는 그렇지 않잖습네까. 진짜 우리 엄마라면 내가 아팠을 때, 내가 죽자고 했을 때 왜서 그런 맘을 품었더냐고 진심되게 물어봐 줘야 하는거 아입네까?" (중략) 영주는 이제 가족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비상구를 찾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119)

아이들은 같이 죽자는 얘기겠느가... 힘들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같이 살아가보잔 것이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란 것을 부모들이 더 잘 아는 것 아닐까? 돈으로 공부하는 것은 가족의 사랑이 밑바탕이 되었을때 그나마 가능한 것이다. 혹 가족의 사랑이 있을지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공부가 힘들때도 있는 법인데.. 엄마처럼 살지 않을것이란 아이의 말이 얼마나 서글픈가. 부모들이, 자식들을 키우는 데에 가장 중하다고 생각해서, 혹은 어쩔수 없다고 생각해서 버는 돈, 그것을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더이상 받지 않겠다는 말을 보며.. 우리는 그 아이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걸까?.. 이것은 아이들에게 돈이 얼마나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 였다. 물론 돈이 없는 아이들, 돈이 없어서 다른이들만큼 과외받지 못하고 문제집 살 돈 부족한 아이들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불행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부모와 좋은 과외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무슨 대답을 할지, 물어보지 않아도, 모두가 알지 않는가. 돈이 없이 공부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부모없이 공부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인 것이다. 당사자인 아이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다만, 어른들이 망각 할 뿐이다.  

자신들이, 힘든 삶에서 그때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그만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친구가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면서 뭐란 줄 아세요? 한국은 지구촌에서 당장 사라져야 할 국가라고 했습니다." (264) 

이 아이가, 이 말을 내뱉기까지 얼마만큼의 고통을 받아왔을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른이길 강요받는 아이들  

"저는 4년짼데예, 전화로만 담화를 해서리 인차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척 알 수 있슴다. 우리 엄마가 지금 아픈지 아이 아픈지. "(106)

작고 여린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어른에 가까워 있었다. 자신을 길러준 부모들의, 한 인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언젠가는 스스로 체득 할 일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시기는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고생과 고통의 의미마저 채 배우지 않은, 혹은 그냥 어렴풋하게 알아가야 할 나이인데, 벌써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아버리는 것.. 이것은 조기교육이 아니라, 시기상조한 교육이다.  

"아빠가 등을 돌리고 앉아 술을 마시는데 너무 가여워 보였어요. 중국에서 술 마실 땐 그러지 않았단 말예요. 고기 안주에 ,얼마나 당당하셨는데요." (209) 

생각이 깊은, 혹은 말을 똘똘하게 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들을 보면, 어른들은 으레 '애어른', '애늙은이' 라는 말을 쓴다. 소싯적에 가끔 그런말을 들을 땐, 그게 마냥 칭찬인줄 알았고, 그래서 부끄러웠다. 하지만 언젠가, 그것은 칭찬뿐만아니라 안타까움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어른이 되어서 해야 할 고민들은, 어른이 되어도 차고 넘친다. 헌데, 아이들에게까지.. 삶의 고단함을 미리 가르쳐 줄 필요가 있느냔 말이다. 돈을 벌어 올 능력이 없는 시기에 돈 걱정을 하는 아이들이 이젠 그리 대견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조금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가 비로소 우리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을때, 그래야만 할때, 수많은 의무, 책임들과 싸워나가야 할 시간들은 반드시 온다. 하지만 그때 좀더 온전히 버티기 위해선, 혹은 그렇게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들을 향해 적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으려면.. 권리가 필요할 때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부모들의 고단함을 아는 것.. 그래도 대견하다. 기특하다. 이 아이들.. 그런데 꼭 그렇게 일찍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찍 배우게 되는 것이.. 온전한 가족안에서가 아닌.. 떨어진 가족에게서 느껴야 함은.. 달콤한 솜사탕을 들고있어야 할 아이들에게, 무거운 돌 덩이를 쥐어 주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그리고 이건 저의 간절한 소망인데요, 두 분 모두 병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너무 아껴 쓰지만 말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유희도 부려 가며 사셨으면 좋겠어요." (중략) "한국에도 지금 비가 올까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엄마 아빠가 더욱 보고 싶은 게 사실이에요. 수업도 엉망이 돼 버리고요." 과연 국단의 저 눈 속에는 어떤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안으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세상에 저런 울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95)  

하지만, 그렇게 부모들을 생각한다고 해도, 그 아이들이 또 완벽한 어른인 것은 아니다. 그 흔한말로,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부모들이 얼마나 고단한지, 머리가 안다해도 가슴으로는 그들의 사랑을 원하는 것이다. 생의 아름다움 보다, 고단함을 먼저 배우는 것은, 앞서나가는 것이 아닌 부작용인 것이다. 힘들면 힘들다고 투정부릴 시기에, 그 대상이 부재한 아이들.. 그리고 그렇게 속으로 삭히는 것을 어른이라고 배워나갈 수 밖에 없는 아이들.. 그 삭힌 것들이.. 곧 마음에서 병을 만들것임이.. 그리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음이.. 너무나 잘 증명되고 있었다.  

"어른들은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이 생기더라도 그걸 가슴으로 삭일 이성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철딱서니 없이 마구 떠들고 지지배배거리고..... 그런 아이들의 입이 닫히면서 가슴까지 꽉 막혀 버렸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59)  
 

 

권리와 책임 사이, 그 경계가 허물어진 

"살다보면 누구라도 한두 번씩 실수를 한단 말임다. 하지만도 용서라는 말이 어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답네까. 나그네한테 지은 죄는 나중에 차차 용서받을 수 있짐나 자식한테 지은 죄는 절대 기렇지 않단 말임다."(167)   

부모들 중에 한명이 한국에 돈벌러 나간 것으로 인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을 벼랑끝으로 내모는 가장 큰 비극은 부모의 이혼이었다. 그리고 그 비율은 이미 지금도 매우 클 뿐더러, 한국으로 나가는 부모들의 비율과 비례해서 꾸준히 높아질 것이다.  

"인간의 성을 도덕적 잣대로 재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다만 그 선택이 자신의 핏줄에게 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안겨 준다면 지탄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139)

대분의 사람은 어쨌건 자신의 이익이 가장 우선이다. 결혼도, 이혼도, 결국 자신을 가장 먼저 위한 일이지, 상대방을 위한 일인 경우는 거의 없다. 혼인과 이혼 그 자체에도 책임이 있지만, 진짜 '책임'이 짊어지는 것은 아이가 생기는 일일 것이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그만큼의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그 일이 벌어질때의 반응은 또 사람마다 달라서, 누군가는 그 책임을 자신의 생에서 자신보다 높은 가치를 매기고, 누군가는 자신의 생에서 그 가치를 자신보다 낮게 매긴다.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어떤 이들은 거룩하게 보이거나 안타깝게 보이고, 어떤 이들은 지독한 이기주의로 보이거나, 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한국 남자가 미칠 듯이 좋아서 산 건 아닐끼다. 당장 벌어 먹고 살 일이 막막하이까네 등짝 기댈 곳이 급하지 않았겠나." (128)

살면서 배워가는 것중에 하나는, 자식 가진 부모들도 결국은 '사람'이란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나 덜먹고, 하나 덜입고 하는 부모들도, 가끔은 그 부모라는 책임을 벗어나 한 남자, 한 여자란 것을 인정해 줘야 하는 것.. 그들도 한 개인이고, 인격체이기 때문에 감정이 먼저 앞설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모란 이름은 그들을 또 다잡게 만든다. 부모가 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부모란 책임 아래서 벗어나는 것 또한 아니다. 사람은 아이나 어른이나 외로운 존재니, 부모들이라 한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체념하기에 아이들은 너무 어린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서 돈벌러 갔다가, 외롭다는, 힘들다는 이유로...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은, 타자에게는 '살다보니깐, 외롭다보니깐'이란 말로 다소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를지언정, 그 부모 아래의 자식들에겐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들의 고생과 외로움은 이해받을 수 있을지언정, 그로인한 선택까지 모두 이해받을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면에서 본다면, 어떻게 해서든 부모가 함께 한국에 나가 있는것은.. 차라리 더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큰 문제를 안고 있지만, 누군가는 아이를 맡고, 누군가는 돈을 벌다가 아예 서로 영영 안보게 되는 것과 비교하자면 말이다.

 
 

이미, 그 시간을 거쳐간 어른들의 후회  

"아시다시피 저도 아들을 이곳에 둔 채 10년 넘게 한국에 나가 있었잖아요. 그때만 해도 뭐 알았나요. 목표한 걸 달성한 뒤 나중에 더 잘해 주면 되는 줄 알았지." (중략) " 가족이란 것이 10년 치를 하루아침에 보상받는 퇴직금이 아니잖습니까. 그날그날 건네고 받아 가는 용돈 같다고나 할까요.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이런 글귀가 있더군요. 세상을 가장 잘못 산 사람은 소소한 추억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고. 제가 요즘 그걸 뼈저리게 느끼며 산답니다." 정 씨는 성공과 자식은 별개인 것 같다며 그것을 이제야 깨달은 자신을 탓했다. "내가 낳은 자식일지라도 저절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질 순 없다고 봐요,. 설령 모자지간이라도 아래서 위로 돌탑을 쌓아가듯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필요할 테고요. 제가 실패한 것도 바로 그 점인 것 같아요." (240)  

10년넘게 한국에서 돈을 벌어와서 집단하숙집을 차린 한 조선족의 인터뷰 이다. 빚만 지고 돌아오는 경우나, 빚 때문에 못돌아오는 경우도 있는 반면 이렇게 가게를 차리거나 아파트를 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잘된 것처럼 보여지는 경우에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했다. 부모 자식간의 시간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는 것이다. 기초를 잘못다진 공사에 후에 그것을 보강하고, 다잡으려면 그 배만큼의 노력이 드는데, 하물며 사람이라고 예외겠는가. 부모들이 부재한 아이들은 바람앞에 놓여진 등불같은 존재다. 자신들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가장 멀리 있다면.. 그것이 과연 진실로 아이를 위한 일이 될 것인지는 고심하고 또 고심해봐야 할 문제이다. 체온의 따뜻함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잘 자라나주길 바라는 것은, 돈없이도 잘 자라나 주길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기대 아닐까?

비록 돈을 벌어 다시 아이들의 곁으로 돌아온다한들, 너무 늦어버리면 되돌리기 힘들다는 것을.. 가정이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하는 부모의 고백은, 모든것이 잘 된것 같음에도, 결국 아니란 것을 절실히 보여준다. 자식이 잘되라고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이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인지... 그들은 더 깊은, 더 현명한 고민을 했었어야만 했던 것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바로 딱 떠오른 한 장면, 처음에 언급했던 장률감독의 <두만강>이란 영화를 다시한번 이야기 하고 싶다. 벙어리인, 주인공 창호의 누이인 순희가, 그들이 도와주었던 탈북자에게 강간 당한 후, 한국에 돈벌러 나간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이다. 집에 혼자만 남아있던 순희는 엄마의 전화를 받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전화 너머에서 아무말이 없자, 엄마는 순희임을 알아차리고,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는지 물어본다. 그때의 그 순희의 표정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털어놓고, 울고싶은 순희가 아무말도 할 수 없는, 모든 설움을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고 있는 그 얼굴을 보며, 가슴속에 얼어붙었던 얼음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어쩌면 생에서 가장.. 엄마가 필요한 시기. 그 시기에 아이와 어른의 구분은 없었다. 그렇게 부모란 존재는 모두에게 필요함에도, 아이들은, 조금은 이해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책을 읽는 내내, 이 아이들의 부모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도,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돈 벌러 나간 부모를 비난함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갈때의 그 심정, 부모가 아닌 내가, 다 헤아릴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감히 그렇게 말해서도 안될지 싶다. 쉽게 내린 결정도 아니었을 뿐더러, 내 자식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기를, 좀더 좋은 옷 입기를, 좀더 따스한 곳에서 좋은 음식 먹기를.. 바라는 마음,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이다. 자신들이 살자고 나간것이 아닐진데, 아이들 더 좋게 키워보자고 나간 것일진데, 결과는 그와 굉장이 상이하단 말이다.  

그리고 나도 그 생각에 어느정도는 동의한다. 자식을 더 잘 키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하는 것. 어쩌면 그 부모들만큼 그것을 여실이 느낀 이들이 또 어디있을까. 다만, 한가지 이야기 하고픈 것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한국에서 어렵게 돈 벌어 '고생'하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로인해 아이들이 받는 '고통'은 더 큰 비극이란 것이다.

"이 모든 게 윗물인 어른들 탓입네다. 한국 바람, 간다 바람이 먼저고 자녀를 돌보는 일은 안중에도 없단 말입네다. 한국에 나가 일하는 어른들이 고생이라면, 이곳에 남은 자녀들은 고통이지요." (27)

한국에 돈을 벌러가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도 한국으로 향할 수 밖에 없던 것은,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돈벌어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희망이 약해 보였을 것이다. 희망이 작다는 것은, 언뜻 가능성의 이야기로만 보이지만, 다시 곱씹어보면 그만큼 더 큰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뜻도 된다. 부모들이 고생을 무릅쓰고 한국에 가서 일 하는 것을 감내할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낀다면, 더 굳게, 더 강하게 마음먹고 그 자리에서 있어주기를 감히 바란다. 중국에서 돈 벌어 키우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일, 그러니깐, 자식을 위해 한국에 나가 돈 벌 고생을 마다않는 부모라면, 그 마음으로, 그 사랑으로 중국에서 더 억척같이 살아내길... 다시한번 감히 바래본다. 

그래서 그들이, 한국도, 중국도 아닌..... 가족이라는, 세상서 가장 튼튼하고 아늑한 집 안에서 재회하길..

 

 

내가 감히 바라는 것..

교원들이 탄 버스에 막 오를 때였다. 천여 명의 학생을 어둠 속에 남겨 둔 채 도망치듯 어른들만 집으로 향하는 것 같아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150) 

그저 책을 덮을 수 밖에 없는 스스로가 멋적었다. 아이들을 뒤로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야만 했던, 작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을 도와줘야 하는걸까, 그런 기관을 찾아봐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해보다가 이내 관둔다. 그들이 동정이 필요한걸까?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한걸까? 그건 아닐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정과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살아갈 것들을 마련하지 못하고,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푼의 돈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좀 더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당위성과 근거를 찾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책을 다 읽고 맨처음 한 생각, 작가가 서문에서도 밝힌 것들이 바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이 한국에 머물고 있는 조선족 부모와 만주에 남은 아이들을 잇는 끈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고통 못지않게 한국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부모의 고통 또한 클 것이다. 나 역시도 처음엔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을 보며 노동의 대상으로만 여겼을 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그들과 벗이 되고부터는 깨달은 바가 많았다. 대구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이옥순 씨의 말처럼 중국에서 먹고살만 했다면 굳이 한국을 찾을 이유가 있었을까? 하여 나는 이 책을 통해 만주에 남은 학생들에게 부모님의 복잡한 사정과 말 못할 상황도 조금은 헤아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이 책을 가장 우선적으로,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이 봐야한다는,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다보니 서문에 있는 작가의 말을 못읽고 지나쳤는데, 책을 읽고 다시 앞부터 돌아보다 작가의 말을 읽고나니, 작가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서 일하는 조선족들에게 이 책을 보게됨으로써 혹 모두 마음을 다시 고쳐잡는다 해도 현실이란 그리 녹록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역할을 강요할 것이 아닌, 부모들과 아이들 모두를 동등하게 이어주길 바란다. 물론 어른들의 역할이 새삼 더 클 것임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역할과 현실은 또 차이가 있으니깐.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더 이해하다보면 언젠가 다시 함께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수반되어야 할 일이 어쩌면, 이곳에 있는 조선족들이 이 책을 읽는것으로 시작되야 할 것이다. 

작가는 만주에 남은 아이들에게, 부모들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주길 간청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이해하여, 아이들을 위해 좀 더 나은 선택을 다시 생각하고, 아이들도 부모들의 말못할 사정을 조금 짐작해주길 바란다.. 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발현되기 위해서.. 내가 조금 더 원대하게 생각하는 것은, 만주에 아이들을 두고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족 부모들을 다시 취재하여 책을 발간하고, 그것을 만주의 아이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그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책을 만나면, 다시 함께 할 그날을 조금 더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혹은, 그 날을 앞당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기다림의 과정이 조금은 덜 버겁지 않을까....

 

 

뜨고 지지 않는, 그저 한결같은 '가족' 이라는 품.. 

"가족이 그렇단 말임다. 상호 의지하는 집체란 말임다. 얼마전 사상품성 시간에 귀맛이당겨 새겨 둔 거이 있는데, 가족을 뚫고 들어온 쪼맨 틈이 인차 나중에 더 큰 괴멸을 불러온다고 했단 말임다." (44)  

가족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건 어쩌면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은, 가족을 와해하는 것은 큰 틈으로 시작하는게 아니라, 작은 틈이 점점 더 벌어져서 생기는 일임을, 이미 알고있던 것이었다. 몸소 체득한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어른들이, 완전한 가족의 요건을 다시 생각하며, 때를 놓치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아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소중한 사랑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단 것을 깨닫는다면.. 아이들은, 더 나은 가정을 하루빨리 완성하기 위해 부모들도 말못할 상황속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 만 더 이해한다면..

'가족'은 우리가 흔히 쓰면서도 그 뜻을 항상 헷갈리는, 혹은 잘 모르는 단어와 닮은 구석이 있다. 누구나 안다고 자부하지만, 의외로 아무나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단어. 혹은 안다고 해도, 제대로 익혀두지 않으면 가끔은 맞춤법을 헷갈리게 하는 단어들 말이다. '가족'이란 단어의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찾아 본다. 사전에서 찾아본 가족이란 단어에는 왠지 찬바람이 불어왔다.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최소한의 의미만을 규정했다. 최소한이자, 기본적인 의미의 가족안에 있지 못한 아이들... 조선족 아이들에게는 이상에 지나지 않을 그 뜻. 부모들이 그 '가족'의 진정한 뜻을 모른다고 폄하하고 싶지만은 않다. 다만, 그들은.. 그들이 안도하고 있는, 혹은 건성으로 지나친 가족의 의미를 다시한번 좀 더 헤아려서 그 뜻을 진정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혹 그 의지만 굳건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꽁꽁 얼어붙은 관계가 영영 돌이킬 수 없기까지의 시간을 조금 유예시킬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부모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아이들과 만나야만 할 곳은,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더욱이 만주도 아니다. 그냥 '가족' 이란 품이 아닐까. 

"그날은 왠지 모르게 엄마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어제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다." (221)  

 

아이들은 엄마라는 별이, 아빠라는 별이 더 높은 곳에서 빛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자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더 높은 곳에서 빛나기 위해 그들을 등지지 않고, 그저 눈이 닿는 곳에서, 한결같이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 큰 고생을 수반하는 일일지언정, 고통만큼은 아닐테니깐.

그러니까, 그들이, 뜨고 지지 않고, 아이들의 곁을 변함없이 지켜주는 별이 되기를.. 

혹, 어제도 없고, 오늘에도 없을지언정, 내일은 있어주길, 빛나주길. 너무 늦기전에..  

"어머니는 해도 달도 아닌, 변함없는 별이란 말임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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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현 2013-11-22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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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리뷰 - 이별을 재음미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 책 읽기
한귀은 지음 / 이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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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기도 한 연인들을 위한 날 중에 하나인 화이트데이. 그 즈음 나는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이 책을 읽고
집에서도 이 책을 읽는다. 책등아래 지하철의 긴 의자에는 남자한명을 제외하곤 연인들끼리 속삭이며 웃었다.
언젠가 봤던 우스갯사진을 보고선 피식하고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엔 침전물이 섞여있었다.
책을 펼치고서도 쭈볏했다. 그들이 이 책을 보면, 무슨생각을 할까.

그때의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서글픔이었을까 아니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자괴감이었을까. 절대적 진리는 그 어디에도 찾기 힘들겠지만, 어렴풋하게 이별이라는 안개속을 더듬어 가는 일. 이별한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 헤맸건만, 거친안개의 끝에서 비에 흠뻑젖은 자신을 발견하는 일. 이책은 그것을 위한 책이었다.

 
프롤로그에서 한귀은 작가는 세상의 사람들을 단 두가지로 정의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두 종류로 나뉜다. 실연당한 적이 있는 사람과 실연당한 적이 많은 사람."

실연이라 함은 명사로써 연애에 실패한 사람 이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실연이라는 것은 고작 이별의 테두리 안에 있을뿐이다. 이별이라는 단어를 실감하고, 그 단어가 지닌 무게를 알고나서 굳이 남녀간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수많은 것들과 이별하고, 멀어지고, 흐려지게 되지 않는가.

이 책은 총 32편의 문학작품을 가지고 그들의 이별을 진단하고 나아가 독자를 진단하는 책이다. (가끔은 영화도 언급된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크게 두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이럴 때이다.영혼의 치유 장소인 '책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할 때. BC1300년경에 책이 있는 곳, 도서관을 '영혼의 치유 장소'
라고 부른 사람은 이집트의 람세스 2세였다. BC 300년경 고대 그리스 도서관 입구에는 '영혼을 위한 약'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책 테라피, 문학 테라피, 라는 말도 책과 문학, 그것이 갖는 치유의 능력을 나타낸 것이다. " (12P)

"어쩌면 당신의 연인은 독특한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불행히도, 그 책을 읽을 줄 모르고 품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은 자기 자신조차도 하나의 책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연인에게 읽힐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별한 자는, 파지가 몇 장 섞인 불안정한 책이거나, 시인 기형도가 말했듯이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책일 것이다. 이제 당신이라는 책을 다른 책의 힘으로 다시 편집하고 제본할 차례이다." (13P)


이 외에도 왜 책이어야 했는지, 독자들이 그간 인식하고 있어도 언어로는 풀어놓지 못했던 이유들을 설명하고, 그 근거로써 32가지 문학작품을 제시한다.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의 '지금 여기'의 상태를 이해하려고 하고 그 상태가 말하는 바대로 응대하는 것에 가깝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들이 타자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타자의 언어와 몸짓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연인은 신비의 장소이다. 우리는 그 연인에 대한 탐험가가 되어야한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은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그/녀에게 적용하는 사라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것, 아무도 모르는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전경린 [물의 정거장]

 결국 "나는 너를 사랑해." 라는 문장에는 그것이 지시하는 직설적인 의미보다 더 강하고 절실한 욕망이 짙게 배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간혹, "나는 너를 사랑해."  라는 고백을 들을 때 순간 불편해지거나 두려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성복 [남해 금산]

 애도는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후기 프로이트는 <에고와 이드>에서 실연 후 발생하는 우울증을 병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질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별한 모든 자아는 우울증적이라고 말했다. 떠난 연인은 내 자아 안에 다시 자리잡는다.

 단언컨데, 누구라도 헤어진 연인을 완전히 잊지는 못할 것이다. 잔인하지만, 애도는 오랜시간 공회전만 한다. 애도해도, 애도해도, 애도는 끝나지 않고 영혼의 에너지를 조금씩 갉아먹는다 (...) 우리는 수많은 이별에 대한 애도의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하여 더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오래전 우리가 겪은 이별의 애도를 위한 것이다.

 


이 책은 서문에서 작가가 밝혔듯이,

이 책은 이별의 과정을 극복한 어떤 성숙한 사람이, 이별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 그러나 마침내 '애도'와 '희망'을 말하는 장에서는 점차 자존감을 회복하는 듯한 고요한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어쩌면 책 제목이야 말로 매우 적절하면서도 솔직하다. 이별에 관한 리뷰. 좀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별에 관해 리뷰하는 책이다. 심지어는 독자들이 이별을 중심화두로 생각지 않았던 책들에게서 까지 이별을 꺼내놓는다. 그래서 여기 32가지의 이별들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거미줄처럼 엮이어 있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져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책에서 다루고 있는 목차대로,

1. 이별의 전조와 실연의 정황
2. 부정과 슬픔의 정황
3. 사랑에 대처했던 우리의 자세
4. 분노하고 애도하라
5. 사랑을 말해본다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이별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이별, 가공된 이별까지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된다. 그래서 그 거미줄 같은 이별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탐색하게 된다. 거미줄이 그 복잡함만큼이나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랑과 이별이 제각각 이듯, 각각의 이유와 변명을 갖고 있듯, 닮기도 하고 닮지않은것 같기도 한 이야기들은, 종국엔 모두 그들의 이야기이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 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게된다. 그래서 나는 한 목차의 책에서 발견한 이별이 다른 목차의 책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느낀다. 

 때론 조금 위험함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읽지 않은 책들의 이별리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미리 그 책을 읽었다면 한귀은 작가의 이야기를 조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가끔은 상대적으로 전문적인 용어들을 바라보며, '이별의 인문학' (이란 단어가 있다면) 같은 책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인문학이 어떤책인가. 처음엔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내려놓고 난 후에는 그 묵직한 지식과 지혜에 스스로가 감탄하지 않은가?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시중의 다른 인문학책처럼 어려운건 절대 아니다. 그저 어떤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을 뿐) 이렇게 느낀바대로 나에게 이책은 사실 그렇게 친절하지만은 않았다. 아마 여타의 이별에세이보다 전문적인 지식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다소 어려웠다는 것은 그동안 너무 쉽게 바라봤던 것임을 증명하는건 아닌지. '이별'이라는 것은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절박한가' 의 문제일 것이고, 그러므로 쉽게 바라보든 어렵게 바라보든 그 모든이의 이별은 가치있다. 다만 누군가는 이렇게 감성으로서의 이별이 아니라 이성으로서의 이별을 얘기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이성을 거치고 다시 감성으로 들어가면 한뼘 성장해있을 것이다.

 여타의 이별치유서와는 조금 낯선 이 책에서 더욱 진한 향을 느낀다. 리뷰된 책들을 미리 읽어봤더라도 그정도로 깊게 들여다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그 리뷰된 책들을 다시 읽어볼때, 나는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이별과 상처는 다르지만 같았고, 그렇기에 어렴풋히 이해할 수 있을테니깐. 어쩌면 그동안 '이별'이라는 화두를 너무 낭만적으로만 생각해왔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의 목적은 세상에서 너무도 만연하고 쉽게 언급되는 이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옛 문헌들을 언급하고, 프로이트를 인용했으리라. 사랑과 이별은 어느순간, 어느장소, 어느누구에게도 존재했던 순간이니깐. 

 사랑이라는 매혹의 향이 다하고, 이별이라는 껍질을 벗겨내었을때, 비로소 자신에 대해서 발견하고, 껍질을 이해하고, 향을 다시한번 음미하기 위해서, 좀 더 구체적이었을 필요가 있었으리라. 세속된 언어와 비유로는 고만고만한 이별 토닥거림 밖에는 안되는 것임을 인지했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꿈이기를..' 하고 속삭여봐도 언제나 이별은 '현재'에 있었으니깐.

 많은이들이 언젠가의 눈부시게 행복했던 순간들의 대가를 치른다. 우리는 요금소에서 통행료를 지불하여야 한다. 누군가는 그런 대가 없이 종착지에 다다르기도, 그 길 중간에서 타인의 사고를 목격하기도, 혹은 당사자가 되어 영영 그 요금소에도 닿지 못하기도 한다. (물론 대가란 것은 다의적인 해석을 포함하고, 무리가 따르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사랑은, 아무 데서나 시작되고, 이별은, 어떤 곳이든 따라붙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에 대해서는 패자일 수 있지만, 이별에 대해서는 패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별은 순전히 내가 짊어져야 할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감당해야 할 일에, 내가 진다면,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태만이자 무능이기 때문이다.(270P) 

 이 <이별리뷰>는 우주라는 도서관에서 이별로 분류된 이야기들, 혹은 이별이 포함된 (사실상) 모든 이야기들을 해체하게끔 도와준다. 그렇게 그 대부분의 이야기들을 해체하고 있노라면, 자신의 사랑, 자신의 이별 그리고 결국은 자신 또한 해체됨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자신에 대한 진실은 아니더라도,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확률의 상승을 도모할 수 있다. (진실이란게 있다면) 간혹 거기까지 멀리 돌아간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이 지나온 길의 풍경을 오롯이 담아왔다는 것을 알게해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별에 대한 책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책이다. 이별은, 사랑으로 가는 가장 먼 길이기 때문이다.(2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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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류 시불류 - 이외수의 비상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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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언뜻 몇페이지를 읽었을땐.. 글과 그림은 참 가슴에 닿지만, 이거 너무 쉽게 읽히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봤다.
마치 넘처나는 자기계발서와 소설의 중간쯤 역할을 하고 있는건가하고 생각이 들정도로 책은 쏜살같이 읽히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독서량이 적으니, 이런책은 쉬이 냉큼 읽어버리고 다른책을 또 읽어야지하는 한심한 생각도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절로, 페이지를 쉬이 넘기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된다.
사랑, 꿈, 철학, 정치, 사회.. 모든분야를 총 망라하며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중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의 명쾌하고 유쾌한, 그리고 종종 가슴을 후벼파는 짧은 글들을 보노라면, 그리쉽게 읽어내기가 염치없다는 생각을 들게한다.
짧은 글은 긴 여운을 남기고, 희고 흰 여백만큼이나 깊게 사고할 것들이 넘쳐난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온 작가만이 해줄 수 있는 간단하지만, 쉽게 흘려보낼수 없는 삶에 관한 따뜻하고, 때로는 냉철한 시선이 마치 그 여백들이 거울이라도 된것마냥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여백이 많다고 그 여백들을 우습게 보지말자. 그게 바로 당신이 생각하고 명상할 '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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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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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이란 것은 크게 공간의 제약을 받는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방 한귀퉁이에서도, 일터에서도, 학교에서도, 복잡한 기차 플랫폼에서도 그리고 그 어디서라도. 실제로도 현실로서의 여행에 회의를 느끼고 책을 통해서 그곳에 대한 상상으로서의 여행을 즐기는 이도 있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나름의 ‘정신적 여행’ 을 하면서도 대부분은 저마다 인생에서 한번이상을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긴 인생속에서 어느 공간, 어느 사람에 머무는 것이 또 긴 부분이라고 친다면, 몸과 마음을 일상에서부터 떠나보내는 여행은 어쩌면 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 물론 역사상 지금까지도 여행하지 않고 많은 업적과 행복을 누린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고, 그런 논리에 입각한 ‘생각’은 앞서 말했다시피 시공을 넘어서 확장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여행은 확실히 그 생각들의 촉매제 혹은 변수의 역할을 한다. 그것이 왜, 어떻게 촉매제와 변수가 되고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이 [끌림]은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행했던 공간에서 그 이상의 공간을 본다. 낯선 어느 공간에서 마주하는 것은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뿐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봐왔던 자신의 공간을 넘어가보는 일이 된다.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될만한 공간에서 잊었다고 믿었던 그리운 이를 다시금 떠올리며 텅빈 가슴을 달래보기도 하고,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낯선 누군가를 동경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성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여행이란것은 개개인에게 바꿀 수 없는 추억이 되고, 삶을 살아가는 제 나름의 밑거름이 된다. 물론 그것은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힘은 당장 없을지라도,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세월을 타고 돌을 깎아 내리듯, 천천히 삶의 방향을 되잡아주기도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실제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은) 또한 처음 마주하는 공간에 대한 경이감을 탄생시키면서도, 자신이 잊고있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불현듯 꺼내보게 만든다.

...
가야지요.
차곡차곡 쌓은 환상도 펴보면서,
때론 그것들이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도 봐야죠.
...

 개인의 그런 경험들을 타인과 나누기 위해 누군가는 그 여행지를 추천해주고 설명해주지만, 누군가는 그 경험들을 시적 언어로 풀어놓음으로써 당시의 사색들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향유한다. 이병률 시인의 [끌림]도 두말할 것 없이 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인의 감수성과 성찰이 듬뿍 담긴 언어들의 향연에 취해있다가도, ‘아 언젠가는 저곳에 꼭 가보고 싶다, 나도 저런 낯선 장소에서 많은것을 생각해보고 싶다’고 느껴지니,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여행추천도서 또한 없을까 한다. 다만 실용적인 것에 중점을 둔 여행책들은 그 여행지들과 여행에 대하여 찬양하기위해 길게 길게 늘어놓는다면, 이 [끌림]은 짧고 간결하고 조용하지만, 그럼에도 낯선곳을 향한 여행의 즐거움에 대해서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삶을 사색하는 시인의 태도에서도 낯선 여행지의 매력적인 모습이 보여지고, 그런 낯선 여행지의 모습에서도 사색하는 시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여행이 우리에게 이렇다 할 생각들을 던져주지 못할때를 본다면(혹은 실제와는 다르게 그렇게 생각함에도), 시인의 감성과 성찰로 가득한 ‘낯선곳에 대한 안내’를 책 한권으로 어느정도 대신할 수 있는것은 참으로 저렴한게 아닌가싶은 생각도 든다. [끌림]은 작가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말그대로 더욱 ‘끌리게끔’ 아름다운 언어들로 표현해내는데, 책의 어느곳을 펴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글이 가득하고, 꼭 가보고 싶은 풍경이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리워지고, 때론 삶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찬 글과 사진을 보며 맘껏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를 둘러싼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어느샌가 책장을 덮으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그의 언어와 사진들이 한편의 외화를 보듯 눈앞에 떠오르기도 하며 낯선곳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을 불태우게 된다. 비록 나는 낯선곳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짓지 못한다해도 말이다.

...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

 그렇게 [끌림]에서는, 시인의 감수성과 낯선 체험이 가지는 힘이 조화가 되서 곳곳에서 시가 탄생한다. 공간속에서 시가 탄생하기도 하고, 시 속에서 공간이 탄생하기도 하고, 타인의 삶이 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곧, 그 시 안에 남겨두고온 자신이, 떠나보낸 자신이, 마주하게 될 자신이 서로 사이좋게 펼쳐진다.
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읽는 자신에 대한 성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여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책 한권으로 세계 곳곳을 누려본 듯한 정신적 충만함과, 그리고 그것이 봄날의 파릇한 새싹처럼, 때로는 가을날의 낙엽처럼 가슴을 저리게 만들어 간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끌리게끔’ 되어있다. 그의 가슴을 적시는 글들에 끌리고, 그가 가보았을 많은 공간들에 대해서 끌린다. 아마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향한 여행에 끌리는 것이지 않겠는가. 결국 시인 또한 외부로 향하여 나갈수록 자신에 대해서 안으로 향하게 되고, 그로 인해 무엇하나 버리기 싫은 사색들이 탄생을 하고, 그것이 우리를 또 세계의 낯선곳으로, 내면의 중심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깐 이 산문집은 결국 자신안으로의 여행안내서일지도 모른다.

...
그렇게 사랑은 아무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쏟아놓을 것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세상을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는 기적을
당신은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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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일이 쉬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다른 한가지는 가능 할 것이다. 우리 내면을 향해 좀더 여행하고, 다듬고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그 길을 누군가와 동행한다면 나와 그 사람을 둘러싼 그 세상은 분명 좀더 아름다운 향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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