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광기
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하던 일이 하던 일이다보니 정신과에 내원한 사람들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학생 시절에 파견 및 실습을 가서 접하기도 했고, 싸이코드라마Psychodrama를 보기 위해 국립정신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그러고보면 한 번은 개방 병동에서 사람들을 보았고, 다른 한 번은 폐쇄병동에서 사람들을 보았으며, 지역 병원에도 나가서 살펴본 적이 있으니, 깊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범위에 있어서는 정신과로 내원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조금은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 신분으로 모두 합쳐서 3주도 안되는 짧은 관찰이었기에 그 한계도 분명 있겠지만, 대충 경향을 살펴보자면 지역 병원에 내원하던 사람들은 주로 우울증이 많았고, 입원을 하던 사람들은 조현병, 그러니까 정신분열병으로 입원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 우울증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역학군이긴 하다. 보통 주요 우울증으로 입원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자살에 대한 생각을 몇 번이고 하거나, 혹은 자살을 실제로 실행해본 사람들이 입원하는 경향이 많은데, 물론 누구나 살아가다가 너무 우울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고, 반농담삼아 '죽어버려야지'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걸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반대로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자살을 시도했거나 자살 사고를 진심으로 강박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 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반면에 정신분열병이 입원한 사람들 중에 많다, 라는 것은 일견 당연하게 보이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흔히 '정신병' 이라고 이름 붙일 때 떠오르는 전형적인 증상들, 갑자기 웃거나 미친 듯이 소리지르거나, 혹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폭력을 휘두르는 (꼭 술에 심하게 취했을때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사람들이 주로 정신분열에 가까운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그런 사람들은 사실 찾아보기 드물다. 집 앞 슈퍼에 가는데 누가 칼을 들고 나를 찌를까 걱정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지 않는가. 그렇게 사회에서 별로 빈도가 높아보이지 않는데도 병원에서는 의외로 정신분열병 (이 책에서 '광기' 로 표현되는) 을 가지고 찾아오고 입원하는 사람들이 잦다.
물론 증세가 심하기 때문에 입원을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병원을 기준으로 사회에서의 빈도를 정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해석도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조용하게 정신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책, 광기에서는 '조용하게 미친' 이라고 표현한다.) 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해석말이다. 그렇게 조용하게 정신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그 무엇인가에, 편의상 표현하자면 '벽' 에 부딪혀 정신병이 '뻥' 하고 터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양성증상을 보이게 되고 (위에서 서술한 타인에게 이유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등) 결국 입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촉발된 정신병은 그 사람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정신분열병은 계속 진행하는 병이고 감히 말하지만 그 진행방향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는 않는다. 그 진행을 잠깐 멈추고 정신병적인 증상을 내재화시키는 경우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정신분열병이 완치가 되냐는 질문에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수 밖에 없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아니 그건 현대의학의 한계다. 저런 병에는 더 깊은 내재적인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교정한다면 나을 수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반론에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아마 내재적인 원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내재적인 원인이 실제로 교정가능한 일인가, 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애초에 내재적인 원인이 없이 그저 신경전달물질과 단백질 그리고 유전자의 이상때문에 생긴 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재적인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그 원인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사례 연구한 것을 보면 각 사람들마다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맞춤식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과연 치료자는 환자에게 얼마나 잘 맞춰줄 수 있는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맞춰준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처음 환자를 겨우 치료했다고 하자. 그 환자 한 명을 치료하고 난 뒤에는 (처음 환자에게 익숙해진 치료방식으로) 다른 환자를 더 치료할 수 있겠는가? 의학이 이런 문제와 반론에 대처하는 방법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료를 검증하는 것이고, 누구에게나 비슷한 병이라면 유사성의 법칙에 따라 기전을 예측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효율적이고 긍정적인 치료를 찾아내는 것이며, 그리고 실제로 내재적인 원인이 규명되었을때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일 뿐이리라.
이 책 광기, 의 첫머리는 책의 저자가 자신이 처음 상담소에 들어갔을때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며 시작한다. 저자는 처음 상담실에서 본 정신병 환자들이 대화나 일상생활이 너무나 '정상적이기에' 놀랐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치료사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는 이야기들을 해준다. 그리고 그녀도 다른 부분을 발견해내었다는 언급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 그 인상을 책의 끝까지 지우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마무리를 한다. 광기의(정신병의) 긍정적인 면을 재발굴하자, 라고 말이다. 사실 옳은 말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의 경험과 대조되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진료실에 앉아서 예진을 할 때의 일인데, 너무나 멀쩡해보이는 사람이 들어왔었다. 보통 정신병에 이환된 사람들은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특히나 물질 중독이 있는 사람들은 더 심한 면모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그런 환자들만 상대하고 교수가 있는 방으로 안내한 나는 심지어 나보다 더 멀쩡해보이는 사람이 들어오자 솔직히 놀랐다. 혹시 건강검진 받으러 왔는데 착각한건가? (정신과라는 이름은 정신건강의학과로 이름이 개명된지 오래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이야기를 해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는 나는 그 사람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증상을 들었다.
어떤 점이 나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세계' 였다. 정말 '세계' 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고정되고 조직화된 생각이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 세계에서 자신은 주인이고 모든 것의 주재자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자신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세계이다. 자신의 세계가 현실에 부딪혀 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자신이 믿는 사람의 충고는 당신의 세계를 약간 변화시킬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에서 말하는 그런 광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외부세계의 말은 그들이 만들어낸 장벽에 퉁, 하고 부딪혀 다시 메아리처럼 되돌아간다. 그런 점에서 분명 그들은 '정상적' 이지 않다. 요즘은 정상적이다, 라는 말이 도리에 획일적이다, 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분명 획일적이다, 라는 말과 정상적이다, 라는 말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정상적이란 말이 단순히 사회적인 규범을 존중한다, 라는 정도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재정의하면, 정상적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가 옳은지 그른지 (덮어놓고 난 저 사람이 싫다, 그러니 저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싫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옳은 판단이든 그른 판단이든 내린 뒤 그 의견을 개진하고 다시 수정하는, 그런 면모를 정상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윤리학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사람들 사이의 선을 사랑하고 신성함을 경배하고 어디에 치우치지 않게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닫혀 있는 세계의 주민은 그럴 수 없다.
책에서는 정신분열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이야기를 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정신분열병을 앓는 사람들은 예민하게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과 참을 구분해내고 그것을 지적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저자가 정신분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도된 경향이 크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치료자는 그 사람이 실제로 참 거짓을 구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덮어놓고 나에게 해를 끼칠까봐 의심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은 그냥 치료자의 이야기를 그냥 거짓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속마음과 다르게 말했는데 그 속마음을 그대로 집어내는 경우가 인상에 남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조용한 광기든 폭력적인 광기든, 어느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공통적으로는 자신의 '세계'에 상대방의 침입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이런 사례들을 가지고 정신분열병, 그러니까 '광기' 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재발견을 하자, 와 같은 말에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포용하자, 라는 말은 분명 옳겠지만, 다양성이 다양성이 될 수 있도록 영향을 주위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 적어도 이런 닫힌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서는 적용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현 상황에서는 광기가 창조성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렇기에 설령 지나친 양성증상이 아닌, 무반응 등의 음성증상만 보이는 정신분열병 환자라도 정신분석을 시도한다거나 하는 일은 사실 당황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약물만 던져주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 약물치료가 비인간적처럼 보일지라도 약물치료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런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치료한 사례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례들은 치료라기보다는 '안정화' 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안정화시켰는가? 이 책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광기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기괴한 망상이라도, 그 망상을 통해서 자신의 증상을 다스린다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말도 안되고 기괴하게 보이는 망상일지라도 사실은 스스로를 치료하기 위한 그런 기제라고 말이다. 옳게 들리는 말이고 옳은 말이지만, 이 말을 치료관계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이렇게 된다. '정신분열병 환자는 치료자까지 자신의 세계에 넣어서 광기를 조직화해버렸다' 라고 말이다. 결국 쉽게 이야기하자면 자꾸 밖에서 자신의 세계에 침범하려고 들자, 자신의 두텁고 단단한 세계를 아예 넓혀버렸다는 것이다. 저 귀찮은 치료자까지 나의 세계에 넣어버리자, 라고 말이다. 정신분석의 무가치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연구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유일한 치료 수단으로, 그리고 책에서 말하듯 이런 분석을 통해서 재발견을 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것은 약간 잘못된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광기가 창조성의 원천이라면 그 광기를 왜 정신분석하면서 치료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정신분석이 끝나고 치료되어 잠잠해진 광기는 과연 다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이 책에서 뒷부분에 실린 사례중에서는 환자가 치료하기 전에는 스스로가 위대한 문학작품을 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문학작품을 써내려가다가 정신분석이 진행되고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에는 전혀 그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모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일정 부분 받아들여서 판단해보면 분명 양성증상들을 드러내지 않고 잠잠하게 살아가는 '광기어린' 사람들은 그 자신의 광기가 연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창조성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성증상과 음성증상을 떼어놓고 병을 다룰 수도 없는 법이고, 그런 양성증상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약물 치료가 효과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약물치료가 그냥 획일화된 사람들을 양산한다, 라는 비난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갑자기 의자를 들고 던지거나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보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더라도 속으로 자신이 자신과 분리되어 자신의 생각으로 너무나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결국 우리는 이런 막연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약물치료와 면담을 함께 하면서 최대한 환자를 배려하고 치료하도록 하자, 라고 말이다. 아니, 우리가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가? 그것도 사실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피해를 안준다면 그냥 놓아두자. 도움을 원하고 괴로워하면 도움을 주자. 피해를 준다면 별 수 없이 교정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니,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덧붙이겠다. 우리는, 그러니까 정상인이라고 분류되는 우리는 그들, 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자격은 모르겠지만 기준은 있다. 우리가 '그들' 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점은 단 하나 뿐일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 를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몇 번이고 자신의 행동을 고착화시키고 반복한다. 물론 이렇게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로 정상인과 정신병에 이환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점을 지적받을 때에는 귀납적으로 그저 내가 관찰한 사례들을 이야기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런 점에 있어서는 이 책의 저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와 나, 둘 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또 처음에서는 조용하게 광기가 숨어 있던 사람들이 어느 '벽'에 부딪혀서 증상이 나타난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 경우 광기가 숨어 있던 사람들은 설령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병의 전구병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상인인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록 이런 의문들을 남겨두었지만 이 책의 저자와 내가 도달한 결론은 동일하다. 내가 앞서 제시한 마지막 질문에서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은 줄 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그렇다' 왜? '정상인' 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어도 정상인이 되기 위해서,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다시 영향을 주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우리가 그들을 쫓아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결론은 분명 이 '광기'의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이리라.
p. s.
광기는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