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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왜 분노하지 않는가.

 

 

 

 

 

1.

 

 

  2012년의 초입에 서서 2011년을 되돌아보면, 2011년 한 해는 무언가 ‘분노’로 가득 찬 한 해 같습니다. 나는 꼼수다, 라는 방송이 촉발한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분노가 가장 많았었던 것 같고, 특히 2011년 마지막에는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오던 김근태 전 의원이 사망하기도 했었는데, 그 사망의 원인에는 이근안씨가 한 고문의 후유증이 크게 차지하고 있으리라는 기사에 분노를 감출 수 없었던 한 해였었지요. 그런데 분노라는 감정은 사실 바람직하다고는 보기 어렵겠습니다. 우리가 분노하면 동시에 복수심도 느끼게 되고, 치욕도 느끼게 되는데,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치욕은 자신이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상상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고, 복수심은 타인의 슬픔을 통해서만 자신이 스스로의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슬픔이라고 합니다. 모두 슬픔과 관련되어 있는 감정들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좀 힘들겠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분노도 '슬픔' 이라는 감정으로 해석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언제 분노할까요? 네, 우리는 우리 뜻대로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좌절과 함께 분노를 느낍니다. 퀴블러 로스가 제시하는 사망을 받아들이는 5단계를 보면, 어떤 사람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을 때, 먼저 난 걸리지 않았어, 라고 부정합니다.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왜 내가 이런 것에 걸리지?' 라고 말입니다. 나는 전혀 원하지 않았는데, 내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런 일이 찾아오다니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는 분노를 피상적으로 본 것에 불과합니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분노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을 때 그런 일이 가능하지요. 의견을 충분히 개진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에 내가 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그 '무엇인가' 의 구성원들과 내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다시 말하면, 그 '무엇인가' 에 유리되지 않고 '나' 라는 존재가 있는 경우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무엇인가' 는 사회도 될 수 있겠고, 사람도 될 수 있을 것이며, 무엇이든 '나'가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나' 라는 존재가 지향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분노는 그 '무엇인가' 에서 우리가 유리되는 경우, 떨어져나가는 경우에 느끼는 슬픔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요. 이 문장을 조금 더 다듬으면 다음과 같이 진술 할 수 있겠습니다. 배제되어짐으로부터 오는 슬픔이 바로 분노다, 라고 말이지요.

 

 

2.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라는 책은 러시아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책입니다. 혹자는 그 책에서 '어머니의 사랑' 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은 '단순히 아들 하나만을 사랑하는 존재에서부터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대모(大母)로의 변모' 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다른 이는 '어머니에서 동지로의' 사회주의 동지 의식의 확산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여기서 언급하면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로 '배제' 에 대한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살짝 훑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인 닐로브나 부인은 망나니였던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과 자신 단 둘 뿐으로 하루하루 생을 영위해나갑니다. 그런데 아들 파벨 블라소프는 다른 젊은이들이나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수염도 얌전히 깎고 책을 읽는 등 모범적은 모습을 보이지요. 그런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던 어머니 닐로브나 부인은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아, 내 아들이 사회주의자구나'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부인은 위험하다며 아들을 말리는 것보다도 아들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들을 위해서 위험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사회주의에 대해서, 인민의 권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지요. 그런데 이들 모자(母子)외에도 또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아들의 동료인 우크라이나 인, 안드레이입니다. 안드레이는 닐로브나 부인에게 말합니다. 주위를 보면 으스스하고 더러우며 모두가 지쳐있고, 싸우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되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이상으로 인간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인간적으로 대한다면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그들은 야수처럼 덤벼들어서 살아있는 마음도 인정하지 않고 인간다운 얼굴을 발로 밟아버립니다. 그런 모욕을 참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한 층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껍질을 벗기려 들지요. 그래서 안드레이는 이야기합니다. 적과 친구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안드레이의 얼굴은 매우 슬픕니다. 왜일까요? 당연합니다. 앞서 정의한 개념인 배제되어짐으로부터 느끼는 슬픔인 '분노' 때문입니다. 안드레이는 그의 지향점을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는 현실과는 갈수록 멀어져만 가고, 현실에서는 그 이상은 결핍되어있으며 그 자신은 다른 계급들에 의해서 강제로 현실로부터 분리되어버린 상태입니다. 더 나아가서 모두가 화합하는 사회를 그리는 그 자신마저도 그 화합하는 사회를 위해서 자신을 가로막는 이들을 격리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제가 격리를 가져오고 격리가 결핍을 가져오는 현장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현실, 그 결핍은 끊임없이 그를 꿈꾸게 만들고, 동시에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하게 하여 좌절을 가져오고, 그 좌절을 통해 분노를 키우며, 이윽고 그 분노로 그들의 적에게 복수를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적의 슬픔으로는 자신의 슬픔을 가실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 그러니깐 안드레이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원했던 세상은 그들의 적마저도 슬픔이 없는, 모두가 공평한 세상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3.

 

 

  이제 이 책 '왜 분노하지 않는가' 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사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권이 실현된 궁극적인 이상사회는 바로 윗 문단에서 이야기했던 저 우크라이나인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어느 누구도 배제당하지 않고 이상이 결핍되지 않은 상태에 놓인 사회겠지요. 책에서 소개하는 인권선언이 바로 그 사회의 초석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책에서는 루스벨트가 말한 4가지 자유를 언급합니다.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경제적 결핍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저자는 환경의 자유를 더하여 5가지 자유를 이야기하고, 그 자유를 이루게 되면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권에 대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언론의 자유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장 우리 사회만 생각해봐도, 언론의 자유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 폐쇄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훨씬 나은 나라겠지요. 하지만 언제나 이러한 자유는 ‘훨씬 더 나은’ 국가들과 비교를 해서 성취되어야 될 것이지, 절대 ‘지금 보다 못한’ 국가들과 비교를 해서 머무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자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의 자유? 물론 우리나라는 아직도 박해가 일어나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에 놓여있지만, 국가 내 소수종교들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경제적 결핍의 자유겠지요. 제가 이렇게 글을 컴퓨터에서 두드리는 동안 편의점에서 알바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20대 학생들이 분명 있을 것이며, 또한 제가 힘들게 일을 할 때 큰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아 비서의 보고를 받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요. 물론 이 책에서도 언급하는 것이지만, 방금 말한 것처럼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고 앉아서 비서의 보고를 받으며 돈을 버는 사람들이, 사실은 실제로 정말 열심히 일을 해서 그 자리에 편하게 앉아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게으른 사람들에게까지 부가 돌아가는 것은 사실 일에 대한 모욕일수도 있을 것이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정말 게으른 사람들은 그리 자주 눈에 띄지는 않으며, 사회의 벽에 부딪혀 쓰러지고 좌절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 열심히 일을 하면 너희들도 저렇게 잘 살 수 있어’ 라고 속삭이는 것은 마치 마약을 투여하면서 불치병이 낫는다고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실제로는 출발점이 다른 경우가, 주어지는 기회가 다른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이 책은 이런 자유를 신장시키고 인권선언을 세계 어디에서든 존중받는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바로 2048운동이지요. 이 책에서 주장하는 2048운동은 1948년 인권 선언 초안을 만들었던 해로부터 100주년이 되는 2048년까지 ‘인류가 미래의 전쟁을 방지하고, 가난을 사라지게 하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조건을 창조할 수 있는’ 합의로 나아가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책에서 세계 모든 사람들을 인권에 대해서 교육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언급합니다.

 

 

4.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의 실망스러운 부분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2048운동의 핵심이 되는 것으로 2048운동 웹사이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www.2048.berkeley.edu가 바로 그것인데, 이 사이트로 들어가 보시면 버클리 법대의 홈페이지가 나올 뿐, 다른 사이트가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월드 와이드 웹(www)을 빼면 더 가관입니다. 백지 상태로 ‘no real content for now' 라는 문장만 나오고 있지요. 책에서는 이 홈페이지가 운동의 핵심이며 이를 이용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수많은 의견을 집적하겠다고 말하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장밋빛 미래는커녕 운동 자체도 흐지부지되었다고 보는 게 옳은 이야기겠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책에서 또 언급하는 것으로는 비영리기업과 영리기업의 합작이 있습니다. 영리기업이라고 해서 꼭 나쁜 것이 아니며, 비영리기업과 마찬가지로 인권 신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가 이 책의 주장인데, 사실 이 문장자체로는 옳은 문장입니다. 비영리기업이라고 해서 꼭 좋은 기업은 아닐 것이며, 영리기업이라고 해서 꼭 나쁜 기업은 아니겠지요. 이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정말 그런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영리기업이 항상 좋은 기업이 될 수는 없겠지만, 보통 인간이 타락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돈, 자본일 테고, 그 자본과 항상 상호작용하는 영리기업이 항구적으로 인권 신장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영리기업의 목표는 그 단어에도 들어있듯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니깐 말입니다. 저자는 국가에서 영리기업이 인권 신장 운동에 참여하는 만큼 금전적 이익을 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만, 그렇다면 그 나라의 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국민의 세금이 국가의 주 수입원이라는 것을 알며,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돈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의 일자리가 많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도 알 것이며, 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역에서 이익을 보아야 한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무역에서의 흑자가 국가의 수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흑자를 만드는 것은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지출보다 수입이 많으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영리기업들이 채찍을 들고 정리해고를 해가며 국가의 수입을 올리는 동안, 소위 말하는 양심적 영리기업들은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겠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등의 ‘책임감 있는’ 갑부들과 다보스 포럼의 이야기도 이 책의 문제점이라고 들 수 있겠습니다. 다보스 포럼은 정, 재계 수뇌들이 모여서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포럼인데, 이 책에서는 다보스 포럼을 마치 ‘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모인 고위 관료들이 머리를 짜내는’ 그런 모임이 될 수 있으리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략 ‘이들을 강제력을 가지는 인권을 지향하는 운동의 잠재적 협력자로만 생각해야 할 것’ 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 책 외에 경제에 대한 다른 책을 보면 다보스 포럼을 악의 소굴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비싼 사교클럽에 지나지 않고, 구체적인 의결은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 그런 포럼이라고 말이지요. 사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지금껏 구체적 의결을 내린 적도 없는, 그리고 미국의 입김이 매우 크게 작용하는 그런 다보스 포럼이 잠재적 협력자라도 될 수 있을까요? 이미 한 국가의 영향이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크다는 점에서 자연스레 인권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것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등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도 잠재적 협력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 책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책에서는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으며 그저 흐지부지하게 웹사이트에서, 그것도 지금은 운영도 안 되고 있는 곳에 의견을 올려 달라, 라고만 이야기하고 있지요.

 

 

5.

 

 

  위와 같은 이유로 사실 이 책은 그리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에게 하나의 시사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지요, 분노는 배제됨으로부터 오는 슬픔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감정, 맹자의 말을 조금 빌려오자면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슬픔의 원인이 타인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들어맞겠지만, 설령 본인에 기인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겠지요. 물론 분노는 말씀드렸다시피 바람직한 감정은 아니겠지만, 이는 반대로 보면 도리어 바람직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타인과 함께 되고자 하는 욕구, 배제됨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는 앞으로의 사회에 있어서 인권 신장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다섯 가지 자유를 떠올리게 하고,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의 사례를 떠올리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분노를 느끼게 하고, 그 근원이 되는 슬픔을 느끼게 하며, 이윽고 다른 사람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 세우는 그런 일련의 일들의 초석을 쌓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이 책에서 언급하는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가 되겠군요. 그래서 이 책은 이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왜 분노하지 않는가?’ 앞으로 이루어나가야 할 일은 많겠습니다만, 할 일이 많다고 그저 던져두기만 한다면, 천릿길이 멀다고 한 걸음조차 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분노하라, 분노가 우리의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p. s. 으아.. 힘들다... 사실 이 책은 0.5권 정도...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가 1.5권이니깐 합쳐서 두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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