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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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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은 정말 자극적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저런 제목,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보면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그러니깐 한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현재가 그리 밝다고 이야기하기는 곤란한 상황이기도 하니깐 말입니다. 사실 이런 제목을 가진 책은 그 의도가 뻔하다면 뻔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과 독일의 비교를 통하여 더 나은 길을 모색한 후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도를 품은 제목이기도 하니깐요. 그런데 사실 저 제목과 책의 내용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끝내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것과는 이 책의 저자와 책의 내용은 실제로 차이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 책의 원제는 ‘Were you born on the wrong continent?'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Wrong continent를 언급하는 부분은 책의 마지막에 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의 선조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후 “헉, 내가 엉뚱한 대륙에 있다니!” 라고 깨닫고는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 책의 원본을 읽어보지 못해서 실제로 저 부분이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되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기 저 문장의 엉뚱한 대륙이라는 문장이 Wrong continent을 번역한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혹시나 Strange continent라고 썼을까요? Bad continent라고 썼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낮아 보이는군요. 저런 단어라면 충분히 다르게 번역할 수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굳이 엉뚱한 대륙에 선조가 있었다, 라는 말을 한 저자의 의도입니다. 저자는 끊임없이 이야기하지요, 자신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미국이 좋다, 미국을 사랑한다, 난 애국심이 넘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교묘하게도 저런 부분은 그저 실제로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공감하면서도 괜스레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느라 괜히 과장스럽게 미국에 대한 애정을 주장하는 것이다, 라는 느낌을 받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가 과장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치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선조가 엉뚱한 대륙(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본다면 이 책의 주제는 일전에 읽었던 ‘불안의 시대Zero-sum future'의 주제였던 ‘미국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도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의 변주가 되어버립니다. 즉, 나는 미국이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상황이 좋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미국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외부의 모델의 장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 모델을 모색해보니 아, 독일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라는 이야기이지요.

 

이 책의 저자인 토머스 게이건은 노동전문 변호사인데 미국식 자본 경제 모델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피자 한 조각을 근무시간에 먹었다고 쫓겨나며, (기업에서는 그 사람은 근무시간에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분류되어있다고 주장했습니다만) 넥타이 색이 이상하다고 해고당해도 뭐라고 호소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고 하지요. 사실 미국에 관한 이 저자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미국은 마치 괴물들과 살인마들이 날뛰는 세상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반면에 독일식 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두 눈에서 반짝 빛을 내듯이 모델의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독일에서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노동자가 얌체처럼 노동조합의 장점을 빼먹으려고 들어도 그건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에 수호해주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자는 다시금 감명을 받지요, 와 독일은 정말 대단한 나라다. 이런 것을 미국이 본받아야 되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자신의 입장을 강변합니다. ‘나는 유럽식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로 시작되는 문장은 미국에 대한 불만과 독일에 대한 예찬으로 끝이 납니다. 아마 저자는 지겹도록 ‘그럴 거면 독일에 가서 살지?’ 하는 말을 들었으리라 봅니다. 이런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자신은 다양한 제품을 고를 수 있는 미국이 좋고, 또 독일에서 이미 태어나지 못한 이상 어쩔 수 없다’ 고 이야기하지요. 글쎄요, 독일이 그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 때문에 차별을 했었던가요? 저자가 쓴 이 책에서는 독일은 터키인 노동자들에게도, 무슬림들에게도 아무런 차별을 가하지 않고 노동시위로 함께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저자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그런데도 여전히 미국인임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저자는 결단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미국에서 테라스에서 시내 전경을 쳐다볼 수 있는 호텔에서 묵으려면 1000달러가 필요하지만 여기 취리히에서는 125달러밖에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숫자를 유심히 따져보면 125달러면 환율을 따지면 우리나라의 돈으로 15만원 상당에 해당합니다. 하룻밤에, 다른 식대나 부대비용을 모두 제외하고 호텔이 15만원을 주고 묵는다, 라니.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 와 닿지 않습니다. 외부에 일 때문에 나가게 되었을 때, 본인의 돈으로 15만원 상당을 지불하고 하룻밤 묵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적어도 그의 의뢰인들은 저렇게 돈을 주고 묵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15만원이 대수인가, 특별한 날, 휴가를 맞아서 쓰는 게 무슨 잘못이 되는가, 그가 무슨 성인군자라도 되나? 라는 반론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15만원 상당을 쓸 수 있는 상황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변호사이고 미국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 돈을 ‘125달러 밖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가 만약 독일에 건너간다면, 그는 그가 그토록 책에서 그토록 애정을 보이고 있는 제조업에 선뜻 뛰어들 수 있을까요? 구두를 만드는 장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장인이 되었을 때 ‘125달러 정도 밖에’ 안되는 호텔에 휴가를 즐기러 묵을 수 있을까요? 그는 그저 미국이 더 잘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미국 본국에서야 이 책이 그 효용성을 다할 수 있겠지요. 적당히 쓰고, 정곡을 찌르고 사회 비판을 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실제로는 잘 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내심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번역된 책을 볼 때에는 그저 복지가 한참 논쟁이 되니깐 적당히 복지라는 이름에 맞춰서 포장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이 책은 전반적인 복지에 관해서 다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미국’을 위한 복지와 이상적인 모델을 기술해놓는 것이 그 목적이니깐 말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저자가 책에서 드는 근거는 ‘내가 노동변호사니깐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이고, ‘내가 아는 신뢰할만한 사람에게서 들었다’ 로 일관합니다. 종종 인용하는 도표에도 문제점이 있는데, 청소년의 이야기를 하면서 소아의 도표를 인용하기도 하고 최상류층의 소득 분포를 들다가 어느 순간 최상류층의 ‘바로 밑에 위치한’ 계층의 이야기를 꺼내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독일에서보다 미국에서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니깐 말이지요. 미국은 ‘전기톱 앨’이 살인마처럼 톱을 휘둘러 사원들을 동강내고 구조조정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지요. 일전에 A대학에 다닐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 교수는 다른 B대학에 대해서 이렇게 촌평했는데, 다른 것들은 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다면서, B대학이 총장이 책임지고 사퇴하면서 모든 비정규직을 잘라버렸다는 일화를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때가 3년을 고용을 하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승진시켜야만 한다는 조항이 막 생길 때였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만, 당시에 들을 때에는 별 생각 없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본주의아래에서 하나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상품이 되어가고 이윽고 인간소외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저자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미국이 오늘날 경제위기를 맞고 힘든 시기를 겪게 되는 것은 무작정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늘려왔던 것에 기인하며 그렇게 노동의 유연성을 통하여 얻어진 값싼 노동력은 당장에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고급인력이 되지 못하고 점차 독일과 같은 고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비싼 노동력들에게 밀리게 된다, 라는 통찰을 보여주지요. 결과적으로 독일은 주위에서 ‘그대로 가다가는 망할 거야, 무너질 거야’ 라는 이야기를 하여도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게, 그리고 그들 직업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엄격하게 관리하고 노조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은 사회 어느 계층이든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쫓겨날 거야’ 라는 생각에 휩싸이게 만들어 자발적으로 톱니바퀴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독일에서는 그들 스스로가 우리는 전문적인 일을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며 숙련된 노동자의 경우에는 높은 임금을 받지만 미국에서는 절대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우선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책에서 3차 산업보다도 2차 산업인 제조업을 강조한 것도 이 제조업이 인간 자체의 감정이나 태도 서비스를 상품으로 삼는 3차 산업에 비하여 훨씬 인간적일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겠지요. 3차 산업에서는 우리는 비록 힘든 일이 있어도 계속 웃고 있어야만 하지만, 인간 본연의 감정 자체마저도 규제당하지만 적어도 2차 산업, 특히나 독일이 그 주축으로 삼고 있는 제조업의 경우에는 그래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다보면 오늘날에도 유효한 담론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장이 소외시킨 수많은 약자들과 노동자, 그리고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무너진 수많은 가정들은 ‘난, 쏘, 공’이 쓰여질 때에 비하여 현재에도 거의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떤 부분에 이르면 더 심해진 면모도 보이기도 합니다. 그저 극복의 담론들만이 오늘날까지 논의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 작품을 처음 읽은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제 눈을 끌어당기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지섭’입니다. 소설 상에서 가장 높은 학벌을 가졌고 부유층의 가정교사로 들어갔지만 그는 노동자들의 곁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사실 눈만 돌리면 그는 그냥 별 문제없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테지만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은 그의 손가락을 잃게 만들고 코뼈를 주저앉게 하였습니다. 사실 이 책이 ‘미국 내’에서의 복지사회에 대한 담론을 다루고 있다고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복지사회에 대한 담론은 어느 국가에서든지 활발한 것이 좋지요. ‘미국에서의 복지’가 복지가 아닌 것도 아닐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복지’는 ‘세계의 복지’ 혹은 ‘우리나라의 복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복지 담론과 자본주의 모델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저기 저 ‘난, 쏘, 공’에 나오는 지섭 같은 인물이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집니다.

 

 

 

 

 

같이 읽어보면 괜찮은 책 :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인지자본주의, 불안의 시대[애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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