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너무 바쁘네요, 에휴. 

 

신간 평가단을 하면서 고민이 들 때가 있다면, 바로 이런 때입니다. 정말 가지고 싶은 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지금 구입해버리면 혹시나, 정말 혹시나, 이 책이 신간평가단의 리뷰 대상 도서로 뽑히면 어쩌나, 하는 그런 때이지요. 아니 그러면, 비싼 돈을 주고 샀는데 한 권을 덤으로 얻은 것이니.. 책 선물을 본의아니게 하게 되는, 하하, 일이 생기게 되버리지요. 욕심쟁이라면 분명 욕심쟁이겠습니다만, 언제나 책에 관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책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되더군요.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도서광, 독서광이 아니라, 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인데, 이 책을 추천하기 위해서 한 달을 넘게 기다렸습니다. 풋. 물론 선정될 가능성은 그리 높아보이지는 않지만 단순히 선정되고 안선정되고를 떠나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그림 자료들과 중세 시대의 시를 읽는 듯한 유려한 문장, 거기에 역사적인 사실과 얽혀있는 구성은 충분히 구매할 만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가만히 제가 추천하는 책들을 스스로 돌이켜보면, 마치 양자역학에 한이 맺힌 것처럼 양자 역학에 관련된 도서들을 추천을 하곤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어려운 철학을 쉽게 풀이하는 책들이 인기를 얻는 것 처럼, 이런 어려운 양자 역학에 대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념서가 눈에 띄면 이렇게 주저없이 추천을 하게 되네요. 사실 저자로 되어있는 히포패밀리, 라는 그룹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지만, 과학분야에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곽영직 교수가 이 책을 감수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내용이 틀이 잡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책을 추천하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생각할 때 책을 직접 읽은 후 장단점을 따져서 추천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요, 적어도 어느 정도 훑어본 후 저자의 다른 책들과 겹쳐서 생각을 전개하고는 추천하는 것이 중책이며, 그저 출판사의 소개글이나 다른 사람의 글에 혹하여 추천하는 것을 하책이라고 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소개글을 읽고 감명을 받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런 감명을 받는 것과 책을 추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지요. 사실 저도 저렇게 방법을 나누어놓으면 상책으로 추천한 경우는 사실 거의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가 중책, 혹은 하책이었지요. 그러나 하책이라도 급이 있는데, 그 책의 저자를 어느 정도 알고 저자의 책을 읽어본 경우, 그 경험을 통하여 책을 추천하는 것은 하책에서도 상위의 급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이 책을 지금 추천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저자 정창권 교수는 '거상 김만덕'의 원저자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그의 강의는 '스토리텔링' 을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스토리텔링이 무엇인고 하니 말그대로 어느 사실을 전달할 때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유기적으로 전달되어져야만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고보면 우리는 어떤 등장인물이 있고, 그 등장인물들이 얽혀서 줄거리를 이루는 그런 형식을 받아들이기 쉬우며 기억에도 오래 남는 경험을 많이 해왔었습니다. 그 스토리텔링 기법을 약자들에게 적용시켜서 연구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라고 짐작됩니다. 장애인들, 사회적 약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펼쳐나가는 역사가 정창권 교수의 스토리텔링 능력과 만나서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이 될지 궁금해집니다.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저 유명한 문구를 들어보지 못한 분은 그리 많이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무한도전에서 독후감 특집을 할 때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나왔던 바로 그 오펜하이머!) 맨하탄 계획에서 핵무기 개발을 성공한 후 후회감과 자괴감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여 내뱉은 말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저 문장은 본래 바로 마하바라타, 인도의 매우 유명한 경전에서 따온 말입니다. 현재에도 마하바라타는 라마야나와 함께 인도인들의 의식을 이루고 있는 주된 토대이지요. 이 마하바라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이 바로 바가바드 기타, 크리슈나가 아르쥬나를 전쟁에 나가도록 설득하는 부분이며, 이 부분은 인도 철학의 정수라고 일컫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각으로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 매우 불합리한 점이 많습니다. 바가바드 기타 뿐만이 아니라 마하바라타 전체를 읽으면 주인공보다는 도리어 주인공에 적대하는 세력이 훨씬 더 멋지고 안타까워보이기까지 하지요. 또한 신화가 신화일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한 대극으로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욕망은 이야기를 낳고 전설을 낳으며 신화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신화는 집단의식을 통해서 다시금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이런 순환에서 신화를 어긋나게 해석하는 사람은 돌을 맞고 쫓겨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같은 방식으로만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같은 생각만 순환된다면 집단은 도태되고 광신적인 열기에 휩싸일 뿐이겠지요. 그래서 이 책은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라고 제안하는 듯 합니다. 바가바드 기타의 후광을 과감히 벗겨버리고 그 속에 내재한 전복성에 현실성과 비판성이라는 두 무기를 가지고 접근하자고 말이지요. 그래서 저자는 과연 어떤 결론에 이르렀을까요, 저자가 택한 신화의 전복은 과연 저자의 의도대로 잘 이루어졌을까요? 

 

  

이 책을 추천할까, 말까 고민을 했습니다만 결국 이렇게 넣게 되는군요. 사실 저는 제임스 조이스의 글은 '피네건의 경야' 앞부분 조금, (사실 이건 어디에 사는 어느 누구라도 앞부분 조금 이상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하.) '율리시스' 일부, 그 외에 단편들 몇 개 정도만 읽어보았고, 제가 읽은 것들로만 판단하건데 정말로 '율리시스' 가 20세기 최고의 역작인지, 저자인 제임스 조이스의 역량이 그렇게 뛰어난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단편들은 뛰어난 구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단편들이 다른 작가들에 비하여 아주 뛰어났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하네요. 물론 이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 책이 제임스 조이스에 관한 평전이었다면 추천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책의 표지를 처음 본 순간 제 뇌리에 떠오른 것은, 니체의 곁에는 루 살로메가 있었고, 샤르트르의 곁에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다 보면 남성은 항상 여성이 옆에서 지지해주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성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둘을 묶어주며 둘을 둘 이상의 역량을 드러내게 해주는 것이겠지요. 물론 루 살로메나 시몬 드 보부아르가 각각 니체와 샤르트르를 사랑했었냐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하. 적어도 이 책의 주인공인 노라도 조이스는 사랑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고보면 플라톤은 그 고대에 남자와 여자의 본성, 그리고 사랑의 기원에 대해서 '향연' 에 이런 말을 남겼다지요, '태초에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었는데 반으로 나누어져 지상에 내려왔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반쪽을 갈구한다'

 

  

 

으아......... 그럼 좀 여유가 생기면 다시 찾아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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