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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데리다 평전.
 

 


1.


  몇 년 전 개정된 고등학교 수학 교과과정은 이런 저런 논란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인문계열을 공부하는 사람은 더 이상 ‘미분과 적분’ 과정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 외에 소소한 변화들도 있었는데, 이름이 바뀐 것도 들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공통 수학’ 이라고 불리던 과목은 ‘수학 10-가, 수학 10-나’ 로 개정되었습니다. 중학교 교과 과정도 8학년, 9학년으로 바뀌었기에, 연속성을 중시하는 ‘수학’ 이라는 과목에게는 제법 적합한 변화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학교 수학과 고등학교 수학이 별개가 아니고, 마치 계단과 같이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저 ‘수학 10-가’와 ‘수학 10-나’의 단원 중 특히 제 눈을 잡아끌었던 것은 바로 ‘자취의 방정식’ 이라는 단원이었습니다. 자취의 방정식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취에 대해서 말을 해야겠군요. 자취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어떤 조건이 주어졌을 때 그 조건을 만족하는 점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취의 방정식은 그 자취를 나타내는 식이 되겠습니다. 애초에 자취를 그려내는 저 ‘조건’을 식으로 표현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네요. 골치 아픈 단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자취의 방정식을 열심히 공부해두면 그 외에 다른 곡선들의 방정식을 기하학적으로 좌표 상에 그려내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고 여겨져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저는 그리 수리에 밝지 못해서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요.

이 ‘데리다 평전’에서 제가 계속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자취의 방정식’ 이었습니다. 데리다 본인을 미지수 X로 두면 그 미지수 X의 조건은 주변 환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데리다가 유대인이었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사람이었으며 정작 본인의 국가에게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그 외의 다른 국가들에게서 ‘해체’ 라는 신선한 개념을 퍼뜨린 사람이라는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이 ‘데리다 평전’은 감히 말하건대 자취 그 자체와 같아서 저 환경들 각각에 대한 미지수 X의 점들의 궤적을 그려나갑니다.


2.

  데리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실 다른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인 프로이트를 다룬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는 프로이트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문학의 비판적 읽기에 대해서 설명하더니 데리다의 ‘산종(dissemination)’ 개념을 가지고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시의 저는 왜 저자가 데리다 이야기를 가져왔는지 전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책을 읽어도 쉽게 이해는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덕분에 저는 데리다의 산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됬지요.

산종은 하나의 기호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로 모든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절망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그 의미가 시작합니다. 저 기호는 문자가 될 수도 있고 언어가 될 수도 있으며 몸짓도 될 수도 있겠으며 혹은 간단하게 언어학자인 소쉬르가 도입한 개념인 ‘기표’ 로 치환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기표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는 일종의 도구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기표를 어떤 속이 빈 실용적인 항아리라고 생각해봅시다. 감상을 위한 미술품으로서의 항아리를 제외하면 항아리의 역할은 내용물을 보존하거나, 옮기는데 있다고 할 때, 그 항아리의 내용물을 우리는 ‘기의’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항아리에 어떤 내용물을 집어넣을 때 이 항아리에는 반드시 이것만 집어넣어야 돼, 라고 생각하면서 집어넣지는 않지요. 다만 어떤 항아리에 생선을 넣었다면 그 항아리에 다른 내용물, 예를 들어서 과일을 넣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넣자면 넣을 수는 있지만 넣었다가 비린내 등이 과일에 묻게 될 테니깐 말이지요. 그래서 과일을 넣기 위해서는 다른 항아리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단어도 이런 빈 항아리와 내용물의 관계와 비슷해서 각각의 기표는 그 기의에 적합한 쪽으로 일종의 사회적 약속처럼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이 예를 조금 확장시켜서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문장은 정말 명확한 ‘저건 연필이다’ 등과 같은 문장을 제외하고는 단지 하나의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해법에 따라서 수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 문장이 단순히 단어들의 연쇄에 불과하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물론 각각의 문장에 가장 최적화된 의미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비린내가 나는 과일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생선을 담은 항아리에 과일을 넣을 수도 있지요. 자신은 이렇게 읽었는데 이 의미가 정말 옳지 않느냐,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르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산종의 의미가 발현됩니다. 산종은 씨를 뿌린다, 라는 의미 그대로 하나의 기호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 방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통해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것이지요. 문학작품에 적용하자면 일부러 ‘낯설게 보기’ 를 통해서 그 작품의 새로운 가치를 이끌어내는 행위를 포함하겠습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모든 해석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는 결국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결국엔 처음 극복하고자 했던 명제와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됩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하나 더 개념을 가져옵니다. 바로 대립이라는 개념입니다.


3.


  예를 들어서 어머니, 라는 단어가 있다면, 우리는 저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데리다는 어머니와 대립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대립이라는 개념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며, 문맥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마주 서는 개념입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 단어의 대립 쌍으로만 그 의미가 정립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머니와 대립하는 단어는 아버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와 대립하는 단어는 자녀를 들 수도 있겠습니다. 또 그 자녀들과 대립하는 단어로 그 자녀들의 친구를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연쇄가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끝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와서 원환의 순환이 반복될 테니 말입니다. 이는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과 유사합니다. 그러고 보면 데리다에게 큰 영향을 준 사상가들을 들라면 니체, 하이데거, 프로이트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니체나 하이데거, 프로이트의 사상을 답습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저 셋의 영향을 받아서 ‘기호는 오직 실종된 신, 부재하는 존재와 같은 비현전적인 중심 또는 기원만을 명명할 수 있다고’ 말하게 되었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재하는 존재’는 항상 도래를 예기하지만 그 도래는 무한히 지연되며 기호의 의미는 그 기원에 무한히 접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데리다의 가장 중심적 사상인 차연(differ'a'nce)입니다.

차이와 지연의 합성어인 차연은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수학적인 개념 중 ‘점근선’ 이라는 개념이 있지요. 고등학교 때 쌍곡선의 방정식을 배우면서 점근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한 곡선이 있고 그 곡선을 따라서 점이 무한히 뻗어나갈 때 그 점에서 한 직선과의 거리가 0에 한없이 가까워질 때 그 직선을 점근선이라고 부릅니다. 차연은 바로 그 곡선과 직선의 관계입니다.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는 한없이 0을 향하고, 그러나 그 차이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습니다. 기원과 그 기원을 향한 몸부림에 이만큼 더 적절한 예를 찾기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이런 차연에 의하여 앞서 말했듯 우리의 기호는 그 중심 의미, 기원이 여기 있다, 고 알려주는 표지점이 되는 동시에 그 절대적 의미의 현전이 도래하기를 무한히 기다리는, 혹은 무한히 방해하는 ‘흔적’ 이 됩니다.


4.


  데리다의 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아무래도 ‘그라마톨로지’ 가 되겠지요. 유일하게 제가 접한 데리다의 책도 바로 그라마톨로지입니다. 물론 끝까지 읽지는 못했고 얼마 읽지도 못하고 다른 책들을 보게 되었지만, 그때 처음 느꼈던 감정은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책은 아니네’ 라는 감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이슨 포웰의 이 ‘데리다 평전’ 을 읽었을 때는 그런 자신감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책이 하는 일은 컨테이너 벨트에서 짐들이 차례로 내려지듯이 무심한 문장들을 차례로 우리 의식 속에 던져 넣는 일이었고 문장을 읽어도 이 문장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두세 번 읽어보아야만 했으며 인용한 사상가들은 어찌나 많은지 한숨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여기서 인용한 사상가들을 당연히 다 알고 있을 만한 사람들을 위한,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만을 위한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 정도였지요.

그러나 끝까지 읽어나가면서 하나 느끼게 된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 책이 일전에 나온 루소의 평전처럼 세세하게 인물의 행적을 밟아나가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만한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기술하고 그의 사상을 정제된 언어로 기록한다면,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 있고 재미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만, 결코 ‘데리다’ 라는 이름에 걸맞는 평전은 되지 못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데리다는 우리의 텍스트는 이윽고 ‘흔적’ 으로 남는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결국 그를 설명하려면 흔적 속에서만 오롯이 드러나게 기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텍스트는 서로 상충되어버리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책은 전체적으로 무심하고 어쩌면 별로 친절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도리어 그 태도는 데리다를 기술하는 데는 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데리다 평전’ 은 그 의도를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은 데리다의 시간을 쫓아갑니다. 데리다의 출생에서부터 고등사범학교를 다닐때, 그리고 구조주의에 맞서고 데리다가 열정적이었던 시기에서부터 노년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 순간순간에 데리다가 택한 좌표 값들을 마치 수학적으로 결과가 나오듯 보여줍니다. 그 좌표 값들이 모두 최적의 선택이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언제나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될 테니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좌표 값들이 자신의 선택으로만 결정된 것이 아니며, 아니 대부분의 좌표 값들이 주변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데리다가 유대인으로 태어나고 그가 살던 시기의 중심 사상이 구조주의였다는 것 등은 주변의 환경이자 자취의 방정식을 그리기 위한 조건들이겠지요. 이윽고 데리다는 그가 살던 시기의 중심 사상인 구조주의를 해체하게 되고 정말 이 책의 부제에 걸맞게 해체 후 ‘순수함’ 을 열망하게 됩니다. 기존 서구의 중심적 사상이었던 로고스 중심주의로는 한계가 있다고 외치며 말입니다.


5.


  이 책 ‘데리다 평전’ 은 데리다 본인은 아니나 그에게 무한히 다가가며, 동시에 ‘데리다’ 의 현현을 무한히 지연시키는 대리보충물의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도 있습니다. 먼저 너무 흔적에 치중한 나머지 글의 독해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책에 나오는 다른 사상가들과 그들의 개념은 너무 무책임하게 던져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A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B를 보라, B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C를 보라, 등으로 일관되어있지요. 데리다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이렇게밖에 불러낼 수 없을지라도 주석에서도 이런 무심한 태도가 연속된다는 것은 더욱 더 책의 독해를 쉽지 않게 만듭니다. 물론 저런 모습은 데리다의 개념 중 ‘대립’ 을 떠올리게 만들고, 이윽고 거대한 순환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게 하겠지만 데리다의 생애나 그의 사상에 대한 대략적 이해를 위해서 집어든 독자들에게는 거리감을 주리라 여겨집니다. 어학을 배우기 위해서 초보반으로 짐작되는 클래스에 등록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응용에 들어가더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한 가지 ‘데리다 평전’에서 저를 약간 당황스럽게 만든 점이 있습니다. 데리다를 언급할 때 이 책에서는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언급합니다. ‘데리다를 해체의 선구자이자 탁월한 후기 구조주의자로 만들었다.’, ‘고급문화가 가진 위대함을 넘어서는 더 순수한 순수함을 찾고자 한다’ 등으로 말입니다. 당연히 평전을 쓰는데 그 평전의 인물에 대해서 애정이 없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어떤 문맥에서는 그 애정이 지나쳐서 데리다가 비판하는 사상가의 철학이 불완전하다는 느낌마저 주게 됩니다. 어떤 사상의 우열을 가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로 데리다도 우열을 가르기 위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발전을 지향하였겠지요. 그러나 무심하게 던져진 문장들은 비록 변증법적인 발전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읽는 독자들에게 저런 느낌을 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데리다가 살아오면서 그의 위상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한’ 직책만 정부가 맡겼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것도 데리다의 삶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기에, 글에서 그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지나쳐 보이는 예라고 들 수 있겠습니다. 원래 데리다는 이런 직책이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직책을 맡아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데리다가 해외에서 제안된 다른 수많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꼭 언급해야겠다’) 외부에서 데리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프랑스 사회는 데리다의 접근법, 그의 이념들, 그의 글읽기 방식과 그의 엄청난 독창성, 말하자면 그의 에너지를 싫어했던 것 같다’) 초라한 직책만 맡게 되었다, 고 무심한 문장들은 우리의 의식으로 흘러내립니다.


6.


  양자역학의 대부로 불리는 하이젠베르크는 데리다의 스승이라면 스승이라고 볼 수 있는 하이데거와 친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에게서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겠지만 결국 과학은 사유하지 않으며 하나의 경계가 있다고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의 스승과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과학과 사유는 하나의 경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경계는 깨어질 수 있다고 믿지요. 그러고 보면 제가 데리다의 사상을 언급하면서 ‘무한’ 이라는 말을 자주 쓴 듯 합니다. 이 무한, 이라는 개념이 엄밀하게 정립된 곳은 바로 수학입니다. 그의 해체는 과학과 맞서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그의 다른 스승인 프로이트를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로 판단하여 읽어나갔더라도 말입니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에 몰두했습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을 하나로 묶어보려는 이 이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으며, 끝내는 완성시키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런 시도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가 그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혹시나 과학과 사유의 경계를 넘기 위해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해체를 통하여 그가 추구하였던 순수성은 과학의 잘 제련된 순수성과 어쩌면 접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이 평전을 따라 쫓아간 그의 생애를 자취의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조건들은 데리다와 함수 관계를 맺으며 책 전반에 걸쳐서 어떠한 곡선을 그려냅니다. 그 곡선은 잘 정리된 일대일 대응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식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지요, 삶의 무한한 조건에 대해서 일대일 대응을 이루는 생애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고, 차연과 산종을 주장해온 데리다 본인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을 테니.

  

 

 

 

p. s. 원래 글의 방향은 로고스 중심주의와 성경을 연관지어서.. 해체를 쓰려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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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5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08-16 20:52   좋아요 0 | URL
도입부를 어떻게 쓸까 한 일주일을 고민했더랬죠ㅎ 완전 흥미끌려고 노린거죠 큭.. 도입부만 멋드러지게 쓰고 내용은 별로ㅠㅠ 생각했던만큼 안나와서 스스로 실망했어요.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