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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1.
'언어의 감옥에서' 라는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제가 느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제가 고민해오고, 또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것이었지요. 우리는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언어를 구사합니다. 게다가 우리의 생각은 머릿속에서 언어로 구현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언어라는 것이 있기 전에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을 구현한다는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컴퓨터를 예로 들자면, 일반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운영체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옛날 구체제 DOS가 그랬고, 지금은 윈도우즈, 리눅스 등 수많은 운영체제가 있지요,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있어야 기계덩어리에 불과한 컴퓨터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게임을 한다던가, 이렇게 글을 쓴다던가 말입니다. 이 언어라는 것이 일종의 운영체제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비유를 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런 비유는 선후 관계를 따지자면 약간 잘못되었지만, 언어(인간)가 있고 운영체제(컴퓨터)가 있으니깐, 그러나 적당한 비유가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저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수많은 철학자, 논리학자, 언어학자들까지 이런 문제에 매달리고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저번 러셀의 책에서 언급했던 비트겐슈타인부터,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최근 몇 십 년을 바라본다면 역시나 노암 촘스키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그러고 보면 촘스키는 가장 언어의 근본에 다가간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짐작되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변형생성문법을 제창하고 우리의 언어가 실재로 '존재' 한다는 것을 보인 사람이라는데 의의를 둡니다. 그는 일단 플라톤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플라톤의 문제는 '우리가 정보가 이렇게 적은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아는 데까지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 라는 내용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른에게서 가나다, 혹은 알파벳만 배우고 단어들 익히고 그렇게 적은 내용만 배우는데도 전혀 듣지도 못한 문장을 어법에 맞게 사용하게 자라나지요. 촘스키는 이렇게 되는 이유가 생물학적으로 우리에게 LAD : Language Acquisition Device가 있기 때문이며 유전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종의 언어에 대한 보편적 그리고 선험적 지식이 담겨있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가 이 오랜 가설을 뒤집었다고 합니다. 관련된 뉴스가 하나뿐이라 내용의 신빙성이 어느 정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연구에 의하면 네덜란드의 어느 심리언어학 연구소에서 4개 어족, 301개의 언어 문법 발달을 추적 관찰한 결과, 각 언어의 발달은 개별적인 문화의 진화에 따른다고 밝혀졌다고 합니다. 이는 동일한 규칙에 따라 기능하는 내재적 언어능력 때문에 언어의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촘스키의 주장과는 상반되지요. 지금부터 말씀드릴 책, '언어의 감옥에서' 를 조명하는데 있어 저는 바로 저 '문화에 의해서 언어가 발달' 된다는 말에 집중합니다. 저자 서경식 교수는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그는 책의 첫 부분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유대인 파울 첼란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절규합니다. '자신의 진실은 오직 자신의 모어로밖에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모어는 저자가 책에 직접 주를 달았듯, 모국어와는 다른 개념이고 그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무자각인 채로 자신 에 생겨버리는 언어' 며 '일단 몸에 익히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언어입니다. 재일조선인 2세로 사는 삶은 저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도 충분히 고달프리라 집작됩니다. 주변의 차별, 멸시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며 자신의 삶의 환경이 일본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쓰게 되고 결국엔 일본어가 모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깐 위의 연구결과를 약간 빌려오자면 서경식 교수 개인의 언어 발달은 그 주변의 일본적 문화에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발달된 모어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이윽고 자신의 생각마저도, 앞서 이야기한 운영체제마저도 일본어가 되어버리게 되고, 결국엔 그 일본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책의 제목 '언어의 감옥에서' 에는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논해봅니다.
2.
윤동주는 연세대, 정확히 말하면 그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다녔었다죠. 그래서 연세대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서 시비를 세웠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저도 예전에 연세대에 잠시 적을 두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백하건대 연세대에 윤동주의 서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는 이야기는 제가 연세대서 떠난 뒤에 들은 터라서 그의 시비는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서시는 참 좋아했습니다. 책은 이 서시를 왜곡하는 일본의 번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논란이 되는 문장은 하나,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입니다. 이를 일본의 번역가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로 오역합니다. 사실 얼핏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 일본의 번역가 말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살아있다는 말로 대체를 해도 상관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냉소적 어투로 그런 세세한 것까지 뭐 하러 신경을 쓰냐. 그런 조그만 것에 신경을 쓰지 마라, 그래도 그들은 그나마 양심적 지식인들이다. 최소한 서시를 읽지 않느냐. 지금 일본 우경화 세력이 날뛰는데 그런 것을 경계하는 게 훨씬 옳지 않냐. 이렇게 주장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말도 얼핏 맞는 듯 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독도는 자기네 땅이다, 라는 발언을 멈추지 않습니다. 일본의 우경화세력은 정말 끔찍할 정도며, 그들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고, 어쩌면 일본 내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선결 과제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경계하는데 바쳐져 있습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모든 일본인들이 다 나쁜 것은 아니야’ 이런 생각을 심어주는 그런 소위 말하는 양심적 지식인들, 책에서는 리버럴 세력으로 소개됩니다만, 그런 자들을 더욱 더 경계해야한다고 밝힙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적혀있었던가요, 사람이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잘 아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미지의 것,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 우리에게 정말 두려움을 안겨준다고. 똑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우경화세력은 일종의 양지의 ‘칼’입니다. 보이는 칼은 피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혹은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서 제압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리버럴 세력의 퇴락은 음지의 ‘무기’입니다. 이게 칼인지조차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 몸을 찌를지도 모릅니다.
3.
적어도 저와 비슷하거나 나이 어린 또래에게서 일본 문화란 제법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저 개인적으로도 일본 노래를 듣기도 하고 만화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일본이라는 데가 영 나쁜 데만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행도 쉽게 다녀올 수 있고, 먹을거리도 맛이 좋고, 괜히 오차즈케나 스시를 먹으며 웰빙의 기분을 맛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젊은 세대에게는 사실 일본의 강점기의 기억이 흐려져만 갑니다. 어쩌면 몇 몇 젊은이들은 이런 생각마저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 과거는 과거에 묻어야지! 우리가 발전하려면 무조건 배타적으로 일본인들을 미워해서는 안돼, 라고. 아닐 것 같지만 제가 본 소위 외국물을 먹고 외국에서 공부를 해 본 아이들마저 '아, 일본인이라고 하니깐 괜히 부정적 인식이었는데 같이 공부해보니깐 괜찮더라. 모든 일본인들이 다 그런 거 아냐.’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과거를 과거에 묻는다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라는 겁니다. 이 책, ‘언어의 감옥에서’ 는 그들 일본인의 속 심정을 정확히 꿰뚫어 설명합니다. 일본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그나마 ‘양심적’ 이라는 지식인들도 그들의 치부에 논의가 이르면 다 ‘그때는 전쟁 중이라서 명령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침략당한 나라에서는 침략자일 뿐인 병사들을 끌어안은 후 그 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끝없는 말꼬리잡기만 할 뿐 실제로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책임은 진실로 그들 자신들을 위로하는 그런 수사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그들이 책임을 질 마음이 있었다면, 위안부문제가 부결되지는 않았겠지요, 재일조선인들이 그들의 땅에서 시름시름 앓아가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았겠지요. 그들 자신들은 끊임없이 ‘사과를 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사과를 하라는 말이냐’ 라고 그들이 침략한 국가에 말을 하지만 백 번 사과를 한 들 어쩌겠습니까, 그들의 사과(라고 주장하는 것)에 담긴 허구성을 이 책은 치밀한 논리로 낱낱이 파헤칩니다.
어쩌면 이렇게 서경식 교수가 그들의 논리를 파헤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일본인들의 말을 모어로 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말을 쓰는 집단은 싫으나 좋으나 일종의 의식을 공유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언어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 오면서 오랜 세월 갈고 닦인 것이기에 그것엔 어쩔 수 없이 그 집단의 문화가 녹여져있게 됩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생각해봐도 ‘말이 안 통하는데’ 당연히 상대의 말을 배우겠지요. 다짜고짜 그들의 문물을 퍼부어가며 이거 봐라, 이건 어떠냐, 이렇게 하지는 않지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무분별한 문물의 주입들을 일종의 침략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보면 또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라도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사례를 세계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즈텍 문명을 멸망시켰던 스페인 군대가 그들의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이유에서 한 집단의 말을 익히는 것은 그 집단의 이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그 말을 선천적으로 익힌 상태, 그러니깐 모어로 삼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그 집단의 문화의 영향을 진하게 받을 것도 자명합니다. 서경식 교수는 이런 점에서 일본어의 그 조그만 뉘앙스조차 예민하게 감지해내며 거기에 더하여 재일조선인이라는 그가 처해있는 힘겨운 상황 때문에 리버럴 세력의 사상의 허구를 조목조목 비판할 수 있는 것이지요.
4.
책에서 큰 흐름을 차지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세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파울 첼란,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프리모 레비에 대해선 얼핏 들은 기억이 있지만 파울 첼란과 장 아메리는 이 책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입니다. 세 명 모두 유대인이라는 공통점 외에 나치에게서 박해를 받았다는 점이 동일합니다.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도 큰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는 파울 첼란에 초점을 맞춰서 나아가보겠습니다. 앞서서 파울 첼란의 말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 말을 하나 더 보태겠습니다. 첼란은 그가 문학상을 탈 때 소감을 이렇게 밝혔지요. ‘갖가지 손실 중에서 언어만이 다른 이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것으로, 상실되지 않은 것으로 남았다.’ 라고. 이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로 자리를 잡고 있는 걸까요? 이 책에서 저자는 ‘이는 국어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이라고 단언합니다.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모어로 독일어를 쓰는 입장에서, 독일에게 박해를 받았다고 그 언어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독일어가 꼭 독일인이 쓰는 것이 아니다, 독일어를 모어로 가진 독일인이 아닌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는 저자의 상황과 일치합니다. 비록 조선인이지만(저자가 본인을 남과 북이 통일된 나라로서의 조선인으로 언급하기에) 어쩔 수 없이 모어로 일본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첼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저자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비록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모어로 쓰고 있지만, 일본어 자체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물론 모어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조선어를 선택하겠지만 이미 일본어가 자신의 틀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비록 감옥 같은 언어이지만 떼어낼 수는 없다. 자신이 비판하고 싶은 대상은 일본어를 쓰기 때문에 자신을 일본인으로 규정지어버리는 국가다, 라고 말이지요. 물론 이런 성찰을 이끌어내기까지 스스로를 얼마나 몰아붙였을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다른 조선인이었던 시인 김시종은 일본어에 결코 숙달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모국어를 습득하려고 합니다. 그런 과정이 저자에게 물론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첼란의 사례를 받아들이며 극복해내는 중이라 생각됩니다. (근원적인 극복은 일본이 과거에 대해서 엄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겠지만) 비록 첼란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모어로 일본과 대결하고 있지요. 앞서 쓴 자신을 ‘일본인으로 규정지어버리는’ 이라는 말에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이는 단순히 어디 여행을 갔을 때 ‘당신 일본인이에요?’ 라고 묻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본어가 모어라는 이야기는 그들의 정체성을 일본어로 된 저작과 일본어를 쓰는 친구들을 보면서 형성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다시금 말하면 일본의 시각이 어쩔 수 없이 정체성 형성과정에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며, 실제로는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아닌데 어느덧 일본인처럼 사고를 가지도록 주입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폭력이지요. 즉, 식민지의 경험이 여전히 그들 재일조선인들에게는 바로 곁에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글을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되자마자 바로 쓰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 글들이 자신의 몸속에서 축적되고 축적되다가 결국 분출되듯이 말이죠. 평소에 아무런 일이 없이 평화로울 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극한 상황에 빠졌을 때, 그리고 그 심연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그리고 적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나를 구해 줄 사람은 나뿐이다, 라는 강한 정신을 가졌을 때,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경우엔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 여기서 더 나아가 휴머니즘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바로 그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를 이겨내게 만든 근원이었을 겁니다. 거기에 희박하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상대가 있을 때 사람은 뭉치게 됩니다. 프리모 레비와 같이 자신이 유대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근원을 모르던 사람들도 유대인을 박해하는 나치 정권 앞에서 자신들을 재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박해가 있어서 거기에 대응하는 집단이 생겨난 거지요. 여기까지는 장 아메리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생겨났으니 그것은 모어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지요.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를 미치지 않게 만들었지만 장 아메리의 경우에는 상황이 나빠서 그가 가졌던 독일 문화가 그를 내부로부터 찌르는 칼이 된 형세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잔혹한 언어경험은 이들만 겪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식민 지배를 당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겪었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아포리아Aporia, 내 정체성으로서의 조선인이라는 것과 내 모어로서의 일본어를 합치시켜 나갈 수 있을까, 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이 책의 저자는 다문화 공동체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5.
이 책은 정말 논리적으로 치밀하며 저자의 문체는 정갈합니다. 마치 베틀에서 씨줄과 날줄을 촘촘히 짜내어 이윽고 아름다운 옷감을 만드는 작업을 보는 듯 합니다. 특히 그가 이 책에서 리버럴 세력의 잘못된 부분을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논파하는 부분은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다문화 공동체에 대한 부분입니다. 책 뒤의 대담에서 서경식 교수는 우리나라는 앞으로 다원주의를 채용하는 그런 공동체로 나아가야 된다고 언급을 합니다. 그러니깐 이왕 문이 열린 김에 가장 열린 나라로 나아가지는 말이지요. 사실 이 부분은 예민한 부분이기도 하고, 제가 이렇게 언급하는 것이 디아스포라에 대한 일종의 또 다른 폭력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여 많이 주저했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는 너무나 디아스포라적인 시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디아스포라는 디아스포라이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지요.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이기에 그들의 상황을 도리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과 나를 동일 선상에서 동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소속감이 없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한 국가에 속한 사람은 그렇게 속해있기에 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말대로 정말로 열린 국가를 지향하게 된다면, 우리의 역사는 늘어나는 걸까요? 우리의 문화는 어디까지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미국이 그랬듯 용광로처럼 인종을 다 녹여서 포용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인문학자 호미 바바의 말을 잠깐 빌려오겠습니다. 문화는 아무리 서로 융합되더라도 이윽고 절대로 융합이 되지 않는 핵이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호미 바바는 식민지배를 한 국가와 식민지배를 당한 국가 사이의 문화에 대해서 연구를 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저렇게 절대로 융합이 되지 않는 핵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적용시켜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단일민족이었고, 단일민족이라는 점에 대해서 일종의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이 과연 다른 문화와 인종을 다 녹여낼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단일 민족이라는 것이 큰 역할을 한 만큼 (통일을 왜 해야 되는가, 라는 질문에 첫 번째 답변이 우리는 한민족이니깐요, 라는 말이 많습니다.) 문화의 핵도 클 것이고, 이는 도리어 열린 나라라고 찾아온 다른 민족을 우리의 문화나 역사에 다 녹이는 우를 범하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현실적 문제도 산재하겠지요. 국력이 약화될 수도 있겠고, 다른 나라가 우리를 본받아 순순히 문을 열어 지구공동체로 나아갈 리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자도 그것을 알고 공상적인 이야기이다, 라고 언급했습니다만 적어도 이 부분은 저자가 생각한 대로 나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일까, 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인간으로서 범인류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국가 간의 소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훨씬 좋은 방향으로의 진보라는데 동의합니다만 아마 그런 일은.. 화성에서 침공해오지 않는 한 생기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5.
몇 번이고 몇 몇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이 감옥에서 내가 어떻게 열쇠를 건네줄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열쇠는 아마도 일본의 진정한 사과,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책임을 거부하지 않는 진지한 자세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저 개인이 어떻게 해낼 수 있는 차원의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서도 안 되며 일본 내부에서의 성찰로부터 비롯되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한쪽은 사과를 요구하고, 다른 쪽은 언제까지 사과를 해야 되는 거냐고 화를 내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물론 일본 내부의 자성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리고 결코 그들로서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일본의 리버럴 세력이 자신들은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사상적으로 퇴락에 빠져버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들을 돕는 것은 일본은 충분히 사과를 했다, 그러니 우리도 쇄신이 필요하다고 옹호하는 우리나라의 몇 몇 지식인들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인들이 무슨 자격으로 사과가 끝났다 운운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상적 퇴락의 독이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을 중독 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과를 받을 권리가 있고, 사과를 했으니, 이제 사과를 그만 받아도 된다, 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과를 받을 권리는 있지만, 여기서 받을 권리라는 것은 정말 그 사과가 가서 닿아야 할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요구를 할 권리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만 예로 들자면 아직도 위안부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정녕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최근에 본 뉴스에 일본의 도서 반환이 연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동안 오래 지속해 온 외교의 결실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일본의 다수 계층에서도 자신들의 수탈을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자세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는 저자와 다른 재일조선인들이 이런 글로서 일본에 힘들게 싸움을 해온 성과라고도 생각이 듭니다. 아직 이것으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나 인식의 변화를 이루게 된 것은 앞으로는 조금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그러면 언젠가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 교수도 더 이상 코리안 디아스포라로 살지 않아도 좋을 날이 올 것입니다. 서경식 교수뿐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재일조선인 모두가.
p. s. 글을 쓰다가 Go라는 일본 영화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재일조선인을 다룬 영화였지요.